백가지 친구이야기
이와타 겐자부로 지음, 이언숙 옮김 / 호미 / 2002년 5월
평점 :
품절


2007년이었나 느낌글을 쓴 적 있는데

군더더기 같은 잔소리를 덜어내고서

새로 써 보았다.


숲노래 책읽기/숲노래 아름책

동무하며 걷는 길


《백 가지 친구 이야기》

 이와타 켄자부로 글·그림

 이언숙 옮김

 호미

 2002.5.25.



  《백 가지 친구 이야기》(이와타 켄자부로/이언숙 옮김, 호미, 2002)가 갓 나오던 무렵, 저는 서울에서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쓰고 엮는 일을 했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을 꾸리는 분(출판사 사장님)은 멋스러운 책이 나왔다면서 잔뜩 장만하셨고 둘레에 하나씩 건네셨어요. “그래, 너도 좀 봐라. 순 글씨가 가득한 책만 읽지 말고, 이런 그림도 읽고 시도 읽으면서 마음 좀 다스려 봐.” 하고 한마디 보태셨어요. “사장님, 저, 시집도 많이 읽는걸요?” “에그, 그런 시 말고, 이렇게 여백을 남기면서 노래하는 글을 읽으라고!” “그럼 시에 빈자리(여백)가 있지, 빈자리가 없는 시가 어디 있어요?” “됐다. 그냥 읽어라.”


  그때 그 어른은 왜 제가 《백 가지 친구 이야기》 같은 책을 안 좋아하거나 못 알아보리라 여겼을까요? 우리말꽃이라는 책은 그야말로 글이 빼곡하고 두툼합니다. 이런 책을 지어야 하는 일을 한대서 글책만 읽을 까닭이 없습니다. 2002년 무렵에 저한테 아이가 없었어도 그림책이며 동화책을 늘 곁에 두고 살았어요. 나라를 꾸짖는 노래(시)도 읽고, 숲을 사랑하는 노래(시)도 같이 읽었어요. 나라를 꾸짖는 노래하고 숲을 사랑하는 노래는 동떨어지지 않는다고 느껴요. 둘은 한마음입니다.


  저를 낳아 돌본 어버이는 제가 열일곱 살이던 해까지 ‘13평짜리 잿빛집(아파트)’에서 살림을 꾸렸는데, 이듬해부터 ‘48평짜리 잿빛집’으로 덜컥 옮겼습니다. 빚을 지면서 옮기셨는데, 열석 평은 코딱지만 한 집이라서 더는 못 살겠다고 하시더군요. 그러나 저는 코딱지만 한 열석 평짜리가 아닌 ‘나고 자란 마을에서 늘 어울리는 동무가 있는 집’이었습니다. 저한테 집은 ‘크기’가 아닌 ‘동무’하고 어울리는 삶자리예요.


  우리 아버지가 넓은 잿빛집으로 옮긴다고 할 적에 차마 아버지한테는 무서워서 말은 못하고 어머니한테 “어머니, 이 집을 팔고 나가야 하니 어쩔 길 없더라도, 한 칸짜리 조그마한 데를 얻어서 저는 이 마을에 그대로 살면 안 될까요? 제 동무는 모두 여기에 있는데 동무가 하나도 없는 그 커다란 곳으로는 가기 싫어요.” 하고 귓속말을 했어요. 어머니는 “너만 그러니? 어머니도 어머니 동무가 다 이 마을에 있잖아. 나도 가기 싫어.” 하시더군요.


  잿빛집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한테 마을이며 골목을 빼앗은 자동차일까요. 자동차한테 동무가 있다면 크고작은 벌레와 길짐승을 비롯해 사람조차 마음놓고 건너다닐 수 없는 까만 찻길일까요. 까만 찻길한테 동무가 있다면 나날이 바닥나는 까만 기름일까요. 까만 기름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가 하루 한때도 잊을 수 없어서 꼭 껴안으려는 돈일까요. 돈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가 날마다 손쉽게 쓰고 버리는 갖가지 살림인, 뚝딱터(공장)에서 뽑아낸 것일까요.


  뚝딱터에서 뽑아낸 것한테 동무가 있다면 이 땅 아이들을 괴롭히는 살갗앓이(아토피·피부병)를 비롯한 갖가지 몸앓이를 일으키는 화학물질이며 항생제일까요. 항생제한테 동무가 있다면 우리 입을 길들이는 고기떡(소시지)이랑 튀김닭일까요. 고기떡이랑 튀김닭한테 동무가 있다면 부릉부릉 씨잉씨잉 골목길과 찻길을 요리조리 헤집고 다니는 씽씽이(오토바이)일까요. 씽씽이한테 동무가 있다면 몽둥이를 휘두르는 경찰일까요. 경찰한테 동무가 있다면 길가에 나뒹구는 담배꽁초일까요. 담배꽁초한테 동무가 있다면 그 옆에 비슷한 크기로 뱉은 엄청난 침덩이일까요. 침덩이한테 동무가 있다면 바로 옆에 비슷한 크기로 눌린 다 씹은 껌일까요. 다 씹은 껌한테 동무가 있다면 껌을 싼 비닐 껍질일까요. 비닐 껍질한테 동무가 있다면 비닐 껍질이 처박히는 쓰레기통일까요. 쓰레기통한테 동무가 있다면 아무렇지 않게 주전부리 껍데기를 휙휙 집어던지는 이 나라 어린이·푸름이·젊은이들 손일까요. 아무렇지도 않게 주전부리 껍데기를 휙휙 집어던지는 어린이·푸름이·젊은이들 손한테 동무가 있다면 큰일터(재벌회사) 글종이(면접 서류)일까요.


  큰일터 글종이한테 동무가 있다면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열린배움터(대학교) 마침종이(졸업장)일까요. 서울에서 내로라하는 열린배움터 마침종이한테 동무가 있다면 배움수렁(입시지옥)으로만 몰아넣는 푸른배움터(고등학교) 길잡이(교사) 회초리일까요. 푸름배움터 길잡이 회초리한테 동무가 있다면 날마다 얻어맞고 꾸지람을 듣는 아이들 허벅지일까요. 뻘겋게 물드는 아이들 허벅지한테 동무가 있다면 배움터가 싫어 당구장으로 달려가며 붙잡은 길다린 작대기일까요. 길다란 작대기한테 동무가 있다면 짜장국수 한 그릇일까요. 짜장국수 한 그릇한테 동무가 있다면 한 벌 쓰고 버리는 나무젓가락일까요. 나무젓가락한테 동무가 있다면 빈 종이꾸러미와 넝마를 주으러 다니는 할배 할매 손길을 타는 낡은 수레일까요. 낡은 수레한테 동무가 있다면 새벽부터 밤까지 쉬잖고 짐더미를 안고 굴리는 할배 할매가 살짝살짝 쉬면서 걸터앉는 거님길 돌일까요.


  서울은 처음부터 서울이지 않습니다. 서울도 똑같이 숲이자 마을이요 들이고 냇물이었습니다. 어느새 서울은 지하철에 잿빛집에 찻길에 끝없이 잇닿는 가겟길입니다. 바야흐로 서울은 흘러넘치는 열린배움터에 큰일터에 자가용에 매캐한 바람입니다.


  제비는 서울하고 시골을 안 가렸으나, 더는 서울에 깃들기 어렵습니다. 돌멩이도 서울이며 시골이며 두루 있었으나, 더는 서울 한켠 골목에서 구르기 어렵습니다. 서울 아이는 뭘 하며 노나요. 시골 아이는 뭘 하며 소꿉을 할까요.


  골목길한테 동무가 있다면 무엇일까요. 골목집한테 동무가 있었다면 무엇일까요. 골목사람한테 동무가 있었다면 누구일까요. 논과 밭한테 동무가 있다면 무엇이고, 멧골과 들한테 동무가 있다면 무엇인가요. 냇물이랑 바다는, 바람이랑 구름은, 비랑 눈은, 들꽃이랑 나무꽃은, 나비랑 벌은, 누구를 동무로 삼아서 오늘 이곳을 살아가려나요.


  다람쥐와 너구리한테는 누가 동무가 되나요. 오소리와 여우한테는 누가 동무로 마주하는가요. 곰과 범한테는 누가 동무로 곁에 머무나요. 박새와 동무였던 동박새는 어디에서 살아가나요. 박쥐와 동무이던 올빼미는 어디에 깃들일까요. 매와 동무하던 무지개는 오늘 어디에서 숨을 죽이나요. 쉬리는 동무와 오붓하고 지낼까요. 각시붕어는 동무와 걱정없이 겨울나기를 할까요. 메기는 동무와 느긋하게 한삶을 마칠 수 있을까요. 땅강아지 동무는 어디로 사라졌을까요. 사마귀 동무는 어디에 숨었을까요. 풀무치 동무는 어디에서 마지막 숨을 쉴까요.


  동무를 하나둘 손꼽아 봅니다. 잃어버린 동무하고 잊어버린 동무를 헤아려 봅니다. 우리 곁에는 누가 동무인가요? 우리는 누구를 동무로 곁에 두나요?


  마당에 조용히 서서 두 팔을 벌립니다. 햇볕을 온몸으로 받으면서 눈을 감습니다. 이윽고 눈을 뜨고는 후박나무한테 다가가서 줄기를 쓰다듬습니다. 후박나무 우듬지에 앉은 멧새가 시원시원 노래합니다.


  우리는 누구한테 동무일까요. 어떤 사람한테 동무일까요. 우리를 두고 선뜻 동무라고 할 사람들은 누구이며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갈까요. 기쁠 때만이 아니라 힘들 적에도 기꺼이 부르면서 웃고 울 동무는 누구일까요. 우리한테 기쁘거나 힘든 일이 있을 적에 스스럼없이 불러서 어깨동무하면서 함께 웃고 울 동무는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살아가는 오늘인가요.


  그림이야기책 《백 가지 친구 이야기》를 덮습니다. 책이름에 온(100) 가지 동무라고 나옵니다만, 가만 보니 온한(101) 가지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왜 온한 가지일까 하고 한동안 고개를 갸우뚱했는데, 온(100) 가지 동무에다가 ‘나(1)’를 넣어서 온하나(101)가 되더군요.


ㅅㄴㄹ


1

한가로이 길을 걷다 보면 길에서 친구를 만난다.


3

돌멩이의 친구는 작은 시냇물.

작은 시냇물의 친구는 개구리.


15

조개의 친구는 물론 바닷가 모래밭.


25

비는 어느새 땅속으로 스며들고

도토리는 이불인 양 마른 낙엽으로 제 몸을 감싼다.


33

그런데, 정말 친구가 있기는 한 것이냐고,

물위에 떨어져 누운 나뭇잎이 묻습니다.


49

난 친구 따위는 필요없어, 하며 늑대거미가 물가를 달린다.

그러면서도 마음속으로는 친구를 찾고 있을는지도

모르지…….


55

그럼, 누구나 마음속에 작은 등불 하나 켜고 태어나고말고!

반딧불이가 장담한다.


65

여뀌의 친구는 소꿉놀이할 때 쓰는 나뭇잎 접시.


74

제비의 친구는 모내기를 끝낸 논의 벼 포기,

파릇한 잎들, 바람 따라 살랑인다.


84

씽씽 부는 바람의 친구는 진눈깨비 섞인 함박눈,

아, 다시 겨울이 ……


93

전철길의 친구는 이젠 끊어져 아무도 다니지 않는

철길에 피어난 잡초,

아마 거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들국화이겠지요.


98

떠돌이 일꾼들의 친구는 술, 그리고

동료들과 함께 부르던 노래.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면서 그 노래도 이곳저곳 여행하였지.


岩田健三郞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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