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어디에서 살까 (2020.5.17.)

― 순천 〈도그책방〉



  마을에서 일하는 분이 있으나, 마을일을 하는 이분들은 으레 ‘지역운동’을 한다고 말합니다. 낡거나 닳은 길을 바꾸려고 일하는 분이 있다면, 이분들은 ‘개혁·혁신’을 한다고 말합니다. ‘마을’이 아닌 ‘지역’을 말하고, ‘바꾸다·고치다·손질하다’가 아닌 ‘개혁·혁신’을 말하는 분은 미덥지 않습니다. 마을이라는 삶자리에서 수수하게 아이어른 안 가리고 쓰는 쉬운 말씨가 아닌, 책상맡이나 벼슬자리에서 흐르는 말씨에 머무는 분하고는 어쩐지 안 만나고 싶습니다.


  제가 시골에서 사니 “‘촌’에 계시는군요.” 하고 말하는 분이 있어, “네, ‘시골’에 삽니다.” 하고 덧붙이지만, 그분은 끝까지 ‘촌(村)’이란 한자에 매달립니다. 먹물잡이로서는 ‘농촌·어촌·산촌’일 뿐, ‘들마을·바닷마을·멧마을’이란 낱말은 머리에 아예 없고, 이런 우리말을 마치 바깥말(외국어)인 듯 바라보기까지 합니다.


  제가 아이들을 돌보고 집살림을 건사한다고 하면 “페미니즘을 실천하시네요” 하고 말하는 분이 많습니다만, “아이들이 못 알아듣는 ‘페미니즘’이란 일을 ‘실천’한 적은 없어요. 저는 그저 ‘아이를 사랑’하면서 ‘집에서 살림하는 아저씨’입니다.” 하고 자릅니다.


  말을 말답게 하는 길부터 모든 일을 새롭게 한다고 생각합니다. 설마 젖먹이한테 인문책을 읽어 주는 어버이가 있을까요? 아이들한테 그림책 아닌 소설책을 읽어 주는 어른이 있을까요? 인문책이나 소설책이 나쁠 까닭은 없되, 이런 책에 적은 말씨는 어린이한테 걸맞지 않아요. 더 파고들자면 수수하게 살아가는 숱한 어른한테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참말로 이 나라를 갈아엎거나 바꾸거나 고치고 싶다면, 우리가 여느 자리에서 쓰는 가장 흔한 말씨부터 수수하고 쉽게 가다듬고서 생각을 수수하게 꽃피우는 들풀넋이 되어야지 싶습니다.


  작은아이랑 〈도그책방〉 마실을 합니다. 떠난 함석헌 님은 ‘들사람·씨알’이란 두 마디를 남겼어요. 어른부터 들사람답게 들말을 쓰고, 씨알답게 씨앗을 심는 손길이기를 바랍니다. 수수하며 푸른 들말로 그림책을 엮고 동화책을 쓰면 좋겠어요. 인문책이나 철학책이나 과학책도 저 멀디먼 이웃나라 말씨가 아닌 이 땅에서 풀꽃을 쓰다듬고 씨앗을 심고 나무를 돌보는 말씨로 추스르면 좋겠습니다.


  어디에서 살까요? 사랑으로 짓는 보금자리에서 살아야지요. 무엇을 할까요? 사랑으로 짓는 살림을 해야지요. 어느 책을 읽을까요? 사랑으로 짓는 보금자리에서 사랑으로 읽고서 사랑으로 아이한테 물려줄 책을 가려내어 읽어야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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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 살다, 책에 산다》(책마을해리 엮음, 기역, 2019)

《행복한 사자》(루이제 파쇼·로저 뒤바젱/지혜연 옮김, 시공주니어, 1997)

《걸어가는 늑대들》(전이수, 엘리,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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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쉬운 말이 평화》,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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