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말꽃


숲에서 짓는 글살림 

49. 살살이꽃 곁에 바람이


  말이란 언제나 생각입니다. 생각이란 모두 마음입니다. 마음이란 늘 삶을 가꾸거나 누리는 길에 피어나는 숨결입니다. 숨결이란 노상 살아가는 하루에서 스스로 지피는 빛살입니다. 빛살이란 저마다 다르면서 새롭고 아름답게 흐르는 넋입니다. 넋은 고요하게 잠들어 꿈꾸는 씨앗이 나아가려는 길입니다. 이런 얼거리를 헤아려 본다면, 아무 말이나 안 하거나 못 하기 마련입니다. 이런 흐름을 살핀다면, 우리가 쓰는 모든 말은 고장·고을·마을마다 다를 뿐 아니라, 집집마다 다르게 태어나서 주고받으면서 퍼지는구나 하고 알아챌 만합니다.


  길이를 따진다면 더 멀구나 싶은 길이 있을 테고, 더 높구나 싶은 멧골이 있을 테지요. 그러나 더 멀리 가기에 힘든 길이 아니고, 짧게 가기에 쉬운 길이 아닙니다. 즐겁게 간다면 길이를 안 따지고 높이를 안 살펴요. 즐겁지 않기에 자꾸 길이를 따지고 높이를 돌아봅니다.


  올해에는 살살이꽃이 꽤 느즈막하게 살랑입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여름부터 살살 춤추던 살살이꽃인데, 올여름은 내내 비요 먹구름에 매지구름이노라니, 여름꽃이 제대로 여물거나 피지 않았어요. 달개비꽃조차 살짝 고개를 내밀다가 큰비랑 벼락비랑 함박비에 녹아버리더군요. 이 여름꽃인 달개비꽃이 가을에 새삼스레 피고, 살살이꽃도 겨울을 앞둔 한가을이며 늦가을에 춤추는 나날입니다.


  살살이꽃이 왜 ‘살살이꽃’인지 궁금했어요. 바리데기 이야기에 나오는 ‘숨살이꽃·몸살이꽃·살살이꽃’이기도 합니다만, 어느 해에 아이들하고 자전거마실을 다니다가 다리쉼을 하는데, 아이들이 살랑살랑 한들한들 슬슬 춤추는 이 들꽃 따라서 춤을 추고 놀다가 톡 꺾으며 ‘살살거린다!’ 하고 읊는 말에서 옳거니 깨달았어요.


  바람이 살살 불 적에 시원하거나 포근하면서 즐겁습니다. 살살 들려주는 말이 부드럽습니다. 살살 다가서니 조용하지요. 살살 건드리면서 북돋우고 보살펴요. ‘살살’이란 말씨란 대단하지요. 아마 우리 ‘살갗·살’도 이런 결을 담아내는 낱말이지 않을까요? 한자말 ‘피부’만 쓰다가는 ‘살갗·살’이라는 낱말에 어린 숨결이나 깊이나 너비를 조금도 못 헤아릴 뿐 아니라, 아이들하고 나누지도 못할 만합니다. 텃말을 쓰자는 뜻에서 ‘살갗·살’을 쓰기보다는, 이 낱말을 혀에 얹는 동안, 비슷하면서 다른 숱한 말을 엮어서 생각을 꽃피울 만해요.


  살. 살갗. 살살. 살랑이다. 살살거리다. 살짝. 살며시.

  살갑다. 살뜰하다. 알뜰살뜰. 사랑. 살림. 살다.

  살살이꽃.


  그냥 태어난 말이란 없습니다. 그냥그냥 쓰는 말도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말은 그저 즐겁게 태어났고, 그저그저 즐거이 나누기 마련입니다. ‘ㅅ + ㅏ’라는 얼개에 ‘ㄹ’을 받침으로 달아 놓은 ‘살’ 한 마디이지만, 이 한 마디가 밑틀이 되어 숱한 낱말이 새롭게 깨어납니다. 먼먼 옛날부터 이 말씨를 즐겁게 썼을 테고, 곱게 가다듬었을 테며, 널리 지폈을 테지요.


  영어로는 ‘코스모스’인 들풀이자 들꽃인데요, 이웃나라에서 들어왔다는 코스모스일 텐데요, 이 들꽃이자 들풀을 마주한 이 나라 수수한 숲사람은 ‘살살이꽃’이란 이름을 이내 떠올렸습니다. 우리 어른들은 이 꽃이름 하나를 놓고서 어린이한테 어떤 이야기를 새롭게 들려줄 만할까요? 그냥그냥 ‘코스모스’를 써도 나쁘지는 않습니다. 바리데기 이야기하고 엮어도 나쁘지 않습니다. 여기에서 마음을 더 기울여 우리 삶에 깃든 숱한 낱말을 구슬처럼 엮어 새롭게 이야기를 짤 만합니다.


  바람이.


  자전거를 달릴 적에는 바퀴로 구릅니다. 바퀴에는 바람을 담은 주머니가 깃들어요. 바람을 담은 주머니를 으레 영어로 ‘튜브’로 가리킵니다. 이 영어를 그냥 써도 나쁘지 않아요. 여기에서 생각을 새삼스레 가다듬어도 되고요.


  바람을 담은 주머니이니 ‘바람주머니’란 이름을 수수하게 붙일 만합니다. 단출하게 ‘바람이’처럼 끊어도 어울립니다. 이렇게 자전거 바퀴랑 바람이를 헤아리다가, 바람을 베푸는 여러 가지로 생각을 이을 만해요. 이를테면 ‘선풍기’하고 ‘에어컨’이 있습니다. 두 가지를 놓고 그 이름대로 그냥 써도 되지요. 그리고 새롭게 이름을 붙이자고 생각을 지펴도 됩니다.


  자전거를 달릴 적에 바퀴에 깃드는 ‘바람이’가 있다면, 시원하게 바람을 베푸는 ‘바람이’가 있을 만합니다. 따로 ‘바람날개’ 같은 이름을 지어도 됩니다. ‘바람싱싱’이라든지 ‘싱싱바람’처럼 꾸밈말을 붙여도 되겠지요.


  모든 말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짓습니다. 더 나은 말이나 덜 좋은 말이 아닌, 그때그때 쓰임새를 살펴서 짓는 말입니다. 말을 새롭게 짓는 틀거리를 어린이한테 찬찬히 들려주면서 “자, 이렇게 우리를 둘러싼 모든 이름은 저마다 스스로 짓는단다. 이렇게 저마다 스스로 지어서 즐겁게 쓰는 말이 ‘사투리’나 ‘고장말’이라 하지. 너희도 앞으로 너희 사투리나 고장말을 지어 보렴. 너희가 바라보는 대로, 너희가 느끼는 대로, 너희가 생각하는 대로, 너희가 살림하는 대로, 너희가 사랑하는 대로, 너희가 살아가는 대로, 이러한 숨결을 고스란히 말 한 마디에 얹어서 생각 한 자락을 지펴 보렴.” 하고 들려줄 만합니다.


  곁짐승.


  ‘곁님’이란 낱말을 처음 지어서 쓴 지 제법 됩니다. 일본말 ‘내자(內子)’를 엉성하게 옮긴 말씨가 ‘안해(아내·안사람)’입니다. ‘아내·안사람’은 무늬는 한글이지만 우리말이 아닌 일본말입니다. ‘내자(內子)’를 옮겼을 뿐이거든요. 이와 짝을 이루는 낱말은 ‘님편’이란 한자말입니다. ‘아내’도 ‘남편’도 멋없을 뿐 아니라, 꽤 낡았다고 느꼈는데, 실마리를 오래도록 못 찾다가 “곁에 있는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사람”을 뜻하는 말을 이 뜻대로 단출히 적으면 ‘곁사랑·곁사람’이요, 서로 아끼고 보살피자는 뜻으로 ‘-님’을 달아 ‘곁 + 님’ 얼개로 ‘곁님’이란 낱말을 지었습니다. ‘각시님·서방님’처럼 쓰는 말씨를 확 바꾸어 누구나 똑같이 ‘곁님’이라 하면 되겠구나 싶었지요.


  요즈음은 사람하고 같이 살기보다 짐승이나 풀꽃나무하고 같이 살아가는 사람이 꾸준히 늡니다. 이때에는 으레 ‘반려동물·반려식물’처럼 일본스러운 한자말을 쓰는데요, 굳이 일본스러운 말을 따오지 않아도 됩니다. 우리한테는 ‘곁’하고 ‘님’이 있는걸요. 더구나 ‘동무·벗·지기’도 있습니다.


  ‘곁짐승·곁꽃’이라 할 만합니다. ‘곁벗·곁동무’나 ‘곁지기’라 해도 어울려요. 부드럽게 ‘곁아이·곁숨결’이라 해도 좋고, ‘곁빛·곁노래·곁별’처럼 아예 새롭게 이름을 붙여서 불러도 좋습니다.


  이런 말줄기를 하나씩 살필 줄 안다면, “곁에 두면서 마음에 새기는 말”을 가리키는 한자말인 ‘좌우명·신조·경구·잠언’이나 영어 ‘모토’를 ‘곁말’로 담아낼 만합니다.


  어려울 일이 없습니다. 까다로울 구석이 없습니다. 생각하고 살아가며 사랑하는 살림결을 그대로 담으면 됩니다. 마음을 기울여 차근차근 엮고 다듬으면서 즐겁게 노래하면 됩니다. 서울말을 안 써도 돼요. 아니, 서울말이 푸짐하고 흐벅지도록 가꾸어 주면 됩니다. 바로 우리 사투리로, 우리가 손수 짓는 살림에 맞추어 손수 짓는 말씨로 우리말을 북돋우면 됩니다.


  우리가 펴는 아름다운 책이라면 ‘곁책’이 됩니다. 언제까지나 곁에 두고 싶은 책인 ‘곁책’일 테니 얼마나 따사롭고 아늑할까요. 모든 이름은 우리가 마음을 기울이는 만큼 짓기 마련이기에, 어제까지 오래도록 쓴 이름이라 해도 오늘부터 새롭게 지어서 쓰면 됩니다. 사람들 입에 꽤 익숙하게 붙은 이름이라고 해서 옛틀에 얽매인다면, 우리는 스스로 새롭게 피어나지 못합니다. 묵은 이름은 거름이 되어 새흙으로 살도록 묻으면 돼요. 어린이처럼 들꽃처럼 피어나는 사투리가 살갑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쓰고 “말꽃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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