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발걸음 붙잡는 곳이란 (2020.5.8.)
― 전주 〈잘 익은 언어들〉
어릴 적에는 놀 생각만 했습니다. 그저 놀고 다시 놀고 새롭게 노는 하루를 그렸습니다. 열 살 언저리에도, 열너덧 살 안팎에도, 늘 놀이가 가장 크게 자리잡았어요. 배움책을 펴며 책상맡에 앉아도 미리 배움책을 읽어치우고서 ‘자, 내가 살필 대목은 다 살폈으니, 남은 짬에는 다른 책을 읽자’라든지 ‘자, 그러면 이제 신나게 그림을 그릴까?’ 하고 생각했습니다. 으레 이레마다 물음종이를 받아서 풀어야 했는데 얼른 슥슥 다 풀어내고서 ‘물음종이 귀퉁이에 무엇을 그리며 놀면 재미날까?’ 하고 생각했어요. 틀리게 풀든 말든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책에 제대로 눈을 뜬 1992년부터는 모든 배움자리가 시들합니다. 배움터에서 들려주는 배움책 줄거리는 성에 안 찹니다. 나라에서 푸름이한테 가르치라 하는 배움책은 어쩐지 거짓말 같습니다. 스스로 배움책을 찾아나서야겠다고 느꼈고, 나라나 배움터에서 말하지 않는 책을 손수 헤아리며 읽었습니다.
이동안 저는 다른 곳을 쳐다보지 않았어요. 찻집도 빵집도 옷집도 안 들여다봅니다. 오직 책집만 들여다봅니다. 걷거나 자전거를 달릴 적에도, 버스를 타고 낯선 마을을 지날 적에도, 으레 ‘이 마을에는 내가 모르는 책집이 어디엔가 있지 않을까?’ 하고 생각하며 두리번댔어요.
전주 〈소소당〉을 들른 길에 그저 가볍게 〈잘 익은 언어들〉 지기님한테 얼굴이나 비추며 “이다음에 느긋이 찾아올게요” 하고 여쭈려다가 그만 멈춥니다. 다음 기차를 타기로 하고, 아니 순천에서 고흥으로 돌아갈 버스 막때를 어림해 조금 더 발걸음을 늦추기로 합니다. 숲에서라면 눌러앉겠습니다만, 책집이라는 곳에 발을 들이면 그대로 붙들리기 일쑤입니다. 아니, 붙들리고 싶기에 책집으로 마실을 가는구나 싶습니다.
누가 “책이 뭐 그리 좋으세요? 늘 책을 읽고, 여태 잔뜩 읽었잖아요?” 하고 묻는다면 “그러게 말입디다. 아무리 아름다운 책이 새로 태어난다 하더라도, 이제는 종이책은 접어도 될 텐데, 해마다 새로 돋는 들꽃을 자꾸자꾸 들여다보듯, 이 아름찬 마을책집을 또 바라보고 거듭 찾아오고 새로 마실하면서 다리를 쉬고 싶네요.” 하고 대꾸하겠지요.
책이 되어 준 나무를 그립니다. 나무가 자라던 숲을 떠올립니다. 숲에 어우러지던 숱한 숲이웃을 생각합니다. 숲에 드리운 햇볕이며 빗방울이며 눈송이에다가 바람을 돌아봅니다. 그저 조그마한 책 하나이지만, 이 책에는 모두 깃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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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만들었어》(하세가와 요시후미/김소연 옮김, 천개의바람, 2013)
《판도라》(빅토리아 턴불/김영선 옮김, 보림, 2017)
《사다리 타기》(다니카와 슌타로 글·모토나가 사다마사 그림·나카쓰지 에쓰코 엮음/한나리 옮김, 대원키즈,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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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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