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이어가는 삶 (2012.10.8.)
― 부산 〈다성헌책방〉
처음 쓰기로는 오래되었겠지요. 그러나, 우리가 처음 만나고 읽으며 느끼고 생각하기로는 바로 오늘이에요. 오늘 읽는 책이기에 모든 책이 새책이 됩니다. 글을 쓴 분은 모든 책을 예전에 마무리했으니 ‘헌책’을 써서 내놓는 셈이지만, 글을 읽는 사람으로서는 바로 오늘 새삼스레 만나기에 ‘새책’으로 맞아들입니다.
저는 때때로 “모든 책은 헌책이고, 모든 책은 새책이다” 하고 말합니다. 모든 책은 ‘펴낸날이 오늘’이라 하더라도 어제 쓴 글을 엮기에 헌책일밖에 없습니다. 이와 맞물려 어제 쓴 글이라 해도 이 글을 읽는 사람은 처음으로 마주하기에 어떤 책을 어디에서 장만하거나 빌려서 읽든 ‘새로’ 읽어요. 책은 책이라 할까요. 책은 삶이라 할까요. 책은 사랑이라고, 이야기라고, 숨결이라고 할까요.
가을햇살이 책마다 살포시 내려앉습니다. 가을햇살은 헌책집 일꾼 등허리에 내려앉습니다. 골목에서도 책집에서도 개구지게 뛰어노는 우리 아이들 온몸에 내려앉습니다. 책집 곳곳을 돌며 바리바리 책을 장만하여 낑낑대며 짊어지는 이 어깨죽지에 곱다시 내려앉습니다. 가을내음 물씬 풍기는 시월을 누리며 아이들 손을 잡고 파란하늘을 올려다봅니다. 아직 잎사귀가 푸른 여러 나무를 바라봅니다.
보수동에서 전철을 갈아타고 연산동으로 옵니다. 부산마실을 온 김에 연산동에서도 하루를 묵으며 〈다성헌책방〉을 누리려고 합니다. 고흥에 돌아가서 아이들하고 읽을 그림책이며 뜨개책을 한가득 살핍니다. 1985년에 3학년이던 국민학교 어린이가 낸 ‘육성회비 영수증’을 보다가 ‘아!’ 소리가 터져나옵니다.
2000년대 오늘날 사람들 삶자국도 3000년대나 4000년대쯤 되면, 또는 5000년대나 10000년대쯤 되면, 새롭거나 놀랍다 여길 문화재를 캐내며 역사나 발굴이나 고고학을 말할까 궁금하곤 합니다. 흔한 말로, 오늘날 비닐자루 쓰레기조차 먼먼 앞날에는 유물이나 문화재가 될 수 있다고 해요. 겹겹이 파묻은 쓰레기더미를 먼 뒷날 사람들은 ‘2000년대 살림살이를 돌아본다’는 구실을 내세워 ‘파헤칠(발굴)’는지 몰라요. 그런데 파헤친다 하더라도 언제나 큰고장을 파헤칩니다. 옛고을을 찾아서 파헤쳐요. 시골을 찾아서 살림살이를 돌아보는 일은 없어요.
문득 생각합니다. 큰고장에서 벌이는 삶이나 살림이란 덧없기 때문에 그만 사라지거나 스러지지 싶어요. 시골에서 일구는 삶이나 살림이란 1000년이 되든 10000년이 되든 한결같기에 사라지거나 스러지지 않고 사람들 가슴에 고이 이어가지 싶고요. 시골에서는 문화재도 유물도 없다 할 만합니다. 시골사람이 빚는 연장이란 하루하루 흐르며 삭거나 닳아 흙으로 돌아가요. 흙집이든 짚을 이은 지붕이든 모조리 흙으로 가요. 유물도 문화재도 없지만, 쓰레기도 없는 시골살림이에요. 역사책에 남을 이야기는 없을 만하지만, 삶·사랑·꿈은 오래도록 이어가는구나 싶어요.
《육성회비 영수증 1985학년도》(동명국민학교 육성회)
《난간 위의 고양이》(박서원, 세계사, 1995)
《오, 나는 미친 듯 살고 싶다》(알렉산드르 블로끄/임채희 옮김, 열린책들, 1989)
《티베트, 인간과 문화》(티베트 문화연구소 엮음, 열화당, 1988)
《야성의 왕국, 아프리카 탐험》(중앙일보사 엮음, 중앙일보사, 1982)
《컬러 산수 대백과사전》(편집부 엮음, 진현서관, 1981)
《敎育名言辭典》(寺崎昌男 엮음, 東京書籍, 1999)
《비둘기 통신》(카와바타/조풍연 옮김, 계몽사, 1987)
《궁핍한 시대의 시인》(김우창, 민음사, 1977)
《한국 호랑이》(김호근·윤열수 엮음, 열화당, 1986)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우리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