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나무 한 그루 같은 동화를 (2019.1.11.)


― 충남 천안 〈갈매나무〉

충남 천안시 동남구 대흥로 280

041.555.8502.



  충남에서 샘님(교사)으로 일하는 분들이 불러 주었습니다. 한겨울에 배움자리를 마련하셨고, 저한테 ‘사전을 지으며 말을 갈무리하는 살림’을 들려주면 좋겠다고 하셨어요. 뜻있게 배움자리를 마련해서 스스로 배우고 다스리는 샘님을 만날 적마다 저로서는 한결 새롭게 헤아리는 눈썰미를 배웁니다. 저는 한국말이라고 하는 숨결이 어떤 마음빛으로 얽힌 수수께끼인가 하는 대목을 풀어서 이야기하는데, 이 이야기를 듣는 샘님이 앞으로 뭇 어린이·푸름이를 만나서 한결 즐겁고 수수하게 말꽃을 피울 수 있다면 참으로 보람있겠다고 여깁니다.


  이야기꽃을 펴는 자리에 가기 앞서 천안에 들릅니다. 고흥에서 배움자리로 가는 길목이거든요. 천안에 있는 오랜 헌책집인 〈뿌리서점〉에 들르려고 했는데 마침 제 발길이 닿을 즈음에는 바깥일을 보러 나가셨는지 잠겼습니다. 이곳에서 가까이 〈갈매나무〉가 있습니다. 헌책집 이름으로 나무 한 그루를 심은 책집지기님은 어떤 분이려나 궁금하게 여기면서 천천히 들어섭니다.


  수북하게 쌓은 책이, 빼곡하게 놓은 책이, 갖은 발자취를 품은 책이, 이쪽에서도 부르고 저쪽에서도 부릅니다. 뒤적이고 넘기면서 그저 놀랍니다. 천안시장이나 천안 공무원이나 글꾼은 이 헌책집을 알는지 궁금합니다. 알기만 할는지, 단골로 찾아와서 오랜 책자취에 서린 삶빛을 배우는지 궁금합니다. 《最新 文學新語辭典》(池中世, 신광출판사, 1950)는 한국전쟁을 앞두고 나왔는데, 1953년 9월 26일에 벌써 10벌을 찍었다는군요. 그런데 ‘문학신어사전’에 나오는 낱말은 죄다 일본 한자말이거나 영어나 프랑스말입니다. 《the National English Readers(내쇼낼 英語讀本) 註解書 6》(편집부 엮음, 보문당, 1951)는 영어 교과서를 풀이하는 책입니다. 참고서랄까요. 《石川生理衛生敎科書》(石川日出鶴丸, 富山房, 1932)는 일본 학교에서 쓰는 교과서였다는데, 아마 한국 학교에서도 이 교과서를 썼을는지 모릅니다. 이 교과서로 배운 분이 곳곳에 밑줄을 긋고 한글로 풀이를 단 자국을 엿봅니다. 《鑑賞 啄木歌集》(石川啄木 글·安藤靜雄 엮음, 金鈴社, 1941)는 겉종이가 떨어졌지만 용케 따로 돌아다니지 않습니다. 만지기만 해도 바스라지는 이 조그마한 노래책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 손을 거치면서 ‘이시카와 다쿠보쿠’ 사랑씨앗을 곳곳에 심어 주었을까요.


  20원짜리 국민학교 공책 꾸러미를 보고 놀랍니다. 여태껏 안 쓴 이 오랜 국민학교 공책은 어느 곳에 얼마나 오래도록 고이 잠자다가 깨어났을까요. 100자락이 넘는 옛 공책을 가만히 쓰다듬습니다. 1960년대에 나온 전남일보 축쇄판 세 벌을 구경하고, 《증언, 쇼스타코비치 회고록》(솔로몬 볼코브 엮음/김도연 옮김, 종로서적, 1983)도 구경합니다. 살아서는 못 남긴 말을 죽은 다음에 터뜨렸다더군요. 《경북아동문학 2 흙이 목숨줄이기에》(경북아동문학연구회, 그루, 1987)를 살피고,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김기창, 경미문화사, 1978)도 살피다가 《舊韓末外國人雇聘考 Ⅱ》(李鉉淙, ?, 昭和 55/1980)이랑 《開港場內 外國人 營業》(李鉉淙, 한국사학회, 1977)도 읽고, 《루소의 식물 사랑》(장 자크 루소/진형준 옮김, 살림, 2008)에 《물고기 소년의 용기》(프란시스 투어/최승자 옮김, 창작과비평사, 1985)도 챙겨서 읽습니다. 1980년대 첫무렵에 나온 조그마한 창비아동문고가 잔뜩 있습니다. 요새는 번쩍번쩍하게 꾸미어 큼직하게 나오는데요, 저는 1980년대 첫무렵에 이처럼 조그맣게 나온 수수한 판짜임이 마음에 듭니다. 《尋常小學 國語讀本 卷十二》(文部省, 1918)가 보이는데, 이 책까지 사려니 주머니가 가벼워 눈물을 삼키고 내려놓습니다.


  어린이책을 어린이 손아귀에 맞게 앙증맞도록 꾸미면 좋겠어요. 크기를 줄이고 값을 낮추고 그야말로 투박하게 엮으면 좋겠어요. 아이들한테 겉치레보다는 속사랑을 알려주도록 단출히 엮고, 삶에서 스스로 지으면서 길어올리는 씩씩한 하루를 헤아리도록 이끌면 좋겠어요.


  먼나라 이야기이지 않은 동화요 문학입니다. 마당에 심어서 돌보는 나무 한 그루 같은 동화이고, 뒤꼍에 새가 심어 어느덧 우람하게 오르는 나무 두 그루 같은 문학이에요. 숲에서 오는 책이듯, 숲에서 오는 이야기요 글이며 노래이지 싶습니다. 헌책집지기님이 갈매나무라면, 고흥에서 천안으로 책마실을 온 책나그네는 후박나무라 하면 어울리려나 하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잣나무도 되고, 떡갈나무도 되고, 오리나무도 되고, 느티나무도 되고, 향긋나무도 됩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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