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글쓰기’를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잘할 만하느냐고, 글을 좀 쓰고 싶다고 묻는 분한테는 언제나 ‘말하기’를 하자고 이야기한다. ‘말하기’를 할 줄 알면 누구나 ‘글쓰기’가 된다고 이야기하지. 말이랑 글은 다르지 않느냐고 으레 되묻는데, 나는 “말이랑 글이 왜 달라야 하지요?” 하고 거꾸로 되묻는다. 모든 글은 말에서 비롯하니까, 말하기를 할 줄 아는 사람은 글쓰기를 할 줄 안다. 자, 보라. 나는 혀짤배기에 말더듬이인 몸을 입고 태어났다. 그래서 나는 혀짧은 소리를 내고 더듬더듬 말했다. 이제 이 말씨를 매우 많이 가다듬었는데, 혀짧은 소리를 가다듬는 동안 내 말씨뿐 아니라 글씨를 저절로 가다듬었다. 말더듬는 소리를 추스르는 사이 내 말씨에다가 글씨를 어느덧 추슬렀다. 못난 말씨나 글씨란 없다. 혀짧배기 소리가 나면 이 소리대로 말하면 되고, 이렇게 글을 쓰면 된다. 맞춤길이나 띄어쓰기가 엉망이어도 좋다. 사투리를 써도 아름답다. 사투리를 억지스레 서울말로 고쳐서 말하거나 글로 옮겨야 하지 않거든. ‘있습니다’ 아닌 ‘있음니다’로 써도 대수롭지 않다. 틀린 글씨라서 틀린 생각이 되지 않는다. 그저 몇 군데가 슬쩍 소리가 새거나 다른 모습일 뿐이지. 우리가 나누는 말에는 ‘번듯하거나 듣기 좋은 말씨’가 아닌 ‘서로 나누고 싶은 생각하고 사랑하고 뜻하고 꿈’이 흐르면 된다. 투박하거나 어설프거나 좀 드세거나 여려도 좋다. 모두 좋다. 우리는 모두 다르게 생겼고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이니, 다 다른 말씨로 이야기를 하고, 다 다른 글씨로 옮겨쓰면 될 뿐이다. 다른 사람을 흉내내면 글쓰기도 말하기도 아니다. 다른 사람 꽁무니를 좇으면 내 글도 네 글도 아니다. 이웃을 사랑하되 우리부터 스스로 사랑할 일이다. 투박한 우리 말씨를 사랑하자. 사투리가 푼더분한 우리 말씨를 사랑하자. 혀짤배기에 말더듬이인 나를 사랑하자. 쭈뼛거리거나 망설이는 우리를 사랑하자. 이런저런 잘못을 저지른 일 때문에 멍울이 있거나, 이래저래 마음이 다쳐서 괴롭다면, 이 모든 멍울하고 생채기를 사랑하자. 그리고 고스란히 말씨로 옮기고 글씨로 담자. 그러면 된다. ‘있는 그대로 글쓰기(말하기)’가 아니라 ‘스스로 사랑하며 글쓰기(말하기)’이다. 나는 사내여도 깡똥치마를 입고 웃으면서 돌아다니고 춤춘다. 둘레를 보라. 가시내이면서 긴바지를 입고 머리카락을 짧게 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가. 가시내여도 바지가 좋으면 바지를 입으면 된다. 사내여도 치마가 좋으면 치마를 두르면 된다. 대수로울 까닭이 없다. 몸매가 미끈해야 치마를 두른다고? 아니다. 즐겁게 춤추며 노래하고 싶으면 바지이든 치마이든 마음이 끌리는 대로 걸치면 된다. 남이 잘 보아주거나 책을 내거나 신춘문예에 뽑히거나 등단을 할 만한 글을 써야 하나? 아니다.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우리 꿈·사랑·삶을 눈물웃음으로 적바림하면 되는 글이다. 이리하여, 이러한 글쓰기인데, 한 가지를 보탤 만하다. “보고 그리고 노래하고”이다. 먼저 가만히 본다. 다음으로 차분히 그린다. 그리고 신나게 노래한다. 글쓰기 석걸음은 이렇다. 2020.6.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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