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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도바람꽃 - 교사 시인 조재형의 청소년시, 2019 ARKO 문학나눔 선정도서 ㅣ 한티재시선 15
조재형 지음 / 한티재 / 2019년 4월
평점 :
숲노래 시읽기
- 너도 바람이며 꽃, 나도 꽃이며 바람
《너도바람꽃》
조재형
한티재
2019.4.15.
‘잘하네’라든지 ‘훌륭하네’라든지 ‘멋있네’라든지 ‘아름답네’ 같은 말은 언제 쓰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이 말을 집에서 흔히 쓰거나 들을 수 있을까요? 이 말을 학교나 마을에서 자주 쓰거나 들을 만할까요?
해본 적이 없는 사람한테는 모든 일이 낯섭니다. 듣거나 마주친 적이 없는 사람한테도 온갖 일이 낯설 테고, 때로는 힘이 들거나 어렵거나 벅찰 만합니다. 글씨를 처음 만나서 하나씩 소리를 내거나 듣는 어린이라면 어떨까요? 글씨하고 글씨를 엮은 글이 가득한 책을 처음으로 마주하며 읽는 아이라면 어떨까요?
논이나 밭이라는 이름을 모르는 아이더러 고랑을 내거나 물골을 잡으라고 이를 수 없습니다. 소꿉놀이를 하는 어린이한테 호미질이나 낫질이나 괭이질이나 삽질이 익숙하기를 바랄 수 없습니다.
배우는 아이들은 처음에는 구경합니다. 구경을 하다가 어느새 지켜봅니다. 가만히 지키는 눈길은 어느덧 살펴보는 눈빛이 되고, 한참 살펴보고 스스로 생각하다가 첫 손길을 내밀어요. 보고 생각하기만 하는 자리에서 움직이고 손수 짓는 자리로 나아가려 합니다. 이때에 어느 아이는 첫 손길부터 매끈할 수 있고, 어느 아이는 여러 손길 모두 어설플 수 있습니다. 이 모습을 곁에서 보는 어버이나 어른은 아이한테 어떤 말을 어떤 목소리로 어떤 마음을 담아서 들려줄 만할까요?
소년의 부모님도 사실은 글을 읽고 쓸 줄 몰랐습니다. 학교에 다닐 형편도 못 되었고, 글을 익힐 만한 주변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96쪽)
포항에서 푸름이하고 함께 배우는 길에 시를 한 줄 두 줄 적어 보았다는 분이 있습니다. 한 해 두 해 꾸준히 적은 글은 어느새 차곡차곡 모이고 책 하나 부피가 됩니다. 《너도바람꽃》(조재형, 한티재, 2019)이란 이름을 달고 시집이 태어납니다.
어린이나 푸름이가 보기에 글쓴이 조재형 님은 어른이겠지만, 첫 시집을 낸 흐름으로 보자면 이제 아장걸음이나 첫걸음입니다. 아장걸음에도 빼어날 수 있고, 첫걸음에도 훌륭할 수 있겠지요. 그러나 아장걸음이요 첫걸음인 터라 마치 아기나 아이처럼 헛디디기도 하고 어설프기도 하고 넘어지기도 하고, 넘어져서 으앙 울음을 터뜨릴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부끄러움보다도
크게 사죄할 일은
너희만 할 때 우리도 맞고 컸다며
회초리를 들었던 일 (참 부끄러운 일/81쪽)
초·중·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자리에 서는 분이 즐겁게 가르치는 길을 헤아려 봅니다. 가르치는 자리란 언제나 배우는 자리인 줄 느끼면서 함께 배우고 같이 가르치며 서로 나누는 마음이 되는 길이라면 무척 즐거울 만하리라 봅니다. 교과서에 적힌 대로만 가르치는 길이 아닌, 교과서에 적힌 이야기도 어린이하고 푸름이 눈으로 다시 들여다보고, 교과서에 적히지 않은 숱한 삶이며 살림이며 사람이며 사랑하고 얽힌 이야기도 하나하나 바라본다면 더없이 즐거울 만하지 싶습니다.
너도바람꽃 피어난 곳에는
어떤 향기의 바람이 불까?
구름송이풀에 핀 꽃처럼
흰 구름도 빨갛게 물들여질까? (이름/65쪽)
오늘 어른 자리에 선 분들이 어릴 적에 얻어맞고 자랐대서 오늘날 어린이도 ‘얻어맞으며 자라야’ 한다고 여길 수 없습니다. 오늘 어버이 자리에 있는 분들이 어릴 적에 따스한 말이나 상냥한 말씨를 못 듣고 자랐기에 오늘날 푸름이도 ‘상냥하거나 따스한 말이 아닌, 차갑거나 매서운 말’을 들어야 한다고 여길 수 없어요.
나도 꽃이요, 너도 꽃입니다. 너도 바람이요 나도 바람입니다. 《너도바람꽃》이란 시집 한 자락은 함께 꽃이면서 바람으로, 또 같이 바람이면서 꽃으로, 서로서로 바람꽃이나 꽃바람으로 나아가고 싶은 꿈을 그리려 합니다. 다만 아장걸음이요 첫걸음인 만큼 잘 걸려넘어질 만하고, 가벼운 턱에도 비틀거릴 만합니다.
교무실 청소당번 하면서 알았다
선생님 옆자리와
휴지통을 비우면서 알았다
우리한테는 분리수거, 분리수거 하면서
선생님 휴지통은 온통
잡동사니였다 (별수 없다 /48쪽)
스스럼없이 말을 하고, 스스럼없이 말을 듣습니다. 그저 가르치는 자리에 서서 ‘내가 너희보다 나이도 많고 겪은 일도 많으니, 내 말을 따르라’ 해도 좋을까요? 아니면 ‘나보다 나이도 적고 겪은 일도 적은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들려주는 말을 귀를 열고 들으’면 좋을까요?
“선생님 휴지통은 온통 잡동사니”였다고 털어놓을 수 있기에 글이 되고 시가 되며 노래가 되고 어깨동무가 됩니다. “너희만 할 때 우리도 맞고 컸다며 회초리를 들”은 일을 고스란히 밝히면서 참 부끄러운 줄 밝힐 수 있기에, 이 말씨 하나는 그대로 씨앗이 되어 서로서로 마음에 새로운 사랑으로 나아가는 징검다리가 될 수 있습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엄마의 얼굴에 웃음이 가득했다
나는 이제부터 엄마에게
우리말이 서툴다고 짜증을 내는 대신
베트남 말을 열심히 배우기로 했다 (뜻밖의 배려/13쪽)
전라도사람이 서울에 가면 서울말을 배웁니다. 경상도사람이 광주에 가면 광주말을 배웁니다. 서울사람이 전라도나 경상도에 간다면? 이때에는 서울말은 한켠에 접어놓고서 전라말이나 경상말을 배울 만하지 싶습니다. 일본에 가면 일본말을, 미국에 가면 미국말을, 덴마크에 가면 덴마크말을 듣고서 배울 적에 서로 마음으로 사귈 수 있어요.
자, 그렇다면 생각을 더 이어 봐요. 한국이란 나라에 일을 하러 왔다가 이 나라가 마음에 들어서 뿌리를 내리려고 하는 이웃이 있어요. 이 이웃은 베트남사람이기도 하고 필리핀사람이기도 합니다. 라오스사람이거나 네팔사람이기도 해요. 이때 한국사람은 베트남말이며 필리핀말이며 라오스말이며 네팔말을 기꺼이 새로 배우며 손을 맞잡는 길로 갈 생각을 키울 수 있을까요?
네가 바람이요 나는 꽃이기에, 나는 너한테서 바람말을 듣고 배우며, 너는 나한테서 꽃말을 듣고 배웁니다. 네가 꽃이요 나는 바람이기에, 너는 나한테 꽃말을 들려주고, 나는 너한테 바람말을 속삭입니다. 시나브로 서로 활짝활짝 웃습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