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마음으로 쓰고 읽는 꽃책 (2020.2.13.)
― 서울 양천 〈꽃 피는 책〉
서울 양천구 목동중앙북로16길 58
https://www.instagram.com/blooming__books
2001년이 저물 즈음 서울 관훈동 한켠에 〈감꽃책방〉이라는 헌책집이 조용히 문을 연 적이 있습니다. 그즈음에는 서울을 비롯해 나라 곳곳에서 마을새책집·마을헌책집이 빠르게 문을 닫았어요. 신문·방송에서는 ‘사라지는 책집’ 이야기만 가득했습니다. 그러나 사라지는 책집 못지않게 새로 여는 책집이 꽤 있었어요. 참고서·문제집으로 벌이를 하던 새책집은 줄줄이 문을 닫았고, 참고서·문제집이 아닌 ‘읽는 책’을 다루는 마을헌책집은 적잖이 문을 열었지요. 이 나라 책집살림이 확 달라지던 너울이었달까요.
서울 관훈동 헌책집 〈감꽃책방〉은 2002년 5월 즈음 책집이 깃든 건물을 헐고서 번듯한 새집을 짓는다고 해서 자리를 옮깁니다. 이러고서 그리 오래 책살림을 잇지는 못했습니다. 저는 그때 서울에서 살며 두 다리하고 자전거로 서울 골목골목 누비면서 헌책집을 찾아다녔고, 길그림을 그렸으며, 누리신문이나 누리글집에 ‘새로 만난 헌책집’ 이야기를 지며리 올렸어요.
2020년 2월에 서울마실을 할 일거리가 생기면서 서울 양천구 한켠, 양화초등학교 앞문 건너쪽에 있는 〈꽃 피는 책〉을 찾아갑니다. 책집 이름에 ‘꽃’을 넣다니, 얼마나 놀랍고 사랑스러운가요. 어느덧 스무 해가 된 일입니다만, 스무 해쯤 앞서 “감꽃책방”이라는 이름을 들은 이웃은 두 갈래로 대꾸했지요. “이름이 곱네요!”가 하나라면, “책집하고 안 어울리게 가볍다!”가 하나였어요.
고흥에서 시외버스로 순천, 순천에서 기차로 전주, 전주에서 시내버스로 이 고장 마을책집 〈잘 익은 언어들〉을 찾아간 다음, 다시 기차로 서울 영등포에 내리고는 택시를 잡아 〈꽃 피는 책〉으로 달립니다. 서울에서 택시를 타고 마을책집을 찾아가며 ‘아차, 잘못했네’ 하고 바로 느꼈습니다. 서울에서는 전철로 빙글빙글 돌아서 가나, 택시를 타나 엇비슷하거나 택시가 한결 느린 줄 또 잊었더군요. 자동차가 엄청나서 길도 엄청나게 막히는 서울입니다. 택시에 앉아 한가람하고 하늘을 바라보는데, 하얀하늘입니다. 틀림없이 구름이 아닌 하얀먼지로 뒤덮인 하늘입니다.
돌림앓이가 무섭다고들 나라가 시끌시끌한데, 이 하얀먼지로 뒤덮인 하늘이야말로 끔찍하지 않을까요? 길을 가득 메운 자동차물결이야말로 무섭지 않을까요? 숨조차 제대로 쉴 틈이 없는 찻길에, 높다른 집에, 시멘트랑 아스팔트로 뒤덮어 풀포기가 돋지도 못하는 땅뙈기에, 한밤에도 안 꺼지는 술집 불빛에, 이 모든 모습이야말로 우리 목을 죄는 굴레는 아닐까요?
한창 어지럽고 시끄러우며 매캐한 서울 한복판을 지나니, 용왕산을 옆에 낀 〈꽃 피는 책〉에 닿습니다. 책집 문을 열고 들어서니 조용합니다. 초등학교 앞이기에 다른 곳보다 더 조용하지 싶습니다. 어쩌면 초등학교 둘레에 마을책집이 깃들 만하겠구나 싶습니다. 가만히 돌아보면 2000년대 첫무렵까지만 해도 초등학교 둘레에 헌책집이 제법 있었어요. 1990년대 첫무렵까지는 웬만한 초등학교 앞에 헌책집이 한둘쯤 있었다고 하며, 1980년대 첫무렵까지는 초·중·고등학교 앞에 으레 헌책집이 있었다고 하더군요.
요즘이야 마을새책집이 곳곳에서 태어나지만, 지난날에는 새책을 살 엄두가 안 난 어린이·푸름이가 많았고, 헌책집은 초·중·고등학교 어린이하고 푸름이한테 크게 이바지했다고 합니다. 새책집에서는 ‘책에 손때 탄다’며 핀잔을 듣지만 헌책집에서는 그런 핀잔이 없이 ‘책을 좋아하는가 보구나’ 하는 말을 들으며 느긋하게 책을 누릴 수 있기도 했다지요.
꽃풀나무를 노래하는 그림책이며 이야기책이 정갈한 〈꽃 피는 책〉에는 책 못지않게 풀하고 꽃이 이곳을 그득 차지합니다. 숲에서 자란 나무로 빚은 책 곁에 푸른바람을 베푸는 풀꽃이 나란히 있는 얼개란, 이 마을 어린이하고 어른한테 둘도 없는 쉼터가 되겠네 싶습니다. 《봄 여름 가을 겨울》(헬렌 아폰시리/엄혜숙 옮김, 이마주, 2019)을 집습니다. 옮김말은 매우 아쉽지만, 잎사귀로 그림을 엮는 빛이 눈부십니다. 《넌 동물이야, 비스코비츠!》(알레산드로 보파/이승수 옮김, 민음사, 2010)는 어떤 이야기를 품었을까요. 책등을 살살 쓰다듬으니, 책이 반가워하면서 두근두근한 숨결을 보냅니다.
책집지기님이 누리글집에 사진을 올려서 알아본 《제주어 마음사전》(현택훈 글·박들 그림, 걷는사람, 2019)이 잘 보이는 자리에 있습니다. 냉큼 집습니다. 제주말이 글쓴님을 오늘처럼 시를 쓰는 길로 이끌었다고 하는 줄거리가 조곤조곤 흐릅니다. 그런데 애써 내는 책이라면 웬만한 낱말은 그냥 제주말로 쓰면 한결 좋았겠구나 싶어요. 올림말만 제주말로 보여주고 풀이말은 서울말로 적으니 좀 밋밋합니다. 책을 펴는 이가 제주말을 못 알아듣겠구나 싶으면 묶음표를 쳐서 넣으면 됩니다. 〈전라도닷컴〉이라는 잡지를 보면 전라말을 쓰는 할매 할배 이야기를 고스란히 옮기면서 묶음표조차 안 쳐요. 그러나 묶음표 없는 할매 할배 이야기를 읽다 보면 어느새 무슨 결이고 뜻인지 마음으로 알아차립니다.
우리가 책을 읽는다고 할 적에는 겉종이만 훑지 않습니다. 종이에 박힌 글씨를 이룬 마음을 읽어요. 누구나 언제나 마음으로 쓰고 읽는 책입니다. 책집도 그렇지요. 마음이 흐르는 책을 마음으로 잇는 자리가 책집이요 책터요 책숲입니다. ㅅㄴㄹ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한국말사전을 쓰고 “사전 짓는 책숲(사전 짓는 서재도서관)”을 꾸린다. 1992년부터 이 길을 걸었고, 쓴 책으로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