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바지 입은 가시내 : 이제는 ‘바지 입은 가시내’를 두고 뭐라 하는 사람은 드물다. 아예 없지는 않다만, 거의 사라졌다 할 만하다. 학교옷을 입히는 곳에서도 ‘바지만 입으려는 학생’이 스스로 고르도록 맡기는 흐름이 된다. 이 나라에서도 1900년대 첫머리에 ‘치마를 벗어던지고 바지를 꿰는 물결’이 있었다. 이 물결은 예순∼일흔 해 만에 빛을 보았구나 싶은데, 문득 다르게 생각하고 싶더라. ‘가시내가 치마를 벗어던질 일’이 아니라 ‘사내한테 치마를 입힐 일’은 아니었을까? 가시내이든 사내이든 ‘치마나 바지를 마음대로 골라서 입도록’ 갈 적에 비로소 길이 확 트이지 않을까? 치마만 두르다가 바지를 꿴 사람은 두 옷이 어떻게 다른가를 안다. 치마가 나쁘기만 하지 않다. 이른바 ‘파자마’ 같은 옷도 치마하고 비슷하다. 긴 마고자나 저고리, 그리고 ‘잠바’나 ‘패딩 코트’도 치마하고 비슷하다. 잘 생각해 보자. 아직 뭇사내가 그리 달라지지 않는 탓이라면 ‘치마 두르는 사내’가 되어 보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아기를 낳지 못하는 몸인 사내’라 하더라도 ‘갓난쟁이한테 가루젖을 먹이고 재우고 자장노래 부르고 같이 놀고 돌보는 살림’을 해본다면, 사내라 하더라도 머리가 확 깨일 만하다. ‘밥하고 설거지하고 부엌일 도맡으며 집살림을 구석구석 챙기는 살림’을 해본다면, 사내인 몸이어도 얼마든지 머리를 확 틔울 수 있다. 버스나 지하철 쩍벌사내란 무엇인가? 치마를 안 둘러 본 탓이지. 오두방정짓을 일삼는 사내란, ‘사랑으로 아이를 돌보는 집살림’이 얼마나 대단한가를 배운 적도 겪은 적도 느낀 적도 없는 모습이리라. 이들 사내한테 치마를 입히는 물결이 일기를 빈다. 대통령·국회의원·법관·군수·시장·교장 교감을 비롯한 뭔가 한자리 맡았다는 모든 사내한테 먼저 깡동치마를 입히고 일하도록 해야지 싶다. ‘치마 입는 사내’로 적어도 열∼스무 해를 살거나 일하도록 한 뒤에, 그 뒤로 어느 옷이든 스스로 골라서 입도록 한다면 참으로 아름나라가 될 만하리라 본다. 2017.12.27.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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