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 여든 앞에 글과 그림을 배운 순천 할머니들의 그림일기
권정자 외 지음 / 남해의봄날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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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책읽기

인문책시렁 103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

 순천 할머니 스무 사람

 남해의봄날

 2019.2.1.



하루는 남편이 그 집에서 나오는 것을 붙잡아 나는 한 달 동안 뼈빠지게 일하고 왔는데 헛짓거리 하고 있었냐고 했더니 남편은 화를 못 이기고 연탄을 들고 와 나한테 던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연탄에 맞아 걷지를 못했습니다. (31쪽/안안심)


엄마는 시장에서 생선 장사를 했습니다. 나는 동생을 업고 젖을 먹이러 다녔습니다. 쌀을 씹어 죽을 끓여 먹이기도 했습니다. 누덕바지로 만든 기저귀에 오줌을 싸서 내 등이 다 젖었습니다. (79쪽/하순자)


남편은 자기 생일날 밥을 빨리 안 준다고 상을 엎어 밥상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나는 상을 새로 안 사고 석 달 동안 땅바닥에 밥을 줬더니 그 뒤로는 상을 안 엎었습니다. (127쪽/김영분)


나는 큰아들이 기특했습니다. 그래서 큰아들에게 흙이 너와 잘 맞는 것 같다고 흙을 사랑하고 가까이하라고 했습니다. (143쪽/권정자)



  오늘 마을에서 마주하는 할머니는 그냥 할머니는 아닙니다. 어느덧 아흔 여든 일흔이란 고개를 넘어가는 할머니도 서른 살이나 스무 살 젊은이였던 나날이 있고, 열대여섯 살 푸른 나날이 있었으며, 예닐곱 살 어린 나날이 있었어요. 어린 나날이나 푸른 나날은 어느덧 지나갔고, 젊은 나이도 지나갔으며, 늘그막을 오래오래 보낼 뿐입니다.


  곰곰이 생각하면 오늘 여든 살 할머니가 스무 살 젊은이였던 예순 해 앞서는 1960년대요, 오늘 아흔 살 할머니가 열 살 어린이였던 여든 해 앞서는 1940년대예요. 그무렵에는 어떤 젊거나 어린 하루를 누렸을까요. 그무렵 그분들 어머니나 아버지는 어떤 어른스러움을 보여주었을까요.


  순천에서 늘그막을 누리는 할머니 스무 사람이 쓴 글하고 그린 그림으로 엮은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순천 할머니 스무 사람, 남해의봄날, 2019)를 읽기는 수월하지 않습니다. 두 가지 때문입니다. 첫째, 할머니마다 떠올리는 어리거나 젊은 날이 매우 모질거나 아프거나 슬픕니다. 툭하면 맞고, 거친 말소리를 듣고, 하고 싶은 일을 할 수 없습니다. 그저 고단하거나 괴롭거나 힘든 나날입니다. 둘째, 모두 시골에서 나고 자란 할머니인데 이 책에 흐르는 글은 모조리 서울 표준말입니다. 매우 아리송했습니다. 시골말로 살아온 시골 할머니가 왜 서울 표준말로 글을 썼지? 스무 할머니는 스무 가지로 다른 삶길을 걸어왔는데, 서울 표준말에 ‘갇힌’ 글은 다 다른 할머니가 다 다른 터전에서 다 다른 삶을 맞닥뜨리면서 헤쳐내거나 이겨내거나 받아들이면서 삭인 숱한 눈물이며 멍울이며 생채기이며 고름이며 앙금을 제대로 담아내기에는 어렵지 싶더군요.


  이 책이 안 좋다는 뜻이 아닙니다. 스무 할머니 살아온 이야기는 매우 애틋합니다. 더구나 지난날을 미움으로 그리지 않아요. 맞든 거친말을 듣든 언제나 가로막혀서 힘겨워야 했든, 할머니는 어리거나 젊은 나날부터 조용조용 한 걸음씩 내딛었습니다. 이녁 아이들은 ‘이녁이 겪은 짓을 겪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 매우 크셨지 싶습니다. 이녁 아이들을 어떤 사랑으로 돌보고 아꼈는가를 물씬 느낄 수 있습니다. 게다가 늘그막에 비로소 한글을 깨치고서 스스로 이녁 마음을 풀어놓을 수 있는 기쁨이 얼마나 큰가도 느낄 만합니다.


  전라남도 한켠에서 벌써 열 해 넘게 나오는 잡지 〈전라도닷컴〉이 있습니다. 이 잡지를 펴면 시골 할매 할배 삶이 시골말 그대로 흐릅니다. 시골 할매 할배가 읊는 말을 굳이 서울말로 바꾸지 않습니다. 곡성 할매라면 곡성말대로, 화순 할매라면 화순말로, 담양 할매라면 담양말로, 부안 할매라면 부안말대로 담더군요.


  시골 할매한테 한글을 가르칠 적에 서울말을 바탕으로 가르치기보다는 할머니마다 어릴 적에 듣고 자란 말씨를 가만가만 받아들여서 그 말씨를 할머니 스스로 그 시골말로, 삶말로, 오랜말로, 사랑이며 아픔이며 이야기가 서린 그 고장말로 나타내도록 북돋우면 한결 좋았으리라 생각해요.


  이 책 《우리가 글을 몰랐지, 인생을 몰랐나》에는 빛깔펜으로 담은 그림만 담았는데, 할머니가 연필로 담은 그림이 있는지 궁금해요. 갖은 빛깔을 그야말로 곱게 살려서 빚는 그림이 참으로 사랑스럽습니다. 그런데 연필로도 온갖 빛깔을 나타낼 수 있어요. 때로는 연필로 할머니 이녁 삶이며 눈길을 한결 수수하고 투박하지만 더욱 짙게 나타낼 수 있기도 합니다. 책을 덮으면서 자꾸자꾸 이 생각이 들어요. 시골 할매한테 시골말이 ‘자랑스럽다기보다 사랑스럽다’는 대목을 일깨워 주면 좋겠어요. 빛깔펜으로 빚는 그림도 고운데 ‘연필로 사각사각 찬찬히 빚는 그림도 사랑스럽다’는 대목을 넌지시 짚어 주면 좋겠어요. 시골말로 삶을 노래하고, 시골스러운 빛으로 하루를 나누는 새로운 책을 기다립니다.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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