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막짓을 겪고 보면 : 막짓을 겪을 적에 곰곰이 생각한다. 이러면서 ‘유체이탈’을 한다. 왜 유체이탈을 하느냐 하면, 나한테 막짓을 일삼으려 하는 이는 내가 그이 막짓을 고스란히 받아들여서 ‘싫거나 밉다는 감정’을 시커멓게 일으키기를 바라는 줄 바로 느낄 수 있으니까. 그래서 그이가 실컷 막짓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서 가만히 넋으로 그이를 지켜본다. 다만 유체이탈을 하더라도 내 몸이 다치지 않도록 파란거미줄을 쳐 놓는다. 자, 나도 내 하루를 즐겁게 쓰고 싶으니 막짓이 어느 만큼 흘렀으면 “이제 좀 후련하십니까? 저는 제 일로 바빠서 이만.” 하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서 돌아선다. 막짓에는 대꾸를 할 까닭이 없다. 또 막짓을 일삼는 이는 그이 스스로 막짓을 한 줄 모르기도 한다. 아마 그이들 마음자리에 시커먼 아이들이 스며들어서 마치 허수아비 부리듯 막짓을 시켰을 수 있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숱한 막짓을 지켜보노라면 ‘막짓을 받는 우리가 싫거나 밉다는 마음을 일으켜서 마음자리에 시커먼 기운’이 생기기를 꾀하고, 이 시커먼 기운은 ‘시커먼 것들’이 빨아들여서 숨을 이으려 한다. 이런 얼거리를 읽고서 스스로 차분히 다스릴 수 있다면, 온갖 막짓을 둘러싼 새로운 길을 엿볼 수 있다. 저이는 밑길을 읽지 않으니 막짓을 하지만, 우리 스스로도 아직 밑길을 더 읽거나 깊이 보거나 넓게 살피지 않은 탓에 막짓을 겪기도 한다. 막짓이 아닌 삶짓을, 사랑짓을, 슬기짓을, 이러하여 빛나는 몸짓이 되는 길을 우리가 스스로 생각하고 느껴서 삭이고 받아들여 살아내어야 할 만하니, 누가 우리한테 찾아와서 막짓을 하는구나 싶다. 내가 왜 글을 쓰는가 하고 스스로 물으면 이런 실마리가 떠오른다. 온누리 온갖 막짓에 얽힌 밑길을 읽고서, ‘싫거나 밉다는 대꾸’가 아닌, 그러한 뒷자리에 흐르는 삶을 이루는 사랑스러운 기운을 하나하나 풀어내어 담는 일을 하는 셈이랄까. 글쓰기 하나로. 1998.12.31. ㅅㄴㄹ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