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책숲마실

북새통 곁에 고요한 이곳 2000.7.29.

― 서울 신촌 〈원천서점〉



  어떤 사람과 신촌에서 만나기로 했습니다. 그분은 일터에서 좀 늦게 나온답니다. 자그마치 한 시간이 남습니다. 어쩔까 하다가 발길을 〈숨어있는 책〉으로 돌리려던 때, 언젠가 이야기를 들은 〈원천서점〉을 찾아가 보기로 합니다. 신촌 전철역(2호선)에서 〈숨어있는 책〉으로 나가는 ‘르 메이에르(그랜드마트)’ 건물 쪽 나들목에서 ‘이랜드 회사’ 건물이 있는 데로 돌립니다. 나중에 가고 보니 이랜드가 나오기까지는 15분은 넉넉히 걸어가야 하더군요. 신촌이나 이대에서는 마을버스 7, 11-1, 13-1 이렇게 석 대와 시내버스가 안양과 여의도순복음교회 사이에 다니는 703번이 있네요. 걸어 보았기에 걸으면 좀 멀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렇게 한참을 걸어 이랜드 회사를 지나가 한갓진 마을이 나올 때까지 〈원천서점〉은 보이지 않습니다. 뻘뻘 흘리는 땀을 닦으며 뒤돌아갑니다. 입맛을 다시며 나중에 다시 찾지 뭐 하며 창전동 세거리 앞에 섭니다. 길 건너 저 앞쪽만 가 보자고 생각하며 목마른데 뭐라도 사 마셔야겠다고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는데, 헉! 바로 뒤 구멍가게인 ‘연백수퍼’ 옆에 같은 간판으로 죽 이어서 〈원천서점〉이 보이지 않습니까.


  이런! 그러니까 저는 헌책집 앞을 한참 지나쳐서 땀을 뺀 셈입니다. 〈원천서점〉 곁을 멀쩡히 지나갔으면서도 그곳이 책집인 줄 몰랐던 셈이에요. 어쩌면 다른 분도 이곳 곁을 지나가면서 그러겠구나 싶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지나치느냐고도 하겠지만, 지나칠 수도 있는 일이네요.


  자물쇠는 잠겼고 앞에는 큰 책수레가 하나 있습니다. 겉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거니 낮밥을 드신답니다. 연백수퍼에 들어가서 마실거리 하나를 사서 마시고 그곳 아줌마하고 〈원천서점〉 이야기를 몇 마디 여쭙고 듣습니다. 연백수퍼 앞에 말리는 고추 옆에 놓은 큰 쓰레기통에는 종이 쓰레기와 나란히 낡은 책 꾸러미도 있어요. 이 꾸러미에 어떤 책이 있는가도 들여다봅니다.


  헌책집 할아버지는 오래지 않아 자전거를 몰고 오십니다. 와서 문을 따시더니 곧바로 책수레를 천으로 꽁꽁 묶습니다. 그 수레에서 《바보새 이야기》(이상수, 길, 1998)가 얼핏 눈에 뜨이고, 진순신이란 분이 쓴 중국 역사 이야기도 눈에 뜨입니다. 이밖에 눈에 뜨이는 책이 꽤 있으나 다 읽은 책이라 그러려니 하고 여깁니다.


  이러다가 미 공보부에서 낸 《미국 대통령들》이란 낡은 책을 집어드는데 꽤 재밌습니다. 눈빛 출판사에서 낸 사진책이 겉그림이 없는 채 여러 가지 보입니다. 아무래도 반품 폐기로 버려진 책이지 싶습니다. 이런 책은 종이쓰레기를 모으는 곳에 잔뜩 쌓이기 마련인데, 비록 겉그림이 없더라도 알맹이를 눈여겨보고 찾을 손님이 있으랴 싶어서 건져내곤 하신다지요. 그도 그럴 까닭이, 헌책집을 찾는 이라면 깔끔한 새책이 아닌, 속이 알찬 이야기꽃을 바라니까요.


  “거기서 보고 볼 만한 게 없으면 얘기해. 뒤에도 책이 많아.” 하시는 말씀에 책집으로 들어섭니다. 책집에 들어서니 새로운 별나라 같습니다. 이렇게 알짜배기 책집이 서울 한복판, 게다가 북새통 신촌 곁에 있는 줄 처음 알았습니다. 다만 오늘은 이따 만날 분이 있으니 얼마 머물 수 없는데, 이따 만날 분이 늦는 김에 더 늦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며 책시렁을 살핍니다.


  먼지가 퍽 쌓여 겉그림 빛깔을 다 앗아갔으나 속은 깨끗한 《이오덕 교육일기》(이오덕, 한길사, 1989) 1·2권이 끈으로 묶인 채 있군요. 저는 1권만 있기에 꾸러미를 어쩌다 하고 생각하다가 둘 다 골라야 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시정신과 유희정신》(이오덕, 창비, 1977) 오래된 판도 보입니다. 예전에 사서 읽었으나 새삼스레 눈에 뜨입니다.


  1980년 5월 18일 이야기를 영화로 담은 대본을 엮은 《부활의 노래》(이정국, 눈빛, 1990) 《제7의 인간》(존 버거·장 모르/차미례 옮김, 눈빛, 1992) 《시대》(고헌, 눈빛, 1996) 같은 사진책 세 권, 4286(1953)년에 나온 겉그림이 떨어져 나간 낡은 시조모음 한 자락과 백범사상연구소에서 ‘앎과 함 문고’로 냈던 《혁명적 인간상》(에리히 프롬, 백범사상연구소)을 쥡니다.


  꼬마 니콜라(니꼴라) 이야기는 언제부터 한국말로 나왔을까요? 《꼬마 니꼴라의 암호 놀이》(르네 고시니/김혜련 옮김, 태멘, 1982)를 보는데 껍데기가 있네요. 짙은 나무빛 껍데기가 있는 이 책은 겉껍데기가 있었기에 속이 아주 깨끗합니다. 가만 생각하니, 1980년에 둥지 출판사에서 나왔던 《빠빠라기》나 1970년대에 세 권으로 나온 《뿌리》도 이렇게 두꺼운종이로 껍데기를 싸서 속을 덮었습니다.


  〈원천〉 할아버지는 책값을 100원 하나치로 셈합니다. 《꼬마 니꼴라》는 1300원으로 셈하셨어요. 책값은 책 앞자락이나 뒷자락에 연필로 적어두셨군요. 책값을 적어 두지 않은 책은 “얼마지? 왜 안 적었지?” 하시며 한참 뒤적이다가 끝내 찾아내지 못하시면 입맛을 다시며 “그냥 얼마를 주지!” 하십니다. “원래 책값은 꽤 비싸니 자네는 싸게 사가는 거야.” 하는 말을 잊지 않으십니다.


  〈원천서점〉에서 나와 신촌으로 가려면 삼성아파트와 기업은행 건물을 지나 건널목을 건너면 됩니다. 그러면 곧바로 앞에 굴다리저자가 넓게 보여요. 바로 이 굴다리저자를 조금 지나면 왼쪽 마을로 들어가는 골목이 보입니다. 이리로 가면 신촌역을 오가는 철길 쪽으로 갑니다. 〈원천서점〉으로 가는 지름길이자 헌책집 〈숨어있는 책〉하고 아주 가깝에 이어주는 샛길인 셈이에요.


  〈숨어있는 책〉에서 〈원천서점〉으로 가자면 산울림 소극장 쪽으로 나아가는 조금 비탈진 길로 갑니다. 그러면 철길이 나오고 철길 바로 앞에 ‘정지’라는 푯말하고 오른쪽에 ‘우서방 각시고기집’이 보입니다. 이때 왼켠에 있는 ‘정지’ 푯말이 있는 데로 들어가면 바로 7m 즈음 앞에 작은 골목이 보입니다. 이 골목으로 들어가 왼쪽에서 두 번째 골목으로 들어갑니다. 그러면 앞서 말했던 굴다리저자하고 이어지는 지름길이자 샛길이랍니다.


  이 길을 미리 알았더라면 저도 찾아가기 좋았겠지요. 굳이 마을버스로를 타지 않아도 되고 큰길을 따로 제법 멀리 빙 돌아서 가지 않아도 될 테고요. 그래도 신촌 북새통을 벗어나면 이쪽은 큰길도 나름대로 걸어다닐 만했습니다. 차도 뜸하고 조용하기에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걷거나 이 생각 저 생각에 빠져 걷기엔 맞춤하더군요. ㅅㄴㄹ


(뒷말 : 아주 마땅하겠지만, 〈원천〉은 문을 닫은 지 오래되었다. 〈원천〉 할아버지도 아마 별나라에 계시리라 본다. 부디 어디에서도 느긋하게 삶을 가꾸는 하루를 누리시면 좋겠다.)



※ 글쓴이

숲노래(최종규) : 사전을 쓰는 사람.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읽는 우리말 사전 1·2·3》, 《우리말 동시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시골에서 책 읽는 즐거움》,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 《10대와 통하는 우리말 바로쓰기》 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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