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실천, 또는 실천적 지식인 : 한자말 ‘실천’은 한국말로 하자면 ‘하다’이다. 그냥 ‘하다’를 ‘실천’이란 한자말 껍데기에 담으니 사람들이 ‘실천’이 어렵다고 여기고 만다. 그러나 한국사람이라면 한국말로 이야기를 하면 된다. 굳이 영어나 일본말이나 한자말이나 중국말이나 티벳말이나 인도말을 안 해도 된다. 다시 말하자면 ‘하다’만 하면 된다. 이렇게 하면 다 된다. 스스로 생각하면 된다.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을 할 적에 몇 가지 말씨가 없으면 한 마디도 못한다. 이 가운데 하나는 ‘하다’요, 둘은 ‘있다’이다. 곰곰이 보면 ‘하다·있다’는 같은말이면서 꼴만 다르다. 스스로 이 얼거리를 생각하면서(생각이 있도록), “배운 살림”을 “익힌 삶”으로 피어나는 길을 가면 된다. 우리가 배우는 까닭은 이쪽 귀에서 저쪽 귀로 흘려나가도록 할 뜻이 아니요, 수업료를 치르려는 뜻이 아니요, 어떤 책을 읽었다고 자랑하려는 뜻이 아니요, 무슨 강의를 들었다고 알리려는 뜻이 아니요, 배운 티를 내려는 뜻이 아니요, 오로지 그처럼 배운 빛을 저마다 다른 삶이라는 열매로 맺도록 마음에 씨앗을 심으려는 뜻일 뿐이다. 그러니 “배운 것을 우리 나름대로 삭여서 ‘하면’ 된다”고 하겠다. 다만, “하면 된다”는 아니다. 한국 곳곳에 전두환이나 박정희가 때려박은 돌에 적힌 “하면 된다”는 거짓이다. 참은, “꿈을 생각하면 된다”이거나, “꿈을 사랑하면 된다”이고, “배운 길을 생각하면 된다”요, “익힌 삶을 사랑하면 된다”이다. 사회의식이나 정부기관은 우리한테 마치 “좋은 말”을 들려주는 척하지만, 그저 좋은 척‘하는’ 말일 뿐이다. ‘실천’ 같은 한자말을 지식인이 왜 끌어들여서 퍼뜨릴까? 생각해야 한다. 왜 사회에서는 ‘실천적 지식인’이란 뜬금없는(엉뚱한) 말을 자꾸 쓸까? “배운 사람(지식인)”이라면 마땅히 배운 그 길을 몸으로 삭여서 하면 될 뿐이다. 다시 말해서 모든 지식인은 허깨비란 뜻이다. 허깨비가 ‘실천적’이란 탈을 쓴들 그이가 실천적일 수 있을까? 일본 말씨 ‘-적’은 ‘하는’을 가리키는 자리에 안 쓴다. 이 일본 말씨 ‘-적’은 ‘하는 척’이나 ‘하는 듯한’을 가리키는 자리에 쓴다. 곧 “실천적 지식인 = 안 하지만, 마치 하는 척하면서 사람들을 지식으로 속여서 장사를 하는 권력자 허수아비”란 뜻이다. 이 속내까지 읽으면 “실천적 지식인”이 읊는 말(강의)이 왜 덧없는지, 또 “실천적 지식인”이 쓴 책(글)이 얼마나 우리를 홀리거나 거짓으로 이끄는가를 알 수 있다. 생각해야 한다. “실천적 지식인”이 쓴 모든 인문책은 열 살 어린이가 못 읽는다. 열 살 어린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을 헤아려서 글을 쓰지도 못하는 이들이 어떻게 “실천하는 아름님” 구실을 하겠는가. 우리가 배우는 뜻은 저마다 다 다른 자리에서 저마다 다 다른 눈높이로 저마다 다 다른 즐거움을 빛내면서 웃고 노래하려고 ‘하는’ 삶이기 때문이다. 즐겁게 배우니 즐겁게 한다. 배울 적에 즐거운 마음이 없으니 안 하고 또 지나간다. 즐겁게 배우지 않는 사람은 늘 수업료만 치른다. 2019.9.29.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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