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꽃―푸르게 읽는 책

《1파운드의 복음》 1∼4 / 타카하시 루미코, 서울미디어코믹스, 2019



푸른목소리 : 내 생채기(상처·트라우마)를 어떻게 씻어야 좋을까요?



  푸름이 여러분한테 제 생채기 이야기를 먼저 들려주어야겠다고 생각합니다. 어느 푸름이한테는 제가 어린 날 겪은 생채기가 아무것이 아니네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그래도 좋아요. 그러나 생채기는 생채기일 뿐이에요. 더 크거나 더 작은 생채기는 없습니다. 다만 제가 푸름이 여러분한테 들려줄 생채기는 제가 국민학교라는 이름이던, 그러니까 이제 초등학교라는 이름으로 바뀐, 여덟 살부터 열세 살까지 겪은 생채기입니다.


  오늘 저는 푸름이 여러분 앞에서 이렇게 멀쩡히 말을 해요. 더욱이 제법 또박또박 하지요. 그렇지만 저는 혀짤배기에 말더듬이였어요. 수줍음도 부끄럼도 잘 타서, 사람들 앞에서 말을 못하곤 했습니다. 어쩌면 속으로 이렇게 생각할 수 있답니다. “뭐야, 저 아저씨, 말을 이렇게 잘하면서, 예전에 말더듬이였다고? 수줍음쟁이에 부끄럼이였다고? 못 믿겠는데? 거짓말 아냐?”


  저는 혀짤배기로서 말을 더듬는 이 몸을 고치려고 죽을힘을 썼는데 참으로 하나도 안 되었습니다. 죽을힘을 써도 안 되고 죽고 싶었으나, 죽지도 못했습니다. 뭐, 그때에 죽지 못했으니, 오늘 이렇게 푸름이 여러분 앞에 서서 말을 합니다. 아무튼 날마다 놀림을 받았어요. 요새는 모르겠습니다만, 예전에는 담임 교사가 날마다 읽기를 시켜요. 한 반 모든 아이가 국어 교과서를 한두 쪽씩 소리를 내어 읽도록 시키거나 동시를 외우도록 시켰어요.


  으레 첫마디부터 웅얼거리면서 소리가 엉키면서 더듬다 보니, 차가우면서 잔뜩 날이 선 조용하던 교실은 한바탕 웃음바다로 바뀝니다. 이를테면 “우리 나라는” 같은 첫 대목을 “으, 으이 아라는”이나 “응이 아라는”처럼 더듬었는데요, 한 반 동무들은 책상을 손바닥으로 치고 발로 바닥을 구르면서 까르르 깔깔 히히히 해댔고, 담임 교사마저 웃음을 참으려다가 피식피식하더니 출석부로 제 머리를 내리쳐요. 저는 놀림질에다가 주먹질까지 받았지요.


  말을 더듬는다고 얼마나 놀리고 손가락질하고 비웃었는지 몰라요. 저는 이 어릴 적을 떠올릴 적마다 아직도 눈가에 눈물이 핑 돌아요. 이 일을 잊으려고 모진 애를 썼지만 안 잊혀요. 그런데 있지요, 6학년이던 열세 살에 아주 놀라운 일을 겪었어요. 예전에는 가시내를 매우 깔봤고, 가시내는 사내 앞에서 함부로 말을 하면 안 된다는 흐름에 셌는데요, 그래서 가시내가 뭔가 똑부러지게 말하면 어른뿐 아니라 아이들 사이에서도 “여자는 입 다물어!” 같은 윽박질을 참 함부로 했답니다. 자, 이런 판에 어느 아이, 가시내인 아이가 넌지시 조용히 차분히 한 마디 했어요.


  “친구가 말하는데, 웃는 거 아니야.”


  제가 말을 더듬은 소리를 듣고 지난 다섯 해 반처럼 그때에도 반 동무들은 책상을 치고 바닥을 구르며 웃어제끼는데, 딱 한 아이, 더구나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안 된다고 여기는 찬밥처럼 내몰린 가시내인 동무 아이가 이런 말을 나즈막하게 한 마디를 했어요. 이 말 한 마디가 교실에 흐르자 쥐 죽은 듯 고요해졌습니다. 2분쯤 다들 아무 말을 안 했어요. 이때 외려 저는 더 떨었어요. 차라리 웃고 넘기면 속이 시원할 텐데, 2분이나 모두 아뭇소리 없이 있자니 더 어떻게 해야 할 줄 모르겠더군요.


  자, 이다음부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저는 말더듬을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까지 안고 살았습니다. 고등학교를 마칠 무렵이 되어서야 거의 고쳤습니다. 어떻게 고쳤느냐 하면, 제가 고등학교 1학년이던 때에 아버지가 새집으로 옮겼어요. 예전 집은 마을 한복판이었고, 새로운 집은 논밭을 밀어 없애고서 올려세운 아파트였는데, 새집하고 학교 사이가 꽤 멀어요. 걸어서 두 시간 길인데요, 오가는 사람 없이 썰렁한 이 두 시간 길을 일부러 날마다 걸어다니면서 큰소리로 노래했습니다. 사람이 아무도 없는 길이라 눈치를 안 보고 ‘돼지 멱 따는 소리’일는지도 모르나 세 해 동안 큰소리로 노래를 부르면서 말더듬을 조금씩 고칠 수 있었어요.


  그나저나 제가 열세 살이던 국민학교 6학년 어느 날, 가시내 동무가 나즈막하게 읊은 “친구가 말하는데, 웃는 거 아니야.”라는 한 마디는 대단히 힘을 냈습니다. 그 뒤로도 제 말더듬은 그대로였는데, 제가 말을 더듬을 적에 이제는 아무도 안 웃었어요. 도리어 기다려 주더군요. 제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는지, 다시 말할 때까지 기다려 주었어요.


  저는 그때 저를 도와주었다고 할, 또는 동무를 그토록 오래 따돌리고 괴롭히던 한 반 모든 동무들 사이에서 어마어마한 한 마디를 들려준 그 가시내 동무를, 국민학교를 마친 뒤에 다시 만나지 못했어요. 그래서 그 동무를 다시 만날 수 있다면 이 말을 들려주고 싶습니다. “동무야, 네 한 마디가 나를 수렁에서 어떻게 건져냈는지 아니? 나를 따돌리고 괴롭히던 아이들을 네가 주먹으로 패준 것도 아니고, 그냥 말 한 마디뿐이었는데, 그 말이 우리 모두를 살렸어. 말더듬이인 나도, 말더듬이를 괴롭히던 철없던 아이들도, 모두 살린 한 마디야. 참 고맙단다. 고맙다는 말을 너한테 꼭 들려주고 싶어.”


+ + +


  “내 생채기(상처·트라우마)를 어떻게 씻어야 좋을까요?” 하고 묻는 푸른벗한테 살며시 건네고 싶은 책은 《1파운드의 복음》이라는 만화책입니다. 만화책을 여러분한테 건네고 싶습니다. 생뚱맞을까요? 네, 생뚱맞아요. 바로 생뚱맞기에 이 만화책을 건네려 합니다.


  《1파운드의 복음》을 그린 분은 1978년부터 여태까지 꼭 하루조차도 안 쉬고서 만화를 그립니다. 저는 이분을 “살아서 움직이는 만화 하느님”으로 여깁니다. 아마 푸른벗은 《이누야샤》란 만화를 보았을는지 몰라요. 또는 《경계의 린네》나 《란마 1/2》 같은 만화를 알는지 모릅니다. 이런저런 만화를 그린 타카하시 루미코란 분이 선보인 《1파운드의 복음》은 바로 ‘생채기’하고 ‘곁에서 돕는 말 한 마디’ 사이를 참으로 부드러우면서 재미있게 보여주어요.


  하나도 안 무겁게, 외려 익살스러운 줄거리로 짜서 보여준답니다. 그런데 이 익살스러운 줄거리로 짠, ‘생채기를 달래는 말 한 마디’를 보여주는 이 만화책을 읽는데, 저는 왜 이렇게 눈물이 날까요?


  푸름이 여러분, 아프면 그냥 우셔요. 볼을 타고 눈물이 흘러도 좋아요. 누가 여러분을 보고서 “야! 쟤 좀 봐! 운다, 울어! 하하하, 쟤 뭐야?” 하고 놀리거나 손가락질을 하더라도 그냥 눈물을 흘리면서 우셔요. 남을 보지 마셔요. 남이 하는 말을 듣지 마셔요. 여러분 가슴속에서 우러나오는 소리만 듣고, 여러분 가슴속에서 흐르는 따뜻한 사랑만 보셔요. 그러면 됩니다. 우리는 모두 가슴 따뜻한 하느님입니다. 이 만화책은 바로 이 대목을 그지없이 아름답게 그려요. ㅅㄴ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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