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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사전 혼내는 책 - 우리말의 집을 튼튼하게 짓기 위하여
박일환 지음 / 유유 / 2019년 3월
평점 :
책으로 삶읽기 470
《국어사전 혼내는 책》
박일환
유유
2019.3.24.
국어사전은 그냥 낱말만 긁어다 모아 놓은 창고가 되어서는 안 된다. 표제어의 수보다 더 중요한 건 모셔 온 낱말들에 바르고 정확하며 아름다운 옷을 입혀 주는 일이다. (11쪽)
차등은 차별로, 차별은 다시 구별로 설명하는데, 이게 정말 맞는 풀이일까? (36쪽)
결국 일본어 사전을 그냥 베낀 거라는 결론이 나온다. (171쪽)
우리가 중국 승려의 기일까지 알아야 할 이유가 도대체 뭔지 모르겠다. (227쪽)
‘스웨덴순무’라는 말을 실어 놓은 것도 모자라 원어인 ‘루타바가’까지 실은 꼼꼼함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380쪽)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국어사전을 늘 들고 다니면서 보았습니다. 다만 국어사전이 한국말을 익히는 길에 썩 이바지하지는 않았다고 느낍니다. 그래도 한 가지를 얻었다면, 우리 국어사전은 ‘한자말을 한국말로 풀이’하고 ‘한국말을 한자말로 풀이’하는 얼거리로구나 하고 느꼈고, 어떤 한자말을 어떤 한국말로 고쳐서 쓰면 좋을까 하는 대목을 배울 만했습니다.
이제 이 국어사전을 뜯어고쳐서, 아니 낡은 국어사전은 버리고서, 한국말을 새롭고 슬기롭게 쓰는 길을 가는 이웃님한테 이바지하는 한국말사전을 차근차근 쓰는 하루를 보냅니다. 그러나 낡은 사전을 버리더라도 곁에 두고서 살펴보는데요, 국어사전을 볼 적마다 어느 사전이든 참으로 허술하구나 싶습니다.
《국어사전 혼내는 책》(박일환, 유유, 2019)은 표준국어대사전하고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이 얼마나 말썽인가 하는 대목을 하나하나 짚습니다. 다만 전문말이나 학술말을 바탕으로 짚느라 좀 아쉽습니다. 흔한 낱말을 얼마나 엉성하게 다루는가는 얼마 안 짚어요.
글쓴이는 보리국어사전은 두 대사전보다 훨씬 낫다고 이 책에서 밝힙니다만, 제가 보기로는 아리송합니다. 흔한 말 ‘휘다·굽다’를 보리국어사전이 어떻게 풀이하는가를 들춰 보면 쉽게 알지요.
* 《보리 국어사전》 뜻풀이
[휘다] 곧은 것이 힘을 받아 구부러지다
[구부러지다] 한쪽으로 굽거나 휘어지다
[굽다] 1. 한쪽으로 휘거나 꺾이다 2. 한쪽으로 휘어 있거나 꺾여 있다
[꺾다] 1. 어떤 것을 구부려서 부러지게 하다 2. 허리, 팔, 다리 들을 구부리거나 접다
표준국어대사전을 비롯한 여러 사전이 전문말이나 학술말을 엉성하게 다룰 뿐 아니라, 뜬금없는 중국말에 일본말에 스웨덴말에 러시아말에 프랑스말에 …… 마구 싣는 대목은 나무랄 만합니다. 그리고 이와 아울러 흔한 삶말을 얼마나 엉터리로 다루는가도 같이 짚어야지 싶어요.
《국어사전 혼내는 책》을 읽으며 몇 군데에서는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때로는 잘못 알려진 얘기로 적은 대목도 있더군요. 이런 대목은 좀 바로잡아야겠습니다.
ㄱ.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우윳빛이 노란빛을 띤다고 했는데, 역시 수긍하기 어려운 풀이다. (22쪽)
ㄴ. 그 후 얼음엿 대신 ‘얼음과자’라는 말을 쓰기 시작했다. 아이스캔디라는 말도 ‘아이스케이크’로 바뀌었으니, 얼음엿은 진작 버렸어야 할 말이다. (47쪽)
ㄷ. 비행기를 ‘날틀’이라고 하자고 했다가 실패한 것과 마찬가지 사례라 하겠다. (79쪽)
ㄹ.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 아래서 살아온 관계로 우리가 사용하는 말이나 각종 용어가 중국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었다. (81쪽)
ㅁ. 모 단체에서 회장을 ‘으뜸빛’, 총무를 ‘두루빛’으로 부르자고 한 모양이다. 고유어를 되살려 쓰자는 취지이겠지만 너무 억지스러운 말로 보인다. (105쪽)
ㅂ. 순화어로 제시한 ‘꽃 그릇’이 과연 제대로 쓰일 수 있을까? 합성어인 ‘꽃그릇’이 표제어에 있는데, 풀이가 ‘꽃이 그려져 있는 예쁜 그릇’이라고 되어 있다. (305쪽)
소젖(우유) 빛깔에 노르스름한 빛이 있을까요, 없을까요? ‘아예 없다’고는 할 수 없습니다. 소젖이든 염소젖이든, 또 사람젖이든 ‘그저 하얗’지만은 않습니다. 다만, 사전풀이에서 섣불리 “노란빛을 딴다”고 붙이기보다는 “살짝 노르스름할 수도 있다”쯤으로 다뤄야 알맞겠다고 봅니다.
‘얼음과자’이든 ‘얼음엿’이든 알맞고 재미나게 잘 지은 말이라면, 굳이 사전에서 버릴 까닭이 없이, 이러한 말을 살리는 길을 더 생각하면 됩니다.
비행기를 ‘날틀’로 바꾸자는 말은, 최현배 어른 같은 분이 밝히지 않았습니다. 1960년대에 ‘한글만 쓰기’를 싫다고 외친 쪽에서 ‘그러면 너희(한글만 쓰기)는 이화여대를 배꽃계집큰배움터로, 비행기를 날틀로 바꾸자는 주장이냐?’ 하고 따진 적이 있어요. 이때에 최현배 어른은 ‘우리는 그렇게 바꾸자고 외치지 않는다. 그런데 너희(한자 함께 쓰기)가 들려주는 그 말은 가만히 생각해 보면 꽤 어울릴 듯하다’쯤으로 대꾸한 적이 있습니다. 한자를 함께 써야 한다고 외친 쪽에서 내놓은 말이 ‘배꽃계집큰배움터’하고 ‘날틀’이었습니다. 그러나 어찌된 셈인지, 이 얘기가 그 뒤로 거꾸로 알려지거나 퍼졌습니다.
한국은 ‘한자문화권’이 아닙니다. ‘한자지배권’에 억눌린 나날이었다고 해야 옳습니다.
‘회장’을 ‘으뜸빛’으로 바꾸어 보자는 뜻이 왜 나쁠까요? 뭐가 억지일까요? 새롭게 이름을 짓는 마음을 북돋울 노릇입니다.
‘꽃그릇’이란 이름은 제법 쓰이는 말이기도 합니다. ‘화분’이라고만 써야 할 까닭이 없을 뿐더러, ‘화분’이란 말을 모르는 분도 있습니다. 인천에서 살며 골목마실을 여러 해 하는 동안, 골목에서 꽃을 키우는 분들이 “스티로폼도 꽃그릇이고 깨진 밥그릇도 꽃그릇이고 빈 간장통도 꽃그릇이고 다 꽃그릇이지.”처럼 곧잘 이야기하는 말을 들었습니다. ‘꽃그릇’은 살림자리에서 피어난 수수한 말이라고 여기면서 사전에 살뜰히 담아낼 노릇이라고 봅니다.
오랫동안 한자 문화권 아래서 살아온 관계로
→ 오렛동안 한자 굴레에 눌려 살아온 탓에
→ 오랫동안 한자에 짓눌려 살아온 나머지
→ 오렛동안 한자 사슬에 갇혀 살아왔기에
→ 오랫동안 한자에 억눌려 살아온 터라
→ 오랫동안 한자에 둘러싸여 살아와서
끝으로, 글쓴이가 적은 글월 가운데 좀 안 맞다 싶은, 번역 말씨가 나타난 한 자락을 손질해 봅니다. “문화권 아래”란 말은 한국말이 아닙니다. ‘下’를 ‘아래’로 섣불리 옮기지 않습니다. 이는 일본 번역 말씨입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