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4

외대 앞 한겨레신문 이문·휘경지국 신문배달원으로 일한 지 한 달. 형들하고 함께 먹고자는 이 작은 지하방에 내 책이 벌써 이백 권 넘게 귀퉁이에 탑으로 쌓인다. 지국장님이 한마디. “야, 공부하려고 책을 사서 읽는 건 좋은데, 우리 잘 자리가 자꾸 좁아진다. 어떡할까? 우리가 넓은 곳으로 이사할 수 있으면 좋겠는데. 너더러 책을 그만 사라고는 못 하겠고.” 1995.5.25.


책 5

“학생처럼 책을 사랑하는 대학생이 열 사람쯤만 손님으로 와도 우리 책방이 문을 닫지 않을 텐데. 그래도 문닫기 전에 학생 같은 사람을 만나니, 이제 이 헌책방을 접기로 했지만 후회가 되지는 않네. 내가 마음으로 선물해 주고 싶어 그러니까, 돈은 걱정하지 말고 여기에서 가져가고 싶은 책은 다 가져가.” 우물쭈물 아무 말을 할 수 없다. 나는 그저 이곳이 책이 알차게 있어 하루가 어떻게 흐르는 줄도 모르는 채 서서 책을 읽고, 읽은 책을 사갈 뿐인데. 한참 망설이다가 ‘게일 선교사가 쓴 한영자전 복사판’ 꾸러미를 집는다. “세 권? 달랑 세 권? 더 가져가. 아니 이 책방에 있는 책 다 가져가도 돼.” “아니에요. 다른 책은 제가 돈을 벌어서 사고 싶어요. 이 세 권만 해도 고마운걸요. 게다가 저는 신문사 지국 좁은 지하방에서 사느라 이 책을 다 가져가도 둘 데가 없어요.” 1995.10.1.


책 6

책이 활활 탄다. 중대장이 북북 찢어발긴 책이 아주 잘 탄다. 중대장은 《태백산맥》 같은 불온도서가 어떻게 내무반에 돌아다니느냐고, 그런 빨갱이 책은 모조리 불살라야 한다고 말한다. 이런 중대장이 관물검사를 하면서 솎아내지 않은 책은 ‘섹스소설’이다. 중대장은 우리더러 ‘섹스소설’만 읽고 딸딸이를 치란다. 다른 모든 책은 정신건강에 해롭단다. 불구덩이 곁에서 책을 찢어발기던 중대장이 사라진다. 아직 찢지 않은 책 서른 권 즈음을 잿더미에 슬슬 묻는다. 책을 다 태웠다고 말한다. 잿더미에 묻은 책은 밤에 보초를 설 적에 빼내려 했는데, 중대장은 불구덩이로 돌아와서 작대기로 잿더미를 뒤지더니 안 찢고 안 태운 책을 찾아낸다. “이런 ○○○들이 다 있어!” 완전군장을 짊어지고서 19소초부터 22소초까지 철책을 따라 걷는다. 물 한 모금 얻어마시고서 23소초를 지나 32소초까지 걷는다. 다시 우리 소초까지 돌아오기까지 열여덟 시간. 《태백산맥》을 불태우지 않았다고 아주 신나게 피눈물이 난다. 그러나 이웃 소초를 오가면서 금강산 구경도 잘했고, 엄청난 골짜기도 실컷 구경했고, 새파란 하늘빛도 잔뜩 보았다. 1996.6.7.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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