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력서 1
이력서를 처음 쓴다. 이력서란 이름도 처음이고 하나도 몰라 둘레에 물었다. 회사에 들어가려고 쓴다는 이력서를 보니 어느 학교를 마치고 무슨 자격증이 있느냐를 적네. 나는 대학교를 그만두었으니 고졸이고, 따로 딴 자격증이 없다. 글쓰기는 평타 800을 칠 줄 알아도 무슨 자격증을 거머쥐지 않았다. 이력서를 넣을 출판사에 전화해서 여쭌다. “아, 이력서요? 이력서는, 여태까지 무엇을 하며 살아왔고 어떤 생각을 하며 살았는가를 적으면 돼요. 길이는 제한 없습니다. 길게 쓸수록 좋아요.” 이리하여 이제껏 어떻게 살았는지, 무슨 생각이었는지, 군대에서 어떤 일을 치렀고, 대학교를 그만둔 뜻, 신문배달로 먹고살면서 배운 이야기, 책과 헌책집과 도서관이 얽힌 실타래를 비롯해서 마음껏 쓴다. 그런데 마땅한 종이가 없어서, 신문에 넣는 광고 뒷종이를 긁어모아서 썼다. 졸업장이나 자격증 이야기는 하나도 없는, 두툼한 이력서를 마무리짓는다. 1999.7.7.

이력서 2
흔히들 ‘이력’이란 ‘학업·직업·경험’이라 여기지만, 달리 바라보아야지 싶다. ‘배움·살림·꿈’으로 걸어온 길로 바라볼 노릇이라 느낀다. 더 따진다면 ‘이력서’란 이름부터 걷어치울 일이다. ‘삶길’이란 이름을 써야 어울리지 싶다. 삶길을 적는 글(서류)이라면 ‘삶길글·삶글’이 될 테지. 어느 학교를 마쳤다고 적는 이력서가 아닌, 무엇을 배워서 어떤 길을 걷고 싶은가를 적는 삶길글이 되어야지 싶다. 어느 곳에 들어가서 몇 해를 일했다고 적는 이력서가 아닌, 어떤 일을 하려고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무엇을 느끼고 알았는가를 적는 삶길글이 되어야지 싶다. 우리한테는 졸업장이나 자격증이 덧없다. 우리한테는 배움길하고 살림길이 뜻있다. 2003.6.4.

이력서 3
학교나 기관에 강의를 갈 적마다 나더라 ‘강사카드·이력서’를 같이 보내라고 한다. 아마 다른 분도 똑같을 텐데, 틀에 박힌 강사카드나 이력서에는 따로 써넣을 만한 말이 없다. 어느 대학교를 나왔는지 적으라는데, 대학교를 그만둔 내가 뭘 적어야 할까? 어느 대학교나 기관에서 강의를 해봤는지 적으라는데, 써넣고 싶지 않다. 그래서 나는 주어진 틀을 몽땅 버리고는, ‘어떤 책하고 사전을 그동안 쓰고 엮었’는가를 써넣는다. 여러 지자체 공문서를 손질해 준 이야기를 써넣는다. 2017.1.15.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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