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은 생각한다 - 숲의 눈으로 인간을 보다
에두아르도 콘 지음, 차은정 옮김 / 사월의책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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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책시렁 52


《숲은 생각한다》

 에두아르도 콘

 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5.20.



비인간적 세계의 사고가 우리의 사고를 해방시키도록 하기 위해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숲은 생각하기에 좋다. 왜냐하면 숲은 스스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숲은 생각한다. (46쪽)


“너 아직 살아 있니?”라는 것을 당신이 배운다 해도 당신은 이 말이 주는 느낌을 제대로 느낄 수 없다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케추아어를 쓰는 원어민은 분명 ‘카우상기추’의 의미를 문자 그대로 느낀다. (56쪽)


기호는 배타적으로 인간만의 것이 아니다. 모든 살아 있는 존재는 기호를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 인간은 다수의 기호적 생명들에 친숙하다. (81쪽)


먹잇감이 혼을 잃으면 사냥 또한 수월해진다. 꿈속에서 동물의 혼을 죽인 남자는 그 다음 날 동물을 간단하게 포획할 수 있는데, 그것은 포획물이 이미 혼이 없는 상태로서 혼맹이 되었기 때문이다. (205쪽)



  생각하지 않는 숲은 없다고 느낍니다. 생각하지 않는 바다도, 생각하지 않는 바람도, 생각하지 않는 물도 없다고 느껴요.


  이런 말을 들으면 어리둥절해 하거나 허튼소리를 한다고 여길는지 모르지요. 그러나 저는 틀림없이 느낍니다. 사람뿐 아니라 짐승하고 벌레도 생각을 하고, 숲도 바다도 바람도 물도 생각한다고 느껴요. 다만, 사람은 사람대로 생각하고, 짐승하고 벌레는 짐승하고 벌레대로 생각할 뿐이에요. 숲은 숲대로 생각하니, 사람하고 사뭇 다른 결로 생각할 뿐 아니라, 사람하고는 아주 다른 길을 생각하지요.


  《숲은 생각한다》(에두아르도 콘/차은정 옮김, 사월의책, 2018)를 읽는데, 옮김말이 한국말이 아니라서 매우 갑갑합니다. 이 책은 한글로는 옮겼으되 한국말로는 옮기지 않았습니다. 한글로 적는다고 해서 모두 한국말은 아니에요. 서양 학문을 번역 말씨에다가 일본 말씨에다가 일본 한자말을 써서 옮겼으니, 무늬는 한글이로되, 줄거리는 좀처럼 종잡기 어렵습니다. 한참을 생각해서 ‘한국말로 새로 풀어서 헤아려야’ 합니다.


  이를테면 69쪽 “신중하게 구획된 부재와 가능성의 공간들 내부에 담긴 혼합물로부터 창발하는 세계가 아니라면, 그의 정신과 미래의 자기는 어디에 존재하는 것일까” 같은 글입니다. 무슨 뜻일까요?


  우리는 숲을 알려면 숲말로 서로 이야기를 해야 합니다. 그런데 숲하고 이야기를 하려고 숲말을 익히기 앞서, 사람 사이에서도 사람말로 이야기를 하기 어려운 흐름이로구나 싶습니다. 지난날에는 지식인이나 권력자가 중국 한문을 끌어들여서 말이 막히도록 했다면, 오늘날 지식인은 중국 한문에다가 일본 한자말을 덧씌우고, 여기에 영어하고 번역 말씨까지 입힙니다.


  어쩌면 우리는 말이지요, 사람하고 사람 사이에 말이 끊어지면서, 사람하고 숲 사이에 흐르던 고요한 말까지 함께 잃었을 수 있어요. 우리 스스로 사람말을 비틀거나 뒤틀면서, 그만 숲말도 잊고 바람말도 잊으며 벌레말이나 꽃말을 모조리 잊거나 잃으면서, 사람 사이에서도 서로 등지거나 담을 쌓는 모습이 되었지 싶습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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