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의 여름휴가 - 내가 본 북조선
유미리 지음, 이영화 옮김 / 615(육일오) / 2012년 10월
평점 :
절판


인문책시렁 27


《평양의 여름 휴가》

 유미리 글

 이영화 옮김

 도서출판615

 2012.10.4.



나는 조국의 말을 모른다. 거리를 걸으며 스쳐 지나가는 사람의 소리를 들어도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소리의 울림을 들을 수 있을 뿐이다. 얼굴과 모습만 볼 수 있을 뿐이다. 빛을 볼 수 있을 뿐이다 … 내가 카메라 셔터를 누르는 것은 감정이 무의식중에 움직여질 때이다. 감정이 움직일 때만 셔터를 누른다. (25쪽)


운동복 차림의 청년들이 열 명 정도 둘러앉아 바비큐를 하고 있었다. “한 장 찍어도 괜찮겠습니까?” 하고 카메라를 들이대자, 일제히 얼굴을 숙여버렸다. 그들은 김일성종합대학 학생들로, 여기서 놀고 있는 게 알려지면 교수한테 혼나니까, 찍지 말라고 했다. (45쪽)


나 자신은 귀화를 생각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일본에서 받는 ‘부자유’, ‘불공정’, ‘불평등’을 해소하기 위해 귀화할 수는 없다. ‘부자유’, ‘불편함’, ‘불평등’ 입장을 계속 강요당하는 한, 일본은 내게 있어 ‘고향’이 아닌 ‘태어난 토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93쪽)



  쉰 살을 맞이한 2018년 4월에 후쿠시마에 책집을 연 소설가 한 분이 있어요. 미나미소마시 간이역 한켠에 연 책집은, 핵발전소가 터지면서 와르르 무너져내려 쓸쓸한 그 고장 푸름이가 느긋하게 쉬면서 삶을 새롭게 꿈꾸는 터전이 되기를 바라는 뜻이 흐른다고 합니다. 핵발전소가 터진 자취가 아직 뚜렷한 곳으로 보금자리를 옮겨서 살려는 사람은 거의 없을 텐데, 그 고장에서 자라야 하는 푸름이를 헤아리는 마음이 놀랍구나 싶습니다. 한국에 이런 걸음을 하는 시인이나 소설가가 있을까요?


  이 소설가는 이녁 아이한테 ‘어머니하고 같은 피가 흐르는 사람들’이 사는 나라를 느끼도록 이끌고 싶어서 남녘마실도 하고 북녘마실도 했다고 합니다. 소설가 아이는 일본에서 태어나서 자라지만, 일본 곁에 어떤 이웃나라가 있는가를 헤아리도록 이끌고 싶었다고 합니다.


  《평양의 여름 휴가》(유미리/이영화 옮김, 도서출판615, 2012)는 책이름처럼 평양을 다녀온 자취를 남긴 글입니다. 글쓴이는 소설을 쓰는 유미리 님이고, 이녁은 재일조선인이라 하며, 아쿠타가와상을 받았습니다. 유미리 님은 남녘은 진작에 여러 걸음을 했으나 북녘은 제대로 걸음한 적이 없는 터라, 재일조선인이라는 삶에서 뿌리인 ‘한겨레’를 제대로 헤아리자면 남북 두 나라를 모두 걸음해야 한다고 여겼다고 해요. 무엇보다 글쓴이 아이가 남녘뿐 아니라 북녘도 같이 겪기를 바랐다고 합니다.


  북녘에서 보고 듣고 겪은 일을 소설가답게 찬찬히 엮어서 풀어냅니다. 북녘사람 누구하고나 홀가분하게 만나거나 이야기할 수 없고, 이른아침에 평양 시내를 달려 볼 수 없고, 평양 아닌 다른 고장에는 발을 디뎌 볼 수 없고, 일본으로 팩스를 보낼 수도 없고, 겨우 팩스 보낼 곳을 찾았더니 값이 어마어마하게 들고, …… ‘없고’투성이인 마실길이지만, 여느 남녘사람으로서는 아예 닿을 수 없는 곳을 보고 느낀 이야기로 어렴풋하게 ‘한겨레 이웃집’ 살림을 그려 봅니다.


  북녘은 아직 자유가 묶인 나라입니다만, 자유가 묶인 곳에서도 대학생들이 풀밭에 모여 고기를 구워먹습니다. 이 모습을 사진으로 찍으려는 소설가 아줌마한테 대학생들은 ‘고기굽고 노는 모습’을 교수한테 들키면 꾸중을 듣는다며 찍지 말아 달라고 했답니다. ‘사진은 안 돼’가 아닌 ‘꾸중들을까 봐 손사래’는 사뭇 다르겠지요.


  북녘마실을 다룬 책을 읽고 나서 생각합니다. 북녘 소설가 한 사람이 남녘하고 일본을 마실하고서 꾸밈없이 글을 쓸 수 있기를, 또 이러한 글을 덜거나 빼지 않으면서 북녘에서 책으로 나와서 읽힐 수 있기를, 수수한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서로 만나거나 어우러지는 이야기가 남녘·북녘·일본 모두에서 찬찬히 피어날 수 있기를, 꿈꾸어 봅니다.


(숲노래/최종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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