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걸음 읽기
둘레에서 저한테 으레 하는 말 가운데 하나는 “제발 남보다 한 걸음 앞서 가려 하지 말고, 반 걸음만 앞서 가라”입니다. 이 말이 때로는 옳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만 이 말은 제 삶하고는 안 맞습니다. 저는 반만 살다 죽을 수 없고, 제가 할 일을 반만 하고 끝낼 수 없습니다. 둘레에서 저를 잘 모를 뿐인데, 저는 무척 오랫동안, 거의 마흔 해를 ‘반걸음질’로 살았습니다. ‘온걸음질’이 아닌 반걸음질을 말이지요. 반걸음질은 어떤 삶이었을까요? 말 그대로 반토막 삶입니다. 반만 산 셈입니다. 생각해 봐요. 말을 할 적에도 ‘온말’을 할 노릇이지, ‘반말’을 하면 어떤가요? 책을 애써 샀는데 반만 읽어도 좋은가요? 책을 반토막만 살 수 있나요? 책을 샀으면 오롯이 읽을 노릇 아닌가요? 책을 온것으로 살 일이겠지요? 글쓰기에서도 똑같아요. 둘레에서 저러더 “제발 반 걸음만 앞서 가서 글을 쓰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주례사 비평을 하란 소리입니다. 좋은 얘기 반만 하고, 궂은 얘기 반은 굳이 하지 말랍니다. 그런데 이렇게 반토막 글쓰기, 이른바 주례사 비평을 하면 누구한테 뭐가 좋을까요? 글이나 책에 궂은 줄거리가 있도록 쓴 사람한테도, 이웃님(독자)한테도 좋을 일이 하나 없어요. ‘반토막’ 노래를 부르는 이들은 그 반토막을 제가 따라주면 다시 반토막을 더 말합니다. 그 반토막을 할 수 있으니 다시 뒤로 더 물러나라 하지요. 이러다 보면 어떻게 되나요? 바로 제자리로 돌아갑니다. 제자리걸음이에요. 반걸음만 앞서 가면서 사람들한테 맞추어야 좋다고 말하는 분은 언제나 제자리걸음에서 멈추거나 때로는 뒷걸음질까지 된다고 느낍니다. 우리는 ‘온걸음’을 떼어야 합니다. 온걸음으로 한 걸음씩 나아갈 노릇입니다. 한 걸음씩 걸어야 비로소 앞이 트입니다. 사람들한테 맞출 노릇이 아니라, 사람들이 바라볼 앞길을, 빛줄기를, 새삶을, 노래를, 사랑을 즐겁게 나아갈 노릇입니다. 하나 더 헤아린다면, 아픈 사람더라 “반만 나으십시오” 하고 말하면 어떨는지 생각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롯이 나아야지 반만 나을 수 없습니다. 반걸음만 나을 수 없어요. 온걸음으로 다 나아야 합니다. 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책 언저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