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벌레 수다
제가 서너 살 아이일 적에 어떻게 놀았는지 가만히 돌아보았습니다. 그무렵 저는 온갖 짓을 다 하며 놀았구나 싶고, 우리 어머니는 너그러이 모든 놀이를 받아들여 주었지 싶습니다. 언제나 포근하다고 느끼며 놀았고, 이때에 즐긴 놀이 가운데 ‘벌레 되기’가 있습니다. 숲에 깃들어 가랑잎하고 죽은 가지가 널브러져 보이는, 그러니까 사람 눈으로는 이렇게 보이는 숲바닥에 납작 엎드렸습니다. 서너 살 제 모습은 어디이건 가리지 않고 납작 엎드려서 ‘벌레가 되어’ 벌레 눈으로 보고 벌레 더듬이로 느끼며 벌레 다리로 기면서 벌레 입으로 맛보며 놀았거든요. 다음부터는 제가 벌레가 되었을 무렵 벌레가 들려준 이야기입니다.
너희(사람)는 우리(풀벌레)를 몰라도 너무 몰라
1. 우리(벌레)한테 말하는 입(발성기관)이 없다고? 모르는 소리 하지 마. 우리(벌레)한테는 말하는 입이 있을 까닭이 없어. 더듬이가 왜 있니? 더듬이로 말하지. 이 더듬이를 쓰면 아무리 멀리 있어도 서로 말을 나눌 수 있어. 너희(사람)처럼 입으로 소리란 걸 내야 하지 않아.
2. 너희가 우리하고 말을 나누고 싶다면 입을 다물어. 우리가 되어 함께 기어다녀. 그리고 눈으로 보려 하지 말고 몸으로 봐. 온몸으로 보고 기고 듣고 느끼면 우리하고 말할 수 있어.
3. 너희는 왜 우리가 너희 몸을 타고 오르거나 기어서 오르는지 궁금하지? 너희가 풀밭이나 숲에 우뚝 서거나 앉으면, 너희 몸뚱이를 나무처럼 여겨. 그런데 나무가 무언지 아니? 너희가 나무로 여기는 것은 우리한테는 나무가 아니라 집이야. 너희가 나무로 여기는 것은 우리한테 집이면서 먹이 곳간이야. 언제까지나 마르지 않는 먹이가 샘솟는 곳간이면서 우리를 아늑하게 지킬 터를 지을 수 있는 집이지. 그래서 너희 몸이라고 하는 곳을 기어다니면서 먹이를 찾고 집을 지을 만한 데를 찾지. 너희가 산 목숨이니까 너희 몸에 집을 짓지는 못하지만, 너희가 죽은 목숨이라면 얼마든지 너희 몸에 집을 지어. 그리고 너희 몸을 집이자 먹이 곳간으로 삼아서 다 쓰면 너희 몸은 흙으로 돌아가.
4. 제발 너희 눈으로 우리를 따지거나 재려고 하지 마. 너희가 풀싹이나 새싹이라고 일컫는 것이 바로 우리한테 나무야. 우리는 한 해를 살면서 풀싹이나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는 모습을 보며 기뻐하지. 풀싹이나 새싹이 무럭무럭 자라듯 우리도 꾸준히 허물벗이를 하면서 자라. 자라는 기쁨을 느끼고 배우는 것이 나무이기에, 우리한테 나무는 바로 풀싹하고 새싹이야.
5. 너희가 우리처럼 되면, 너희가 우리처럼 놀면, 우리는 너희 몸을 타고 오르거나 기어서 다닐 엄두를 안 내. 왜냐고? 그때에는 너희가 우리를 잡아먹을는지 모르잖아! 너희처럼 커다란 몸뚱이인 벌레가 숲을 돌아다닌다고 생각해 봐! 얼마나 무서운데! 그렇지만 너희가 우리를 잡아먹지 않고 얌전히 우리를 지켜보거나 살펴본다면 너희가 어떤 벌레인가를 살피려고 살짝살짝 다가설 수 있어. 그러나 너희(벌레가 된 사람)가 언제 우리를 잡아먹을는지 모르니 늘 살금살금 다가설 뿐이지.
6. 네가 개구리가 된다면 모기는 너를 물 수 없어. 생각해 봐. 모기가 개구리한테 다가가면 어떻게 되겠니? 숲에서 모기가 싫다면 개구리처럼 굴어. 그러면 돼.
7. 하나 덧붙인다면, 우리가 너희 몸에서 기어다니는 길은 너희 몸에서 긁어 줄 만한 곳이야. 우리는 우리 먹이를 찾으려고 너희가 나무라고 이르는 것을 기어다니는데, 이렇게 기어다니면서 나무라고 하는, 우리한테는 집이자 먹이 곳간인 것에서 아픈 데를 콕콕 쑤시거나 파헤치지. 그러면 우리한테 맛난 밥이 흘러. 너희 몸을 깨물면 우리한테 좋은 밥(독소나 찌꺼기)이 나오고, 그러면 너희한테도 이바지를 하겠지.
8. 더 하고 싶은 말은 많지만, 네가 가야 한다니 이만 줄일게.
(숲노래/최종규 . 보고 들은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