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영화의 길 - 나의 삶 나의 영화 일제강점기 새로읽기 1
나운규 지음 / 가갸날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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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349


어릴 적 들은 구슬픈 아리랑을 영화로 담다
― 조선 영화의 길
 나운규
 가갸날, 2018.4.20.


돈으로 꾸며놓는 화려한 작품은 만들기 어려워도, 단 두 사람이 출연하고 오막살이 세트 하나라도, 실력만 있으면 사람의 가슴을 찔러줄 작품은 만들 수 있다. (15쪽)


  《조선 영화의 길》(나운규, 가갸날, 2018)을 읽습니다. 영화감독 나운규 님이 남긴 글로 엮은 책으로는 《춘사 나운규 전집》(집문당, 2001)이 있습니다. 2001년에 나온 책은 500쪽 가까운 두께로 나운규 님 삶을 두루 밝히려 했다면, 2018년에 나온 책은 176쪽 두께로 나운규 님 넋을 찬찬히 살피도록 이끈다고 할 만합니다. 누구나 이름은 익히 들어 보았어도 정작 목소리로는 알지 못하는 영화감독 숨결을 느끼도록 북돋우려는 《조선 영화의 길》이라고도 할 수 있어요.


“아즈바니, 도사부 잘 드능구마.” 이렇게 써놓으면 타지방 사람은 못 알아보는 모양이다. “아저씨 거짓말 잘하시네.”로 알아들을 사람이 없는 모양이다. 그래서 어느 지방 사람들이나 알아듣도록 고치려고 해 봤으나, 그것도 절름발이가 되는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중앙언으로 해버렸는데, 이렇게 해놓고 보니 지방색이라고는 아주 아니 난다. (28쪽)


  함경도에서 나고 자란 나운규 님한테는 함경말이 텃말이면서 엄마말입니다. 함경도를 터전으로 영화를 찍을 적에 ‘함경말을 쓰고’ 싶었다지만, 막상 함경말하고 서울말(중앙언)이 매우 다를 뿐 아니라, 다른 고장에서 쓰는 말하고도 달라, 영화로 들려주려는 줄거리를 못 읽을 수 있으리라 느꼈대요. 어쩔 수 없이 서울말을 쓰도록 했지만 아주 섭섭했다고 합니다.

  오늘날이라면 영화에서는 함경말을 고스란히 쓰되, 글씨를 서울말로 넣을 수 있습니다. 제주사람 삶자리를 담은 영화를 보면 이렇게 하기도 합니다. 더 헤아린다면, 고장마다 다른 사람들이 고장마다 다른 말을 넉넉히 쓰도록 북돋우면서, 영화에 글씨를 붙여 서울말로 알려주어도 됩니다.

  영화감독 나운규 님이 나중에 글로 밝혀 놓기도 했습니다만, 함경도를 터전으로 찍는데 함경말 아닌 서울말을 쓰면 어쩐지 맛이 없겠지요. 말이란 살림살이가 그대로 드러나는 목소리이거든요.


그는 옛날에는 환영을 받았다. 그렇지만 옛날의 환영이란 얼굴에 대한 환영이 대부분이었다. 인격이나 배우로서의 기량에 대한 환영이 아니었다. (33쪽)

지금 와서 탄식만 한다면 그런 낡은 썩은 옛이야기를 들추어낼 필요가 없다. 머리를 깎고 양복을 입은 것만이 개화가 아니다. 역사란 언제든지 움직인다. (43쪽)

그 사람의 신분이 기생이라고 하자. 그러나 막이 열리고 무대에 나온 이상 한 사람의 배우다. (108쪽)


  오늘 우리는 영화감독 나운규 님한테 어떤 마음으로 영화를 찍었느냐고 물을 수 없습니다. 배우는 어떤 눈길이나 잣대로 뽑는지, 배우한테 무엇을 바라는지, 배우는 연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지, 이런 여러 가지도 물을 수 없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영화를 찍으며 얼마나 고단했는지, 일제강점기에 굳이 영화를 찍으려 한 마음은 무엇인지, 일제강점기라는 그때에 어떤 영화를 어떻게 찍어서 이 나라 사람들한테 보여주고 싶었는지, 이런 궁금한 대목도 물을 수 없어요.

  그러나 나운규 님이 드문드문 남긴 글을 한자리에 그러모으니, 어렴풋하지만, 아쉽지만, 더 살펴볼 수는 없지만, 무척 고맙게 마음으로 묻고 마음으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구나 싶어요. 짤막하게 스치는 듯한 한두 줄에서 떠난 영화감독 한 사람 목소리를 어림해 봅니다. 참말로 짤막한 한두 줄을 되읽고 또 읽고 거듭 읽으면서, ‘식민지 조선에서 영화감독이라는 길을 걷기’란 이와 같구나 하고 새삼스레 느낄 수 있어요.


나는 국경 회령이 내 고향인 만치, 내가 어린 소학생 때에 청진서 회령까지 철도를 놓기 시작하였는데, 그때 남쪽에서 오는 노동자들이 철로 길뚝을 닦으면서 ‘아리랑 아리랑’ 하고 구슬픈 노래를 부르더군요. 그것이 어쩐지 가슴에 충동을 주어서 길 가다가도 그 노래가 들리면 걸음을 멈추고 한참 들었어요. 그러고는 애연하고 아름답게 넘어가는 그 멜로디를 혼자 외워 보았답니다. (148쪽)


  나운규 님은 퍽 젊은 나이에 이슬이 되었다고 합니다. 애써 찍은 영화는 툭하면 가위질이요, 가위질되어 줄거리 앞뒤가 끊어지니 다시 찍느라 돈은 돈대로 들고 품은 품대로 들며 마음앓이는 마음앓이대로 해야 하니 언제나 머리가 지끈거렸대요.

  일본 제국주의는 영화감독 한 사람을 총칼을 휘둘러 죽이지 않았습니다. 영화감독 한 사람은 식민지살이를 하며 영화를 제대로 찍기가 너무 벅차면서 괴로워 그만 갑자기 숨을 거두었대요.

  국경에 있던 회령에서 나고 자라며, 그곳으로 일하러 고향을 떠나 멀리 온 한겨레붙이가 구슬프게 부른 아리랑을 가만히 따라하고 외웠던 작은 아이는, 구슬픈 노랫가락 아리랑을 잊지 않았대요. 이 작은 아이는 어른이 되었고, 어느새 영화감독이란 자리에 서면서, 어릴 적부터 가슴에 고이 담은 구슬픈 노랫가락을 손수 갈무리하고 노랫말을 새로 입혀서 영화에 담았대요.

  애틋하면서 아련하게 부르던 구슬픈 가락에 사람들 눈시울이 젖습니다. 일제강점기에도 해방 뒤에도 전쟁 뒤에도 군사독재 뒤에도, 앞으로 새로 지을 참다운 민주와 평등과 평화가 드리울 나날 뒤에도, 아리랑은 사람들 가슴을 촉촉히 적시는 아름다운 노랫가락으로 흐르겠지요. 2018.5.9.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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