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임하의 여성사 특강 - 여성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0대를 위한 인문학 특강 시리즈 3
이임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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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207


하루도 안 쉬고 일한 사람들
―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
 이임하
 철수와영희, 2018.4.25.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남성 혐오 표현이 월평균 1∼2회인 데 반해 여성 혐오 표현은 월평균 600∼3000여 회였답니다. 2015년에는 여성 혐오 표현이 월평균 8만 회에 이를 정도로 늘었습니다. (14쪽)

(1930년대에) 왜 사회는 신여성을 이토록 조롱하고 비난했을까요? 이러한 시선은 이전과 다르게 살아가는 신여성들에 대한 두려움과 경고의 표현입니다. (22쪽)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이임하, 철수와영희, 2018)은 참다운 평등으로 가는 길에 ‘여성 혐오’라는 덫을 자꾸 깔아 놓는 바보스러운 짓을 멈추자고 하는 이야기로 글머리를 엽니다. ‘여성 혐오’를 누가 할까요? 바로 성차별로 가부장 권력을 누리는 이들이 하겠지요.

  참다운 사랑으로 민주·평등·평화를 어릴 적부터 배우지 못한 삶이기에 성차별뿐 아니라 ‘여성 혐오’가 불거진다고 느껴요. 우리가 슬기로우면서 참답게 사랑살림을 지을 줄 안다면, 이제 ‘함께 짓는 보금자리 살림길’을 바라볼 수 있으리라 느껴요.

  여자는 노리개일 수 없습니다. 여자는 심부름꾼일 수 없습니다. 여자는 집안에 갇혀 부엌데기나 애보개로 한삶을 마칠 수 없습니다. 뒤집어 생각해도 마찬가지예요. 여자뿐 아니라 남자도 노리개나 심부름꾼이나 부엌데기나 애보개로 살 까닭이 없습니다. 서로 돕고 아끼면서 함께 가꿀 살림이라고 여깁니다.

  ‘가정주부·주부’ 같은 이름은 성차별을 고스란히 담는다고 느낍니다. 이 이름은 오직 여자를 가리킬 적에만 쓰거든요. 이런 이름이 낡은 줄 느끼면서 새 이름을 남녀 누구한테나 붙일 수 있을 때에, 바로 작은 집부터 평등하고 평화하고 민주를 이룰 만하지 싶어요. 오랜 한국말 ‘살림꾼’처럼, 사내도 가시내도 모두 살림을 넉넉하며 즐겁게 지을 줄 알아야지 싶습니다. 아이도 어버이 곁에서 ‘살림이’가 되고, 집집마다 ‘살림님’이 사랑스레 보금자리를 돌볼 줄 알아야지 싶어요.


신라는 골품제 때문에 더는 발전하지 못한 데다가 진골 귀족들이 서로 왕이 되겠다고 싸우는 바람에 나라가 어려워졌습니다. 그런데도 후대 사람들은 진성여왕 때문에 신라가 망했다는 이야기를 만들어냈습니다. (55쪽)

7세기의 동아시아 삼국을 통치했던 여왕(황)들은 비슷한 통치술을 통해 많은 업적을 남겼습니다. 이들 통치술의 특징은 새로운 인재 등용, 불교·도교·무속 신앙을 포용한 문화 정책과 다각적인 외교 정책의 시행, 경제의 활성화 등입니다. (69쪽)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은 책이름처럼 여성사를 다룹니다. 그리고 이 여성사를 남성 학자가 밝혀서 적는 틀이 아닌, 여성이 걸어온 길에 맞추어 바라보려고 합니다. 남성 학자가 신라 임금(여왕 아닌 임금) 가운데 진성 임금을 깎아내리려 하는 속내를 살핍니다. 신라를 비롯해 이웃 임금이 여성이던 무렵 여러 나라가 얼마나 넉넉하고 알차고 아름다웠는가를 역사로 짚으면서 이야기합니다.

  이 대목에서 오늘날 삶터를 바라보면 좋겠어요. 여성 참정권을 늘리려는 뜻은 그저 성평등 때문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숱한 남성 정치꾼은 인맥이나 학맥 같은 끈에 얽매여 참답거나 착한 정치길을 못 걷기 일쑤였어요. 얄궂고 엉성한 정치와 사회를 바르게 세우자면 ‘일하는 여성’이 정치에 함께하도록 권리를 늘리는 길을 널리 펼 수 있어야 한다고 여길 만합니다.


신사임당과 허난설헌은 부모님이 지어준 이름보다 자신들이 닮고 싶은 대상을 골라서 사용할 정도로 자의식이 강한 여성이었습니다. (73쪽)

조선시대에는 내외법에 따라 여성은 장옷, 쓰개치마, 천의, 삿갓 따위로 얼굴을 가렸지만 개화기 여성들은 장옷의 불편함을 내세워 장옷 벗기 운동을 했습니다. (154쪽)


  하루도 안 쉬고 일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여성입니다. 남성도 하루조차 안 쉬고 일만 했다고요? 아니에요. 여성하고 남성이 똑같이 바깥일을 하고 집에 들어와도 밥짓기 살림하기는 고스란히 여성이 도맡아야 했어요. 젖먹이 아기는 누가 도맡아서 돌보았을까요? 아기가 자라 어린이로 꿈을 키우는 동안 아버지는 무엇을 했을까요? 아기가 자다가 기저귀에 쉬를 하면 누가 일어나서 기저귀를 갈고, 이 기저귀를 빨아서 널까요?

  《이임하의 여성사 특강》은 우리 삶터가 걸어온 발자취를 짚으면서 ‘여성한테 시킨 일’이 무엇이었나 하고 돌아봅니다. 왜 여성한테 커피 타기를 시킬까요? 왜 버스안내원을 갑자기 여성으로 바꾸었을까요?

  그리고 조선 무렵에 왜 여성한테 장옷이며 쓰개치마를 씌웠을까요? 마치 ‘차도르’처럼 여성 얼굴을 가려야 할 까닭을 생각해 보자고 우리한테 묻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여성사를 제대로 바라보자고 묻습니다.


(1961년에) 버스안내원을 여성으로 바꾼 것은 ‘상냥하고 친절함’이 요구되는 서비스업이나 단순 작업에는 여성이, 숙련과 강한 힘이 필요한 작업에는 남성이 알맞다는 논리가 적용되었기 때문입니다. 성에 따라 역할이 달라야 한다는 논리로 여성과 남성이 해야 할 일을 구분했던 것이지요. (199쪽)

노동은 인류를 유지시킨 중요한 삶의 동기이자 고리입니다. 여성은 단 한 번도 노동의 역사에서 벗어난 때가 없었고 지금의 역사를 일구어 왔습니다. (192쪽)


  가만히 보면 지구별 뭇가시내는 ‘하루도 안 쉬고’가 아닌 ‘눈을 붙일 틈마저 없이’ 일하면서 살아왔습니다. ‘눈을 붙일 틈마저 없이’ 일한 사람인 여성이 있었기에 우리 삶터를 가꾸거나 지킬 수 있었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역사를 ‘가부장 남성 역사’ 아닌 ‘늘 일하면서 수수하게 살림을 지은 여성 역사’로 바라볼 수 있다면, 이제부터 새롭게 역사를 살필 수 있다면, 평등뿐 아니라 평화하고 민주도 멀리 있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싸워야 하는 사람이 있다면 평화롭지 않습니다. 싸우지 않고는 살 수 없는 사람이 있다면 평등을 이루지 못합니다. 다만, 권력을 잃지 않으려는 싸움은 부질없어요.

  이제 사내들이 눈을 뜨고 마음을 열기를 바라요. 바늘하고 실을 손에 쥐어 봐요. 손수 옷을 짓거나 손질해 봐요. 빨래비누를 쥐어 걸레를 빨아서 집안을 훔쳐 봐요. 도마질을 하며 콧노래를 부르고, 김치를 담그면서 춤을 춰 봐요. 아이들을 학원에 그만 내몰고, 집에서 아이들하고 함께 배우고 놀고 생각하고 꿈꾸고 책도 읽고 영화도 나란히 보면서 이야기꽃을 피워요.

  앞으로는 함께 일하고 함께 쉴 수 있기를 바라요. 앞으로는 즐겁게 어깨동무하면서 참다운 평등, 슬기로운 민주, 사랑스러운 평화를 우리 보금자리부터 가꾸어 온누리에 고루 퍼지도록 마음을 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도 여성들이 커피를 타거나 책상 닦는 일 따위를 하기는 하지만 이제는 부당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아졌고, 아예 그런 일을 하지 않는 직장도 많습니다. 이런 흐름은 어느 날 갑자기 이루어진 것은 아닙니다. 사무직 여성 노동자들의 눈물겨운 싸움이 있었지요. (188쪽)


  여성사는 ‘여성만 높이는 역사’가 아닙니다. 여성사는 여성하고 남성이 같이 읽으면서 새롭게 배울 옛 발자취입니다. 어제를 살아온 여성사를 다 같이 어깨동무하면서 읽기에, 앞으로 살아갈 길에 참하고 착하며 아름다운 걸음걸이로 피어날 수 있지 싶습니다.

  여성 사무직 노동자가 힘겨이 벌인 싸움은 여성 사무직 노동자한테만 이바지하지 않았어요. 모든 사무직 노동자한테, 또 모든 노동자한테 이바지합니다. 여성사란 ‘평등하지 못한 삶터가 평등을 바라보며 걸어온 길’을 보여주는 이야기이면서, 슬기롭게 삶을 짓는 길을 배우도록 북돋우지 싶습니다. 새롭게 태어날 한국사를 어린이하고 푸름이가 제대로 배울 수 있기를 빕니다. 2018.5.4.쇠.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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