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 속 영웅들을 만나볼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습니다. 잘 몰랐던 영웅들의 이야기를 많이 알게 되어서 좋았습니다. 장보고, 충무공 이순신, 사명대사, 제주 기생 김만덕, 안중근, 홍범도, 이봉창, 북촌을 만든 민족사업가 정세권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백미는 역시 이순신 장군님입니다.
한산대첩은 단순한 해상전이 아니었습니다. 넓은 바다에서 학익진을 펼칠 정도로 조선 수군이 잘 훈련되어 있었다는 증거이자 기동전술과 포격술이 어우러진 승리였어요. 해상에서 포위섬멸전을 이 정도로 정교하게 선보인 전투는 세계 해전사에서도 드물기 때문에 전 세계에서 손꼽힐 만한 해전입니다. -p57
한산대첩은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입니다. 이 전투로 이순신은 바다를 장악했습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일본군에 해전 금지 명령을 내립니다.
그렇다면 선조와 이순신의 사이를 완전히 갈라놓은 고니시의 정보는 진실이었을까요? 아니나 다를까, 눈엣가시인 이순신을 제거하려는 일본의 함정이었습니다. -p61
일본군을 이끄는 장수는 고니시와 가토 였습니다. 둘은 앙숙 관계로 유명했습니다. 고니시는 조선의 조정에 첩보를 보냅니다. 가토를 제거하는 데 도와주겠다는 것입니다. 선조는 이에 넘어가 이순신에게 가토를 치라고 명령하지만 이순신은 이 정보를 믿지 않았습니다. 출진하면 적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고 출진하지 않으면 왕명을 어기는 상황. 일본의 계략에 말려들었습니다.
역사를 보면 이런 이간계를 쓰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길 수 없는 장수를 상대할 때 그 장수를 모함하여 실각시키는 것이지요. 어리석은 왕은 이 꾀에 넘어갑니다. 현명한 왕은 자신의 신하를 믿고요.
"1597년 4월 1일. 맑음. 옥문 밖으로 나왔다." <난중일기> -p63
이순신은 결국 투옥되어 28일간 고문을 받다 풀려납니다. <난중일기>를 읽어보고 싶습니다. 조금 읽었던 거 같긴 한데. 담백한 이순신 장군의 문체가 멋집니다.
"1597년 4월 11일. 새벽꿈이 매우 번거로워 마음이 불안하다."
"1597년 4월 13일. 종 순화가 배에서 와서 어머님의 부고를 전한다. 가슴이 미어지는 슬픔이야 이루 다 어찌 적으랴."
<난중일기> -p65
1597년은 이순신 장군에게 최악의 해였습니다. 여든셋의 노모가 옥에 갇힌 아들을 만나기 위해 여수에서 한양으로 오던 중 돌아가신 것입니다.
"1597년 4월 19일.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간에 나와 같은 사정이 또 있으랴. 어서 죽는 것만 같지 못하구나." -p68
이순신은 백의종군 중인 죄인이기에 장례조차 제대로 치르지 못했습니다. 함께 이동하는 의금부 관리에게 간절히 애원하고서야 겨우 상복을 입고 어머니의 영전에 인사만 올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 신에게는 아직도 열두 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죽을힘을 다해 항거해 싸운다면 오히려 해볼 만합니다. 전선의 수는 비록 적지만 신이 죽지 않은 한 적은 감히 우리를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이충무공전서> 9권, <행록> -p73
12척으로 300여 척을 막아야 하는 상황에서도 이순신은 결코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아니 물러설 수 없었습니다. 바다를 포기하면 조선 전체가 일본의 손에 넘어가기 때문입니다. 이순신은 죽기를 각오하였습니다.
고문당한 몸으로 행한 백의종군, 하늘 같았던 어머니의 죽음, 생사를 함께한 병사들의 궤멸, 죽음을 각오하고 싸운 명량해전, 그리고 아들의 죽음까지. 1597년 한 해 동안 벌어진 이 모든 걸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일까요? 이날 일기에 따르면 이순신은 코피를 한되 남짓 흘리고, 식은땀을 흘리며 몸이 상한 모습을 보였습니다. -p81
같은 해 어머니에 이어 아들까지 잃었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몸과 마음의 고통을 헤아릴 수 없습니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는 언제 들어도 너무 재밌습니다. 이번에는 이순신 장군의 아픔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살생을 금하는 불교 승려였지만 사명대사는 나라가 위기에 빠졌을 때 백성들을 위해 전장을 누볐습니다. 조선의 최대 국난인 임진왜란은 유명한 장군의 활약뿐 아니라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수많은 조선인이 온몸으로 막아낸 전쟁이었어요. -p127
사명대사에 대해 몰랐는데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습니다. 승려들이 어떤 연유에서 창을 들었는지 알 수 있었습니다. 개인의 신념보다도 눈 앞에 닥친 백성들을 구하기 위해 창을 들었던 것이겠지요.
제주에선 남자들이 바다로 뱃일을 나갔다가 죽는 일이 많았습니다. -p139
제주가 삼다도로 유명한 이유는 남자들이 뱃일을 나갔다가 많이 죽었기 때문입니다. 김만덕의 아버지도 바다에서 숨을 거뒀습니다.
김만덕은 쌀을 사들이면서 굉장한 통찰력을 발휘했어요. 쌀값이 싼 가을에는 쌀을 잔뜩 사들여서 점포 창고에 저장해 두었다가 쌀이 귀한 봄에 비싼 값으로 팔았습니다. -p141
김만덕은 똑똑했습니다. 기생으로도 성공하고 장사를 시작해서도 큰 성공을 거뒀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번 돈을 어려운 이들을 위해 썼습니다. 이렇게 훌륭한 사람의 이야기를 모르고 있었습니다. 교과서에서 꼭 다뤄야할 인물입니다. 혹시 기생 신분이라 그녀의 이야기를 다루지 않는 걸까요?
조선 시대 척박한 제주에서 태어나, 기생으로 살아야 했던 김만덕은 천민이라는 신분의 굴레에 묶이지 않고 삶을 개척해나간 용기 있는 인물이었어요. 또 인생을 바쳐 번 돈을 기꺼이 어려운 이들을 위해 쓰며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큰사람이었지요. 우리는 김만덕처럼 스스로 한계를 뛰어넘으며 시대를 앞서간 용기있는 인물을 기꺼이 영웅이라고 부르곤 합니다. -p156
우리 민족사에 기록된 비극적인 사건, '간도참변' 입니다. -p233
홍범도 장군의 활약으로 봉오동 전투, 청산리 전투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에 일본군은 간도의 민간인 수천 명을 학살했습니다.
폭탄이 터진 직후, 폭탄을 터뜨린 인물을 잡기 위해 경찰이 몰려왔습니다. 그런데 일본 경찰은 이봉창이 아닌 다른 남자를 체포하는 것 아니겠어요? 이봉창 뒤에 있는 사람이 범인이라 착각한 것입니다. 이때 이봉창은 빠져나갈 기회를 버리고 "그 사람이 아니라 나다!" 라고 외치며 자신이 범인임을 밝힙니다. 남에게 죄를 씌우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스스로 나선 것입니다. 이봉창은 침착하게 말합니다.
"도망가지 않을 테니 난폭하게 굴지 말라."
이봉창은 오히려 우왕좌왕하는 일본 경찰들을 진정시키고 당당히 체포됩니다. -p275
이봉창의 거사는 실패해서 그런지 이름이 살짝 낯섭니다. 수류탄으로 일왕을 제거하려 했지만 실패했습니다. 이봉창은 빠져나갈 수 있었지만 당당하고 침착하게 체포되었습니다. 이미 거사 전부터 죽음을 각오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높은 도덕성 때문일까요?
지금의 북촌 한옥마을을 만든 사업가이자 민족운동가인 정세권씨의 이야기도 흥미로웠습니다.
요즘 한국사가 참 재밌습니다. <벌거벗은 한국사> 시리즈를 계속 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