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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일상의 성정치학, 개정판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3년 2월
평점 :
품절
페미니즘, 페미니즘, 용어만 많이 접해봤지 그 실체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다. 페미니즘 하면 왠지 꺼려지고, 혼날까봐 두려운 느낌? 그리고 먼가 꼬치꼬치 따질 것 같은 불편함. 특히나 언어사용에 대해서 딴지를 걸 것 같은 느낌이 강했다.
이 책을 통해서 처음으로 페미니즘에 대해 제대로 알게 되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잘못된 인식이나 편견을 많이 수정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가장 두려운 것은 무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어디에서 읽었는지는 기억나진 않지만, 우리는 무지에 의한 잘못은 괜찮다고 쉽게 생각한다. 나또한 그랬다. '몰랐으니깐 뭐. 이해해 주겠지.' 하지만, 무지에 의한 잘못은 알고 하는 잘못보다 더욱 나쁘다. 왜냐하면 잘못을 알면서 저지를 때는 그래도 한계선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누구나 양심이 있고, 어느정도 도덕심이 있으니깐 일정한 한계를 넘지는 않는다. 하지만 무지에 의한 잘못에는 한계라는 것이 없다. 무차별적이고 폭력적이 될 수 있다. 아무렇게나 한 말이 다른 사람에게는 큰 상처가 될 수 있다. 무심코 던진 돌에 개구리 맞아죽는다고 하지 않았는가. 무지에 의한 잘못은 때문에 더욱 나쁠 수 있다. 이때의 무지는 용서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지는 죄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여성해방운동이 아니다. 페미니즘은 대화와 이해의 가치관이다. 인식의 확장이다. 우리의 사회는 아주 오랜기간 가부장적 사회였고, 남성중심사회였다. 지금도 아직 많은 부분에서 그러하다. 언어도 비장애인남성중심 언어이다. 여성과 장애인은 언어에서 배제된다. 언어에서 차별이 존재하면 인식에서도 차별이 존재하게 된다. 언어는 단순한 기호가 아니다. 사고관 자체이다. 그 사람이 쓰는 언어를 들으면 그 사람의 사고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는 언어에 의해 사고가 좌우된다. 페미니즘은 단순히 언어사용에만 그치지 않는다. 모든 것에 대한 페러다임의 전환을 요구한다. 차별을 거부한다. 서로 다른 사람, 다른 가치관에 대한 대화와 이해를 요구한다. 서구 남성 중심의 이분법적 사고에서 벗어나서 대화와 이해를 전제로한 사고로 전환을 요구한다.
이분법적 사고관에는 폭력이 존재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 장애인과 비장애인 등 차이에 대해 차별을 강요하게 된다. 차이에 가치판단을 내리는 순간 폭력이 발생한다. 페미니즘은 그것을 경계하는 가치관이다. 차이는 인정하되 차별은 인정하지 않는다.
정희진씨는 페미니즘의 가치관으로 사회현상, 사회문제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다. 그녀의 글은 무겁고 어렵다. <정희진처럼 읽기>를 힘겹지만 재미있게 읽어서 이 책도 읽게 되었다. 역시나 정희진씨의 글은 어려웠다. 용어 자체도 낯설고 전문적, 학술적 용어가 많이 쓰이고 그리고 문법이나 문장구조 자체도 일상의 언어와는 조금 다르다. 때문에 그녀의 글을 읽기 위해서 정신을 집중했지만 가독성은 떨어지고 이해가 안되는 문장들에 부딪치게 된다.
힘들었지만 그래도 재미있고 무엇보다 유익했다. 몰랐던 부분들과 간과했던 부분들에 대해서 알게 되서 좋았고, 앞으로 언어사용이나 인식, 행동에 대해서도 조심해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페미니즘에 대해 새롭고 좋은 점들을 알게 되어서 좋았다.
서구 백인 남성 중심의 사고는 낡았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현실을 파악하기에도, 변화시키기에도 불가능한 체계이다. 기존의 모든 국가, 공동체, 종교 등 정치적 행위자의 갈등은, 정확히 말하면 남성들 간의 갈등을 의미한다. 바꿔 말하면, 이제 더이상 남성의 시각으로는 성차별 문제는 물론이고, 빈부 격차, 환경 파괴, 폭력, 인종 증오, 근본주의 같은 인류가 직면한 고통을 해결하기 어렵다는 뜻이다. 남성 중심 사고의 기본 구조는, 세상을 인식자를 중심으로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이분법이다. 이분법 사유에서는 독자적이고 자율적인 타자를 허용하지 않는다. 모든 타자성은 동일성의 틀 안에서 만들어지고, 우월한 것만이 자율적으로 기능한다. 2, 3, 4를 허용하지 않는 것이다. (중략) 경계에 선다는 것은 혼란이 아니라 기존의 대립된 시각에서는 만날 수 없는 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상상력과 가능성을 뜻한다. 대립은 서로를 소멸시킬 뿐이다. -p13
인간은 누구나 소수자이며, 어느 누구도 모든 면에서 완벽한 ‘진골’ 일수는 없다. 특히 한국 사회에서는 성별과 계급뿐만 아니라 지역, 학벌, 학력, 외모, 장애, 성적 지향, 나이 등에 따라 누구나 한 가지 이상 차별과 타자성을 경험한다. 중심과 주변의 이분법 속에서 자신을 당연한 주류 혹은 주변으로 동일시하지 말고, 자기 내부의 타자성을 찾아내고 소통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모든 사회운동은 부분 운동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필요한 것은 서로 다른 각자의 처지(차이)를 이해하고 소통하는 연대이지, (남성 중심의) 단결이나 통합이 아니다. 어떻게 전체 운동이 따로 있고, 부분 운동이 따로 있을 수 있는가? 그리고 전체와 부분을 나누는 기준은 누가 정하는가? -p22
그러나 지금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사랑받을 때보다 사랑할 때, 더 행복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운다. 사랑하는 고통으로부터 자신의 크기, 깊이를 깨닫는다.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포함해 모든 대화는 최음제이며, 인생에서 깨달음만 한 오르가슴은 없다. 상처와 고통은 그 쾌락과 배움에 대해 지불하는 당연한 대가이다. 사랑보다 더 진한 배움을 주는 것이 삶에 또 있을까. 사랑받는 사람은 배우지 않기 때문에 수업료를 낼 필요가 없다. 사랑은 대상으로부터 유래-발생하는 에너지가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 내부의 힘이다. 사랑하는 것은 자기 확신, 자기 희열이며, 사랑을 갖고자 하는 권력 의지다. 그래서 사랑 이후에 겪는 고통은 사랑할 때 행복의 일부인 것이다. -p23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구성한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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