찐빵과 글쓰기


 글이 엉망인 책이 많다. 창작이든 번역이든. 글은 엉망이지만 줄거리는 괜찮은 책 또한 많다. 창작이든 번역이든.

 글이 엉망인 번역책을 읽으면서 생각한다. 처음에는 나라밖 말로 되어 있었을 이 책이 얼마나 아름다웠을는지, 또는 어느 만큼 어설펐을는지를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나 스스로 바깥말을 그때그때 새롭게 따로 익혀서 모든 책을 ‘이 책을 내놓은 나라에서 적바림한 말’로 읽지 않고서야 번역책 속내와 말투와 줄거리와 이야기를 옳게 새기기 힘들다고 느낀다. 이 나라에는 번역책이 어마어마하게 쏟아지지만 번역책이 다루어야 할 말이며 글을 옳게 가르치거나 배울 만한 곳이 없을 뿐더러, 번역하는 이들 스스로 말이랑 글을 참다이 가누거나 다스리도록 마음을 찬찬히 기울이지 못하기 일쑤라고 느낀다. 책을 보면 느낀다. 책을 읽으면 깨닫는다.

 한국사람이 한국문학이라는 이름을 내걸어 내놓는 창작책을 읽을 때마다 가슴이 시리다. 줄거리라든지 이야기라든지 글감이라든지 펼침새라든지 아기자기하거나 놀랍거나 훌륭하거나 대단하다 할 만하지만, 정작 이 모두를 이루는 말이나 글은 엉망이기 때문이다. 줄거리는 살피지만 말은 살피지 못하는 한국문학이 몹시 많다. 글감은 찾아나서지만 글은 찾아나서지 못하는 한국문학이 너무 많다.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우고 읍내 장마당에 나온다. 언제나 들르는 찐빵장수한테 찾아가 찐빵 이천 원어치를 산다. 장마당 찐빵장수는 찐빵 여섯에 이천 원을 받는데, 장마당하고 맞닿은 하나로마트에서는 찐빵 여섯에 삼천 원을 받는다.

 찐빵집에서 찐빵을 살 때면 늘 뜨거웠기에 오늘처럼 쌀쌀한 날에는 차가운 아이 손을 녹일 수 있겠거니 생각했는데, 오늘은 웬걸, 찐빵이 미적지근하다. 아니, 좀 차갑다 할 만하다. 익힌 지 얼마 안 되었나. 불을 제대로 안 넣었나. 여느 때에는 늘 맛나게 먹던 아이가 오늘만큼은 맛없다면서 “아빠, 먹어!” 하면서 나한테 내민다. “벼리가 먹어.” 하면 아이가 한 입을 깨문다. 그러나 한 입만 깨물고는 다시 “아빠, 먹어!” 하고 내민다. 하는 수 없이 아빠가 받아서 먹는다.

 장마당 마실을 마치고 아이를 자전거수레에 태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난다. ‘아이야, 넌 네가 읽던 책이 재미없으면 아빠한테 내밀며 아빠가 읽으라고 할 셈이니?’ (4343.11.2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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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달빛과 글쓰기


 새벽 두 시 오십 분, 창문 틈으로 환하게 비치는 달빛에 기대어 아이 기저귀를 갈다. (4343.11.21.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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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쥐와 글쓰기


 세 해 남짓 비어 있던 산골집에 들어왔더니 이 빈 집에서 쥐가 신나게 놀고 있더라. 이들 쥐를 쫓아내고 사람이 들어와서 지낸다. 한 달쯤 지날 무렵 멧쥐가 한 마리 두 마리 다시 들어와 벽 안쪽을 갉으며 돌아다녔고, 이들 멧쥐를 한 마리씩 끈끈이로 잡았다. 첫 멧쥐는 금세 잡혔으나 둘째 멧쥐는 이곳저곳에 구멍을 파며 쉬 잡히지 않다가 끝내 잡혔다. 그러고 한 달 반쯤 멧쥐는 다시 들어오지 않더니 어느새 또다른 멧쥐가 벽으로 기어든다. 이들 멧쥐는 벽에서 새끼까지 깐 듯하다. 구멍을 다 막았는데 어디로 다니나 싶더니, 예전에 팠던 구멍을 막고 다시 막았는데 그 자리를 또 뚫었다. 제 발로 곱게 나가 주기를 빌지만, 바깥보다 따스하며 아늑할 벽 안쪽을 섣불리 버리지는 못한다고 느낀다. 게다가 벽 안쪽뿐 아니라 집안까지 마실을 다니는 모습을 보고는, 이 집이 사람 집인지 쥐 집인지 알 노릇이 없다. 이번에도 하는 수 없이 끈끈이를 놓는다. 서너 마리쯤 있는 듯한 멧쥐 가운데 한 마리가 금세 잡힌다. 끈끈이 하나를 더 놓는다. 다른 쥐들은 잡히려 하지 않는다. 아마, 한 번 붙잡힌 자리로는 좀처럼 안 나올 테지. 다른 데에 몰래 구멍을 팔는지 모르지. 어젯밤 끈끈이로 잡은 쥐는 땅을 파고 묻어 흙으로 돌아가도록 해야 할는지, 쓰레기봉투에 담아 읍내 쓰레기통에 넣어야 할는지 곰곰이 생각한다. (4343.11.2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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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감귤과 글쓰기


 아이가 귤을 하나씩 까서 아빠 입에 넣어 먹인다. 겉껍질은 아빠가 벗겨 주었다. 아이는 열 알 즈음 하나로 뭉쳐 있는 귤을 제 작은 손으로 하나씩 깐 다음 제 입으로 쪽쪽 빨다가 더 빨아먹을 수 없을 때에 아빠 입에 넣기도 하고, 그냥 안 빨아먹고 넣기도 한다. 이러다가 어느 때에 뚝 끊긴다. 모로 누워 책을 읽던 아빠는 아이가 왜 뚝 그쳤는지 모른다. 엄마가 옆에서 부르는 소리를 듣고 일어나 본다. 아이는 오른손에 귤을 들고 입에는 귤 한쪽을 문 채 큰베개에 엎드려 곯아떨어졌다. 이른아침부터 일찌감치 깨어나 낮잠 없이 놀더니 저녁을 먹고 이내 곯아떨어졌구나. 곯아떨어진 채 입을 오물오물거리는 아이를 한동안 바라보다가 살며시 들어 자리에 눕힌다. 기저귀를 채워도 꼼지락거리지 않는다. 아주 깊이 잠들었구나. 한참을 이 모습 그대로 두다가 손에서 귤을 빼내고 입에서 오물거리다가 만 귤을 꺼낸다. 둘 다 아빠가 먹는다. (4343.11.2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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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기와 글쓰기


 인천에서 살다가 또다시 인천을 떠나 산골마을로 거듭 들어가서 지낸다. 인천에서 지낼 때에 늘 글을 쓰다가 또다시 인천을 떠나 산골마을에 들어와서도 글을 쓴다. 이제는 동네마실이 아닌 인천마실이 된다. 인천 골목동네를 찾아가자면 인천나들이가 된다. 혼자서 인천으로 찾아와도 만만하지 않고, 식구들 다 함께 찾아와도 꽤 벅차다. 시골집으로 옮긴 지 얼마나 되었나 싶지만, 시골집에서 지내는 느낌이 하루하루 쌓이면서 도시로 마실을 나올 때마다 몸이 퍽 무겁고 힘들다. 도시로 식구들 함께 나들이를 나왔을 때에는, 시골집에서 하듯 으레 새벽 서너 시쯤이면 홀로 조용히 일어난다. 촛불이든 작은 불이든 켜고 책을 읽거나, 작은 셈틀을 꺼내어 글을 쓴다. 올해에는 모기가 없다고들 하지만 도시로 나들이를 나와 바깥잠을 자는 우리들은 모기한테 시달린다. 책을 읽든 글을 쓰든 하느라 모기장 밖으로 나와서 움직이는 애 아빠는 모기한테 좋은 밥이 된다. 모기들은 살 판이 나고 애 아빠는 죽을 맛이 난다. 그렇다고 더 드러누워 잠들고 싶지는 않고, 더 드러누워 잠들 수 없기도 하다. 조금 더 바지런을 떨어 글줄 하나라도 끄적이며 밥벌이를 삼아야 한다. 그러나, 애써 써대는 글줄이 모두 밥벌이가 되지는 않는다. 입으로는 밥벌이를 하느라 글을 쓴다고 외기는 하나, 글을 쓰는 동안에는 이 글을 내가 내 삶으로 삭여내어 적바림할 이야기 하나로만 여긴다. 정작 따지고 본다면, 밥벌이를 하려고 쓰는 글이 아니라 내 삶을 적바림하고 싶어 쓰는 글이다. 이런저런 글 가운데 다문 한 가지쯤 밥벌이 구실을 할 글이 나올까 말까 할 뿐이다. 살림돈은 바닥을 보이고, 써대는 글은 돈이 되지 않는다. 그래도 따로 살림돈을 벌어들일 일거리를 찾지 않을 뿐더러 찾을 수조차 없다. 집식구를 돌보고 아이하고 복닥여야 하니까. 홀로 느긋하게 살아가며 글을 써대던 지난날을 날마다 그리워 한다. 그렇지만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고, 굳이 예전으로 돌아갈 마음은 없다. 살림과 글쓰기와 아이키우기로 고단하다 못해 모기한테까지 밥을 주어야 하는 몸이지만, 이런 하루하루를 보내며 지난날 내 글을 돌아보노라면 온통 고치거나 손질할 곳투성이라고 느낀다. 날마다 새 글을 몇 꼭지씩 쓰기는 하지만, 예전에 쓴 글을 몇 꼭지씩 고치거나 손질한다. 아마, 앞으로 몇 해쯤 뒤에는 오늘 내가 쓴 글을 또 고치거나 손질해야 할 테지. 그런데 집식구하고 부대끼거나 아이하고 복닥이지 않으며 홀로 살아가던 때에는 내 예전 글을 고친다든지 손질한다든지 하지 않았다. 늘 새 글을 더 많이 쓰느라 몹시 바빴다. 그저 쏟아내기만 하고, 그예 쏟아붓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이렇게 쏟아내고 쏟아부었기에 꽤 많다 할 만큼 자료를 모은 셈인데, 자료는 많아도 잘 갈무리되지 못했다면 나부터 옳게 쓰기 힘들다. 그러니까, 요즈음은 하루에 두어 꼭지 글을 가까스로 일구는 고달픈 나날이라 하지만, 이렇게 가까스로 영글어 놓은 두어 꼭지 글은 앞으로 한동안 더 고치거나 손질할 곳이 그리 안 많을 수 있다. 어쩌면 더 손볼 구석이 없을 수 있겠지. 이제껏 쓴 글은 거의 머리를 써서 글을 일구었다면, 요즈음 쓰는 글은 온몸을 바쳐 글을 영글어 놓으니까. (4343.8.14.처음 씀/4343.11.20.흙.고쳐씀.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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