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자꽃이 필 무렵

 


  도시에서 살아가면 누구라도 봄 여름 가을 겨울 가리지 않고 어느 때라도 감자를 손쉽게 사다 먹을 수 있습니다. 가게에 가면 감자이건 오이이건 양파이건 마늘이건 파이건 무이건 늘 있어요. 시골에서 살더라도 읍내 가게에 이 같은 푸성귀는 언제나 싱그러이 놓입니다. 감자가 싹을 터서 꽃망울 터뜨리려면 유월을 맞이해야 하는데, 감자꽃이 필 무렵인 유월 첫머리에도 가게나 저잣거리에서는 감자를 다룹니다. 감자싹이 막 돋을 무렵인 오월에도 가게이든 저잣거리이든 감자를 내놓습니다. 비닐집에서 감자를 거두기도 하고, 커다란 저온창고에 감자를 가득 쌓고는, 한겨울에도 꺼내어 파니까 감자를 구경할 수 있겠지요.


  바람을 쐬고 햇볕을 먹으며 흙땅에 뿌리를 내린 뒷밭 감자잎을 쓰다듬습니다. 무럭무럭 크렴. 알차게 여물렴. 우리 아이들 맛난 감자를 누릴 수 있게 네 사랑을 듬뿍 담아 주렴. 토막토막 썰어서 묻은 작은 씨감자 알에서 더없이 굵직하고 튼튼한 줄기가 올라 예쁘장하게 꽃망울이 돋는구나. (4345.5.30.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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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없이 마땅하지만, 이 사진책은 여느 새책방에서 살 수 없고, 도서관에도 없습니다)

 

 

 


 전두환 대통령 사진은 ‘돈이 될’까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32] 한국연합광고, 《全斗煥 대통령》(문화공보부,1982)

 


  “‘世界 속의 韓國’을 向한 意志와 獻身”이라 하는 이름이 붙은 사진책 《全斗煥 대통령》은 문화공보부에서 펴냈습니다. 이 사진책에 사진을 넣은 사람들 이름은 따로 나오지 않습니다. 신문사 사진기자가 찍은 사진인지, 문화공보부 사진기자나 공무원이 찍었는지, 청와대 사진기자나 공무원이 찍은 사진인지 알 길이 없습니다.


  오래 묵은 사진은 헌책방으로 흘러들곤 합니다. 나는 아직 헌책방에서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구경해 보지 못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사진이 헌책방에 나오면 이 사진도 퍽 돈이 될 만하다고 여길는지 어떠할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헌책방을 다니다가 ‘김대중 대통령 사진’이라든지 ‘노무현 대통령 사진’이라든지 ‘이명박 대통령 사진’은 곧잘 구경합니다. 그런데 이 세 대통령 사진은 아직 돈이 안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들에 앞선 ‘김영삼 대통령 사진’도 돈으로 치지 않습니다. 누군가 달라 하는 사람이 없으면 폐휴지에 섞어 동네 할머니나 할아버지한테 드리면서 고물상으로 가져가도록 한답니다.


  그런데, 이 나라 숱한 대통령 가운데 ‘박정희 대통령 사진’이 헌책방에 흘러들면, 이 사진만큼은 제법 돈이 된다고 이야기합니다. 대통령으로 지낸 나날이 길 뿐더러, 정치 홍보 사진이 많은 터라 헌책방으로 흘러들 만한 사진도 많은데, 다른 어느 사람보다 박정희 대통령 사진만큼은 돈값이 쏠쏠하다고 합니다.


  1980년부터 1987년까지 대통령 노릇을 한 전두환이라는 분 사진은 어떤 값어치가 있을까 궁금합니다. 우표도감을 살피면, 이승만·박정희·전두환 세 분은 다른 어느 누구보다 자주 얼굴을 보여줍니다. 우리 옆나라에서도 이와 같다 하는데, 민주정권 아닌 독재정권을 꾸린 이들은 ‘우표에 얼굴을 자주 선보인다’고 해요. 이를테면, 북녘나라에서 정치권력을 거머쥔 분도 북녘 우표에 참 자주 얼굴을 선보여요. 다만, ‘우표에 얼굴을 자주 선보이는 정치 지도자는 독재자’라고 하는 이야기를 헤아린다면, 영국 여왕은 어떤 사람이라 할 만한지 알쏭달쏭하곤 합니다. 영국 우표에 영국 여왕 옆얼굴이 참 많이 나오거든요. 그 나라에서도 여왕이 독재자이기 때문에 우표에 자주 나타나는지, 아니면 다른 뜻에서 널리 우러르기 때문에 우표에 자주 나타나는지 아리송합니다.

 

 

 

 


  전두환이라는 분 뒤를 이어 대통령 자리를 지킨 노태우라는 분은 ‘기념우표에 꼭 한 번만 얼굴을 내밉’니다. 내가 한동안 우표를 곧잘 모았기 때문에 이 같은 얘기를 들었는지 모릅니다만, 1988년부터 대통령 자리를 물려받은 분은 ‘우표에 얼굴 자주 내미는 일은 독재정권 지도자나 하는 짓’이라는 소리를 듣고는, 이러한 ‘국민 목소리’를 귀담아들어서 딱 한 번만 얼굴을 내밀겠다고 밝혔다고 해요.


  사진책 《全斗煥 대통령》을 생각합니다. 이 사진책에서 대통령 이름은 한자로 적고 ‘대통령’은 한글로 적습니다. 문득 떠오르는데, 내가 국민학생이던 1982∼1987년에 ‘대통령 이름을 한자로 적을 줄 알아야 한다’는 숙제를 곧잘 받았습니다. 학교에서 으레 이런 짓을 숙제로 내주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世界 속의 韓國’을 向한 意志와 獻身”도 온통 한자투성이입니다. ‘세계 속의 한국’도 ‘의지와 헌신’도 아닙니다. 그예 한자 자랑입니다. 마치 오늘날 대통령이 영어 자랑을 하듯, 1982년 이무렵에는 한자 자랑을 드러냅니다.


  사진책 《全斗煥 대통령》을 넘기면, 미국 레이건 대통령을 만났다는 사진부터 지구별 수많은 나라 정치 지도자를 만났다는 사진이 가득합니다. 한국땅 대통령은 나라밖 수많은 정치 지도자한테 ‘훈장’을 달아 줍니다. 나라밖 정치 지도자보다 ‘키가 작은’ 한국 대통령이기에, 나라밖 정치 지도자는 한국 정치 지도자 앞에서 ‘허리를 숙여 인사하는’ 듯한 모습입니다. 경제를 살리고 복지를 살찌우며 민주를 이루겠다는 세 가지 뜻을 밝힌다는 전두환 대통령이라 하는데, 사진책 《全斗煥 대통령》에 나오는 모습 가운데 95%는 나라밖 정치 지도자하고 손을 맞잡거나 푹신한 걸상에 다리 벌리고 앉아 웃는 모습입니다.


  틀림없이 누군가 사진을 찍었고, 틀림없이 누군가 책으로 묶었으며, 틀림없이 누군가 전국 지방자치단체에 이 사진책을 비매품으로 널리 뿌렸으니까, 이 사진책은 스무 해를 흐르고 흘러 헌책방 책시렁에 꽂힙니다. 어쩌면 이 사진책은 앞으로 스무 해가 더 흐르도록 ‘애써 장만하는 사람’ 없이 먼지만 먹을 수 있으나, 어떤 쥐대기를 만나 조용히 사고팔릴 수 있어요.

 

 

 

 


  내가 떠올리는 전두환 대통령 사진으로는, 예전 〈중앙일보〉 사진기자였던 오동명 님이 찍은 ‘술에 절어 고래고래 소리지르던 모습’ 사진이 있습니다. 사진기자한테 필름 아끼라고 소리지르면서 2차이고 3차이고 더 술을 푸러 가는 모습을 담은 사진이 또렷이 떠올라요. 참 마땅한 노릇인데, 전두환 대통령도 노태우 대통령도, 또 박정희 대통령이나 이승만 대통령도 사람이에요. 게다가, 이들 모두 할아버지예요. 어여쁜 손자가 있겠지요. 사랑을 물려주고픈 아이들이 있을 테지요.


  그러면, 당신들은 이와 같은 사진책, 나라돈으로 찍고 나라돈 받는 공무원이 널리 퍼뜨린 《全斗煥 대통령》 같은 사진책을 당신 귀여운 손자한테 어떻게 보여줄 만할까요. 백 해나 이백 해쯤 흐른 뒤, 이 나라에서 살아갈 뒷사람은 이 사진책을 헌책방이나 도서관에서 들추며 무엇을 생각할 만할까요. 이 사진책 귀퉁이에 적힌 대로 ‘1980년대 대통령 전두환 씨는 나라를 지키고 살찌우며 일으킨 멋진 군인’으로 되새길 만한가요.


  아마, 앞으로 이백 해쯤 흐른다면, 전두환 대통령 사진도 이럭저럭 돈이 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온누리 모든 물건은 ‘나이를 먹으’면 돈이 된다 하니까요.


  그나저나, 1980년부터 1987년까지 전두환 대통령 곁에서 ‘대통령 사진’을 찍은 사람은 누구인지 궁금합니다. 이들은 이동안 대통령 사진을 찍으면서 돈을 얼마나 벌었을는지 궁금합니다. 이들은 이무렵 대통령 사진을 찍으면서 사진밭에서 권력이나 권위를 내세웠을까요, 아니면 당신 이름을 숨겼을까요. 대통령을 비롯해 국회의원이나 이런저런 정치권력자 곁에서 사진을 찍은 이들이 제법 많을 텐데, 이들 이름은 어디에서 찾아볼 수 있을까요.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에서 사진을 찍으며 돈을 벌던 사진기자나 사진 공무원으로는 누가 있었을까요. 너무 배고픈 나머지 식민지 제국주의자 돈이든 독재정권 대통령 돈이든 어쩔 수 없이 받으면서 사진을 찍어야 했다 할 수도 있는데, 이런 사진 저런 사진을 찍던 그분들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이분들은 오늘날 어떤 마음으로 사진기를 쥐며 당신 뒷사람한테 사진삶을 물려주는가요.

 

 


  1980년대에 전두환 대통령을 찍던 분은 ‘사진을 찍으며 즐거운’ 마음이었을까요. 당신 사진이 묶여 사진책으로 태어났을 때에 당신 벗님들한테 ‘자, 보라구, 내 사진으로 이런 사진책이 나왔다구.’ 하면서 선물할 수 있었을까요. 독재정권을 휘두르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랑 독재정권을 휘두르는 자리에 있던 사람 곁에서 사진을 찍던 사람은, 어떤 꿈을 꾸면서 사진기를 손에 쥐었을까요. 이분들은 사진 한 장에 사랑을 담을 수 있을 때에, 비로소 아름다운 삶인 줄 조금이나마 헤아린 적 있을까요. (4345.5.29.불.ㅎㄲㅅㄱ)

 


― 全斗煥 대통령 (한국연합광고 엮음,문화공보부 펴냄,1982.12./비매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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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똥기저귀 빨래 책읽기

 


  첫째 아이가 태어난 2008년 8월 16일부터 내 삶에서 ‘빨래’는 아주 진득하게 자리잡았다. 이와 함께 ‘밥하기’라든지 여러 갈래 집일이 단단히 자리잡았다. 첫째 아이가 스스로 똥오줌 다 가리고부터 이제 ‘빨래’ 일이 많이 줄어들까 하고 생각했으나, 첫째 아이가 밤오줌을 다 가리고 나서 곧장 둘째 아이가 태어나는 바람에, 내 삶에서 ‘빨래’는 앞으로도 몇 해 진득하게 이어가리라 느낀다.


  갓난쟁이는 언제 똥이나 오줌을 눌 지 알 수 없다. 식구들이 밥먹는 자리에서도 똥이나 오줌을 눈다. 자다가도 똥이나 오줌을 눈다. 함께 나들이를 가는 길에도 똥이나 오줌을 눈다. 번쩍 안아서 예쁘다 말할 때에도 똥이나 오줌을 눈다. 그러니까, 아이들 빨래는 언제나 한다. 아침에도 밤에도 낮에도 새벽에도 언제나 한다. 똥기저귀나 똥바지 빨래라면 더더욱 언제나 한다.


  그런데, 나는 아이들 아버지로서 날마다 빨래를 한다. 아이들 아버지로서 날마다 빨래를 한 지 여러 해 되었다.


  문득 생각한다. 대한민국이라는 나라에서 ‘빨래하는 아버지’는 몇이나 될까. ‘날마다 빨래하는 아버지’는 이 가운데 몇이나 될까. ‘날마다 똥을 주물럭거리며 빨래하는 아버지’는 이 가운데 몇쯤 될까.


  내가 국민학생이던 어린 날, 내 할아버지는 당신 몸을 쓰지 못해 으레 누워 지냈다. 내 어머니는 내 할아버지 똥오줌을 날마다 여러 차례 받았고, 이불이며 옷가지이며 으레 손으로 빨래를 했다. 빨래기계가 마땅히 없던 무렵이기도 했으나, 빨래기계가 있대서 똥이불이나 똥옷을 기계로 빨지 못한다. 손으로 빨아야 한다.


  나는 참 여러 해에 걸쳐 이 모습을 곁에서 지켜보았다. 내가 할아버지 똥옷을 빨래한 적은 없었지만, 똥이불을 빨래할 때에 어머니 곁에서 발로 밟는 일은 으레 거들었다. 그런데 내 어머니는 똥을 주무르면서 무어라 싫어하거나 꺼려한 적이 없었다고 느낀다. 그저 늘 하는 일이요, 스스럼없이 받아들인 삶이었다.


  아이들 똥을 날마다 숱하게 주무르기에 내 손과 몸에는 아이들 똥내음이 밴다. 내 옷가지에는 아이들 침내음이랑 오줌내음이랑 땀내음이 밴다. 이 삶이 싫다거나 이 삶이 못마땅하거나 이 삶이 힘들다고 느낀 적이 없다. 왜냐하면, 하나도 힘들지 않으니까. 그래서 나는 어느 때였나, 꽤 크게 놀란 적이 있다. ‘아이가 눈 똥을 치우지 못하는 아버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꽤 크게 놀랐다. ‘아이가 눈 똥을 치운 적 없다는 아버지’가 있다는 얘기를 듣고 무척 크게 놀랐다.


  아이가 눈 똥을 치운 적 없는 아버지라면, 할머니나 할아버지가 눈 똥을 치운 적 없을 뿐 아니라,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못 치우지 않을까? 옆지기가 눈 똥은 치울 수 있을까? 살붙이가 게운 것을 치울 수 있을까? 가장 가까운 벗이 몸져 누우며 내놓은 똥오줌을 치울 수 있을까? 예쁘장한 아가씨들 젖가슴이나 엉덩이는 주무를 수 있어도, 아이들과 할머니 할아버지 똥은 주무를 수 없을까?


  똥을 주무르지 못하는 사내라면, 거름을 주무르지 못하겠지. 거름을 주무르지 못한다면 흙을 만지지 못하겠지. 흙을 만지지 못한다면 사랑을 아끼지 못하겠지. (4345.5.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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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12-05-30 00:02   좋아요 0 | URL
아기 똥기저귀를 빠는 아버지가 얼마나 될까요?
우리집 애 아빠도 아이들 키울 때 큰거 싸놓으면 나를 불렀죠.ㅜㅜ

숲노래 2012-05-30 00:29   좋아요 0 | URL
아버지들은... 스스로 아이였을 적 제 똥을
누가 어떻게 치웠을까쯤이라도 생각해야지
비로소 철들리라 느껴요...
 

사진찍기
― 아버지 좀 찍어 주어

 


  시골마을에서 살아가는 젊은이가 거의 없는 탓에 시골마을 어른들이 논이나 밭에서 일할 적에 논밭을 뒹굴거나 가로지르며 뛰노는 아이들이 참말 없습니다. 우리 집 아이는 어디에서나 거의 혼자 뒹굴거나 뛰어놉니다. 마늘을 캐고 엮어 경운기에 실은 마늘밭은 차츰 넓어지지만, 이 덩그러니 드러난 흙밭을 뒹굴 놀이동무가 따로 없습니다. 아이는 놀이동무가 딱히 없지만, 스스로 놀이동무를 찾습니다. 나무하고 놀고, 풀이랑 놉니다. 고욤나무 밑에서 고욤꽃송이 주워 놉니다. 고추꽃을 바라보고, 돌 틈 마삭줄에 맺힌 하얀 바람개비꽃을 들여다봅니다.


  아이 아버지가 아이를 부릅니다. “아버지 일하는 모습 좀 찍어 주어.” 다섯 살 아이는 아버지 사진기를 들고 마늘밭 귀퉁이에서 사진 여러 장 찍습니다. 꼭 여섯 장 찍고는 사진기를 내려놓습니다. 잘 찍어 주었나. 잘 찍었겠지, 하고 믿으며 하던 일을 마저 합니다.


  이윽고 이웃집 마늘밭 일손 거들기를 마칩니다. 아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아이는 이내 아버지 손을 놓고 먼저 저 앞으로 힘차게 달음박질을 합니다. 달리고 또 달려도, 뛰고 또 뛰어도 기운이 넘칩니다. 좋구나, 좋은 삶이고 사랑이구나, 하고 느끼며 아이 뒷모습을 기쁘게 사진으로 담습니다. 아이하고 살아가며 아이 뒷모습을 참 자주 찍습니다. 아이는 제 어버이한테 뒷모습을 자주 보여줍니다. 씩씩하게 달리는 뒷모습을 보여주고, 꽃밭이나 풀밭에 옹크리고 앉아 꽃이랑 얘기하는 모습을 보여줍니다. (4345.5.29.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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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웃집-12-0524-19 집-12-0525-70
 고욤꽃 책읽기

 


  감꽃하고 고욤꽃은 다르게 생겼다. 고욤이 있기에 감나무가 있다. 감은 언제부터 감이었을까. 가지를 이어붙여 감나무를 이룬다는데, 감나무를 맨 처음 이룬 사람은 누구였을까. 아주 어릴 적 국민학교 다니던 때에도, 또 이무렵 충청남도에 있는 시골집에 나들이를 할 적에도, 어른들은 으레 ‘감나무는 가지 이어붙이기를 해서 얻는다’고 이야기했다. 어느 어른은 가지 이어붙이기를 어떻게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기도 했다. 나중에 어른이 되어 스스로 이렇게 해 보라 이야기해 주었다.


  이제 우리 네 식구는 전남 고흥 시골집에서 살아가고, 우리 집 뒤꼍에 감나무랑 고욤나무가 나란히 있다. 어쩌면, 이 시골집 옛 할머니나 할아버지는 몸소 가지 이어붙이기를 해서 감나무를 얻지 않았을까. 가지를 이어붙인 고욤나무는 한쪽 구석에 두고, 집 앞에 감나무를 예쁘게 심어 키우지 않았을까.


  봄맞이 감꽃이 피었다가 천천히 진다. 봄맞이 고욤꽃이 피었다가 살며시 진다. 시골에서도 도시에서도 으레 감꽃을 말하고 감꽃을 먹으며 감꽃을 노래한다. 돌이키면, 나 또한 감꽃을 생각하거나 바라보거나 느꼈을 뿐, 막상 고욤꽃을 헤아리거나 살피거나 맞아들이려고 마음을 기울이지 못했다.


  자그맣게 열매를 맺는 고욤이기에, 고욤나무 고욤꽃은 촘촘히 달린다. 자그마한 풀딸랑이 줄지어 달린다. 나무그늘에서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풀딸랑이 딸랑딸랑 바람결에 흔들리며 어여쁜 풀노래 들려주는 소리를 누린다. 아이는 흙바닥에 떨어진 고욤꽃을 손바닥 가득 주워서 아버지한테 보여준다. “아버지 이거 뭐예예요?” 다섯 살 아이는 “뭐예요?” 하고 말해야 하는 줄 아직 모르고, “‘뭐예’예요?” 하고 말한다. “이게 뭘까? 생각해 봐.” 하고 이르고는, 곧이어 “고욤꽃이야.” 하고 붙인다. “고임꽃?” “고욤꽃.” “아, 고염꽃.” (4345.5.28.달.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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