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회용품과 재활용품

 


  새책방만 있는 문화는 1회용품 문화가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책 하나를 한 사람만 읽고 더 읽히지 못하도록 책꽂이에 꽁꽁 가두어 모신다면, 이 책은 한낱 1회용품 물건하고 똑같기 때문입니다.

  새책방 곁에 헌책방이 있으면, 책은 재활용품 문화로 거듭납니다. 내 살림집에 건사한 내가 즐겁게 읽은 책을 헌책방에 내놓으면 이 책들은 누군가 다른 사람 손으로 건너갑니다. 가난한 이웃이든 마냥 책이 좋아 새책방도 헌책방도 신나게 마실하는 책님이든, 책이 돌고 돕니다. 다른 책벗이 헌책방에서 장만해서 읽은 책은 또 헌책방으로 나올 수 있고, 이 책 하나 돌고 돌면서 수없이 되읽힙니다.


  도서관이라는 곳은 바로 책 하나 되읽히도록 이음돌 놓는 책터입니다. 그런데 이 나라 도서관은 책 두는 자리를 새로 짓거나 늘리지 못합니다. 책은 날마다 새로 나오는데, 날마다 새로 나오는 책을 모두 장만하지 못하고, 모두 건사하지 못합니다. 국립중앙도서관을 뺀 다른 도서관은 꾸준히 ‘묵은 책은 버리’고 ‘새로 나온 책을 사들이’는 일을 하고야 맙니다. 도서관 곁에 헌책방이 없다면, 이 나라 도서관에서 버릴 수밖에 없는 슬프고 안타까운 책이 모두 종이쓰레기가 됩니다.


  꾸준하게 많이 팔리는 책이라면 몇 권쯤 종이쓰레기 되어도 다시 찍어 다시 읽힐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줄거리와 속살이 아름답고 훌륭하지만 미처 사람들한테 제대로 사랑받지 못해 새책방 책시렁에서 사라진 책은 몇 권이라도 종이쓰레기가 되면 자칫 두 번 다시 만날 길 없는 책이 될 수 있습니다.


  100만 권 팔리는 책만 아름답지 않습니다. 1000권 겨우 팔린 책도, 100권 가까스로 팔린 책도, 10권 힘겹게 팔린 책도 아름답습니다. 오늘날 사람들이 참으로 많이 읽는 헨리 데이빗 소로우 님이 처음 펴낸 책은 빚을 지고 혼잣돈으로 펴냈는데 몇 해에 걸쳐 고작 100권 남짓 팔렸다고 해요. 소로우 님은 이녁 삶을 책으로 써서 내놓고는 엄청난 빚더미에 올라앉아 이 빚을 갚느라 여러 해 고되게 일해야 했다고 해요. 이 책들을 도서관에서 버린다면, 이 책들을 받아줄 헌책방이 없다면, 아마 소로우 님 책은 앞으로도 제대로 빛을 못 받을 수 있었겠지요.


  삶은 1회용품이 아닙니다. 1회용품은 모두 쓰레기로 바뀝니다. 부엌칼도 도마도 빗자루도 쓰레받기도 1회용품이 아닙니다. 얼마든지 다시 쓰고 또 쓰며 오래 쓰는 재활용품입니다.


  재활용품 파는 가게에서 사는 물건이 재활용품이 아니라, 우리가 꾸준히 곁에 두며 쓰는 물건이 모두 재활용품입니다. 바지 한 벌 열 해째 잘 건사해서 입는다면, 나는 바지 한 벌을 열 해째 재활용품으로 즐기는 셈입니다. 자전거 한 대 열 해째 잘 돌보며 탄다면, 나는 자전거를 탈 적마다 재활용을 하는 셈입니다.


  돌고 돌 때에 돈이듯이, 돌고 돌 때에 책입니다. 여러 사람이 골고루 누릴 때에 아름다운 돈이 되듯이, 여러 사람이 골고루 읽으며 스스로 이녁 삶을 살찌우는 징검돌로 삼을 적에 아름다운 책이 됩니다. 큰책방과 작은책방, 인터넷책방과 동네책방, 여기에 새책방과 도서관과 헌책방이 고루고루 골골샅샅 아름답게 어깨동무를 해야 책빛이 환하게 드리울 수 있습니다. 4346.10.15.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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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0-15 12:44   좋아요 0 | URL
정말 새책방 옆에 헌책방이 있고, 더구나
도서관 옆에 헌책방이 있어야 함을, 함께살기님의 글을 읽으니
더욱 절감이 드네요.
저도 즐겁고 살뜰하게 읽은 책들을 꼭 소장할 책이 아니라면
부지런히 헌책방에 내놓으려 합니다~^^

숲노래 2013-10-16 14:57   좋아요 0 | URL
모두들 아름답게 어우러지며
책빛도 삶빛도 환하게 드리운다면 좋겠어요~
 

책방 앞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책내음을 맡는다. 커다란 책방이건 작은 책방이건, 새책 다루는 책방이건 헌책 다루는 책방이건, 책방 앞에서는 책내음을 맡는다. 빵집 앞에서 빵내음을 맡고, 떡집 앞에서 떡내음을 맡듯이, 책방 앞에서는 나를 부르는 책내음을 맡는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발걸음을 멈춘다. 아무리 바삐 어디론가 볼일을 보러 가는 길이라 하더라도 책방 앞에서 한 번쯤 발걸음을 멈춘 뒤 때를 살핀다. 볼일을 보러 바삐 가야 하기는 하지만 1분이라도 쪼갤 수 있을까, 10분을 쪼개면 어떨까, 20분까지 쪼개면 너무 늦을까, 이런 생각 저런 생각을 한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빙그레 웃는다. 책방 문 열고 들어서면 나를 기다리던 책들이 즐겁게 웃을 테고, 책방 문 열고 들어설 틈이 없어 그대로 지나쳐야 한다면 누군가 다른 책손이 이녁 마음 기쁘게 채울 책들 떠올리며 방긋방긋 웃을 테지. 사람들은 배가 부를 적에도 웃고, 마음이 부를 적에도 웃는다.


  책방 앞을 지나갈 적마다 생각에 젖는다. 이 책방은 언제부터 이곳을 지켰을까, 이 책방은 앞으로 언제까지 이곳을 지킬까, 이 앞을 지나다니는 사람들은 책내음 흐르는 줄 느낄까, 이 마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이녁 마을에 고운 책방 하나 있는 줄 얼마나 헤아릴까, 이 생각에 젖고 저 생각에 빠지다가, 아차 내 갈 길은 까맣게 잊었네 하고 깨닫는다. 다시 길을 걷는다. 4346.10.9.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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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letreeje 2013-10-09 00:51   좋아요 0 | URL
책방 앞,이란 제목과 정다운 글과 함께
책방 앞을 자전거를 타고 가는 흑백사진이 잘 어울립니다.^^
사진을 볼 줄 모르는 제게도 넓고 시원한 구도로, 책과 사람과 책방의
아름다운 조화가. ..어린날의 마냥 천진하고 행복했던 그 시절들처럼
즐거운 꿈과 이야기 되어 흐르는 좋은 밤입니다~ 감사드립니다. *^^*

숲노래 2013-10-09 01:05   좋아요 0 | URL
누구라도 사진을 보면 다 '사진을 보는 사람'인걸요.
사진이든 책이든 시이든 문학이든 영화이든 춤이든...
마음으로 바라볼 수 있을 뿐,
머리에 담긴 이론이나 논리나 지식이나 형식으로는
도무지 읽거나 느끼거나 바라보거나 살필 수 없어요.

서울 창천동 린나이세거리 옆에 있는 헌책방인데,
김대중도서관 큰길 건너에 있는 곳이지요,
이 앞 거님길이 많이 깎였어요.
버스전용차선 만든다며 다른 데는 찻길을 깎는데,
여기는 거님길을 깎아 버렸지요.

이 사진을 볼 때면,
저 널찍하던 거님길이 1/3로 토막난 쓸쓸한 일이
떠오릅니다...

transient-guest 2013-10-09 01:18   좋아요 0 | URL
아름다운 사진이에요. 마치 예전의, 제 기억속에만 남아있는 고향의 모습같아서 더욱 가슴에 와 닿네요.

숲노래 2013-10-09 07:37   좋아요 0 | URL
디지털사진기 없이 필름사진만 목걸이처럼 하고 다닐 적에 찍은 사진입니다. 나무와 하늘과 헌책방과 거님길과 자전거 모두 좋아서 ... 막상 이 사진은 나무 옆에 세운 제 자전거만 찍을 생각이었는데, 초점과 조리개값 맞추며 들여다보다가 단추를 누를 즈음 저 내리막길에서 다른 자전거 한 대 씽하니 내려와서 곱게 담겨 주었어요. 저도 저분도 모르는 새 서로 찍고 찍혔어요 ^^;;;

그 자전거가 일으켜 준 바람이 transient-guest 님한테도 어떤 기억과 아름다움과 고향을 떠올려 주도록 이끌어 주었으리라 생각해요~
 

연필과 책

 


  헌책방에서는 연필을 써서 책값 적는 곳이 꽤 있습니다. 연필로 책값을 숫자로 적어 넣지요. 단골은 연필 숫자를 읽으며 책값을 어림합니다. 단골 아닌 책손은 아직 숫자읽기를 못해서 책값을 어림하지 못하기 일쑤이지만, 한 번 두 번 드나든 뒤에는 숫자읽기를 할 수 있습니다.


  책은 종이로 만들고, 종이는 나무로 만듭니다. 연필은 나무로 만듭니다. 책도 연필도 나무로 만듭니다. 책방 책시렁은 으레 나무로 짭니다. 나무로 짠 책시렁에 둘 나무로 만든 책에 나무로 만든 연필로 책값을 적어 넣습니다. 책값을 적어 넣는 손은 숲에서 자란 풀밥을 먹으며 기운을 냅니다.


  책을 읽는 사람은 나무를 읽겠지요. 종이로 바뀌었다가 책으로 다시 태어난 나무를 읽어요. 연필로 거듭난 나무를 읽어요. 풀밥 먹고 기운내어 일하는 책지기 손길을 읽어요. 4346.10.4.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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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아끼는 손길

 


  책을 아끼는 손길로 풀 한 포기를 아낍니다. 책을 사랑하는 손길로 아이들을 따사롭게 쓰다듬습니다. 책을 믿는 손길로 나무 한 그루를 살며시 어루만집니다. 책을 즐기는 손길로 이웃과 어깨동무를 합니다. 책을 돌보는 손길로 집살림을 알뜰살뜰 일굽니다.


  마음을 기울일 적에 책 한 권 내 속으로 들어옵니다. 마음을 기울이지 못할 만큼 바쁘거나 힘들거나 고되거나 지치거나 멍하거나 쪼들릴 적에 책 한 권 내 속으로 들어오지 못합니다. 마음을 기울여야 내 동무와 이웃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알아듣습니다. 마음을 기울이지 않으면 옆지기가 하는 말을 하나도 못 알아듣고는 한귀로 흘립니다.


  책을 읽으려면 책을 읽으면 됩니다. 마음을 들여 생각을 활짝 열면서 책을 보드랍게 손에 쥐면 책을 읽을 수 있습니다. 책을 읽을 때에는 다른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이 책 하나만 생각합니다. 책을 읽으며 다른 데에 마음을 쓰지 않습니다. 우리 집 살림돈이 바닥이 났든, 내 몸 어디가 아프든, 내가 하는 일이 높은 울타리에 가로막혔든, 책방마실 나오는 길에 비를 쫄딱 맞았든, 이런 일 저런 일 아무것도 마음을 안 쓰고 오직 책만 손에 쥔 채 책에 깃든 이야기를 좇습니다.


  삶을 새롭게 마주하는 힘을 글 한 줄에서 얻습니다. 삶을 새롭게 마주하겠다는 다짐을 글 한 줄에서 깨닫습니다. 때로는 지식 한 조각 책에서 얻어요. 그런데, 지식조각은 책을 펼치지 않아도 우리 둘레에 널렸어요. 굳이 책을 손에 쥐어 이 책 하나에 깃든 이야기를 읽으려 한다면, 내 삶을 내 손으로 곱게 아끼면서 보듬을 빛을 헤아리고 싶기 때문입니다.


  책을 아끼는 손길로 삶을 아낍니다. 책을 아끼는 손길로 삶터와 마을과 지구별을 아낍니다. 책을 아끼는 손길로 꿈과 사랑과 믿음을 고이 아낍니다. 책을 아끼는 손길로 하늘과 해와 비와 바람을 살뜰히 아낍니다. 4346.10.1.불.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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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도록 읽는 책

 


  새책방에는 오래된 책이 없습니다. 도서관에는 오래된 책이 있을 수 있고, 없을 수 있습니다. 도서관은 책을 두는 곳이지 ‘오래된 책’을 두는 곳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예전 책을 알뜰히 여겨 차곡차곡 건사하는 도서관이 있으나, 모든 도서관이 오래되거나 묵은 책을 챙기거나 돌보지는 못합니다.


  헌책방에서 오래된 책을 만납니다. 그렇다고 헌책방에 오래된 책만 있지 않습니다. 그리고, 헌책방에 들어온 오래된 책이 다시금 오래도록 빛을 못 본 채 쌓일 수 없습니다. 오래된 책만 있고 책이 흐르지 않으면, 헌책방지기는 책방살림을 꾸리지 못해요. 오래된 책이든 새로 나온 책이든, 사고팔리면서 돈이 돌아야 헌책방 일터를 지킬 수 있습니다.


  책을 읽습니다. 새책방에서 장만한 새로 나온 책을 읽고, 도서관에서 갖춘 책을 읽으며, 헌책방에서 돌고 도는 책을 읽습니다. 새로 나온 책은 새로 나온 책입니다. 묵은 책은 묵은 책입니다. 새로 나왔기에 새로운 이야기를 담지는 않습니다. 묵은 책이니 묵은 이야기를 보여주지 않습니다. 어느 책을 마주하더라도 처음 만나는 책이고, 새삼스레 되새기는 이야기입니다. 이제껏 살아온 내 하루를 돌아보고, 앞으로 살아갈 내 길을 헤아립니다.


  지나간 책들을 읽다가 생각합니다. 햇수로 치면 한참 지나간 책들이지만, 이 책들을 읽는 동안 이 책이 몇 년도에 나온 책인지 살피지 않습니다. 그저 이 책에 깃든 줄거리를 따라가며 이 책에 서린 이야기를 가슴으로 삭힙니다. 갓 나온 책들을 읽다가 생각합니다. 햇수로 치면 보송보송하다 할 만한 책들인데, 이 책들을 읽는 동안 이 책이 며칠 앞서 나온 책인지 돌아보지 않습니다. 그저 이 책에 담긴 줄거리를 좇으며 이 책에 감도는 이야기를 마음으로 아로새깁니다.


  책을 읽습니다. 햇수나 연도 아닌 책을 읽습니다. 값이나 돈셈 아닌 책을 읽습니다. 작가나 출판사 이름값 아닌 책을 읽습니다. 베스트셀러도 스테디셀러도 아닌 책을 읽습니다. 더 파고들면 ‘책’을 읽는다기보다 ‘이야기’를 읽습니다. 책이라고 하는 ‘종이그릇’에 담은 이야기를 읽습니다. 책이라는 종이그릇에 담은 이야기는 사람들이 살아온 나날입니다. 그러니까, 책을 읽는 사람은 ‘사람이 살아온 나날’을 읽는 셈이요, 내 이웃과 동무가 누리는 ‘삶’을 책으로 만난다 할 수 있습니다. 아니, 삶을 읽기에 책입니다. 사랑과 꿈이 서린 삶을 읽으니 책읽기입니다.


  헌책방에서 만나는 ‘지나간 책’이나 ‘묵은 책’, 다시 말하자면, 헌책방 헌책은 어떤 책인가 하고 생각합니다. 이 헌책은 ‘헌 책’으로 여길 수 있을 테지만, 헐거나 낡거나 묵거나 지나간 책이라기보다 ‘오래도록 읽을’ 수 있는 책들이지 싶습니다. 헌책방으로 책마실을 떠나는 이들은 오래도록 읽고 싶은 책을 찾으려는 마음이지 싶습니다. 오늘만 읽을 책이 아니라 앞으로도 읽을 책을 살피고 싶은 마음이지 싶습니다. 어제와 오늘과 모레를 잇는 책을 헌책방마실을 하며 만나고 싶은 마음이지 싶어요.


  삶은 하루에 하루가 모여 이루어집니다. 이야기는 사랑에 사랑이 모여 이루어집니다. 책은 삶에 삶이 어우러져 이루어집니다. 4346.9.27.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 헌책방 언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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