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 상상을 현실로 만든 혁신학교 이야기
에냐 리겔 지음, 송순재 옮김 / 착한책가게 / 2012년 2월
평점 :
구판절판



 아름답게 배우며 살아가는 꿈
 [사랑하는 배움책 11] 에냐 리겔,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

 


- 책이름 :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
- 글 : 에냐 리겔
- 옮긴이 : 송순재
- 펴낸곳 : 착한책가게 (2012.2.20.)
- 책값 : 15000원

 


  ㄱ. 교사는 배우는 사람


  2012년 가을, 전라남도 고흥군 주민들은 고흥군에 화력발전소가 못 들어오게 막았습니다. 전라남도 해남군 주민들도 해남군에 화력발전소가 못 들어오게 막았어요. 몇 해 앞서는, 고흥군과 해남군에 핵발전소를 끌어들이려고 여러 권력자와 기업자가 똘똘 뭉쳤지만, 이때에도 주민들이 막아내어 고흥과 해남이 정갈한 시골로 이어가도록 지켰습니다.


  그 어느 곳도 아닌 시골이기에, 시골에 발전소 하나 들어서는 일이란 아주 끔찍합니다. 사람들 먹을 곡식과 열매와 푸성귀를 거두는 들이요, 사람들 먹을 물고기와 김과 파래와 미역과 매생이를 얻는 바다입니다. 들판 한쪽에 공장이 있으면, 곡식이 어떻게 될까요. 양식장이나 갯벌 곁에 발전소가 있으면, 양식장이나 갯벌은 어떻게 될까요.


  돼지우리나 소우리 곁에 공항이 있으면, 돼지와 소는 시끄러워서 죽습니다. 사람도 비행기 끔찍한 소리에 귀가 찢어지거나 머리가 어지럽습니다. 그러나, 자꾸자꾸 커지는 도시인 탓에 공항을 새로 짓고, 고속도로와 고속철도를 자꾸 놓으며, 공장은 끝없이 늘어납니다.


  무엇이 삶일까요. 어떻게 살아갈 때에 즐거울까요. 사람으로 살아가는 보람은 무엇일까요. 학교는 사람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는가요. 학교는 아이와 어른한테 무엇을 보여주는가요. 학교는 이 나라 이 땅 이 마을에 어떤 구실을 하는가요.


.. 아이들이 집에서 읽기와 쓰기가 정말 중요하고 쓸모있으며 심지어 달콤한 것이라는 사실을 경험하면, 아이들은 자연스럽게 스스로 배우려 한다 … ‘읽기’와 ‘쓰기’는 죽은 사회에서는 이루어질 수 없다. 끊임없이 정확하게 비판적으로 ‘읽는 것’을 배운 사람은 혼잡스러운 텔레비전 영상이나 심지어 이른바 ‘진실’을 말한다고 하는 인쇄 매체를 안심하고 대할 수 있다 … 학생들의 사회적 책임감을 키우는 교육을 행하고 있는 학교가 너무도 적다 ..  (19, 30, 77쪽)


  2013년에 접어들면서, 중앙정부는 이 나라에 새 화력발전소를 열여덟 곳 짓겠다고 외칩니다. 전기가 모자라 화력발전소가 더 있어야 한다고 밝힙니다. 핵발전소는 너무 아슬아슬하니까 더 안 지을 듯하고, 핵발전소만큼 아슬아슬하지 않다고 하면서 화력발전소를 짓는다고 합니다.


  화력발전소가 들어선다는 곳을 들여다보면, 일찌감치 다른 화력발전소가 깃든 곳이요, 또는 ‘발전소 지으며 시나 군에 준다는 돈’을 노리는 곳입니다. 삶에 따라 어떤 일을 하지 않고, 돈에 따라 어떤 일을 꾀한달까요. 더군다나, 발전소에서 나오는 매연과 공해와 전자파를 끊거나 줄일 길이 없는데, 화력발전소를 자꾸 더 지으려는 움직임을 제대로 깨닫는 사람이 얼마 안 보입니다.


  이 나라에 왜 전기가 모자랄까 하고 생각하는 사람을 찾기 어렵습니다. 도시는 자꾸 커지며 전기를 더 쓰려고 합니다. 시골은 더 작아지며 전기 쓸 일이 자꾸 줄어듭니다. 전기가 모자라다면 도시에서 전기가 모자라지만, 도시 한복판에 발전소를 지어 송전탑 갯수라도 줄이려는 움직임조차 없습니다. 전기가 모자란 까닭을 캐내어, 전기를 안 쓰거나 덜 쓰려는 움직임마저 없습니다. 무한동력 에너지를 빚어서 공해도 매연도 없이, 아름답고 알차게 전기를 쓰려는 움직임 또한 없습니다.


  화력발전소 사업은 어마어마한 돈덩이 사업입니다. 건설회사는 건설회사대로 발전소를 짓고 전기를 (중앙정부한테) 팔면서 돈덩이를 거머쥐고, 중앙정부는 중앙정부대로 세금을 거두고 전기를 (사람들한테) 팔면서 돈덩이를 거머쥐는 사업입니다. 그렇지만, 이러한 얼거리를 교과서에서는 안 다룹니다. 제도권교육 울타리 안쪽에서는 발전소 사업 밑뿌리를 캐거나 밝히지 않습니다. 교과서로서는 ‘발전소 반대’를 ‘지역 이기주의’로 몰아세울 뿐이요, 전기와 도시와 산업 문제를 슬기롭게 바라보도록 이끌지 않습니다.


.. 단지 말로 듣기만 할 때보다 자신이 직접 경험한 것이 훨씬 더 기억에 오래 남는다는 사실은 모두가 공감할 것이다. 그런데 왜 유독 학교 수업에서는 무언가를 실제로 경험하게 하기를 마다하는가 … 수업시간에 말을 해도 되는 것, 나아가 말을 해야만 하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다. 침묵해야 하는 상황이야말로 오히려 낯설고 이상한 것이다 … 어떤 학교에서는 음악을 모두 함께 즐기고 우리의 영혼을 쓰다듬어 주는 좋은 것으로 여긴다. 그런가 하면 어떤 학교에서는 그저 배운 것을 누가 몇 주 후에 더 잘 기억하고 있으며, 이를 기반으로 어떻게 점수를 매길 것인가에 온 정신을 쏟기도 한다 ..  (43, 48, 62∼63쪽)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교사는 교과서 지식을 한 해에 걸쳐 아이들한테 물려주는 구실을 맡습니다. 오늘날 학교교육에서 학생은 교과서 지식을 한 해에 걸쳐 교사한테서 물려받는 몫을 맡습니다. 교과서에서 다루는 지식을 제대로 외워야 시험문제를 잘 풉니다. 시험문제를 잘 풀어야 대학입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습니다. 대학입시에서 더 높은 점수를 얻어야, 더 등급 높은 대학교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더 등급 높은 대학교에 들어가야 더 연봉 높은 공공기관이나 큰회사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국어국문학과를 나오거나 문예창작학과를 나와야 시를 쓰거나 소설을 쓰거나 문학을 할 수 있지 않습니다. 사진학과를 나와야 사진을 찍을 수 있지 않습니다. 미술대학을 나와야 그림을 그리거나 도자기를 구울 수 있지 않습니다.


  삶을 배우고 싶은 사람은 삶을 배우면 됩니다. 시를 쓰고 싶은 사람은 시를 쓰면 됩니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은 그림을 그리면 될 테지요. 시를 쓰는 자격증은 없어요. 그림을 그리는 졸업장은 없어요.


  그러면, 학교란 무엇일까요. 학교는 왜 있어야 할까요. 아이들은 학교를 왜 다녀야 하나요. 어른들은 왜 교사가 되어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야 하나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길을 가르치는 학교는 없습니다. 아이를 어떻게 사랑하고 보살펴야 즐거운가 하는 삶을 가르치는 교사는 없습니다. 나무를 아끼는 사랑을 가르치는 교과서는 없습니다. 풀을 어루만지고 멧새와 노래를 즐기는 삶을 이야기하는 교사는 없어요.


  교과서에는 개구리 울음소리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바람이 나뭇잎 간질이는 소리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훤한 달밤에 빛나는 구름 이야기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함박눈 펑펑 내리며 고요한 시골마을 한켠에서 붉은 꽃망울 어여쁜 동백꽃 이야기가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젖을 어떻게 물리는가 하는 몸가짐, 젖을 아기한테 물리는 기쁨, 젖을 먹는 아기가 얼마나 좋아하면서 무럭무럭 자라는가 하는 이야기도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제비가 찾아드는 시골집 처마 밑 이야기 또한 안 실립니다. 교과서에는 씨앗을 갈무리해서 이듬해에 밝은 웃음빛 지으며 뿌리는 이야기 또한 안 실려요.


.. 우리의 경험에 따르면 예술은 폭력에 대응할 수 있는 좋은 예방책이다 … 사람들은 아름답고 정돈된, 정성껏 만들어진 공간에 있을 때는 황량하고 볼품없고 애정 없이 대충 만들어진 공간에서와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 같다 … 많은 학교 공간은 여전히 사람이 사는 공간 같지 않고 그저 어떤 기관 같은 느낌을 줄 따름이며 …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돕는 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면 한다. 우리 아이들이 교실에 앉아 그저 인간애에 대해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직접 자신의 손으로 어르신들을 씻겨 드리고 아기의 기저귀를 갈아 주고 아픈 친구를 병원에 데려가 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러한 경험들이야말로 수업을 몇 시간 빼먹어도 좋을 만큼 충분한 가치를 지니고도 남는 일이다 ..  (88, 89, 95쪽)


  교사가 되려면 대학교를 나와야 한답니다. 교육대학교이든지 사범대학이든지 마치면서 교사자격증을 거머쥐어야 교사가 될 수 있다고 해요. 그러면, 대학교에서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쳐 교사가 되도록 키우는가요. 교사자격증 따도록 하는 시험제도는 어떤 이야기를 물어 보면서 교사가 되도록 북돋우는가요. 아이들 앞에 서는 교사는 교사로서 어떤 넋·마음·얼·사랑을 품으며 활짝 웃는 어른인가요. 교사가 되고 난 다음에는 교사 스스로 무엇을 꾸준하게 익히거나 배우면서 이녁 삶을 아름답게 갈고닦을는지요.


.. 청소년들은 어려운 과제를 해결할 만한 충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우리는 아이들을 끝없이 보호하고 지키려고 하면서 사실은 아이들의 인생에 우리가 책임지지 못할 짐을 지워 주며 방관하고 있다 … 하루에 단어 스무 개 외우고 공식 몇 개 외우고 묻는 말에 대답하는 일은 청소년들의 입장에서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만일 이러한 것들이 학교가 아이들에게 제공할 수 있는 전부라면 아이들이 학교에서 미쳐 가는 것을 보고 놀랄 까닭이 전혀 없다 … 학교 스스로가 수없는 규범과 규칙에 얽매여서 스스로의 자유를 차단하고 이해할 수 없는 교육의 길을 택하는 현실에 통탄하지 않을 수 없다. 상상력과 도전정신 그리고 학교운영자들의 연대 없이 이 같은 학교구조가 변화하기를 기대하기는 힘들다 ..  (100∼101, 107쪽)


  흔히,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라고 일컫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교사가 가르치는 사람이기만 할 때에는 참교사하고는 동떨어지리라 느껴요. 교사는 가르치는 사람이기 앞서 배우는 사람이기에 교사라고 느껴요. 아이들을 가르친대서 교사가 아니라, 삶을 먼저 즐겁게 배운 다음, 이녁 스스로 즐겁게 배운 삶을 아이들한테 너그러이 나눌 수 있기에 교사로구나 싶어요. 아이들한테 온갖 지식 베푼대서 교사가 아니라, 사랑을 늘 흐드러지게 빛내면서, 이녁 스스로 빛내는 사랑을 아이들과 어깨동무하면서 새롭게 꽃피울 때에 바야흐로 교사로구나 싶습니다.


  배우는 사람이기에 가르칩니다. 배울 줄 아는 사람이기에 가르칠 줄 압니다. 배우는 마음이기에 가르치는 마음이 돼요. 배우는 즐거움을 누리기에 가르치는 즐거움을 나눠요.

  배우는 사람은, 지식을 머리에 집어넣지 않습니다. 배우는 사람은, 배운 모두를 삶으로 녹입니다. 배우는 사람은, 늘 새 삶으로 거듭나면서 날마다 새 이야기를 길어올립니다.


  똑같은 지식을 똑같은 틀에 맞추어 똑같은 목소리로 똑같은 모습을 한 아이들한테 똑같은 시간에 맞추어 줄줄 외는 사람은 교사가 아니겠지요. 새로운 이야기를 새로운 웃음으로 들려주면서, 새로운 얼굴빛을 짓는 아이들하고 언제나 새로운 노래를 부르듯 어깨동무하면서 새로운 삶을 북돋우는 새로운 사랑을 속삭일 때에 비로소 교사라 하겠지요.

 


  ㄴ.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


  배우는 사람이기에 학생이라고 느끼지 않아요. 배운 대서 학생이 아니라, 무엇을 배우고 싶은가를 말할 줄 알기에 학생이라고 느껴요. 곧, 학생은 가르치는 사람이에요. 학생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어른한테 ‘당신이 나한테 무엇을 이야기해야 하는가’를 가르치는 사람이 학생이로구나 싶어요. 그러니까, 교사는 늘 배우는 사람이지요. 학생이 무슨 이야기를 듣고 싶은가 하는 대목은 늘 배워야 하니까 교사는 늘 배울밖에 없어요. 학생은 늘 가르칠밖에 없고요.


.. 교사에게 모자란 지식을 습득하고 새로운 과목을 연구하고자 하는 호기심과 동기부여만 있다면, 이는 학생들에게 굉장한 이득이 되어 돌아온다 … 아이가 가진 능력에 대해 학교는 그저 잘해야 ‘기특한 재능’ 정도로 여길 뿐 졸업성적을 평가할 때 이런 것은 하나도 반영되지 않는다 … 학교는 학과목과 직접 관련되지 않은 학생들의 재능을 정식으로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  (144, 167쪽)


  아이들은 어른들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사랑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한테 꿈을 끊임없이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밥을 지어 아이들한테 차려 주어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옷을 지어 아이들한테 입혀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아이들은 어른들이 어떤 집을 지어 아이들과 함게 살아야 할는지 가르칩니다.


  어버이는 아이를 낳으며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하는 말을 까닭이 있어요. 아이를 낳으면, 아이가 늘 곁에 있기에, 이 아이가 어버이를 늘 새롭게 가르쳐요. 어버이가 된 사람은 아기가 옹알거리는 목소리와 몸짓을 알아들어야 합니다. 어버이는 자꾸자꾸 배워야 합니다. 아기 똥오줌 흥건한 옷가지를 빨래하면서 빨래를 새로 배웁니다. 아기 똥오줌을 가리게 하면서, 아기한테 젖과 죽과 미음과 밥을 먹이면서, 아기한테 말을 가르치면서, 아기한테 마을과 이웃과 숲과 새와 짐승을 가르치면서, 아기한테 풀과 나무와 들과 바다를 가르치면서, 어버이 된 사람은 이녁 스스로 온누리를 모두 새롭게 바라보고 새롭게 깨달으며 새롭게 배웁니다. 아이를 낳는 어버이는 아이와 언제나 함께 지내면서 언제나 새로운 삶을 배웁니다.


  교사는 어버이와 같아요. 어버이는 갓 태어난 아기들을 한결같이 보살피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운다면, 교사는 제법 자란 아이들을 하루 내내 보살피면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웁니다. 지식을 가르칠 때는 교사가 아니라 독재자나 폭압자나 권력자 굴레에 갇힙니다. 아이들한테서 삶과 사랑과 꿈을 배울 때에, 비로소 교사가 됩니다. 교과서 진도를 나가며 대학입시에 걸맞을 학생으로 길들일 때에는 교사가 아니라 바보나 멍청이나 얼간이가 됩니다. 아니, 노예가 되겠지요. 기계처럼 되고 말겠지요. 아이들하고 삶과 사랑과 꿈을 나누는 길동무가 될 때에, 비로소 교사가 돼요.


.. 학생들은 이 시간(수다 떨기)을 통하여 자신이 단지 영어나 수학을 배우는 학생으로서만 가치 있는 존재가 아니며, 하나의 인간으로서 하는 모든 경험이 소중함을 깨닫게 된다 … 학교가 그곳에 속한 이들이 서로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 채 공부만 하기 위해 임의로 모여 있는 곳이어서는 안 된다 … 학생들이 학교라는 곳에 대해 “나는 여기에 ‘있어야 하기’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있고 싶어서’ 있는다.” 하고 느끼기를 바란다 ..  (195, 208, 230쪽)


  독일사람 에냐 리겔 님이 쓰고, 한국사람 송순재 님이 옮긴 《꿈의 학교, 헬레네 랑에》(착한책가게,2012)라고 하는 책은 ‘교사’와 ‘학생’과 ‘학교’와 ‘마을’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차근차근 짚습니다. ‘가르침’과 ‘배움’과 ‘삶’과 ‘사랑’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조곤조곤 다룹니다.


  교사가 할 몫은 배움이요 학생이 할 몫은 가르침이라면, 학교가 할 몫은 교사와 학생이 서로를 아끼고 사랑하는 이웃으로 만날 수 있는 쉼터요 숲이 될 일입니다.


  학교는 쉼터가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쉬고 생각을 쉬며 몸을 쉬는 터전이 되어야 합니다. 학교는 숲이 되어야 합니다. 마음을 살찌우고 생각을 북돋우며 몸을 일으키는 숲이 되어야 합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일을 합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즐겁게 뛰놉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서로 까르르 웃고 떠듭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노래와 춤과 문학과 예술을 누립니다. 쉼터에서 쉬면서 사랑을 속삭이고 꿈을 키웁니다.


  숲에서 하늘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나무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새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벌레바라기를 합니다. 숲에서 구름과 바람과 흙과 풀과 짐승과 냇물과 어우러집니다.


.. 아이 방에 텔레비전을 들여놓는 것에 아무런 문제의식도 가지지 않은 부모라면 아이를 우리 학교에 등록시키지 말아 달라는 것을 하나의 기본원칙으로 세웠다. 자기 아이에게 어떤 능력을 키워 주고 이를 계발하도록 이끌어 줄지는 부모가 직접 결정할 문제라 생각했다 … 그나마 건강한 식생활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는 학부모도 드물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부모들 사이에서는 아이에게 군것질을 못 하게 했을 때 생길 난리법석을 감당하느니 하루 종일 방송에서 흘러나오는, 젤리와 크림과자가 우리 아이들을 행복하고 건강하게 만들어 준다는 광고를 믿어 버리고 말자고 생각하는 분위기가 지배적이다 ..  (263, 265쪽)


  도시에 짓는 학교를 보면 어디에서나 감옥이 떠오릅니다. 똑같은 칸, 똑같은 골마루, 똑같은 차림새, 똑같은 말투, 똑같은 시간표,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몸가짐, 똑같은 신분과 계급과 서열, …… 오늘날 학교에서는 폭력과 따돌림이 춤출 수밖에 없습니다. 사랑이 없는 학교인걸요. 꿈이 없는 학교인데요. 삶이 없는 학교에 폭력과 따돌림이 감돌밖에요.


  학교에는 칸이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건물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학교는 운동장이 따로 없어도 됩니다. 학교는 풀과 나무가 마음껏 자라는 숲이면 되고, 냇물이 흐르고 골짜기가 이루어지는 멧자락이면 됩니다. 밥을 얻고 옷을 기우며 집을 짓는 삶터가 학교입니다. 이야기보따리를 꾸리고, 이야기꽃을 피우며, 이야기샘이 흐르는 데가 학교입니다.


  학교라고 하는 시설이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모든 풀이름과 나무이름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제도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집짓기·옷짓기·밥짓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교육이나 복지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사랑이랑 꿈이랑 믿음을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학교라고 하는 울타리가 없던 지난날, 사람들은 누구나 춤과 노래와 이야기를 아이들한테 물려주었습니다.


  이제 학교가 서면서 아이도 어른도 풀이름과 나무이름을 하나도 모릅니다. 이제 학교가 생기면서 사람들은 집도 옷도 밥도 지을 줄 모릅니다. 이제 학교가 나타나면서 사람들은 사랑도 꿈도 믿음도 속삭이지 않습니다. 이제 학교가 퍼지면서 사람들은 춤도 노래도 이야기도 스스로 빚지 않습니다.


  아름답게 배우며 살아갈 때에 교육입니다. 아름답게 가르치며 어깨동무할 때에 교육입니다. 교육은 아주 쉬워요. 삶이면 교육이에요. 삶을 나누기에 교육이고, 삶을 즐기기에 교육입니다. 삶이 아니라면 모두 거짓입니다. 삶하고 동떨어지면 모두 껍데기입니다. 삶을 말할 때에 교육을 말할 수 있고, 삶을 나눌 때에 참배움이 이루어집니다. 4346.1.25.쇠.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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