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이름은 욤비 -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기
욤비 토나.박진숙 지음 / 이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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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책과 함께 살기 102

 


독재정권과 싸우며 나라를 떠나다
― 내 이름은 욤비
 욤비 토나·박진숙 글
 이후 펴냄,2013.1.4./16500원

 


  나는 언제부터 하늘 올려다보기를 좋아했을까 하고 가만히 헤아려 봅니다. 국민학교에 처음 들어가던 1982년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고, 중학교에 들어가던 1988년과 군대에서 흰눈 멧자락 바라보던 1995년∼1997년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습니다. 내가 미처 떠올리지 못할 수 있는 너덧 살 아이였을 적에도 하늘을 즐겨 올려다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두어 살 아이였을 적에도 아장걸음 걸으면서 골목동네에서 하늘을 곧잘 올려다보았으리라 생각합니다.


  내 어린 날, 충청남도에 있는 외가집에서 밤하늘 별을 쏟아질 듯 보았습니다. 외가집 형과 누나는 늘 보는 별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여겼지만, 나는 저렇게 쏟아지는 별을 늘 보고 싶었습니다. 그무렵, 1980년대 첫머리에는 인천에서도 별을 제법 볼 수 있어, 이럭저럭 별자리를 그릴 만했지만, 학교에서나 동네에서나 별자리를 이야기하거나 달빛을 이야기하는 동무는 없었어요.


  그러고 보면, 한낮에 소나기 쏴아 지나가고 찾아드는 무지개를 좇는다며 달리기를 하던 동무는 몇 없습니다. 소나기가 쏴아 지나갈 때면 소나기가 빠른지 내가 빠른지 땀 줄줄 흘리며 달리기를 했습니다. 언제나 소나기한테 따라잡히지만, 꼭 한 번, 소나기가 그칠 때까지 비를 안 맞고 앞서 달린 적 있어요. 그날, 빗물에 안 젖은 몸으로 바라본 무지개는 몹시 싱그러웠습니다.


  중학교라는 데에 들어가서 밤늦게까지 붙잡히느라 낮도 저녁도 모르던 하루에 시달리기 앞서까지, 국민학교 공부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으레 무지개를 보았습니다. 한여름에는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 이 세 가지는 내 벗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공장마다 굴뚝에서 끝없이 매연을 쏟아내지만, 그런 인천 하늘에서도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를 보았어요.


  내 마음이 이들 세 벗, 뭉게구름과 소나기와 무지개를 바랐기 때문일까요. 나한테만 이들 세 벗이 보였을까요. 다른 학교동무나 동네 놀이동무는 이들 세 벗을 바라거나 생각하지 않았기에 뭉게구름도 소나기도 무지개도 얘기를 안 하며 어울렸을까요.


.. 콩고는 내전과 독재를 거치며 역사의 격동기를 지나고 있었지만, 나는 초원과 정글을 뛰어다니는 철부지에 불과했다 … 밤늦게 기숙사로 들어가면 한 벌뿐인 티셔츠를 열심히 빠는 게 내 일과의 끝이었다. 그래도 거리낌이 없었다. 고향에서도, 기숙사에서도 금욕적인 생활이 몸에 배어 있었기 때문이다 … 킨샤사 국립대학에 다니는 학생들 사이에 패인 갈등의 골은 깊었다. 킨샤사를 비롯한 도시 출신의 부유한 학생들과 나 같은 지방 출신 고학생 사이에는 넘지 못할 벽이 있었다 ..  (19, 40쪽)


  국민학교 3학년이던 1985년은 나로서는 열 살이 되는 나이입니다. 그해 인천에는 가을비가 어마어마하게 퍼부었습니다. 텔레비전에서 서울 아닌 인천 이야기를 퍽 오랫동안 들려준 적은 그때 빼고는 거의 없었지 싶습니다. 이제는 아파트가 높직하게 들어선, 예전 인천 시외버스역에는 찰방찰방 물결치는 빗물에 잠긴 버스들이 수두룩했고, 시외버스 타고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어른들은 그저 발을 동동 구르는데, 나는 동무하고 이 앞에서 ‘공짜 헤엄터 생겼다!’고 여기며 물장구 치고 놀았습니다. 빗물에 잠긴 버스 지붕에 올라타 앉은 버스 일꾼 멍한 얼굴을 보고서야 비로소 물놀이를 그쳤어요.


  그리고 이해 팔월이었나 구월이었나, 또는 칠월이었나, 아버지 사진기를 살짝 빌려서 구름 사진을 열 장 남짓 찍습니다. 모처럼 집에서 하늘바라기를 하며 놀다가, 저 하늘 어여쁜 구름을 먼먼 뒷날에는 못 볼 수 없겠다고 느낍니다. 앞으로는 우리 나라가 더욱 지저분해지고 매캐한 바람이 불며, 이 어여쁜 구름은 내 마음속에만 남으리라 느낍니다.


  좋은 사진기인지 아닌지 모르지만, 완전자동으로 찍는 사진기 단추를 찰칵찰칵 누릅니다. 아무튼 누르면 찍을 수 있는 사진기였어요. 이 구름도 예쁘니 찍고, 저 구름도 예쁘니 찍습니다. 5층짜리 나즈막한 아파트 4층집에서 구름을 올려다보며 한 장 두 장 찍습니다.


  그러고서 스물아홉 해 지난 2013년 오늘, 참말 나는 어릴 적 보던 어여쁜 구름을 좀처럼 다시 보지 못합니다. 열 살 어린이가 인천 바닷가 공단 가까이에서 보던 구름조차, 고흥 시골마을에서도 잘 찾아볼 수 없어요.


.. 과거 로랑 카빌라는 모부투에 대항하는 세력을 모으면서 무력의 상당 부분을 콩고 인근의 르완다와 우간다에서 빌려 왔다. 그러면서 대통령궁에 입성하게 되면 콩고 영토 일부를 르완다와 우간다에 떼어 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그러나 대통령이 된 뒤에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분할을 약속한 지역은 각종 천연자원의 보고였다. 그곳을 떼어 준다는 것은 황금알 낳는 거위를 내주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로랑 카빌라가 약속을 지키지 않자 르완다와 우간다 세력이 들고 일어난 게 그 유명한 제2차 콩고 내전(1998년∼2003년)이다. 4천 명에 이르는 투치족 군인들이 킨샤사 시내까지 침입해 들어오기도 했다 ..  (67쪽)


  늘 고흥 시골집에서 네 식구 오순도순 지내다가, 때때로 도시로 볼일을 보러 마실을 합니다. 인천에도 가고 부산에도 가며 순천에도 갑니다. 서울에도 가다가는 청주에도 갑니다. 크고작은 도시에 가는 길에 으레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가까운 시골인 장흥에 갈 적에도 하늘을 올려다봅니다. 고흥자락에서 돌아다닐 때에도 마을마다 어떤 하늘을 누릴 수 있는가 헤아리며 하늘을 가만히 바라봅니다.


  너무 마땅한 노릇인데, 어느 마을에서 바라보더라도 구름이 다릅니다. 구름빛이 다르고 구름무늬가 달라요. 햇살이 다르고 햇볕이 달라요. 바람이 다르고 바람내음이 다릅니다.

  제아무리 자동차 북적거리며 시끌벅적한 서울이라 하더라도, 달빛을 찾을 수 있습니다. 비록 서울이나 부산 같은 데에서는 달빛이 스밀 틈 거의 없지만, 가녀린 달은 숱한 등불과 전깃불 사이로 빼꼼히 고개를 내밉니다. 드높은 건물 사이에서 달을 찾을 때면 ‘이야, 반갑네.’ 하고 인사를 합니다. 손을 들어 달한테 ‘잘 있었니?’ 하고 말을 걸기도 합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달을 살짝 보고 더는 못 보기 일쑤입니다. 길을 걷노라면 어느새 이 건물에 가리고 저 건물에 막혀 안 보이거든요. 시골에서는 하염없이 걸어도 해하고 속닥속닥 이야기꽃 피울 수 있지만, 시골에서는 이 들길 저 멧길 걸어도 달이랑 도란도란 이야기잔치 벌일 수 있지만, 조그마한 도시에서마저 달하고 벗삼기는 꽤 힘듭니다.


  도시사람은 달을 안 좋아할까요. 도시사람은 달이 안 반가울까요. 어쩌면, 도시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달을 생각할 겨를이 없는지 몰라요. 도시살이란, 달하고 등지는 삶일는지 몰라요. 도시에서 돈벌이 하느라 바쁘고, 도시에서 일자리 지키느라 바쁩니다. 도시에서 자가용 모느라 바쁘고, 도시에서 자가용 댈 빈 구석 찾느라 바쁩니다. 도시사람은 달이고 별이고 해이고 무지개이고 구름이고 찾아볼 틈이 없어요.


.. 마리는 콩고민주공화국 옆에 있는 콩고공화국 사람이었다 … 외국인들이 ‘콩고민주공화국’과 ‘콩고공화국’을 헷갈리듯, 나 역시 ‘북한’과 ‘남한’을 헷갈렸던 것이다 … 마음에 입은 상처는 쉬 사라지지 않았다. 상처를 치유할 힘이 모두 바닥나 버린 것 같았다. 모멸감 섞인 시선과 부당한 대우를 받으며 늘 전쟁터 한복판에 서 있는 기분으로 일하고 생활했다 …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나는 ‘아프리카 노동자’ 아니면 그냥 ‘깜둥이’일 뿐이었다 ..  (87, 100, 190, 200쪽)


  아침이면 파르스름한 빛이 살며시 걷히며 노르스름한 하늘이 열리고 이내 불그스름한 햇덩이가 떠오릅니다. 그런데, 나 또한 이 새 아침을, 이 새 햇살을, 도시에서는 거의 못 느꼈어요. 다만, 어릴 적 인천에서 학교를 다닐 때에는 날마다 보기는 했어요. 나는 국민학생 때에도 새벽 여섯 시 반에 일어나 학교로 걸어갔어요. 중·고등학생 때에는 새벽 다섯 시 반에 일어나 학교로 걸어가거나 버스를 타고 갔어요. 고등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삶터를 옮겨 대학교를 다섯 학기 다니고 그만두기까지 신문배달을 하며 아침해를 봅니다. 대학교 그만두고 신문배달을 잇는 내내 으레 아침해를 봅니다. 신문배달은 그만두고 출판사 일꾼으로 들어갈 적에도 새벽 일찍 일터로 가는 버릇을 이으며 언제나 아침해를 봅니다.


  구름이 짙게 끼어 해가 보이지 않더라도 해가 뜰 자리를 바라봅니다. 햇살 기운이 어떻게 스미는가 하고 헤아립니다. 바람이 어디에서 어떻게 부는가를 눈을 감고 살갗으로 느껴 봅니다. 하늘이 밝게 열리며 내 눈자위를 따사로이 어루만지는 느낌을 즐깁니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어디에서나 어떤 건물에 깃들어 일을 해야 하니, 어느새 해를 잊고 하늘과 구름과 바람을 잊어요. 사무실에서는, 또 지하상가나 지하철에서는, 낮도 밤도 잊습니다. 네 식구 함께 고즈넉한 고흥 시골마을에서 조용히 살아가면서 바야흐로 새벽·아침·낮·저녁·밤이 흐르는 결을 살핍니다. 먼저 내 몸으로 받아들이고 내 마음으로 아로새깁니다.


.. 침대에 누워 서울이 콩고의 정글 같다는 생각을 했다. 빌딩과 좁은 골목으로 이루어진 정글 말이다 … 한국 사람들은 왜 자기들 좋은 문화를 외국인에게는 적용하지 않는 것일까? 나중에 나이지리아 친구를 만났을 때 들었던 얘기가 정답인지도 모른다. “한국 공장에서 바뀌지 않는 게 있어. 한국 사람은 무조건 왕이야. 그 다음이 조선족이고, 그 다음이 필리핀이나 베트남에서 온 사람들이지. 아프리카? 아프리카 사람은 사람도 아니야.” 내 경험에서도, 크게 틀린 얘기는 아니었다. 한국 공장의 카스트 제도는 국적에 따라, 피부색에 따라, 사람들을 나누고 차별했다 ..  (109, 155쪽)


  집안에 텔레비전을 안 들이고, 신문을 끊은 지 열 해가 넘는 우리 집에서는, 사회 흐르는 이야기를 거의 모릅니다. 아니,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들을 값이 없고 알아야 할 까닭이 없다고 느낍니다. 어느 정치꾼이 어떤 말을 했건, 어떤 사건이나 사고가 터졌든, 우리 삶하고는 참으로 동떨어집니다. 수출이 얼마요 새 대통령이 누구요 하는 대목은 그야말로 대수롭지 않습니다. 주식시세표나 연예인 뒷이야기를 왜 들어야 할까요.


  우리 식구한테는, 올겨울에도 우리 집 마당 한켠 동백나무에서 몇 송이쯤 일찌감치 피어날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언제부터 봄꽃을 논둑과 밭둑에서 만날 수 있을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올봄에는 제비가 몇 월 몇 일에 처마 밑으로 돌아와서 반가운 인사를 건넬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큰아이는 얼마나 씩씩하게 뛰놀고, 작은아이는 얼마나 말문을 환하게 틀까 하는 대목이 대수롭습니다.


  그런데, 2013년 1월 겨울 한복판에 한국땅 크고작은 도시에 ‘스모그’가 덮쳤다고 하는군요. 1월 한복판에 청주로 마실을 와서 밥집에서 밥 한 그릇 먹다가 옆에 놓인 신문을 문득 바라보니 1쪽에 이런 이야기가 실렸어요. 중금속 잔뜩 머금은 스모그라 하는데, 도시사람은 어른도 아이도 모두 이런 바람을 마시며 살아야 하는구나 싶습니다. 그러고 보니, 고흥에서 청주로 오는 동안, 어둑어둑 뿌연 밤하늘이었지만, 하늘이 꽤 칙칙했어요. 왜 하늘이 이토록 뿌옇거나 칙칙하지 하고 고개를 갸웃했어요. 달이 어슴푸레 보이기는 하지만, 흐리멍덩한 빛이었어요. 그렇구나, 스모그로구나.


  그나저나, 도시사람 가운데 스모그 낀 하늘이 얼마나 아슬아슬하며 끔찍한가를 살갗으로 느낄 사람이 있을까요. 스모그가 왜 생기는 줄 알거나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까요. 스모그 끼는 도시에서 어떻게 살아야 아름답거나 즐거운가를 돌아볼 사람이 있을까요.


.. 콩고에서 받은 경제학 석사 학위와 정보요원 경력 따위는 한국에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러면 남은 선택지는 공장으로 돌아가는 길뿐이었다. 최저임금에도 못 미치는 돈을 받으며 하루 열두 시간씩 일해야 하는 그런 삶을, 언제가 될지 모를 그날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뜻이다. 왜 난민은 더 나은 삶을 꿈꾸면 안 되는가? 왜 난민은 배움의 열망을 충족시킬 수 없는가 ..  (280쪽)


  욤비 토나·박진숙, 두 분이 일군 이야기책 《내 이름은 욤비》(이후,2013)를 읽습니다. 콩고민주공화국에서 태어나 살다가 그만 한국(남한)이라는 나라로 ‘정치 망명’을 해야 했다던 욤비 토나라고 하는 아저씨가, 한국에서 겪은 일을 찬찬히 되새기는 이야기책입니다. 망명은커녕 이주노동자로서도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고 슬프고 힘겹게 살아야 하던 나날을 담은 이야기책입니다.


  책을 다 읽고 한참 생각에 잠깁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도 지난날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피울음 뱉으며 이 나라 떠난 사람이 퍽 많습니다. 이 나라 한국에서도 지난날 독재정권과 싸우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죽거나 다친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아니, 어떤 이들은 벌건 대낮에 총을 맞아 죽었어요. 어떤 이들은 훤한 대낮에 몽둥이를 맞아 죽었어요.


  2013년 한국은 민주주의 사회일까요. 한 해가 더 흐르면 자유 물결이 넘실거린다 말할 수 있을까요. 한 해 새로 찾아오면 평화 날갯짓 춤출 만할까요. 한 해 새삼스레 찾아들면 평등 꽃노래 흐드러질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한국 사회가 얼마나 민주요, 자유요, 평화요, 평등인지, 참말 잘 모르겠습니다. 도시 길가에도 뿌리를 내려 작은 잎사귀 틔우는 들풀 한 자락 사랑스레 쓰다듬을 겨를 없는 이 나라 수많은 사람들 가슴에 민주나 자유나 평화나 평등 같은 이야기가 얼마나 뿌리내린 채 춤출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대학입시에 목을 매달며 흐느껴 울거나 동무들을 따돌리거나 괴롭히느라 바쁜,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얼마나 민주와 자유와 평화와 평등을 아끼거나 보살피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이름은 욤비》를 쓴 욤비 토나 아저씨는 ‘한국에서 난민으로 살아가는 하루’를 보낸다 하는데, 곰곰이 따지면, 한국사람 가운데 고향 살뜰히 지키거나 돌보며 살아가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잘 모르겠습니다. 고향을 잊거나 등지거나 모르거나 빼앗긴 채, 돈을 버느라 힘들고 일자리 지키느라 버거우며 아이들을 대학교 보내느라 등골 휘는 쳇바퀴 삶 아닌지, 참말 잘 모르겠습니다. 4346.1.17.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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