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hildren (Paperback) - Refugees and Migrants
Sebastiao Salgado / Aperture / 200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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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사람들과 사진으로 사랑을 나누기
 -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the children》(aperture,2000)



 돈없는 사람이 돈있는 사람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는 일이란 없습니다. 드물다 할 만한 일이 아니라, 아예 없다 할 만합니다.

 돈없는 사람은 사진을 찍을 일조차 드뭅니다. 그러나, 사진길을 걷고픈 꿈을 꾸는 돈없는 사람이 저와 비슷한 돈없는 이웃을 사진으로 찍는 일이 있습니다.

 돈없는 사람이 저와 비슷한 돈없는 이웃을 사진으로 찍을 때에는 둘로 갈립니다. 첫째, 사진을 찍기 앞서와 사진을 찍는 동안과 사진을 찍고 나서 한결같이 살가이 이웃으로 지내려는 매무새입니다. 둘째, 사진을 찍고 나서 돈있는 사람 자리에 서려는 매무새입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있는 사람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없는 사람도 사진으로 찍습니다. 돈있는 사람은 돈을 들여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돈없는 사람은 아주 드물게 사진책을 내놓을 수 있으나, 말 그대로 너무 드문 일입니다. 돈없는 사람이 ‘돈없는 삶으로 담은 사진’을 기꺼이 책으로 엮는다든지 두루 알린다든지 하는 일이란 참으로 드뭅니다.

 다큐멘터리라 하는 갈래를 이루는 사진을 생각합니다. ‘돈있는 사람’을 찍은 사진을 놓고 다큐사진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아직 이러한 사진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돈없는 사람’을 찍은 사진을 가리켜 인물사진이라 하거나 패션사진이라 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아니, 이제껏 이러한 사진은 없지 않느냐 싶습니다. 다큐사진이라 하면 으레 ‘가난하거나 힘들거나 어렵거나 고단한 사람’을 찍어야 이야기가 이루어지는 듯 여기곤 합니다.

 사진기를 쥐고 다큐멘터리를 이루려 하는 이들은 ‘가난한 사람’을 찾아나섭니다. 가난한 사람하고 여러 날 여러 달 여러 해를 함께 지내곤 합니다. 가난한 사람을 동무로 삼는다면서 자주 찾아가곤 합니다. 그런데, 다큐사진을 하는 이들 가운데 ‘한 가지 이야기만 온삶을 붙잡으며 사진찍기를 하겠다’는 사람은 매우 드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끝내고 나서 다른 이야기를 찾아나섭니다. 사진책 한 권 또는 사진잔치 한 번 할 만한 부피만큼 사진을 찍고는 ‘또다른 가난한 사람’을 찾아나섭니다.

 이효리 님을 찍은 패션사진을 헤아립니다. 이효리 님을 더 예뻐 보이도록 하는 사진이 가득합니다. 아프리카나 중남미 가난하다는 아이들을 찍은 사진을 떠올립니다. 하나같이 가엾어 보이거나 굶주려 보이거나 슬퍼 보이는 사진입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Sebastiao Salgado) 님 사진책 《the children》(aperture,2000)을 들춥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아이들》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았으나, 그냥 아이들이 아니라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책 이름은 ‘가난한 아이들’이 아닌 ‘아이들’입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이 내놓은 사진책에 붙은 이름을 곱씹습니다. 한국 다큐사진쟁이 가운데 ‘아이들’이라는 이름을 수수하게 붙이며 사진을 찍는 사람이 있는지 몹시 궁금합니다. 스스로 다큐사진이라 여기지 않고 ‘놀이를 즐기는 아이’를 찍은 편해문 님은 《소꿉》이라는 사진책을 내놓은 적 있습니다. 가만히 보면, 골목동네를 사진으로 담은 김기찬 님은 ‘골목’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았습니다. ‘골목 안 풍경’이라고 덧말을 달았습니다.

 《the children》을 한 장 한 장 넘깁니다. 사진책에 나오는 아이들은 하나같이 가난한 아이들입니다. 이 아이들은 제 모습을 제 사진기로 저희 스스로 찍을 일이 없습니다. 언제나 바깥에서 누군가 찾아와서 저희 모습을 찍은 다음 돌아갑니다.

 사진책에 드러나는 아이들은 한결같이 가난합니다. 한결같이 외롭습니다. 한결같이 고단합니다.

 그런데, 이 가난하고 외로우며 고단한 아이들은 모조리 ‘아이들’입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workers》라는 사진책에서도 ‘일꾼’ 모습만 보여주었습니다. 가난하며 외롭고 고단한 일꾼을 사진으로 담았는데, 그저 ‘일꾼’이라는 이름만을 붙이며 일꾼만을 보여주었습니다.

 돈있는 집 아이도 아이입니다. 돈없는 집 아이도 아이입니다. 이름있는 집 아이도 사랑스럽습니다. 이름없는 집 아이도 사랑스럽습니다. 힘있는 집 아이도 예쁩니다. 힘없는 집 아이도 예쁩니다. 아이는 누구나 아이이면서 사랑스러운데다가 예쁩니다.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이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 사진책을 차분히 들여다보면서 살가이 배우면 좋겠습니다. 겉모습을 키우거나 겉치레를 부리려고 ‘사진솜씨’를 북돋우는 길은 그만 배우면 좋겠습니다. 아이를 아이로 바라보고, 일꾼은 일꾼으로 바라보는 눈길과 손길과 몸길과 마음길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 스스로 사진으로 담는 일이란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가난한 사람 스스로 글로 써서 이야기하거나 그림으로 그려 보여주는 일 또한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든 가멸찬 사람이든, 제법 돈이 있는 사람이 글·그림·사진으로 이야기를 꾸립니다. 가난한 사람 스스로 가난한 살림살이를 고스란히 보여주는 사진을 찍지 못하는 줄 또렷이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려는 삶 가운데 하나로 사진찍기를 합니다. 사람들과 사랑을 나누려는 삶 가운데 하나로 글쓰기를 할 수 있고, 밥짓기를 해서 나눌 수 있으며, 옷짓기를 해서 나눌 수 있어요. 언제나 ‘사람들과 사랑 나누기’를 하는 흐름에서 어깨동무를 하는 사진찍기입니다.

 가난하니까 더 꾀죄죄해 보인다거나 더 슬퍼 보이도록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가난하니까 이 가난한 아이들을 불쌍히 여긴다거나 도와주도록 생각하게끔 이끄는 사진을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이 아이들은 모두 ‘아이들’입니다. 가난한 아이가 아닌 ‘아이’입니다. 사랑스러운 목숨을 선물받은 아이요, 아름다운 목숨을 곱게 이을 아이입니다.

 사진은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사진책 《the children》은 사진은 조금도 대단하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사진이야기를 묶으면서 아름다운 삶과 사랑과 사람을 잇는 고리를 보여줍니다.

 아이를 사랑해 주셔요, 이뿐입니다.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요, 이뿐입니다.

 누군가는 당신 살림집 네 살 아이를 한 번 더 꼬옥 껴안으면서 사랑하겠지요. 누군가는 군수공장에서 일하며 집식구 먹여살리는 짓은 그만두고 자전거공장이나 두부공장으로 일터를 옮긴다든지, 아예 시골마을에서 흙을 일구는 터로 보금자리를 몽땅 옮기면서 사랑하겠지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님은 아이들을 아이들 그대로 받아들이고 바라보며 사진을 찍는 길을 걷는 사랑을 나눕니다. (4344.5.12.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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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지음, 박상미 옮김 / 윌북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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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찾아 읽는 사진책 30] 스콧 슈만, 《사토리얼리스트》(윌북,2010)



 한국말은 ‘발돋움’입니다. 중국말이나 일본말은 ‘發展’입니다. 한글로 ‘발전’이라 적으면 한글이지, 한국말이 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오늘날 ‘발전’이라는 낱말은 들온말(외래어)로 뿌리를 내렸습니다. 바깥에서 들어온 낱말인 ‘발전’이지, 한국사람 스스로 일구거나 빚은 낱말인 ‘發展’이 아니에요. 한국사람은 스스로 한국말 ‘발돋움’을 잊거나 내팽개치거나 잃을 뿐입니다.

 한국사람이든 서양사람이든 일본사람이든 사진을 찍습니다. ‘撮影’을 하거나 ‘出寫’를 하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진기를 손에 쥡니다. ‘camera’를 손에 쥐지 않습니다. 저마다 사진을 합니다. ‘photo’를 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영어를 쓰는 나라에서 살아간다면 ‘사진’이 아닌 ‘photo’를 하겠지요. 중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라면 ‘寫眞’을 할 테고요.

 이 글을 쓰는 나, 이 사람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사람이기에 더 잘 났거나 덜 떨어지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땅에서 살아가며 한국말을 쓰는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말이 더 뛰어난 말이라고 여기지 않습니다. 한국말을 담는 한국글인 한글이 가장 훌륭한 글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저 한국땅에서 한국사람으로 태어나서 한국말을 즐겁게 쓰면 아름답다고 느낍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윌북,2010)를 읽습니다. 사진을 찍고 글을 쓴 스콧 슈만 님은 머리말에서 “독자들이 이 책에 실린 사진들을 보면서 좀 다른 각도에서 패션과 스타일을 보게 되길 바란다(7쪽).”고 이야기합니다. 그렇습니다. 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는 ‘패션사진책’입니다. 사진책이 아닌 ‘패션사진책’이고,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보여줍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이 아닌 패션사진을 하지만, ‘사진을 하는 사람다운 넋’을 놓치지는 않습니다. “헤어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에게 저쪽에 가 있으라고 하는데, 사진을 찍을 때마다 달려와서 매만지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완벽하면 할수록 때로는 완전히 지루한 사진이 되기 때문이다(163쪽).” 같은 말을 읽으며 생각합니다. 더없이 마땅합니다. 아주 마땅하기에 굳이 토를 달 까닭이 없는 말입니다. 그리고, 그지없이 마땅한 만큼, 굳이 이렇게 이야기할 까닭마저 없어요. 사진을 찍는 사람이라면 이러한 매무새쯤은 밑바탕으로 다스려야 합니다.

 그러면, 사진을 찍는 사람만 이러한 매무새를 다스려야 할까 궁금합니다. 글을 쓰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글을 쓰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그림을 그리는 사람도 ‘빈틈이 없는 그림을 그리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빈틈없다는 사진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사진입니다. 빈틈없다는 글은 말 그대로 빈틈없다는 글입니다.

 그저 이러할 뿐입니다.

 사진이든 글이든 그림이든, 또 만화이든 춤이든 노래이든, 여기에 영화나 연극이나 공연이든 매한가지예요. 빈틈이 없는 작품을 노리면, 틀림없이 빈틈이 없는 작품이 태어납니다. 그러나, 빈틈은 없되 아름다움 또한 없기 마련입니다. 빈틈은 없지만 사람내음 또한 없기 일쑤예요.

 ‘사진 아닌 패션사진’을 하는 이들을 바라볼 때에는 늘 이러한 대목이 걱정스럽습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저절로 ‘패션사진’이 이루어지도록 나아가면 좋을 텐데, 처음부터 ‘패션사진’이라고 못을 박으니 슬픕니다.

 다큐사진을 하는 분들을 바라볼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사진을 하면서 시나브로 ‘다큐사진’이 되도록 살아가면 즐겁습니다 구태여 ‘다큐사진’이라고 대못을 꽝꽝 박아야 거룩한 다큐멘터리 작품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나라 안팎 이름난 상패를 거머쥐어야 손꼽히는 다큐멘터리 작품이 되지 않아요. 《다카페 일기》 같은 사진책이나 《윤미네 집》 같은 사진책은 참 사랑스러운 다큐사진이라 할 만합니다.

 그런데, 《다카페 일기》이든 《윤미네 집》이든 이 사진책을 일군 사진쟁이는 ‘다큐사진’을 찍겠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사진을 찍겠다’는 마음마저 아닙니다. 틀림없이 사진기를 쥐어 사진을 찍지만, 모리 유지 님이 《다카페 일기》를 일구거나 전몽각 님이 《윤미네 집》을 가꿀 때에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이었구나 싶어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아름답게 껴안고픈 마음을 담은 손길로 함께 지내며 ‘사진도 몇 장 같이’ 찍었을 뿐입니다.

 다시 《사토리얼리스트》를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이 젊은 여성은 내가 사진을 찍을 때 무척 부끄러워하면서 어색해 했다. 긴장을 풀어 주려고 갖은 재주를 피웠지만 전혀 통하지 않았다(198쪽).”고 말합니다. 사진찍기는 재주놀음이 아니니까요. 사람을 사귀려 하지 않고 ‘멋진 사진’만, 아니 ‘멋진 패션’만 뽑아내려고 하면, ‘사진찍기’이든 ‘패션사진찍기’이든 이루어질 수 없는 노릇입니다. 스콧 슈만 님은 사진기를 내려놓거나 당신이 사진으로 담고 싶은 사람하고 마음으로 만나야 합니다.

 스콧 슈만 님이 쓴 글을 더 읽으면, 스콧 슈만 님은 ‘더 많이 찍거나 다시 찍어’ 보는 틀에서 벗어나, ‘사진쟁이가 아니라 이웃이나 동무처럼 다가갔을’ 때에 비로소 ‘길거리에서 모델 노릇이 된 여느 사람들’이 부끄러움이나 떨림이나 뻣뻣함을 풀면서 스스럼없이 웃거나 멋진 모습을 잡아 주었다고 밝힙니다.

 사진은 기계놀음도 재주놀음도 아닙니다. 사진은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거나 아끼거나 좋아하거나 반기는 숱한 사람들하고 어우러지는 삶이 곧 사진입니다. 아니,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도 나타내거나 이러한 삶을 사진으로 길어올리기도 한다고 이야기해야 옳습니다.

 사진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진입니다.

 사람은 발돋움하지 않습니다. 사람은 예나 이제나 똑같이 사람입니다.

 기계가 바뀌거나 나아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문화와 문명이 태어나거나 깊어진다고 하지만, 발돋움하는 일이 아닙니다.

 사진은 예나 이제나, 사진기를 쥐었건 사진기 앞에 서건, 서로서로 삶을 즐기는 나날입니다. 사람들은 예나 이제나, 어디에서 무슨 일을 하면서 어떻게 살아가건, 서로서로 부둥켜안거나 어우러지면서 사랑을 나누는 이야기꽃입니다.

 “사진에 담고자 하는 것이 그녀라는 내 의도를 이해했을 때 그녀는 ‘노, 미 브루타’라고 말했다. 사진에 찍힐 만큼 예쁘지 않다는 말을 알아들을 정도는 되었다(445쪽).”를 읽으며 거듭 생각합니다. 스콧 슈만 님은 할머니한테 당신은 참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했답니다. 그래요, 할머니는 참으로 아름답습니다. 아름답기에 사진으로 찍을 만하다고 이야기할 만합니다.

 할머니는 왜 아름다울까 생각할 노릇입니다. 할머니가 어떻게 아름답기에 애써 사진으로 찍어야 할까를 돌아볼 노릇입니다.

 삶이 아름다울 때에 사랑이 아름답고, 사랑이 아름다우니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사진기를 손에 쥐어 사람을 사진으로 담고픈 사람이라면, 어느 한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살포시 느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얼굴’을 찍는 사진이 아니라, ‘사람한테서 드러나는 사랑과 삶’을 찍는 사진일 테니까요.

 이리하여, 사진이든 사람이든 발돋움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발돋움이 아니거든요. 삶 또한 발돋움이 아니에요. 더 나아지는 사랑이 아니라, 한결같이 따사로운 사랑입니다. 더 나아지는 삶이 아니라, 늘 넉넉한 삶입니다.

 사진책 아닌 패션사진책 《사토리얼리스트》를 손에 쥔 이들이 이 패션사진책을 넘기면서 ‘사람들마다 어떠한 사랑과 삶을 받아들여 즐기거나 누리는가’를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꿈결로 받아들인다면 어떠하랴 싶습니다. (4344.5.11.물.ㅎㄲㅅㄱ)


― 사토리얼리스트 (스콧 슈만 사진·글,박상미 옮김,윌북 펴냄,2010.6.20./178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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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차이 Chang Ts‘ai 열화당 사진문고 30
장차이 사진, 젠융빈 글, 한정선 옮김 / 열화당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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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를 기록하는 사진’이란 없어요
 [찾아 읽는 사진책 21] 젠융빈·한정선 엮음, 《장차이》(열화당,2008)



 지난날 ‘열화당 사진문고’는 ‘프랑스 photo poche’를 그대로 옮겨서 내놓았습니다. 오늘날 ‘열화당 사진문고’는 ‘영국 phaidon’을 고스란히 옮겨서 내놓습니다. 사진문화나 사진예술이 거의 자리잡지 못하는 한국 사진밭을 헤아린다면, 포토 포쉐이든 페이돈이든 옮겨서 내놓는 일이란 무척 고맙습니다. 한 발 나아가 ‘taschen’이라든지 ‘朝日カメラ’를 옮겨서 내놓을 수 있어요. 사진책을 팔아 돈을 벌기 힘든 한국땅에서, 돈있는 출판사가 선뜻 프랑스나 영국이나 독일이나 일본에서 만든 손꼽히는 사진책을 펴낼 수 있다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가만히 보면, 이름난 사진쟁이라 하든 이름 안 난 사진쟁이라 하든, 사진책을 낼 때에는 으레 제살깎기를 하듯 내놓기 마련입니다. 아주 이름난 사진쟁이가 아니고서는 제살깎기 아닌 ‘사진책 내기’란 몹시 어렵습니다.

 지난날이든 오늘날이든, 이러구러 나라밖 사진문고를 한국말로 옮겨서 낸다 할 때에는, 이러한 사진책을 내면서 저작권삯을 치렀든 안 치렀든 조금 더 바지런히 옮겼더라면 얼마나 좋았겠는가 하고 생각합니다. 몇몇 아주 이름난 사진쟁이 사진책뿐 아니라, 한국에 거의 안 알려졌다 하더라도 ‘아름다운 사진’이나 ‘사랑스러운 사진’이나 ‘믿음직한 사진’을 펼쳐 보인 사람들 따사로우면서 넉넉한 손길을 느끼도록 했다면 얼마나 고마웠을까 하고 헤아려 봅니다.

 2008년을 끝으로 더는 안 나오는 ‘새 열화당 사진문고’ 가운데 하나인 《장차이》(열화당,2008)를 읽습니다. 장차이 님 사진은 “서양 문물이 유입되던 시기의 상하이 풍경, 정치사회적 격변기의 타이완 사람들과 원주민들의 생활상 등을 관찰과 탐구의 열정으로 기록한 타이완의 선구적인 사진가”라고 합니다.

 아무래도 사진은 ‘역사를 기록한다’는 노릇을 톡톡히 한다고 여기기 때문에, 이처럼 지난 한삶을 고이 보여주는 사진을 요즈음 들어 높이 사곤 합니다. 틀림없이 사진은 ‘본 대로 찍어서 남깁’니다. 내가 보는 모습이든 네가 보는 모습이든, 저마다 보는 모습을 고스란히 찍어서 남깁니다.

 다만, 사진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하되, ‘내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합니다. 사진은 내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하되, ‘내가 생각하면서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합니다. 사진은 내가 생각하면서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하되, ‘내가 살아가며 내가 생각하는 동안 내가 보는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합니다.

 사진으로 담기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모습이란, 어느 한 나라나 한 겨레 역사라 할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담기는 ‘역사를 기록한다’는 모습이란, 어느 한 사람이 한 곳에서 부대끼는 만큼 바라보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담는 모습입니다.

 사진은 더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덜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기를 쥔 사람 삶 깜냥과 무게와 깊이와 너비와 속살만큼 담아냅니다.

 사진기를 쥔 한 사람이 타이완 어느 도시에서 어느 한 동네 사람들하고 깊이 사귀거나 어울렸다면 바로 이 어느 한 동네 사람들 삶자락만을 아주 깊으면서 살갑게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이 타이완 토박이하고 멧자락 깊이 들어가 조용히 살아갔다면 바로 이 멧자락 깊은 터전 토박이들 여느 삶(토속 생활)을 사랑스레 사진으로 담습니다. 사진기를 쥔 한 사람이 집에서 아이를 도맡아 키웠다면, 어느 한때(1920년대이든 1950년대이든 1970년대이든) 여느 살림집 아이 하나 자라는 동안 입거나 걸친 옷자락을 비롯해 생김새와 놀잇감이나 집살림을 요모조모 들여다볼 만한 사진을 남깁니다.

 ‘사진은 역사를 기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온 발자취를 담는다’고 말해야 올바릅니다.

 1980년대 민주운동을 사진으로 담는다고 할 때에도 ‘역사를 기록한 사진’이라 할 수 없습니다. ‘1980년대 민주운동하고 살아온 내 발자취’를 담는 사진일 뿐입니다.

 1980년대 민주운동 언저리에서 구경꾼으로 지냈는지, 그저 보도사진기자로만 머물렀는지, 민주운동을 ‘거친 폭력 시위대 몹쓸 짓’으로 여기며 지냈는지, 민주운동 한복판에서 온몸을 던지며 ‘독재정권 몰아내기’에 힘을 기울였는지 하는 내 삶자락이 담기는 사진입니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사진으로 담던 사람들도 매한가지입니다. 축구경기를 마음껏 즐긴 사람인지 축구경기가 벌어지는 언저리에서 구경꾼으로 머물렀는지, 또는 이무렵 일어난 ‘미군 장갑차 살인사건’을 살피는 한 사람으로 지냈는지 하는 ‘내 삶 한 자락 발자취’를 담는 사진이 됩니다.

 장차이 님 사진을 담은 《장차이》는 ‘1940∼50년대 현대 타이완 사회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장차이가 살았던 1940∼50년대 타이완 어느 한켠 이야기’를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기록이란 없습니다. 사진기록이란 없습니다. 글기록이든 그림기록이든 따로 없습니다. 모두 내 삶이면서 내 이야기가 되고, 내 모습이면서 내 얼굴이 됩니다. 더 뜻있는 사진이란 없고, 더 뜻없는 사진이란 없습니다. 더 좋은 사진이나 더 나쁜 사진은 없습니다. 2050년이나 2100년쯤 될 때에는, 이들 2050년이나 2100년 뒷사람은 2000년대나 2010년대 오늘 이야기를 어떤 눈길로 바라보려나요. 앞으로 2050년대 뒷사람이나 2100년대 뒷사람 또한 ‘2000년대 한국 사회 모습’이나 ‘2010년대 한국 서민 생활 모습’ 같은 이름을 붙이는 ‘사진기록’을 이야기하려나요. (4344.5.9.달.ㅎㄲㅅㄱ)


― 장차이 (젠융빈·한정선 엮음,열화당 펴냄,2008.11.15./12000원)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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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글이 너무 맛!있습니다~~
    from 즐겁게~재밌게~美色不同面 半夜佳人 2011-05-09 17:49 
    된장님의 글이 너무 좋습니다~~ 제 맘대로 순서는 초큼 바꿔보았습니다~잘 발효된 된장에 맛나게 조물조물,나물반찬처럼 자꾸자꾸 생각이 납니다*^^*‘사진은 역사를 기록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어느 한 사람이 한 곳에서 부대끼는 만큼 바라보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담는 모습입니다.사진은 더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덜 담아내지 않습니다. 사진은 오직 사진기를 쥔 사람 삶 깜냥과 무게와 깊이와 너비와 속살만큼 담아냅니다.다만, 사진은 본 대로 찍어서 남기도록
 
 
 
男子 (ペ-パ-バック)
梅 佳代 / リトル·モア / 200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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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을 만든 남자한테 말을 걸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5] 카요 우메(梅 佳代), 《男子》(Little More,2007)


 우리 집 첫째 아이가 하루가 다르게 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내 어린 나날은 어떠했을까를 가만히 곱씹습니다. 이른아침부터 늦은밤까지 지치지 않으면서 엉겨붙거나 노는 품을 바라보면서 아이들은 이렇게 싱싱하거나 기운차게 살아간다고, 무럭무럭 자라는구나 하고 헤아려 봅니다.

 수백 가지 웃음과 눈물을 보여주는 아이입니다. 수천 가지 몸짓과 노래를 선보이는 아이입니다. 수만 가지 이야기와 꿈을 밝히는 아이입니다.

 모든 사람은 어머니가 있고 아버지가 있습니다. 누군가는 어른이 되기 앞서 어머니나 아버지가 흙으로 일찍 돌아가곤 합니다. 누군가는 새어머니나 새아버지를 맞아들일 테지만, 낳은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이는 내 목숨이 이 땅에 설 수 없습니다. 내가 낳아 돌보는 아이 또한 나와 옆지기가 있기에 예쁘게 태어나서 고맙게 살아갑니다.

 누구나 선물덩어리이면서 보배덩어리입니다. 누구나 선물을 듬뿍 물려주면서 보배를 가득 남깁니다. 일찍 혼인해서 일찍 아이를 낳든, 조용히 혼자 살아가며 아이 없이 지내든, 어떠한 사람이더라도 나부터 내 가슴에 펄떡펄떡 뛰는 목숨이 있습니다. 이 목숨을 어떻게 느끼느냐에 따라 사람과 삶과 사랑이 달라집니다. 일찍 혼인해서 아이를 열씩 낳았다지만 사람과 삶과 사랑하고는 동떨어질 수 있습니다. 짝꿍을 사귀지 않고 홀로 지내다가 앓아누워 조용히 숨을 거두더라도 사람과 삶과 사랑하고는 살가울 수 있습니다.

 내가 내 온몸을 사랑으로 돌본다면 나와 마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고스란히 사랑입니다. 내가 내 온마음을 믿음으로 보듬는다면 나를 둘러싼 모든 사람들은 한결같이 믿음입니다.

 사진이란 ‘하루가 다르게 살아가는’ 사람들 이야기를 담습니다. 하루 동안에도 ‘때마다 다르게 살아내는’ 사람들 사랑을 담습니다.

 사진은 수백 가지 웃음과 눈물뿐 아니라 수만 가지 이야기와 꿈을 밝힙니다. 수천 가지 몸짓과 노래 또한 알알이 즐기면서 보여줍니다.

 값진 사진기로 값진 사진을 이루지 않습니다. 높은 이름값으로 거룩한 글을 이루지 못해요. 어마어마하다는 권력으로 아름다운 그림을 빚지 못합니다. 사람 목숨 하나이든 사랑스러운 손길 한 번이든 살가운 삶 한 자락이든, 돈이나 이름이나 힘으로 건드리지 못합니다. 살가운 사랑으로 사람을 사귀는 예쁜 삶이란, 살가운 사랑으로 이웃과 어깨동무하는 어여쁜 삶으로 마주하면서 느낄 수 있습니다. 값진 사진기가 아니라 ‘내 온 사랑을 담아 손에 쥔 사진기’로 담는 아름다운 사람들 아름다운 사랑 아름다운 삶입니다.

 카요 우메(梅 佳代) 님 사진책 《男子》(Little More,2007)를 들여다봅니다. 사진책 이름이 더도 덜도 아닌 ‘남자’입니다. 첫 쪽부터 마지막 쪽까지 ‘남자 어린이’ 사진이 펼쳐집니다. 장난꾸러기인지 개구쟁이인지 까불이인지 철부지인지 알 길이 없는 남자 아이들 사진이 가득합니다.

 이 아이들, 이 사내 녀석들은 장난꾸러기라 할 만할까요, 개구쟁이라 할 만할까요. 사진기 앞에서 스스로 바보스러운 몸짓과 얼굴짓을 하는 요 녀석들은 까불이라 할 만한가요, 철부지라 할 만한가요.

 여자 아이라 하면 사진기 앞에서 어떤 모습 어떤 몸짓 어떤 낯빛이 될까 궁금합니다. 여자 아이라 하든 남자 아이라 하든 다 마찬가지가 될는지, 남자 아이는 남자 아이답게 남달라 보이는 모습이 될는지 궁금합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지 않더라도, 남자 아이나 어른은 참 바보스럽습니다. 스스로 얼마나 바보스러운 줄 모르며 바보스레 살아가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무엇 하나 대단하지 않은데, 어리석게도 대단하다 생각하며 얽매이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그러니까, 정치라든지 권력이라든지 스포츠라든지 이름값이라든지 얽매이는 남자 아이나 어른입니다. 남자가 얼마나 잘나서 ‘공차기는 남자만 하는 놀이’라고 여깁니까. 여자가 권투를 할 때에 우악스럽다거나 징그럽다고 여긴다면, 남자가 권투를 할 때에도 매한가지입니다. 서로서로 신나게 두들겨패서 넋을 잃고 쓰러지면 손뼉을 치며 웃고 떠드는 남자들이란 더없이 바보요 멍텅구리입니다. 참삶을 모르고 참사랑을 모르며 참사람을 모르는 철부지요 꺼벙이입니다.

 축구선수도 밥을 먹고 권투선수도 밥을 먹습니다. 밥을 안 먹어도 될 사람은 없습니다. 축구를 못 하든 안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밥을 못 먹거나 밥을 할 줄 모른다면 큰일입니다. 대통령이나 국회의원이 되든 말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밥을 못 먹거나 밥을 할 줄 모른다면 살지 못합니다.

 카요 우메 님 사진책 《男子》는 어린아이 모습을 담아 ‘남자’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어린아이 모습으로만 읽을 남자 이야기만은 아니로구나 싶습니다. 남 앞에서 제 모습을 돋보이려는 이 바보스러운 남자들은 ‘사진에 찍힌 몇몇 아이만 바보스럽다’는 소리가 아닙니다. 이 아이들이 바보스러운 노릇이 아니라, ‘남자’라고 하는 목숨붙이들이 얼마나 바보스러운 짓을 하면서 바보스러운 줄 모르고 바보스러운 꼴을 되풀이하면서 제 삶을 슬프게 잊는가를 들려주는 셈입니다.

 한 마디로든 두 마디로든 세 마디로든 남자는 바보스럽습니다. 이 바보스러운 남자들이 정치 권력이나 사회 권력이나 사진 권력을 움켜쥡니다. 철없고 까부는 남자들이 평론이니 학문이니 무어니를 온통 거머쥡니다. 참말 남자들은 뭔 짓을 하는지 스스로 알기나 하겠습니까. 뭔 짓을 하는지조차 스스로 모르면서 바보짓을 하는 사람들이 곧 남자라는 목숨입니다. 슬프며 가녀린 목숨입니다. 쓸쓸하며 허전한 목숨입니다. 따순 손길과 포근한 눈길을 바라는 애처로운 목숨입니다. (4344.5.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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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4〉秋田の民俗 (ちくま文庫) (文庫)
木村 伊兵衛 / 筑摩書房 / 1995년 7월
평점 :
품절




 모두 그리운 모습, 오늘은 오늘을 찍는다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4 秋田の民俗》(筑摩書房,1995)



 누구나 사진을 찍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사진을 찍습니다. 책으로 묶는다든지 사진잔치를 열어야 비로소 사진쟁이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 식구끼리 웃고 떠들며 넘기는 사진첩에 담을 사진을 찍더라도 사진쟁이가 됩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릴 수 있습니다. 누구나 그림을 그립니다. 멋들어진 곳에서 멋들어진 틀에 끼워 그림을 내다 걸어야 그림쟁이가 되지 않습니다. 나와 벗과 살붙이가 웃고 떠들며 돌아보는 살가운 그림이 된다면 그림쟁이가 됩니다.

 이름난 문학평론가가 손뼉을 쳐 주는 문학을 써야 글쟁이가 아닙니다. 이름난 출판사에서 책으로 나와 수십 수백만 권이 팔려야 비로소 쓸 만한 글이 아닙니다. 나라 안팎에 널리 알려지거나 불리는 노래를 짓거나 불러야 좋은 노래가 아닙니다.

 나 스스로 좋아서 쓰는 글입니다. 내가 좋아하니까 그리는 그림입니다. 내 마음을 담아 부르는 노래입니다. 내 삶을 사랑하면서 찍는 사진입니다.

 모두 그리운 모습이기에 오늘은 오늘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모두 애틋한 이야기이기에 오늘은 오늘을 글로 씁니다. 모두 살가운 이웃이기에 오늘은 오늘을 그림으로 담습니다.

 글을 쓰다 보면 어제나 그제 이야기를 쓴다든지, 모레나 글피 이야기를 쓴다 할 만합니다. 그렇지만 어제 이야기를 돌이키든 모레 이야기를 톺아보든, 언제나 오늘을 살아가는 나로서 쓰는 오늘 글에서 비롯합니다. 꽃이나 나무나 사람을 그림으로 그릴 때면, 처음 붓을 들 때와 마지막 붓질을 할 때는 다르다 할 만합니다. 여러 날을 두고 그림을 그리면, 처음 바라보던 모습을 처음 모습 그대로 그린다 하기 어려울 수 있어요. 1초 만에 휘리릭 그려내든 1분 만에 재빨리 담아내든, 그림을 그린다 할 때에는 1초와 1분 사이에 살아낸 모습을 고스란히 옮깁니다. 한 달에 걸쳐 그림 한 장을 그린다면 한 달이라는 나날과 삶과 모습과 이야기가 그림 한 장에 스미는 셈입니다.

 사진은 오늘을 찍습니다. 사진은 어제도 모레도 찍지 못하고, 오로지 오늘만을 찍습니다. 1초에 여러 장을 찍을 수 있는 사진기인 만큼, 사진은 오늘 가운데에서도 몇 시 몇 분 몇 초로 끊으면서 찍을 수 있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많은 모습을 어마어마하게 많은 이야기를 담아 보여줄 만합니다.

 같은 글이라 하더라도 쓰는 사람에 따라 맛과 멋이 다릅니다. 같은 그림이라 하더라도 그리는 사람에 따라 깊이와 너비가 다릅니다. 돌멩이를 찍든 문짝을 찍든, 사진기를 손에 쥔 사람이 돌멩이와 문짝을 어떻게 바라보며 함께 살아가는 이웃으로 느끼는가에 따라 사진맛과 사진멋이 달라져요. 사진깊이와 사진너비가 새롭습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는 몇 년 몇 월 몇 일 몇 시 몇 분 몇 초라는 틀에 사로잡힌 채 ‘오늘 사진’을 찍지만, 누군가는 ‘나와 네가 처음 태어나던 때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서로 다르게 일군 삶을 나란히 마주하면서 느끼는 오늘 사진’을 찍기 때문입니다.

 기무라 이헤이(木村伊兵衛) 님이 빚은 사진을 그러모은 자그마한 사진책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4 秋田の民俗》(筑摩書房,1995)을 들여다봅니다. 이웃나라 일본은 사진책을 이처럼 손바닥책으로 아기자기하게 묶어서 내놓곤 합니다. 책값은 고작 840엔. 쪽수는 208쪽. 한국에서는 한 사람 사진삶과 사진넋을 조그마하면서 예쁘장한 책 하나에 살뜰히 그러모으기 힘들다고 새삼 느낍니다. 이 사진을 더 큼지막하게 바라볼 수 있다면 느낌이 한결 깊어질 수 있으리라 생각하지만, 자그마한 크기로 바라본대서 느낌이 옅거나 어수룩할 수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며 오늘을 아름다이 사진으로 옮긴 아름다운 손길을 얼마든지 느낍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지난날 김기찬 님이 내놓은 《골목 안 풍경》이라는 사진책을 이렇게 조그마하면서 예쁘장한 판꾸밈으로 아기자기하게 새로 엮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하고. ‘기무라 이헤이 사진문고’처럼 ‘김기찬 손바닥 사진책’이라든지 ‘임응식 손바닥 사진책’을 어여삐 묶어서 오래오래 사진꿈과 사진얼을 맛볼 수 있게끔 하면 참으로 기쁘겠다고 느낍니다.

 일본 사진쟁이 기무라 이헤이 님은 사람들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사람들 얼굴을 사진으로 찍고, 사람들 차림새를 사진으로 찍으며, 사람들 살림살이라든지 살림집이라든지 마을을 사진으로 찍습니다. 어느 한 가지를 더 돋보이도록 하지 않습니다. 몇몇 사람을 도드라지게 보여주지 않습니다.

 저마다 작은 사람입니다. 저마다 고마운 목숨을 어버이한테서 선물받아 저마다 새로운 목숨을 제 아이한테 선물하며 살아가는 고운 사람입니다. 가난한 사람이 아니고 힘겨운 사람이 아닙니다. 외로운 사람이거나 슬픈 사람이 아닙니다. 그저 ‘내 이웃인 한 사람’입니다. ‘내 동무인 두 사람’입니다. ‘나와 살붙이라 할 만한 세 사람’이고, ‘나랑 한 마을에서 지내는 네 사람’이에요.

 돈이 없기에 슬픈 삶일 수 없습니다. 돈이 있기에 기쁜 삶일 수 없습니다. 어버이 두 분이 몸이 튼튼하든 어버이 두 분이 일찍 돌아가셨든, 어느 한쪽이 더 슬프거나 더 기쁘지 않습니다. 내 아이큐가 150이 되든 100이 되든 50이 되든 다를 일이란 없습니다. 내 걸음이 빠르든 느리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내 키가 크든 작든 어떠하든 대단하지 않습니다. 내 삶은 그예 내 삶입니다. 내 길은 고스란히 내 길입니다. 내 넋은 사랑스러운 내 넋입니다.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더 가난하게 살아가는 사람을, 더 똥구멍 찢어지게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야 ‘다큐멘터리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아니, 굳이 다큐사진을 찍어야 사람들 살아가는 이야기를 보여주는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연예인이나 예쁜 아가씨를 알몸으로 벗기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또는 예쁘다 하는 옷을 입히고 사진을 찍는다든지, 아름답다는 나라로 가서 아름다운 얼굴과 몸매라는 아가씨를 사진으로 찍는다고 하든지 하지 않더라도 얼마든지 ‘패션사진’이 나올 수 있습니다. 옷 만드는 회사 이름이나 상품을 널리 알리거나 파는 데에 도움이 되는 길을 걸어가기에 ‘여느 사람 눈길을 확 끄는’ 사진을 찍을 수 있을 테지만, 사람들 눈길을 확 끌기에 아름다운 사진이 되지는 않아요.

 얼굴에 주름이 졌으니까 주름진 얼굴을 고스란히 보여주되, 주름진 얼굴만큼 주름진 옷과 주름진 집과 주름진 땅과 하늘을 보여줍니다. 방아를 찧거나 물레를 잣거나 벼를 훑으며 고단하기에 고단한 모습을 사진으로 찍지만, 방아를 찧으며 밥을 얻는다는 즐거움이 있고 물레를 자으며 옷을 얻는다는 기쁨이 있습니다. 고단함과 즐거움과 기쁨을 한 자리에 그러모읍니다.

 사진과 함께 걷는 따사로운 길 하나는 ‘모두 그리운 모습’이라고 느끼며, ‘오늘은 오늘을 찍는’ 사진길입니다. 내 오늘을 예쁘게 사랑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애써 《木村伊兵衛 昭和を寫す 4 秋田の民俗》 같은 사진책을 들추지 않더라도 ‘내 예쁜 오늘과 내 예쁜 오늘 사진’을 살갗으로 느끼리라 생각합니다. 내 오늘을 예쁘게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기무라 이헤이를 들추든 토몬 켄을 넘기든 살가운 속살을 헤아리지 못하겠지요. (4344.5.5.나무.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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