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사진과 삶에 관한 단상
필립 퍼키스 글.사진, 박태희 옮김 / 안목 / 2011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더 나은 사진장비’를 놓고 망설이는 분한테
 [내 삶으로 삭인 사진책 33] 필립 퍼키스,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책이름 :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 노트
- 글 : 필립 퍼키스
- 옮긴이 : 박태희
- 펴낸곳 : 안목 (2011.2.8.)
- 책값 :9500원



 (1) 사진이란 무엇인가


 더 나은 사진장비는 있습니다. 좀 떨어지는 사진장비 또한 있습니다. 필름사진기이든 디지털사진기이든 값진 장비가 있고 값싼 장비가 있습니다. 그런데, 더 나은 사진장비이든 좀 떨어지는 사진장비이든, 언제나 ‘사진을 찍도록 이끄는’ 기계입니다.

 더 나은 사진장비를 쓰면 시야율이 높을 뿐 아니라 화질이 한결 뛰어납니다. 화소수가 높은 사진장비를 쓸 때에는 사진 하나를 크게 만든다 하더라도 입자가 덜 깨지거나 안 깨지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입자가 보드라운 사진이든 입자가 거친 사진이든, 늘 ‘사진다울 때에 사진’이라고 일컫습니다.


.. 전시장에 간다. 눈길을 끄는 사진 앞에 선다. 그것을 5분 동안 바라본다. 사진에서 눈을 떼지 말아야 한다 ..  (15쪽)


 필름은 감도 50부터 감도 3200까지 있습니다. 필름은 감도 100만 있지 않습니다. 흑백필름을 쓰던 예전 사람들은 감도 400을 곧잘 썼다지만, 흑백필름 또한 감도 100이나 감도 200이 있으며, 감도 800이나 감도 1600이나 감도 3200이 있습니다.

 누군가는 감도 100 필름을 400으로 올려서 찍습니다. 누군가는 감도 400 필름을 1600으로 올려서 찍습니다.

 입자가 보드라운 결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입자가 거친 느낌을 즐기는 사람이 있습니다. 풍경사진을 찍을 때에는 대형원판으로 찍어야 비로소 ‘먼 곳과 가까운 곳’이 작은 데까지 살아난다고들 말합니다. 틀림없이 맞는 말입니다. 그렇지만, 풍경사진이기 때문에 언제나 보드라운 결로 사진을 찍어야 하지 않아요. 풍경사진이든 얼굴사진이든 패션사진이든 다큐사진이든 한결같이 ‘사진’이에요. 사진이라는 테두리에서만 같은 울타리일 뿐, 저마다 홀가분하게 제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다 같은 사람이라지만 다 같은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저마다 좋아하는 길을 저마다 제 힘과 슬기와 삶에 맞추어 걸을 뿐입니다. 농사꾼이 되고픈 사람하고 버스기사가 되고픈 사람이 똑같은 길을 걸을 까닭이 없어요. 회사원이나 공무원이 되고픈 사람이랑 학자나 교사가 되고픈 사람이 비슷한 길을 걸어야 하지 않아요. 돈이 많은 사람하고 돈이 적은 사람하고 꼭 같은 자리에 서야 하지 않습니다.

 무언가 더 누린대서 더 낫거나 좋은 삶이 아닙니다. 무언가 적게 누린대서 덜 떨어지거나 나쁜 삶이 아니에요. 일본사람 미우라 아야코 님은 몸이 아파 죽을는지 모르는 채 오래오래 병자리에 누워 지냈지만, 고마운 하늘 뜻이라고 받아들였습니다. 처음부터 고맙게 받아들이지는 못했다지만, 나중에 고맙게 받아들이면서 당신 삶이 달라졌다고 해요. 아픈 사람은 아프기 때문에 고맙고, 튼튼한 사람은 튼튼하기 때문에 고마운 노릇이에요. 혼자 살아가면 혼자 살아가는 대로 고맙습니다. 여럿이 복닥거리며 살아간다면 이대로 고맙겠지요.

 사진기는 1회용 사진기부터 여러 천만 원에 이르는 사진기까지 있습니다. 몹시 이름나고 아주 잘 팔린 사진기부터 그닥 많이 알려지지 못한 사진기까지 골고루 있습니다. 같은 회사 사진기라 하더라도 기종에 따라 빛느낌이나 질감이 조금씩 다르기 마련입니다. 같은 기계라 하더라도 다루는 사람 손길과 마음에 따라 빛느낌이나 질감이 조금씩 새로워지기 마련입니다.

 사진은 기계 단추만 누른대서 이루어지는 삶이 아닙니다. 기계 단추만 누른대서 이루어지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기계 단추를 누르는 사람 넋과 얼이 스미는 사진이에요. 기계 단추를 누르기까지 저마다 제 삶을 어떻게 보듬으며 살아왔는가 하는 꿈과 뜻이 서리는 사진입니다.

 곧, 내가 사랑하는 삶결 그대로 내가 빚는 사진결이 됩니다. 내가 좋아하는 삶무늬 그대로 내가 일구는 사진무늬가 돼요. 내가 보살피는 삶자락 그대로 내가 껴안는 사진자락이 될 테고, 내가 아끼는 삶길 그대로 내가 걸어갈 사진길이 되기 마련입니다.


.. ‘무엇’을 상상하려고 하면 우리는 그 말의 족쇄에 걸려 그 ‘무엇’밖에는 상상할 수 없게 된다 ..  (27쪽)


 인천에서 살던 때, 인천으로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사람이 꽤 많았습니다. 이들을 데리고 인천 골목길 골골샅샅 몇 시간씩 누벼 보기도 했습니다. 누구든 혼자서 하루 예닐곱 시간을 천천히 걸어다닌다면 굳이 저 같은 사람하고 함께 골목길을 다니지 않아도 됩니다. 굳이 저 같은 사람하고 함께 골목마실을 해야 하는 까닭이라면, 늘 오붓하거나 호젓하게 오래오래 골목동네를 즐기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골목길 사진을 찍으러 찾아오는 사람들은 늘 ‘골목 사진을 찍어야지!’ 하는 생각에 사로잡힙니다. ‘더 깊은 골목을 봐야 한다!’라느니 ‘더 골목다운 골목을 봐야 해!’ 하는 생각에서 풀리지 못합니다.

 인천에서 살던 지난날, 저는 날마다 서너 시간씩 옆지기나 아이를 데리고 골목을 구비구비 거닐었습니다. 혼자서 거닐 때에는 날마다 대여섯 시간은 가벼이 걸었어요. 꼭 어느 골목 어느 모습 어느 이야기를 빚으려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따로 무슨 사진을 찍겠다거나 반드시 어디를 다녀 보거나 느껴 보려 하지 않았어요. 집식구하고 골목마실을 하는 동안 꼭 한 가지만 헤아렸습니다. 내가 살아가는 이 터에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하고 봄·여름·가을·겨울 맑거나 비오거나 눈오거나 바람부는 온갖 삶자락을 함께한다고 헤아렸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사람내음이 나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가난해 보이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따스한 삶터가 아닙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오래되거나 낡아 보이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더 사진거리가 될 만하지 않습니다. 골목이기 때문에 곧 사라질 추억어린 곳이 될 수는 없습니다.

 골목은 그저 골목입니다. 시골은 그예 시골입니다. 큰도시는 그냥 큰도시입니다.

 골목집도 집이고 아파트도 집입니다. 굴피집도 집이고 풀집도 집입니다. 흙으로 집을 짓고 짚으로 지붕을 이어야 가장 아름다운 집이 되지 않습니다. 가장 아름다운 집이란, 나 스스로 내 삶을 사랑하면서 아름답게 살붙이랑 어울리겠다는 꿈을 꽃피우는 집을 가리킵니다. 아파트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집일 수 있고, 아파트도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진거리가 됩니다.

 기찻길이든 뱃길이든 하늘길이든 땅밑길이든 골목길이든 매한가지입니다. 오솔길이든 멧길이든 물길이든 바닷길이든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은 모습이란 없습니다. 덜 떨어질 모습이란 없습니다. 예쁘장하다는 모델을 세워 놓고 찍어야 예쁜 얼굴 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값진 옷을 입히고 찍어야 패션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가난하거나 따돌림받는 사람들을 애써 찾아다니며 찍어야 다큐사진이 태어나지 않습니다. 사진은 언제나 사진이 될 때에만 사진입니다. 야구 경기를 하는 이들이 1등을 해야만 야구를 하고 막등이나 가운데쯤 자리할 때에는 야구를 안 한다 할 수 없습니다. 2등이나 3등쯤은 차지해야 비로소 농구를 하거나 배구를 한다고 하겠습니까. 1등을 했다지만 참말 1등이라는 소리를 들을 만하겠습니까.

 사진은 늘 사진이어야 합니다. 사진으로 장난을 쳤으면 ‘사진 장난’이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진으로 돈벌이를 한다면 ‘사진으로 하는 돈벌이’이지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사진으로 이름값을 높인다든지 특종을 노린다든지 무슨 왜곡을 한다면 모두 ‘이름값 높이기’나 ‘특종 노리기’나 ‘왜곡 보도’에 머물 뿐, 사진이라는 데에 이르지 못해요.

 이리하여, 사진기자일 때에 사진을 찍는 기자라고 할 수 있기도 하지만, 사진기자이면서 사진 노릇도 기자 노릇도 못한다 할 수 있습니다. 사진작가라는 이름을 내건다지만 막상 사진을 빚는 사람 노릇을 못하는 사람이 대단히 많습니다.

 책을 읽었다 해서 다 책읽기가 되지 않습니다. 짝꿍하고 사귀며 혼인을 했대서 다 혼인살이가 아닙니다. 사랑이 없이 읽은 책이라면 앎조각만 갖다 맞추는 ‘지식쌓기’입니다. 사랑이 없이 맺은 짝꿍이라면 혼인이 아닌 ‘계약 동거’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사랑이 있을 때에 사진입니다. 사랑이 없는데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하는 사람들이 사랑을 담은 손길로 기계를 매만지며 일구는 사진입니다.


 (2) 두 번째 나오는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


 2007년 6월에 인천에서 ‘사진책 도서관’을 연 뒤부터 곧잘 ‘사진작가’나 ‘사진즐김이’를 만났습니다. 사진책 도서관이라는 곳을 열기 앞서까지는 ‘사진작가’를 만날 일은 거의 없었습니다. 언제나 만나는 사람이라면 ‘사진즐김이’뿐이었습니다.

 2010년 6월에 인천살림을 모두 추슬러서 충주 멧골마을로 옮겼습니다. 도시에서는 더 달삯을 버틸 수 없을 뿐더러, 집식구들 몸을 생각해서 시골로 옮기기로 했습니다. 시골마을로 깊이 들어가니까 이제는 사진작가라 하든 사진즐김이라 하든 거의 만나지 않습니다. 이제는 언제나 집식구하고 어울리면서, 집식구하고 복닥이는 사진을 시골자락에서 혼자 즐깁니다.

 인천에서 지낼 때이든 충주 멧골마을로 들어온 뒤이든, 사진과 얽힌 사람을 드문드문 만나는 자리에서 ‘책 하나 소개’해 달라는 이야기를 듣거나 ‘책 하나 선물로 사 주는’ 때에는 으레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꼽곤 했습니다. 사진길을 처음 밟는 사람한테이든, 사진길을 퍽 오래 밟았다는 사람한테든,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만큼 사랑스러운 사진동무는 드물다고 느꼈습니다.

 이러던 어느 날, 2005년에 눈빛출판사에서 처음 나온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가 판이 끊어졌다는 이야기를 문득 듣습니다. 깜짝 놀랍니다. ‘참말인가? 이런 책이 참말 판이 끊어질 수 있나? 출판사 누리집에서 이 책이 꽤 잘 팔린다고 늘 밝혔다고 떠오르는데?’ 하고 생각하면서, 헌책방마실을 할 때에 이 책이 나오는가를 눈여겨보았습니다. 그러고는 두 번 이 책을 다시 장만합니다. 왜냐하면 새책방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요. 2005년에 처음 나왔을 때에 장만한 책은 내 도서관 책시렁 ‘사진책 자리’에서 왼쪽 끝 즈음에 꽂고, 새로 장만한 책은 사진책 자리에서 오른쪽 끝 즈음에 떨어뜨려서 꽂습니다. 다른 한 권은 나한테 반가운 사진즐김이 한 분한테 선물로 드립니다.


.. ‘문화적 의미’를 담으려 하지 마라 … 사진이 찍혀지는 순간까지 그것과 함께 머물러야 한다 … 이름을 주지도, 상표를 붙이지도, 재 보지도, 좋아하지도, 증오하지도, 기억하지도, 탐하지도 마라. 그저 바라만 보아라 … 그러나 그저 보이는 게 찍힐 뿐이다 … 사진가가 열린 마음과 지성으로 사물을 충분히 관찰한 다음 그 주제를 온전한 매체로 기록할 때, 우리가 ‘예술’이라고 부르는 무언가가 튀어나올 가능성이 있다 … 사진의 이미지란 결코 창조물이 아니며, 무지개나 우박처럼 오히려 어떤 식으로 환경이 조성되었을 때 일어나는 자연적인 현상이라는 것이다 ..  (19, 57, 64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쓴 필립 퍼키스라는 분은 미국에서 사진을 가르치는 사람입니다. 미국사람으로서 미국에서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 이들한테 도움말을 들려주려고 엮은 책이라 할 만합니다.

 일본사람이 사진강의노트를 썼다면 일본사람 눈길과 넋으로 일본 ‘사진 새내기’한테 도움말을 들려주려고 책을 엮을 테지요. 필립 퍼키스 님은 미국에 있는 대학교에서 사진을 가르친 기나긴 나날을 되짚으면서 책 하나를 갈무리했습니다.

 사진을 가르치던 첫무렵부터 이와 같은 사진강의노트를 내놓지는 못합니다.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친 끝에 이와 같은 사진강의노트를 내놓습니다.

 여러 차례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읽었고, 2011년 2월에 새옷을 입고 다시 살아난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새삼스레 읽으며 곰곰이 생각합니다. 사진길을 처음 밟는 이한테나 사진길을 오래 밟았던 이한테나 더없이 도움이 될 만한 사진동무인 작은 책 하나이지만, 이 작은 책 하나를 알뜰히 여기며 사랑할 만한 사진쟁이가 한국에 얼마나 있을까 살짝 알쏭달쏭합니다.


.. 이 사진은 재미있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고 소름이 끼치기도 한다. 한 마디로 걸작이다. 오직 사진만이 표현할 수 있는 세계다. 이런 식의 은유와 애절함은 사진이라는 독특한 매체의 직접성에서 비롯된다 … 시를 쓰는 단 하나의 이유는 산문체로는 표현할 수 없는 감정들이 있기 때문이다 … 누군가 바닐라 맛에 대해 최상의 표현으로, 지적이고 우아하게 설명하는 것을 듣는다고 치자. 나는 여전히 바닐라 맛을 모른다. 그러나 난생 처음으로 바닐라 맛을 본 후에 설명을 듣는다면, 그제서야 ‘맞아, 바로 이 맛이야’라며 무릎을 칠 것이다. 처음으로 그랜드 캐니언에 가 보거나 예술 작품을 보았을 때도 마찬가지다 … 그러나 이름이 없는 것은 상도 안 준다. 오로지 이름을 붙이는 것만이 관건이다. 읽기와 산수로만 지능이 평가된다. 감수성과 관찰력이 뛰어난 학생이 장학금을 받았던 적은 언제였던가? ..  (25, 35∼36, 66∼67쪽)


 사진길을 걷겠다고 하는 이들치고 ‘어떤 사진장비’를 갖출까로 망설이거나 근심하거나 마음쓰는 사람만 많을 뿐입니다. 말 그대로 ‘어떤 사진길을 걸을까’ 하는 대목에 생각을 기울이거나 마음을 쏟는 이가 퍽 드뭅니다.

 야구선수한테 ‘어떤 방망이’나 ‘어떤 공’이나 ‘어떤 장갑’을 쓰느냐고 여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방망이 가운데에도 더 낫다 하는 방망이가 있겠지요. 더 질기며 튼튼하고 손에 잘 맞는 장갑이 있을 테지요. 그런데, 어느 야구선수도 방망이 탓이나 장갑 탓을 하지 않습니다. 할 수 없겠지요.

 축구선수가 더 낫다 하는 축구신을 신고 더 낫다 하는 공을 발로 차야 더 이름을 드높이거나 더 멋지거나 더 신나게 축구를 할 수 있지 않습니다. 배구선수가 더 낫다 하는 공을 써야 배구를 더 잘 하겠습니까.

 100원짜리 연필이든 100만 원짜리 연필이든, 글을 쓸 때에 달라질 대목이란 없습니다. 좀 싸구려 연필이나 좀 싸구려 볼펜을 쓰면 손목이 더 아프거나 어깨가 더 결릴까 궁금합니다. 좀 싸구려 자판을 두들기면 글쓰기를 더 못할는지 궁금합니다.

 글을 쓰든 그림을 그리든 똑같습니다. 사진을 찍든 노래를 부르든 똑같을 수밖에 없습니다. 더 낫다 하는 장비가 있대서 글을 더 잘 쓰거나 그림을 더 잘 그리지 않습니다. 마음이 없고서야 글이고 그림이고 태어날 수 없습니다.

 장비는 좋다지만 마음이 없으면 사진이 태어날 수 없습니다. 무대가 좋다지만 마음이 없으면 노래가 태어날 수 없습니다.

 사진길을 걸으려는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한 가지만을 생각해야 합니다. ‘나는 어떤 사진길을 걸으려 하는가’ 한 가지만 생각해야 합니다. 사진장비란 내 살림돈에 맞추어 장만할 뿐입니다. 사진기 만드는 회사는 참 고맙게도, 값싼 사진기부터 값진 사진기까지 골고루 만들어 베풉니다. 어느 사진기를 쓰든 어찌 되건 돈이 있어야 하지요. 돈이 없고서야 사진을 찍지 못해요. 그러나, 돈이 아주 넉넉하기 때문에 사진을 걱정없이 할 수 있지는 않아요. 돈이 참 없어 밥굶기를 자주 한다 하더라도 사진을 못 할 수 없어요. 내 마음가짐에 따라서 할 수 있는 사진일 뿐입니다.


.. 늘 같은 렌즈를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렌즈가 제공하는 시야에 익숙해지면 ‘전체’를 훨씬 빨리 포착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프레임은 사진가가 조작한 시각이지 결코 자연스러운 것이 아니다 … 기술이 중요한 게 아니다. 문제는, 보고 느끼는 사진 속에서 사진의 내용이 되는 질감과 명도를 제대로 살릴 수 있도록 사진가의 섬세함을 기르는 일이다 … (내가 찍은 사진을 내 손으로 갈무리하는) 편집을 하는 까닭은 내 사진을 발전시키기 위한 훈련이 필요해서다 … 작품의 정신은 예술가의 내면으로부터 나오고, 창조적 행위는 우리가 숨을 쉬며 살고 있는 이 땅에서 슬프고 기쁘고 지치고 죽는 그 모든 과정과 서로 맞물려 이루어진다 ..  (41, 81, 95, 114쪽)


 필립 퍼키스 님은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쳤습니다. 사진을 오래오래 가르친 열매가 담긴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입니다. 저는 이 책을 2005년에 처음 만나고 2011년에 새책으로 다시 만나면서,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사진은 가르칠 수 없고, 사진은 누구한테서 따로 배울 수 없다’고 예나 이제나 한결같이 생각합니다.

 모르는 노릇입니다만, 필립 퍼키스 님이 사진을 가르칠 수 있다고 여겼다면 ‘사진강의노트’가 아닌 ‘사진강의’라고만 이름을 붙이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무슨무슨 ‘예술개론’이라든지 무슨무슨 ‘이론과 실제’라는 이름을 붙이는 책이 있는데, ‘사진미학’이든 ‘영화미학’이든 있을 수 없다고 느낍니다. 주의주장이 아니라 느낌으로 받아들입니다. 사진은 ‘사진예술’이나 ‘사진문화’라는 덧옷을 입힐 수 없구나 싶어요. 글을 놓고 ‘글예술’이나 ‘글문화’라 할 수 없어요. ‘수필예술’이나 ‘소설문화’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저 글이고 수필이며 소설입니다. 사진은 그저 사진이지 사진 앞에 무슨무슨 꾸밈말을 붙이거나 사진 뒤에 어떤저떤 덧말을 달 수 없습니다.

 패션사진을 한다는 사람들은 패션도 사진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돈벌이만 합니다. 다큐사진을 한다는 사람들은 다큐도 사진도 하지 않습니다. 오직 구경꾼 노릇만 합니다. 누군가 예술사진을 한다고 말한다면 이이는 예술도 사진도 못 하거나 안 하는 셈입니다. 예술은 예술이고 사진은 사진입니다. 패션은 패션이고 사진은 사진입니다. 패션을 하면서 사진을 즐길 수 있고, 사진을 하면서 패션을 즐길 수 있어요. 다큐를 이루면서 사진을 받아들일 수 있고, 사진을 하면서 다큐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가르칠 수 없는 예술이고, 배울 수 없는 예술입니다. 문화를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습니까. 그저 살아낼 뿐인 문화이자 예술입니다. 사랑을 가르치거나 배울 수 있습니까. 그저 사랑할 뿐인 내 삶입니다.

 사진은 어느 누구도 어느 누구한테 가르치지 못합니다. 사진을 배우겠다며 대학교에 갈 수 없고 사진학교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필립 퍼키스 님은 대학 강단에서 오래도록 몸담으면서 바로 이 대목, ‘사진은 가르칠 수 없구나’ 하고 깨달으면서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를 썼다고 느낍니다. 가르칠 수도 배울 수도 없는 사진인 줄을 사람들이 알아채기를 바라면서 이 책을 썼다고 느껴요. 그래서, 이 책은 필립 퍼키스 님이 ‘대학교 사진 강단’에서 물러날 즈음이 되어서야 비로소 내놓을 수 있습니다.

 사진은 내가 살아내는 하루만큼 그날그날 찍는 이야기입니다.


.. 세월이 흐르면서 사진도 돈벌이로 부상했다. 사진가가 죽거나, 대형 사진이거나, 비평가들에게 쓸거리가 풍부한 내용일 때 값은 더욱 올라갔다 … 권세 있는 자들이 사진을 예술이라고 선고한 후부터 많은 사진가들이 예술 안에서 사진의 개념을 확장하려는 노력이나 예술로서의 사진에 대한 진지한 고민보다는 그저 예술처럼 보이는 그럴싸한 사진을 만드는 데에만 죽을힘을 다해 애쓰고 있다. 머릿속에 든 생각이 점점 빈약해질수록 사진의 크기는 점점 커져만 간다 … 희한하게도 새로운 기술이 발전하고 접근이 용이해질수록 플라티늄, 팔라디움, 카브로, 사이아노타이프 같은 ‘과거의’ 기법들이 기승을 부린다 … 인물 사진의 최신 경향은 영리하고 재능 있고 의욕에 찬 사진가들이 영민한 머리로 온갖 재주를 부려 사람들을 찍는 것이다. 특히 최근의 경향은 얼굴의 땀구멍이 불쾌하게 보일 정도로 가깝게 촬영한다(어떤 감정이든 불러만 오면 된다는 식이다). 지금 잘나가는 인물 사진가들이 사람들의 시선을 유혹하는 방식에 나름대로 일가견이 있는 패션 사진가들이라는 사실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  (59, 91, 102, 109쪽)


 사진이 처음 태어나던 지난날에도 사람들은 사진을 했고, 사진이 널리 퍼진 요즈음에도 사람들은 사진을 합니다. 옛사람이 더 빼어난 사진을 하지 않았습니다. 새사람이 더 훌륭한 사진을 하지 않습니다. 예전 사람이건 요새 사람이건, 그저 사진을 하는 사람일 뿐입니다.

 그렇지만, 사진을 하건 사진을 즐기건 사진을 누리건, ‘내가 좋아하는 사진을 내 삶에 걸맞게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나눈다’고 하는 마음을 잊거나 처음부터 안 품는 사람이 너무 많습니다.


.. 시인에게 이런 질문을 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오늘 시를 몇 편이나 쓰셨오?” … 결코 ‘순수’사진이라고 불릴 만한 사진은 한 장도 없다 … 모든 사진은 무엇인가를 ‘기록하고’ 있으며, 모든 사진은 사진가가 결정을 내린 순간 찍혀지기 때문에 얼마간 사진가의 의도가 ‘표현된’ 것이다. 선을 그어 놓고 한쪽만을 취하도록 학생들에게 강요하는 것은 해악이다 ..  (93, 121, 125쪽)


 《필립 퍼키스의 사진강의노트》는 사진길을 걷는다는 사람들한테 나누어 주는 선물입니다. 사진을 찍는 내 삶이 어떠한 삶인가를 저마다 스스로 즐거이 돌아보자는 뜻으로 나누어 주는 선물입니다.

 사진을 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사진을 하는 마음을 돌아볼 수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으면서 글을 쓰는 마음을 되새길 수 있습니다. 초·중·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일을 맡은 사람이라면 ‘교육이란 무엇이고 교육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는 마음을 짚을 수 있습니다. 집에서 살림하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읽는 동안 살림하는 마음을 깨달을 수 있어요.

 우리가 저마다 살아가는 터전에서 망설여야 할 대목이라면 다문 한 가지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맞이하는 내 하루를 오늘은 얼마나 더 사랑스럽거나 즐겁거나 신나게 맞아들이려 하는가’입니다.

 삶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랑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람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사진은 덜도 더도 아닙니다. 삶은 삶이고, 사랑은 사랑이며, 사람은 사람이겠지요. 사진은 사진입니다.

 좋은 삶·사랑·사람을 이야기하는 책 하나를 알뜰히 여미어 되살린 박태희 님이 참 고맙습니다. (4344.4.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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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天空下(シャンハイのそらのした) (大型本)
英 伸三 / 日本カメラ社 / 200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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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부사 신조' 사진책은 모두 두 가지가 뜬다. 내가 바라는 이 책은 없을 뿐더러, 하나부사 신조 님한테 대표가 될 만한 다른 사진책 또한 안 뜬다. 그래도, 이 사진책에 살짝 걸어 놓으면서, 이이가 보여주는 사진길이 무엇인가를 밝혀 보고 싶다. 하나부사 신조 님 다른 사진책들을 구경할 수 있는 날이 있을까...

 

어린이 사진책으로 물삶을 보여주는 마음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3 : 하나부사 신조(英 伸三), 《みず》(福音館書店,1982)



 사람은 밥을 먹지 않으면 살아가지 못합니다. 한국사람이나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 웬만한 아시아사람은 밥을 먹으며 목숨을 잇습니다. 서양사람은 빵을 먹으며 목숨을 잇는다 할 만하겠지요. 그런데 막상 한국에서는 ‘목숨을 잇는 고마운 밥’ 이야기를 다루는 글책이나 그림책이나 사진책을 거의 찾아볼 수 없습니다. ‘더 맛나거나 멋지게 차리는 밥’을 ‘요리(料理)’라는 이름으로 붙인 책만 있을 뿐입니다. 한자말 ‘요리’ 말뜻을 살피면 그저 ‘밥하기’일 뿐이지만, ‘요리책’은 만들어도 ‘밥하기책’이나 ‘밥책’은 만들지 못하는 이 나라 어른들입니다.

 날마다 한 끼이든 두 끼이든 세 끼이든 네 끼이든 밥을 먹는 한국사람입니다. 흰쌀로 짓든 누런쌀로 짓든 보리쌀이나 온갖 곡식으로 짓든, 밥을 먹는 한국사람입니다. 밥짓기야 누가 누구한테 따로 어찌저찌 가르치지 않아도 다 할 만하다 여길는지 모릅니다. 요즈음은 전기밥솥에 물 얼추 맞춰 붓기만 하면 알아서 밥이 다 된다 할 만합니다. 찰밥이든 오곡밥이든 감자밥이든 쑥밥이든, 그냥 전기밥솥이 해 준다 할 수 있어요.

 더 많은 기계를 쓰고 새로운 전자제품을 쓰면서 집집마다 다 다르게 꾸리던 살림살이가 사라졌다 할 수 있습니다. 내 손으로 논을 일구고 가을걷이를 해서, 낟알을 털고 방아를 찧은 다음, 키질과 조리질을 거쳐, 불린 쌀을 불세기를 살피면서 짓던 밥이 아니기에, ‘밥을 하는 흐름’을 애써 글로 쓰거나 그림으로 그리거나 사진으로 찍을 까닭이 없을는지 모릅니다.

 그렇지만, 하나하나 품을 들여 밥을 하든, 전기밥솥을 쓰든, 우리가 오늘 살아가는 밥삶 모습을 고스란히 이야기 한 자락으로 담을 수 있을 때에, 우리 집부터 내 아이한테 ‘밥이란 이렇게 해서 고맙게 한 그릇을 비울 수 있단다’ 하고 사랑을 물려주리라 생각합니다. 밥때가 되었으니 꼭꼭 씹어 얼른 흘리지 말고 먹으라 하는 데에서는 사랑을 물려주지 못하겠지요. 냄비밥으로 밥을 하든 전기밥솥으로 밥을 하든 무쇠솥을 쓰든, 밥솥에 안치기까지 쌀이 어떤 길을 거쳤고, 쌀이 되기 앞서 벼였으며, 벼이기 앞서는 모요, 모로 내기 앞서는 ‘벼 씨앗’인 볍씨인 줄을 헤아리는 흐름을 어른부터 스스로 느끼고 아이와 함께 살피면서, 이야기 한 자락 잃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밥하기와 맞물려 설거지하기로도 얼마든지 깊고 너른 이야기가 태어납니다. 밥하기에서는 온갖 반찬을 하는 매무새라든지, 부엌살림 쓰는 이야기가 더 태어납니다. 집안을 구석구석 쓸고닦는 이야기도 따로 있고, 옷가지를 빨래하는 이야기도 따로 있으며, 옷가지를 손질하거나 마련하는 이야기도 따로 있어요. 살림은 예쁘장한 그림으로 보여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날마다 오랜 겨를을 많은 품을 들여 따사롭게 사랑하면서 어깨동무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쩌면, 한국에서는 가장 밑바탕이 될 살림살이부터 글로든 그림으로든 사진으로든 다루지 못하거나 안 다루기 때문에 다른 문화이든 예술이든 교육이든 정치이든 환경이든 제자리를 잃거나 잊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사진책 《みず(물)》(福音館書店,1982)를 넘기면서 여러 가지를 생각합니다. 일본 복음관서점에서 “かがくのとも傑作集(과학동무 빛나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나온 열아홉째 책인 《みず》는 일본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 가운데 하나인 ‘하나부사 신조(英 伸三)’ 님이 빚은 작품입니다. 한국에서는 손꼽히는 사진쟁이가 ‘어린이 사진책’을 내는 일이 거의 없거나 아주 드물거나 좀처럼 찾아볼 수 없습니다만, 일본에서는 손꼽히는 사진쟁이들이 곧잘 ‘어린이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사진감으로 ‘어린이’를 삼는 이들이 곧잘 ‘어린이부터 함께 즐기는 사진책’을 마련해요.

 사람은 밥과 함께 물이 없으면 목숨을 잇지 못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みず》는 바로 물을 다룹니다. 사람한테 없어서는 안 되는 더없이 고마운 님은 물을 다룹니다. 사람한테 반드시 있어야 할 첫째를 꼽자면 바람이 되겠지요. 물을 안 마시고 몇 날을 버틴다고 하더라도 숨을 들이마시지 않고는 몇 분조차 버틸 수 없을 테니까요. 여느 사람은 몇 분이 아닌 일 분조차 못 버틸 테고요.

 그러면, 한국에서는 ‘바람’을 다루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글책이, 또 ‘물’을 보여주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글책이, 여기에 ‘밥’이라든지 ‘옷’이라든지 ‘집’을 다루는 사진책이나 그림책이나 글책이 얼마나 될까요. 곁에서 늘 마주하거나 보듬거나 살피거나 돌봐야 할 살림살이를 책으로 얼마나 담아낼까요.

 연필이나 종이나 신발이나 젓가락이나 가방은 얼마나 잘 살피는 한국사람이라 할 만할는지요. 나무나 풀이나 꽃이나 짐승이나 들판이나 논밭이나 멧자락이나 바다나 소금밭은 어느 만큼 알뜰히 돌아보는 한국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저잣거리나 골목길이나 바닷마을이나 동굴이나 숲은 어떻게 바라보는 한국사람이라 할는지요.

 사진책 《みず》는 아이들이 제 둘레에서 마주하거나 느낄 물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사진책 《みず》는 ‘과학동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 책 가운데 하나이지만, 애써 ‘과학’이라는 틀에 맞추지 않아도 될 사진이야기를 들려줍니다. 과학으로 바라보자면 과학이지만, 삶으로 바라보면 삶입니다. 고마운 님으로 바라보면 고마운 님이요, 아름답거나 즐거운 놀이로 바라보면 아름답거나 즐거운 놀이예요.

 후두두둑 떨어지는 빗물을 느낍니다. 꽁꽁 언 얼음을 느낍니다. 냇물에 고개를 처박고 물속을 들여다봅니다. 도시에서는 따로 헤엄터를 찾아갑니다. 물고기가 살아가는 모습을 바라보고, 바닷가에서 바닷물이랑 신나게 어우러집니다. 돌멩이 하나를 못물에 살짝 던져 물결이 이는 모습을 바라봅니다. 목마른 사람과 고양이가 목을 축입니다. 사람뿐 아니라 골목고양이도, 비둘기도, 까치도, 참새도, 골목개도, 들짐승도, 새앙쥐도, 물을 마시지 않고는 목숨을 잇지 못합니다. 과학으로 들여다보기 앞서 아주 살가운 내 삶인 물입니다.

 고드름에 볼을 댑니다. 물이 얼어 얼음이 됩니다. 얼음이 녹아 봄이 되면 따사로운 날씨에 따라 숱한 푸나무가 봄비를 맞으며 새싹과 새잎을 틔웁니다. 물을 머금으면서 햇볕을 쬐고, 물을 맞아들이면서 바람을 쐬며, 물과 함께 밥을 먹습니다.

 아무래도 오늘날에는 물을 맑고 시원하게 얻는 삶보다는 돈을 더 많이 오래 벌 수 있는 삶을 찾아 보금자리를 마련하거나 일자리를 얻을밖에 없겠지요. 수도물이 못미더우면 먹는샘물 사다 마시거나 정수기를 달면 된다고 여기겠지요. 돈이 있으면 프랑스에서 날아온 물을 사다 마실 수 있고, 평창에서든 제주에서든 마음껏 사다가 쓸 수 있을는지 모릅니다. 내 몸을 이루는 2/3가 물이건 말건, 내 몸 어느 한구석도 돈으로 이루어지지 않건 말건, 물을 물 그대로 바라보거나 맞아들이지 못하는 요즈음 삶터입니다.

 생각해 보면, 한국땅에서는 물을 물 그대로 바라보지 못하는 어른투성이입니다. 삽질을 막자는 목소리가 드높습니다. 그러나 커다란 삽질을 막는다 한들, 커다란 도시에 깃든 아파트나 살림집마다 내놓는 생활폐수는 어떻게 할까요. 한국에 가득 있는 원자력발전소와 화력발전소에서 내놓는 열폐수는 어떻게 하나요. 공장마다 수없이 쏟아내는 공장폐수는 어쩌지요. 2013년쯤이면 한국땅 자동차 보유대수는 2000만 대가 넘어선답니다. 이 어마어마한 자동차마다 내뿜는 배기가스는 이 나라 물을 얼마나 맑거나 시원하게 지켜 줄까요. 삽질을 막는다고 물길을 살리지 못합니다. 원자력발전소를 줄이거나 없앤들 내 살림집 전기 씀씀이를 줄이지 않거나 내 물건 씀씀이를 가누지 않고는 열폐수와 공장폐수로 더럽혀지는 물길은 똑같이 더러워지고 맙니다. 돈을 들여서 한강·금강·낙동강·영산강을 살리지 못하듯, 돈을 들여서 더 맑거나 시원한 물을 마실 수는 없어요. 돈을 더 들인다 해서 아이가 더 똑똑하게 자라며 똑똑한 어른으로 홀로서기를 하지 않습니다.

 아이한테는 사랑보다 고마운 손길이 없습니다. 들과 멧자락과 바다와 하늘과 흙에는 돈이 아닌 사랑어린 손길로 살포시 보듬는 마음결이 없다면 맑은 넋이 깃들 수 없습니다. 사진책 《みず》는 아이들한테 과학 지식을 들려줄 생각이 없습니다. 사진책 《みず》는 아이들한테(또 이 사진책을 아이들한테 읽힐 어른들한테) 물이란 참말 무엇이고 물이란 우리 곁에 어떻게 있으며 물이란 내 삶에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사랑과 믿음으로 살펴보아 주기를 바라는 마음을 보여줍니다. (4344.4.2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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埿まみれの死―澤田敎一ベトナム寫眞集 (講談社文庫) (新裝版, 文庫)
澤田 サタ / 講談社 / 199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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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흙투성이 사진을 찍으며 진흙투성이 죽음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쓴 《보도사진가》(타임스페이스,1991)를 읽으면 사와다 교이치(澤田敎一) 님 이야기가 짤막짤막 나옵니다. 두 사람이 동갑내기라 했으니 사와다 교이치 님 또한 1936년에 태어난 셈인데, 사와다 교이치 님은 1970년 10월 28일에 베트남에서 숨을 거둡니다. 미국이 베트남으로 쳐들어가서 싸움이 터진 뒤로 일본 사진기자는 모두 열다섯 사람이 숨을 거두었다 했는데(미국 사진기자는 스물한 사람이 숨을 거두었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도 열다섯 가운데 하나입니다. 생각해 보면, 베트남전쟁 때에 죽은 수많은 사람 가운데 하나입니다.

 구와바라 시세이 님도 베트남전쟁 때에 베트남에 가서 사진을 찍었답니다. 사진을 왕창 찍고는 도쿄로 돌아와 사진잔치를 벌이며 “약간 자랑스러운 말투로 설명을 덧붙였다(《보도사진가》 178쪽)”고 했는데, 구와바라 시세이 님은 사진잔치 강연을 마치고 내려오며 사와다 교이치 님 얼굴을 보고는 “자신의 우쭐대던 태도가 부끄러워졌다”고 밝힙니다. 이때 사와다 교이치 님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과 눈이 마주쳤을 때에 아무 말을 하지 않고 그저 싱긋 웃기만 했다는데, 당신은 구와바라 시세이 님이 뒷날 펴낸 《보도사진가》라는 책을 볼 수 없었을 테니, 이이가 남우세스러워했는지 어떠했는지는 몰랐겠지요.

 이러거나 저러거나 사와다 교이치 님은 베트남전쟁 때에 온몸을 던져 사진을 찍었고, 온몸을 던져 찍은 사진에는 숱한 상장이 돌아왔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숱한 상장을 받았으나 한결같이 베트남전쟁터로 뛰어들어 사진을 찍습니다. 이 전쟁이 끝나지 않고서야 사와다 교이치 님 사진 또한 그칠 수 없었겠지요. 아니, 이 전쟁이 끝난다면, 전쟁 뒤끝 베트남 삶터와 사람과 삶자락을 살며시 사진으로 담았겠지요.

 서른다섯이 될 무렵 더는 사진기 단추를 누를 수 없게 된 사와다 교이치 님은 당신 젊은 나날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일본사람으로서 미국군이 아닌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겠지요. 오늘날 미국이 이라크로 쳐들어갈 때에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어야지,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면서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이라크군하고 함께 움직이며 사진을 찍는 기자는 쥐도 새도 모르게, 아니 뼛가루 하나 남기지 못하는 채 언제 죽었는 지조차 모르며 죽고 말 테지요. 애써 찍은 사진은 하나도 빛을 못 볼 테지요.

 베트남에서 싸움판이 끝난 지 꽤 긴 해가 흘렀습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미국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만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베트남 해방군’하고 함께 움직인 사진기자 사진은 좀처럼 들여다보기 힘듭니다. 어쩌면 베트남 해방군은 숱한 사진기자를 거느리기 힘들었다 할 만한지 모르며, 이동안 베트남 해방군은 굳이 사진을 안 찍었는지 모르지요. 한국땅에서는 알기 힘들지만, 베트남에 가 보면 해방군 자리에서 사진을 찍어 이룬 열매를 어느 만큼 맛볼 수 있을는지 모르고요.

 사진책 《泥まみれの死》(講談社,1985)를 펼칩니다. 《진흙투성이 죽음》 또는 《고달픈 죽음》이라는 이름이 붙은 이 사진책은 사와다 교이치 님 옆지기인 ‘사와다 사타(澤田サタ)’ 님이 엮어서 내놓습니다. 당신 옆지기가 떠난 지 열다섯 해가 지난 어느 날 내놓은 《泥まみれの死》에는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미국군 테두리에서 느낀 베트남전쟁을 찬찬히 보여주기도 하지만, 미국군 테두리에서 바라본 베트남전쟁이라기보다는 ‘전쟁이란 무엇인가?’와 ‘전쟁터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지내는가?’와 ‘전쟁터 군인은 어떠한 삶인가?’를 넌지시 보여줍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잠을 자고 밥을 먹습니다.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총소리가 멎을 때에는 두 다리 뻗으며 쉬거나 노래를 부릅니다. 총에 맞아 다치면 아파서 소리를 지르거나 눈물을 흘립니다. 총알이 머리나 염통을 꿰뚫었으면 그만 고개를 픽 떨굽니다. 총알이 빗발치면 미국군이든 해방군이든 탱크 뒤이든 건물 뒤이든 바싹 달라붙으며 두려움이 덜덜 떱니다.

 미국군과 함께 움직이면서 전쟁사진을 찍은 사와다 교이치 님이기 때문에 ‘미국군이 포로를 어떻게 다루는가’를 살며시 엿봅니다. ‘해방군을 도와주었다’는 빌미 때문에 애꿎게 죽은 사람들 모습을 일본 사진기자 눈길로 바라봅니다. 총에 맞아 죽어야 하는 가녀린 베트남사람, 미국군 주먹에 얻어맞는 슬픈 베트남사람을 일본 사진기자 눈매로 함께 들여다봅니다. 손바닥만 한 사진책 겉에는 장갑차 꽁무니에 밧줄을 이어 ‘해방군 한 사람 주검’을 질질 끄는 모습을 담은 사진을 박습니다.

 베트남에 간 미국이라는 나라 군인은 누구를 왜 어떻게 죽여야 했을까요. 평화를 지키는 일이 사람을 죽이는 일이 될까요. 자유를 찾는 일이 사람을 괴롭히거나 주검을 갖고 노는 일이 될까요.

 일찌감치 숨을 거둔 사와다 교이치 님은 더 말할 수 없지만 더 사진을 찍을 수도 없습니다. 죽은 이는 말이 없습니다. 죽은 이 곁에 있었거나 죽은 이를 살짝 스쳤던 사람들이나 죽은 이 사진을 본 사람들이 ‘새로운 말’을 남길 뿐입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은 죽고 나서 ‘로버트 카파 상’을 받았다는데, 이 상이란, 이 이름이란, 이 훈장이란, 참 덧없구나 싶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이 로버트 카파 님보다 일찍 태어나 일찍 죽었으면 ‘사와다 교이치 상’이 생겨서, 로버트 카파 님이 ‘사와다 교이치 상’을 받는 사람이 되지 말란 법이 없으니까요.

 사진기자 사와다 교이치 님은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사와다 교이치 님을 비롯해 수많은 베트남사람과 숱한 미국사람이 베트남 들판과 숲과 도심지에서 진흙투성이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너나없이 괴로우며 고달픈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전쟁은 누가 왜 일으켰을까요. 전쟁이 일어난 동안 누가 돈을 벌었을까요. 전쟁터에 찾아간 군인은 왜 월급을 받아야 할까요. 사람을 죽이는 짓을 하는데에도 돈을 벌 수 있다니 이 무슨 평화요 자유요 민주라 할 만한가요. 미국은 군수산업으로 얼마나 많은 돈을 벌어들였으며 오늘날에는 또 얼마나 돈벌이를 하는가요. 미국이 벌인 싸움터에 종군기자로 뛰어든 사람들이 찍은 사진은 우리들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는가요. 전쟁사진이란, 전쟁터를 보여주는 사진이란, 보도사진이란, 보도사진가란, 목숨을 바치며 총알받이가 되어 숨을 거둔 사진기자가 남긴 사진이란, 오늘날 한국땅 여느 도시내기들한테 무슨 이야기로 아로새겨질 수 있을까요. (4344.4.16.흙.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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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막의 꽃
조현예 지음, 박태희 사진 / 안목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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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느낌이 사랑일 때에 바야흐로 사진
 [찾아 읽는 사진책 28] 조현애·박태희, 《사막의 꽃》(안목,2011)


 나는 1998년에 사진찍기를 처음 배웠습니다. 사진읽기 또한 이때에 처음 배웠습니다. 신문배달을 하며 먹고살던 나는 신문기자가 되는 길이 아니면 그저 신문배달만 하면서 먹고살겠다고 꿈을 꾸었습니다. 도시에서 살아간다면 신문배달만큼 ‘쓰레기 안 만들면서 조용하고 착하게 땀흘려 일해서 살림을 꾸리는’ 좋은 일도 없다고 느꼈기 때문입니다.

 고등학교를 다니며 이런 제도권학교에서 시달리는 일이 얼마나 끔찍한가를 느꼈지만 막상 고등학교를 그만두어야겠다고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내 둘레에 아무도 고등학교를 그만두지 않았을 뿐 아니라, 학교를 그만두고 싶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어 주며 힘을 북돋아 준 동무 또한 없었습니다.

 어영부영 고등학교를 마치고 1994년에 대학교라는 데에 들어갔으나, 대학교 또한 고등학교와 다를 구석 없이 제도권학교였고, 대학생 선배라는 사람은 그닥 대단하지 않을 뿐더러, 대학 교수라 해서 지식이나 지성이나 슬기나 아름다움을 건사하지 못하는구나 하고 느꼈습니다. 그래도 한 학기는 버티자고 다짐했지만, 한 학기를 버티면서도 대학교는 지나치게 비싼 돈을 받으며 참배움을 나누지 못한다고 깨달아 몹시 갑갑했습니다. 어쩔 수 없이 둘째 학기에는 강의는 거의 안 듣고 도서관과 학교 앞 새책방과 서울 시내 여러 헌책방을 찾아다니며 스스로 배움을 얻으려고 했습니다. 대학교 강의실 울타리에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했습니다.

 1995년 가을에 스스로 영장을 받아 군대에 들어갑니다. 1997년 겨울에 군대에서 용케 살아남아 사회로 돌아옵니다. 군대 가기 앞서 하던 신문배달을 잇습니다. 이제 대학교에는 자퇴서를 내고 싶지만 어머니가 한 해를 더 다녀 보고 네 마음대로 하라 말씀하셔서 한 해를 더 다니기로 하면서, ‘고졸자도 신문기자로 받아 준다면 신문기자가 되고 싶다’고 꾸는 꿈에 따라 신문방송학과 수업을 듣기로 하고, 이때에 보도사진 강의를 듣습니다. 이무렵 한국외대와 중앙대에서 강사로 뛰던 허현주 님이 보도사진 강의를 했고, 허현주 님은 ‘사진찍기’와 함께 ‘사진읽기’를 해야 한다고 말하는 한편 ‘사진글쓰기’를 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찍기와 읽기와 쓰기, 여기에 듣기 한 가지까지 더했습니다.

 어버이한테서 고운 목숨 받고 태어난 아이가 듣기와 말하기와 읽기와 쓰기로 말과 글을 익히듯, 허현주 님 보도사진 강의는 네 가지를 고루 받아들이면서 ‘기계 같은 사진기자’가 아니라 ‘사람내음이 나는 사진쟁이’가 되도록 길동무가 되려고 했습니다.

 그래요, 이무렵 보도사진 강의를 듣는 사람 가운데 나만 혼자 사진기가 없어 쩔쩔매다가 1회용 사진기를 쓰다가, 또 망가진 싸구려 사진기 하나를 3만 원 주고 고쳐서 쓰다가, 나중에는 후배한테서 낡은 사진기 하나를 얻어 5만 원을 들여 고쳐서 쓰는 동안 ‘사진기는 목걸이로구나’ 하고 배웁니다. 또, 사진을 찍는 사람은 다른 사람 눈에는 ‘사진이 보이’겠지만, 이렇게 보이는 사진에 사진쟁이가 담을 이야기란 곧 ‘내 사랑과 믿음’이요, 이리하여 내 사진을 보는 사람은 사진이 아닌 ‘내 사랑과 믿음이 깃든 이야기’를 볼 수 있도록 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안목,2011)을 펼칩니다. 글 하나와 사진 하나가 예쁘게 어우러진 사진책입니다. 참 오랜만에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아니, 참 오랜만에 ‘나라안 예쁜 사진책’을 만났습니다. 나라밖 예쁜 사진책은 수두룩하게 흔히 보지만, 나라안 예쁜 사진책은 더없이 드뭅니다.

 나라안 사진책들은 하나같이 조금 더 잘 팔리거나 한결 돋보이거나 더욱 이름값 높이려는 예술이나 작품만 가득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은 작품집이 아니요, 예술품이 아닙니다. 그저 사진책 하나입니다.

 조현애 님은 “나는 새벽 길을 좋아했다 / 자전거타기를 더 좋아했다 / 네게 가는 것을 가장 좋아했다(12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고, 박태희 님은 새벽 길을 좋아하고 자전거 타기를 좋아하며 너한테 가는 길을 좋아하는 느낌을 당신 사랑과 믿음을 사뿐히 실어서 사진 하나로 보여줍니다.

 조현애 님은 다시 “나에게 네가 없다면 삶이 없다(26쪽).” 같은 글을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나한테 네가 없으면 내 삶이 어떠한가 하는 이야기를 당신 사랑과 믿음에 따라 사진 하나로 드러냅니다.

 조현애 님은 거듭 “뉴욕은 내 꿈을 대변하였으나 / 어느새 내 꿈을 잡아먹은 도시가 되어 버렸네 / 미드나잇 카우보이의 추위와 / 택시 드라이버, 트레비스의 고독을 기억하는 동안 / 가난한 예술 혼이 내 꿈을 지켜주었지만 / 지하철을 버리고 택시를 타고 차를 몰고 /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125쪽).” 같은 글을 울먹이며 적바림하고, 박태희 님은 사랑길과 믿음길 결을 찬찬히 어루만지면서 사진 하나를 넌지시 내밉니다.

 조현애 님은 새삼 “나도 널 초대해서 좋은 시간 갖고 싶다 / ‘네 목소린 참 정겹다’ 말해 주고 싶다(138쪽).” 같은 글을 적바림했으며, 박태희 님은 당신한테 사랑스러운 님을 부르는 손짓과 목소리라 할 만한 사진을 하나 살그머니 내놓습니다.

 사진은 내 느낌입니다. 글은 내 느낌입니다. 그림은 내 느낌입니다. 노래와 춤과 연극과 영화 또한 내 느낌입니다. 밥하기와 빨래하기와 청소하기와 아이돌보기 모두 내 느낌이에요. 논일과 밭일과 바닷일도 하나같이 내 느낌이에요.

 나는 둘레 아이들한테고 어른들한테고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 이야기를 요사이에 꽤 자주 합니다. 어린 날 〈플란다스의 개〉라는 만화영화를 보았을 때에는 느끼거나 알아채지 못한 이야기를 서른일곱 나이에 바야흐로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열 살 안팎 어린이였던 내 지난날을 더듬으면, ‘네로가 그림을 좋아한’ 줄을 잘 떠올리지 못했어요. 아니, 생각조차 안 했습니다. 네덜란드와 벨기에와 프랑스가 맞닿은 곳에서 살아가는 예쁘장한 네로와 아로아와 파트라슈 이야기쯤으로만 떠올렸을 뿐입니다. 그런데, 만화영화 〈플란다스의 개〉를 들여다보니, 또 위다 님이 쓴 원작소설 《플랜더스의 개》(비룡소,2004)를 읽으니, 이 얘기에서 네로가 그림을 얼마나 아끼거나 좋아하느냐는 대단히 큰 자리를 차지하더군요. 가난하고 학교 문턱은 밟은 적이 없으며 한겨울에도 양말과 장갑 없이 우유 나르기를 거든 네로는 ‘아로아를 그린 그림을 돈을 받고 팔지 못’해요. 네로는 스스로 그린 그림 가운데 어느 그림도 돈을 받고 누구한테 준 적이 없습니다. 마음속에서 우러나는 이야기를 그림으로 그립니다. 아무런 그림 기법을 모르지만 네로가 품은 사랑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어떠한 그림쟁이도 모르나, 오직 하나, 루벤스라는 사람이 어떠한 믿음으로 그림을 그려서 나누었는가를 되새기면서 네로는 네로라는 아이 가슴에서 피어나는 믿음으로 그림을 그립니다. 네로가 본 그림은 루벤스 님이 그림 그린 한 점뿐이었고, 굶주리고 추위에 떨다가 죽기 앞서 루벤스 님 다른 그림 두 점을 더 보았습니다.

 사진책 《사막의 꽃》을 펼치면서 생각합니다. 사진책이 사진책이 되자면 이와 같이 내 느낌, 곧 글을 쓰든 사진을 찍든, 내 느낌이 사랑이며 믿음일 때에 사진책이 됩니다.

 글로 빚는 문학책이든 인문책이든 다르지 않습니다. 지식을 더 많이 담거나 정보를 한껏 싣는다 해서 문학책이나 인문책이 되지 않습니다. 사랑을 담아야 문학책이고, 믿음이 감돌아야 인문책입니다.

 어린이문학가 이원수 님을 놓고, 요즈음 이분이 ‘친일작가’이니 아니니 하고 떠들썩합니다. ‘생계형 친일’이니 ‘친일이면 다 똑같은 친일’이니 하고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하나 궁금합니다. 이원수 님을 놓고 친일이요 아니요 하고 읊는 이들 가운데 이원수 님 발자취를 찬찬히 더듬어 보았다든지, 이원수 님이 일제강점기부터 1981년에 구강암으로 숨을 거두기까지 어떠한 글을 써서 어린이한테 읽히려 했는지를 곰곰이 헤아려 본 사람은 몇이나 될까요. 1980년 전라도 광주 일을 병자리에서 먼 소식으로 들으면서 이제 더는 글을 쓸 수 없는 몸이 되어 꼼짝도 못하면서 광주 이야기를 동화로 써서 아이들한테 들려주고 싶은데 못할 수밖에 없으니 너무 안타깝다 읊조린 말마디를 곱씹으면서, 1981년 전두환 독재정권 사슬을 슬프게 바라보며 숨을 거둔 마지막길을 톺아보는 사람은 있기나 있을까요.

 나는 서정주 님 시를 그리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이 전두환이나 박정희를 기리는 시를 썼대서 서정주 님을 그닥 안 좋아하지 않습니다. 서정주 님 시를 읽을 때에 내 가슴이 울렁이는 사랑이나 믿음이 딱히 없기 때문에 그닥 안 좋아합니다. 잘 썼다는 글이라든지 토박이말을 잘 살렸다는 글이라든지 이름값 높다는 사람 글이라든지 하나도 대단하지 않습니다. 어수룩하게 쓰면 어떻습니까. 글에 사랑이 있어야 글이지요. 이름값이 없으면 어떻습니까. 글에 믿음이 깃들어야 글이지요.

 사진작가로 이름이 드높아야 훌륭한 사진이지 않습니다. 사진마다 알알이 깃든 사랑이 있을 때에 바야흐로 사진이라고 일컫습니다. 사진 흐름을 뒤흔들거나 사진 역사를 새로 쓰도록 했다는 사진이래서 나한테까지 아름답다 싶은 사진이 되지 않습니다. 내 눈물샘을 터뜨리면서 아름답거나, 내 웃음보를 터뜨리면서 아리따울 때에, 나는 비로소 이 하나를 사진이로구나 하고 이야기합니다.

 어린이문학으로 한삶을 바친 이원수 님은 틀림없이 ‘친일시’를 썼으나 ‘친일작가’가 아닌 ‘어린이문학가’입니다. 한때 저지른 당신 잘못을 온삶을 바친 ‘어린이문학 한길 걷기’로 뉘우쳤어요. 왜냐하면, 이원수 님 동시나 동화나 수필이나 번역동화를 읽다 보면, 이분이 얼마나 사랑과 믿음을 당신 글에 녹여냈는지 느낄 수 있거든요.

 사진책 《사막의 꽃》을 거듭 되읽으면서 생각합니다. 나는 자가용 모는 사람을 되게 싫어합니다. 자가용하고 헤어지지 못하는 사람을 아주 미워합니다. 그러나, 차를 타야 할 때에는 차를 몰아야 하고, 저 또한 때때로 차를 얻어 타요. 자가용을 모느냐 안 모느냐는 그리 대수롭지 않아요. 어떤 마음이고 어떤 삶이냐가 대수롭습니다. 조현애 님처럼 “돈을 주머니에 집어넣는 순간부터 / 꿈은 조금씩 내 곁을 떠나 버렸네” 하고 노래하는 목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이 목소리를 사진 하나로 예쁘게 담아서 울먹이는 이야기를 마주하고 싶습니다.

 권정생 할아버지는 “자가용을 버려야 이라크 파병을 막을 수 있다”고 피울음 나는 목소리로 외쳤는데, 자가용을 버리지 못해 이라크 파병을 막지 못한 불쌍한 사람들을 곱게 어루만지는 글을 당신이 숨을 거두는 마지막날까지 예쁘게 적바림해 주었습니다. 예쁜 삶으로 예쁜 글을 쓰고, 예쁜 사랑으로 예쁜 사진을 빚습니다. (4344.4.15.쇠.ㅎㄲㅅㄱ)


― 사막의 꽃 (조현애 글,박태희 사진,안목 펴냄,2011.2.8./38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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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bert Frank's 'The Americans' : The Art of Documentary Photography (Paperback)
Jonathan Day / Intellect L & D E F A E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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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룩하지 않은 사진, 엉성하지 않은 삶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4]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 《les Americanis》(Delpire,2007)



 커다란 새가 하늘을 날아갑니다. 시골집 창문으로 새를 올려다봅니다. 먹이를 찾아 날아다니는 새는 거룩하지도 않으나 엉성하지도 않습니다. 봄날을 맞이해 왜가리며 해오라기며 곧잘 만납니다. 이 새들은 봄을 맞이해 깨어난 개구리를 즐겁게 잡아먹습니다. 멧기슭에 보금자리를 튼 멧새 또한 개구리랑 개구리알까지 즐겁게 잡아먹습니다. 개구리는 엉성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습니다.

 사진책 《les Americanis》(Delpire,2007)를 읽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다 읽고 나서 또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책상맡에 다섯 달쯤 꽂아 놓고는 틈틈이 천천히 천천히 읽습니다.

 나는 로버트 프랭크(Robert Frank)이든 유섭 카쉬이든 요제프 쿠델카이든, 이런 사람들 사진을 사진잔치에서 구경해 보지 않습니다. 아니, 사진잔치에서 로버트 카파이든 안젤 아담스이든 만나지 못합니다. 다만 한 번, 세바스티앙 살가도 사진은 사진잔치에서 만났습니다. 도무지 사진책으로 만나기 힘들다고 느끼던 어느 날, 마침 서울에서 살던 때에 살가도 사진잔치가 가까운 곳에서 열렸거든요.

 살가도 사진잔치를 보고 나서 십만 원을 웃도는 살가도 사진책을 두 권 장만했습니다. 하나를 먼저 사고 두 달 뒤에 살림돈을 추슬러 새로 하나 샀습니다. 로버트 카파도 안젤 아담스도 요제프 쿠델카도 유섭 카쉬도 푼푼이 살림돈을 그러모아 사진책을 장만해서 천천히 천천히 읽었습니다.

 썩 좋다 하기 어려운 사진장비를 쓰는 내 삶을 헤아립니다. 내가 사진책을 장만하는 데에 돈을 들이지 않았다면, 다른 사람들이 ‘마크 투’이니 ‘파노라마’이니 ‘핫셀’이니 ‘롤라이’이니 ‘라이카’이니 번쩍거리며 들고 다닐 때에 군침을 흘릴 까닭이 없습니다. 그동안 사진책에 들인 돈이라면 이 모든 사진장비를 두루 꿰차고도 남을 테니까요.

 나라밖 사진책 열 권이면 백만 원이 거뜬히 나옵니다. 나라밖 사진책 백 권이면 천만 원이 가벼이 나옵니다. 새책도 비싸고 헌책도 비쌉니다. 몇 천 권에 이르는 사진책을 이래저래 장만하면서 내 주머니는 어느 하루라도 넉넉한 적이 없습니다. 내 사진감을 필름으로 찍는 동안 필름값 떨어지는 소리를 안 들은 날이 없습니다. 찍고 싶은 만큼 실컷 사진을 찍은 때가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필름사진을 찍을 때마다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나 눈물을 흘리며 필름사진을 찍기 때문에 스스로 가리거나 추리면서 사진을 찍습니다. 디지털사진을 찍을 적마다 가슴이 아립니다. 그렇지만 가슴이 아린 채 디지털사진을 찍으니까 ‘요 작은 녀석으로 내가 담을 수 있는 사진’을 아낌없이 담습니다.

 사진책 《les Americanis》를 찬찬히 넘깁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담은 《미국사람들》에는 미국사람이 나옵니다. 이 사진책에 실린 사람이 영국사람이거나 일본사람이거나 한국사람일 까닭이 없습니다. 모두들 미국사람입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들은 잘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숨겨지거나 감춰진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꾀죄죄하거나 못난 사람이 아닙니다. 《미국사람들》에 나오는 사람은 뒷골목 사람이 아니요, 앞골목 사람 또한 아닙니다. 그저 미국사람을 담은 《미국사람들》입니다.

 미국사람이라 해서 더 대단하거나 어리숙하지 않습니다. 그냥 미국에서 살아가니 그 모양과 결대로 미국사람입니다. 티벳사람이라 해서 더 대단하거나 어설프지 않습니다. 그저 티벳에서 살아가니 이 모습과 무늬대로 티벳사람이에요. 네팔에 간대서 인도에 간대서 버마에 간대서 파키스탄에 간대서 이란에 간대서 몽골에 간대서 …… 무슨 사진을 무슨 사람을 무슨 삶을 무슨 사랑을 얻거나 마주할는지요.

 잘 찍어야 할 사진이 아닙니다. 잘못 찍어도 될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찍을 사진입니다. 내가 싫어하지만 돈을 벌어야 하기에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내가 보는 자리에서 찍으면 되는 사진입니다. 내가 보지 않았으나 내가 본 듯 꾸며서 찍을 사진이 아닙니다.

 잘 나거나 못난 사람이 아닌 나와 내 둘레 사람을 즐거이 찍으면 넉넉한 사진입니다.

 내 사진은 내 삶입니다. 내 사진에 담는 사람은 내 모습이거나 내 둘레 사람들 모습입니다. 내 사진에 깃들이는 사랑은 내가 나 스스로와 내 이웃한테 깃들이는 사랑입니다.

 내가 좋아하는 대로 꾸릴 삶입니다. 내가 썩 좋아하지 않지만, 돈을 벌어야 하니까 억지로 얄궂은 매무새로 꾸릴 삶이지 않습니다.

 참을 밝힌다든지 거짓을 까밝힌다든지 하는 내 손이 아닙니다. 보이는 그대로가 참이 아니고,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참이 아니며, 보이는 그대로가 거짓일 수 없으며, 보이지 않는 어떤 거짓이 있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배부르겠지요. 누군가는 배곯겠지요. 누군가는 힘겨이 일할 테지요. 누군가는 하느작거리며 노닥거리겠지요. 힘겨이 일하는 모습을 찍는대서 사회고발이 아닙니다. 노닥거리는 모습을 담는대서 한갓진 놀음놀이나 예술이 아닙니다.

 사진은 그대로 사진입니다. 거룩하지 않은 사진이면서 대단한 사진입니다. 엉성하지 않은 삶이면서 어수룩한 삶입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은 그예 미국사람을 사진으로 담아 《미국사람들》을 내놓습니다. 로버트 프랭크 님이 살아가는 결대로 마주한 미국사람 이야기가 《미국사람들》에 깃듭니다. 이 책 하나로 미국사람 삶을 마무르지 않습니다. 이 책 하나가 미국사람 모든 모습을 보여주지 않습니다. 패션모델만이 미국사람이지 않고, 권력자나 문화예술인만이 미국사람이지 않습니다. 이름난 운동선수를 찍어야 미국사람이 될 까닭이 없습니다. 또한, 이름 안 났다는 여느 농사꾼이나 청소부를 찍는대서 새삼스럽거나 훌륭한 미국사람 사진이 되지 않아요. 모두 미국사람이고, 한결같이 사람이며, 똑같이 사랑스러운 목숨입니다. (4344.4.1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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