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nsel Adams (Hardcover)
Lauris Morgan-Griffiths / Quercus / 2008년 2월
평점 :
절판




 사람을 남기는 사진
 [잘 읽히기 기다리는 사진책 23] 안젤 아담스(Ansel Adams), 《landscapes of the American West》(Quercus,2008)
 Lauris Morgan-Griffiths (엮음)


 자연을 찍은 사진이란 자연을 찍은 사진입니다. 그러나, 자연이 아닌 풍경을 찍은 사진이라면 ‘자연 사진’이 아닌 ‘풍경 사진’입니다. 꽃을 찍으면 ‘꽃 사진’입니다. 꽃에 깃든 자연을 찍을 때에는 ‘자연 사진’이지만, 자연을 헤아리지 않고 꽃만 찍는다면 ‘꽃 사진’에 그칩니다. 나무를 찍거나 하늘을 찍거나 바다를 찍거나 논밭을 찍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기를 쥔 사람 스스로 나무만 바라본다면 ‘나무 사진’이지 ‘자연 사진’이 될 수 없습니다. 시골 논밭을 찍었대서 ‘자연 사진’이나 ‘시골 사진’이 되지 않아요. 때로는 ‘논밭 사진’조차 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진으로 찍힌 모습은 논밭일지라도, 사진기를 쥔 사람은 논밭을 논밭 그대로 바라보거나 받아들이면서 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골목길을 찍었기 때문에 언제나 ‘골목 사진’일 수 없어요. 사진감은 골목길이지만, 사진쟁이 마음이 골목길을 골목길 터전 그대로 껴안지 못한다면 ‘골목 사진’이 되지 못합니다.

 사람 얼굴을 찍거나 사람 몸을 찍을 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쉽게 말해서 ‘얼굴 사진’이나 ‘사람 사진’이라 할 수 있습니다만, 사진쟁이 스스로 한 사람을 한 목숨으로서 사랑하면서 찍느냐 아니냐에 따라 ‘사람 사진’인지 아닌지가 갈립니다. 기계처럼 찍어대는 일이야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만, ‘사람 사진’이라는 이름을 붙일 만하거나, 나아가 ‘사진’이라 할 만하도록 이루어 내는 일은 누구나 하지 못합니다.

 안젤 아담스 님이 빚은 사진책 《landscapes of the American West》(Quercus,2008)를 보면서 생각합니다. 안젤 아담스 님은 언제나 ‘미국 대자연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고들 일컫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에서 사진감은 틀림없이 ‘미국 대자연’입니다. 북중미 대자연을 큼지막한 사진기로 한 장씩 천천히 담았습니다. 그렇다면, 안젤 아담스 님이 빚은 사진에 깃든 이야기 또한 ‘미국 대자연’이라 할 만하를 헤아려야 합니다. 사진감이 미국 대자연이래서 사진이야기 또한 미국 대자연일 수는 없기 때문입니다.

 사진책 《landscapes of the American West》는 여섯 갈래로 나눕니다. 첫재는 하늘이고, 둘째는 물이며, 셋째는 푸나무이고, 넷째는 돌이요, 다섯째는 집입니다. 마지막 여섯째는 삶입니다.

 하늘에서 비롯하여 물로 흐르다가는 푸나무에서 기운을 얻은 다음 돌로 우뚝 서고는 집을 마련합니다. 이리하여 삶입니다.

 안젤 아담스 님은 무슨 사진을 이루면서 무슨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을까요. 안젤 아담스 님 사진에는 어떠한 이야기가 깃들면서 우리가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다고 말하고 싶었을까요.

 하늘은 하늘 그대로가 아닙니다. 내가 바라보는 하늘, 곧 사람이 올려다보는 하늘입니다. 물은 그저 물이 아닙니다. 내가 마시는 물이요, 내 목숨을 이루며 건사해 주는 물입니다. 푸나무는 그예 푸나무가 아니에요. 내 밥이 되는 풀이요 내 집을 짓도록 몸을 내어주는 나무입니다. 돌은 딱딱하게 굳은 흙이나 모래일 뿐일까요. 나는 어디에서 무엇을 디디며 섰을까요. 내가 선 지구별이란 어떤 곳일까요. 더운 곳에서는 더운 곳대로 집을 짓습니다. 추운 곳에서는 추운 곳대로 집을 짓습니다. 저마다 다 다른 터에 걸맞게 집을 짓습니다. 이리하여 사람들은 저마다 다 다른 터에서 저마다 다 다른 삶을 일굽니다.

 사람들은 착한 일을 하기도 하지만, 미운 짓을 하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참답게 살아가기도 하지만, 그릇되게 뒹굴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아름답게 어우러지기도 하지만, 돈이나 이름값이나 권력 때문에 등치거나 짓밟기도 해요.

 우리는 햇볕 없이 살아갈 수 있을까요. 우리는 구름을 모르면서 살아갈 수 있나요. 하늘에서 비나 눈이 내리지 않아도 우리 목숨을 이을 수 있나요. 가게에서 돈을 치러 먹는샘물 페트병을 사다 먹으면 목이 안 마르나요. 꼭지를 틀어 물을 쓰면 되나요.

 풀 한 포기 자라지 못하도록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꽁꽁 뒤덮는 도시에서 어떤 사람이 어떻게 살아갈 수 있나요. 안젤 아담스 님은 참말 ‘풍경 사진’을 찍은 사람일까요. 안젤 아담스 님은 ‘너른 자연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사람’이라는 꼬리표를 붙일 만한 사진쟁이로 그칠 수 있나요.

 한국땅에서 설악산을 찍거나 제주섬을 찍는 사람들은 왜 찍는가 궁금합니다. 풍경을 찍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은 얼마나 좋은 풍경일는지 궁금합니다. 왜 내가 살아가는 보금자리나 마을은 어여쁜 풍경으로 담지 않고, 굳이 자가용을 몰아 멀리멀리 나들이를 가거나 비행기를 타고 바깥으로 나다니며 사진을 찍나요.

 가난한 사람은 티벳이나 인도에만 있나요. 내 살림집 옆에는 가난한 사람이 없나요. 한국에는 골목길이 없나요. 한국에는 높은 산이나 시원한 골짜기가 없을까요. 한국에서는 어떤 햇볕을 쬘 수 있는가요. 이 나라에서는 어떤 바닷물을 마시고 어떤 갯벌에서 어떤 조개를 캐서 먹으려나요.

 모든 사진은 사람을 남깁니다. 사람 모습이 드러나도록 찍으며 사람을 남기는 사진이 되기도 하지만, 사람 그림자란 얼씬도 하지 않지만 사람을 남기는 사진이 되기도 합니다.

 모든 사진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사람이 이 땅에서 고마운 목숨 하나 얻으며 살아가며 복닥이는 이야기를 담는 사진입니다.

 모든 사진은 사람이 빚습니다. 착한 사람이든 미운 사람이든 잘난 사람이든 못난 사람이든 똑똑한 사람이든 어리석은 사람이든 좋은 사람이든 엉망진창 사람이든, 누구나 제 깜냥껏 살아가는 대로 사진 하나 빚습니다.

 겉치레로 사진을 하는 사람도 사진을 남기고, 속마음으로 사랑을 나누는 사람도 사진을 남깁니다. 돈벌이로 사진일을 붙잡는 사람도 사진을 남기며, 집에서 내 아이 사랑하며 돌보는 사람도 사진을 남깁니다.

 누군가는 그럴싸한 사진책을 몇 권 내놓거나 그럴듯한 대학교수 이름표를 앞에 내밀면서 사진을 한다고 말합니다. 누군가는 아마추어나 풋내기라는 이름을 언제까지나 꼬리표로 붙이면서 사진책은커녕 아무런 사진비평을 듣지 못하면서 홀로 좋아하는 사진을 혼자서 누리며 스러집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대단하지 않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나쁘지 않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거룩하지 않습니다. 안젤 아담스 님 사진은 그리 어수룩하지 않습니다.

 삶이 대단할 때에 사진 또한 대단한데, 대단한 삶이란 무엇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로서는 내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대단하다고 여기기에, 내 어머니나 아버지 같은 사람들이 찍은 사진이 참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삶이 거룩할 때에 사진 또한 거룩한데, 거룩한 삶이란 어떠한지 알쏭달쏭합니다. 저로서는 제 살림을 제 손으로 일구며 꾸리는 사람들이 거룩하다고 느끼기에, 여느 농사꾼이나 고기잡이들이 사진을 찍는다 할 때에, 이들 사진이 참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아니, 굳이 스스로 사진기를 쥐지 않아도 숱한 사진쟁이들이 농사꾼이나 고기잡이 삶을 사진으로 담아 주니까, 이 사진으로 들여다보기만 해도 참 거룩하다고 느낍니다.

 사람을 남기는 사진입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발자국을 남기는 사진입니다. 안젤 아담스 님은 당신이 바라보며 사랑하는 삶을 당신 사진에 차곡차곡 아로새깁니다. 자연이나 대자연이 아닌 ‘미국 서쪽 땅’에서 ‘미국 서쪽 땅 사람들’하고 어울리며 지내던 이야기를 사진으로 차근차근 담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삶을 당신이 아끼는 사진으로 옮깁니다. 당신이 고맙게 여기는 사람들 삶을 당신이 고맙게 여겨 마지 않는 사진으로 그립니다. (4344.4.6.물.ㅎㄲㅅㄱ)
 

 

(최종규 .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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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을 찾아 떠나다 - 사진기자가 유럽에서 풀어가는 사진 이야기
채승우 지음 / 예담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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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에는 어떤 사진과 삶이 있을까
 [찾아 읽는 사진책 26] 채승우, 《사진을 찾아 떠나다》(예담,2010)



 사진작가나 사진기자로 일하는 분들이 으레 사진책을 내놓습니다. 그저 사진을 좋아하는 사람이 사진 이야기를 글이나 사진으로 엮어 사진책으로 묶는 일이란 아주 드뭅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다면 혼자서라도 사진책을 내놓겠지요. 주머니에 돈이 없이 사진만 좋아하는 사람으로서는 사진찍기를 할 때부터 무척 고단합니다.

 주머니가 가난하대서 사진을 못 찍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넉넉하대서 사진을 잘 찍을 수 없습니다. 주머니가 가난하기에 스스로 사진을 익히면서 스스로 내 몸과 살림에 맞게 사진을 받아들입니다. 주머니가 넉넉하기에 이름난 사진학교에도 들어가고 나라밖으로 사진마실을 다녀옵니다. 수많은 사진책을 걱정없이 사서 읽을 만하겠지요.

 주머니가 가난한 사진쟁이나 사진즐김이는 사진책 사는 일을 엄두를 못 냅니다. 그나마 도서관에서 사진책이라도 갖추어 주면 좋으련만, 사진책을 찬찬히 갖추는 도서관이란 없습니다. 사진갤러리 같은 데에 찾아가면 온갖 사진책을 마음껏 돌아볼 수 있나요. 사진갤러리에서는 어떤 사진책을 얼마나 갖추려나요.

 다른 나라는 어떠한지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에서 이루어지는 사진은 으레 ‘돈과 이름과 힘이 있는’ 사람들 테두리에서 이루어지곤 합니다. 작게 조용히 즐기는 사진이 문화나 예술이나 삶으로 이루어지기에는 퍽 빠듯합니다.

 1995년에 사진기자가 되어 열 몇 해 만에 여섯 달짜리 ‘휴가 또는 외귝연수’를 누릴 수 있었다는 채승우 님이 내놓은 사진책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읽습니다. 채승우 님은 당신이 사진기자로 일하던 곳을 신문사 아닌 ‘회사’라고 말합니다. 사진기자를 쓰는 ‘신문사 아닌 회사’에서 사진기자 한 사람을 여섯 달 동안 ‘휴가 또는 외국연수’를 보내 줄 만한 곳이 몇 군데나 있을까 궁금합니다. 아예 없지는 않았기 때문에 이렇게 채승우 님은 사진마실을 떠났고, 《사진을 찾아 떠나다》가 태어납니다. 채승우 님은 돈을 마음껏 쓸 수 없었다고 얘기하지만, 유럽으로 가는 편도 비행기삯뿐 아니라 마땅한 사진기나 필름이나 메모리카드 하나 살 만한 주머니가 안 되는 사람이 꽤 많습니다. 필름값은 메모리카드값보다 비싸다지만, 메모리카드가 있으려면 저장장치 부피가 넉넉한 셈틀을 갖추어야 합니다. 필름사진이나 디지털사진이나 장비값에 들여야 하는 돈은 매한가지입니다. 어떻게 보면, 한국에서 사진을 하자면, 나를 낳아 기른 어버이한테 돈이 많다든지, 내가 용케 돈 많이 받는 일터에 들어가 일할 수 있어야 하는지 모릅니다.

 채승우 님은 “유럽을 여행하며 사진을 보는 것은 가치 있는 일이었다. 그 땅의 분위기와 냄새는 사진의 흐름을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9쪽).” 하고 말합니다. 마땅하고 옳은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우리 나라에서도 똑같습니다. 내 이웃을 알려면 내 이웃을 찾아가야 합니다. 다른 누군가가 내 이웃을 다룬 책을 찾아서 읽는다든지 방송이나 기사를 읽는다고 내 이웃을 알거나 느낄 수는 없어요. 아니, ‘책에 적힌 모습’은 알겠으나, 막상 어떻게 살아가는지는 알지 못할 뿐 아니라 생각조차 못하기 일쑤입니다. 유럽을 마실하면서 유럽 냄새와 숨결을 맡을 수 있을 때에, 나로서는 ‘유럽에서 빚는 삶에 걸맞게 사진을 이루는 길’을 느끼거나 배웁니다. 이 나라 곳곳을 차근차근 디디며 이 나라 이웃을 마주한다면, 나로서는 ‘한국에서 일구는 삶에 알맞게 사진을 즐기는 길’을 느끼거나 배웁니다.

 채승우 님은 “축제가 끝날 때쯤, 나 역시 사진이 대중과 함께 가는 것이 중요하다는 생각에 동의하게 되었다. 대중이 이해하지 못하는 실험이란 적어도 저널리즘 사진에는 무의미할는지 모른다(39쪽).” 하고 말합니다. 이 또한 마땅하며 옳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대중이란 누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민중이란 또 누구일까요. 나는 대중 가운데 하나일까요, 민중 가운데 하나일까요. 또는, 나는 국민인가요 시민인가요. 나는 여느 사람인가요, 또는 읍민이나 면민인가요, 아니면 군민이거나 시골사람이거나 도시사람인가요.

 실험이란 어떤 일이고, 실험은 왜 할까요. 함께 가는 길이라 할 때에 ‘함께 가는 길을 가는 까닭’이란 무엇이고, 함께 가는 길은 어느 때에 즐거울까요. 마냥 함께 가기만 하면 언제라도 좋을는지요.

 채승우 님은 “사진가들이 사진을 발표할 수 있는 공간, 대중에게 보이고 반응을 얻을 공간이 전시장밖에 남지 않았다. 그런데 전시장과 잡지의 지면은 말하기 방법이 완전히 다른 공간으로, 전시장에서 말하기 위해서는 사진의 모양새가 달라질 수밖에 없다(46쪽).” 하고 말합니다. 지난 2010년 사진잡지 《포토넷》이 사진잡지를 더 펴낼 수 없다고 밝혔습니다. 한국에 사진잡지가 아예 없지 않습니다만, 참말 사진을 이야기하거나 사진을 사랑하거나 사진을 보여주거나 사진을 나누려 하는 사진잡지는 이제 없다고 말하더라도 틀리지 않습니다. 다른 몇 가지 사진잡지를 깎아내리려는 뜻이 아니라, 다른 몇 가지 사진잡지들이 사진잡지다운 모습과 뜻과 넋을 밝히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진은 누가 찍고, 사진은 누가 보며, 사진은 누가 즐길까요. 아무개가 찍으면 프로사진가 좋은 작품이고, 저무개가 찍으면 아마추어 풋내기 습작이 될는지요. 사진으로만 바라보아도 참으로 아름답기에 꾸준하게 태어나는 사진책일까요. 사진쟁이 이름이 없이 사진만 훌륭할 때에도 얼마든지 사진책을 엮어서 내놓는 한국 사진밭인가요.

 “지금 패션사진은 현대 사진 예술의 중요한 한 갈래다. 하지만, 나는 아직도 어떤 사진가가 대중에게 인기 있다는 이유만으로 예술가로 취급받는 것은 옳다고 생각하지 않는다(244쪽).” 하는 말을 가만히 되씹습니다.

 ‘사진은 대중과 함께 가야 한다’고 느낀다는 채승우 님이라 한다면, 이 말은 스스로 어긋납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하면, 스스로 느낀다 하더라도 스스로 살아가려는 길은 다를 수 있어요. ‘대중한테 사랑받는 사진을 찍는다지만, 이이는 그저 상업사진을 하는 사람일 뿐, 예술사진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하고 말할 만합니다. 또한, 상업사진이래서 굳이 예술사진으로 나아갈 까닭이 없고, 상업사진은 상업사진으로도 훌륭합니다.

 상업사진이란 돈을 버는 사진입니다. 처음부터 ‘돈을 벌겠다’고 해서 찍을 때에 상업사진입니다. 패션사진이란 상업사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사람들 옷차림을 살피는 사진이라 한다면 상업사진이 아닐 터이나, 오늘날 한국에서든 나라밖에서든 이루어지는 모든 패션사진은 돈을 버는 뜻으로 찍는 사진입니다. 옷을 더 많이 팔아 돈을 더 많이 벌려는 회사에서 일감을 맡기는 패션사진이지, 돈하고는 동떨어진 채 예술을 이루려는 패션사진이란 없어요.

 생각해 보면, 돈벌이를 꾀하는 사진을 ‘사진이라 말해야 하는가’부터 따져야지 싶습니다. 예술사진이건 아니건, 사진인가 아닌가부터 따져야지 싶습니다. 상업사진이 ‘장사’로만 그치는지 ‘장사를 하며 즐기는 사진’인지를 따져야지 싶어요.

 책방 일을 하는 사람이나 책을 만드는 책마을 일꾼을 헤아려 봅니다. 책방 일꾼이나 책마을 일꾼이나 책을 팔아야 합니다. 언제나 장사를 합니다. 그러나, 책방 일꾼이 장사만 꾀한다든지 책마을 일꾼이 장사에만 마음을 빼앗긴다면 ‘우리가 즐겁게 마주할 만한 아름다운 책’은 만날 수 없습니다. 돈벌이를 꾀하기에 자꾸자꾸 베스트셀러 목록과 스테디셀러 책시렁을 마련합니다.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해야 먹고살 수 있다는 뜻에서 하는 장사랑, 더 많은 돈을 벌어 더 가멸차고 싶대서 하는 장사는 아주 달라요.

 돈을 버는 일이 나쁠 수 없습니다. 돈만 벌어들이니까 나쁘고, 돈벌이에 빠져 내 삶을 놓치거나 잃으니 나쁩니다. 돈은 벌지만 마음은 갈고닦지 못한다면, 돈을 벌면서 사랑과 믿음을 잃는다면, 이러한 장사꾼 삶이란 ‘상업’이라고만 해야지 ‘상업사진’이라 하면 안 됩니다. 예술사진이라 하기 어렵다 말하기 앞서, 사진이라 말하기부터 어려워요.

 우리는 사진을 이루는 바탕을 살펴야 합니다. 우리는 삶을 다스리는 밑뿌리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람다이 살아가는 밑길을 느껴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사진을 마주해야 합니다.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 들어섰을 때, 저 안쪽에서 선명한 음악 소리가 들렸다. 잘생긴 청년이 피아노를 연주하고 있었다. 이들의 화려한 문명과 눈 마주치기가 부끄러워 몰래 한 장 찍었다(343쪽).”는 대목을 읽으며 아차 싶습니다. 그저 즐겁게 바라보며 사진 한 장 슬쩍 찍은 다음, 나중에 국제우편으로 사진을 보내 주면 되잖아요. 부끄러울 까닭이든 달리 무어라 느낄 까닭은 없어요. 스스럼없이 찍은 다음 스스럼없이 ‘너희들 참 예뻐 보여 찍었다. 괜찮지?’ 하고 말을 걸면 됩니다.

 ‘화려(華麗)한 문명’이란 무엇일까 생각해 봅니다. 사람들은 으레 한자말을 써 버릇하니까 말뜻을 제대로 모르기 일쑤인데, ‘화려’란 “환하게 빛나며 곱고 아름답다”를 뜻한다 합니다. “곱고 아름답다”를 함께 적는데, 곱다와 아름답다는 얼마나 어떻게 다를까요. ‘곱다’는 모두 일곱 가지 뜻으로 쓰인다는데, 첫째로 “산뜻하고 아름답다”이며, 둘째로 “빛깔이 밝고 산뜻하여 보기 좋다”입니다. 말뜻을 놓고 살피자면, “환하게 빛나며 아름답다”는 고스란히 ‘곱다’ 뜻하고 같습니다. 그런데 ‘곱다’를 풀이하면서 ‘아름답다’를 말하기 때문에 한자말 ‘화려’를 풀이하는 말마디는 앞뒤가 어긋납니다. 겹말이에요. 그러니까, 한자말 ‘화려’로 가리키려 하는 모습이란 ‘곱다’는 모습이거나 ‘아름답다’는 모습입니다.

 사진기자 채승우 님이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라는 책방에 들러 이곳 사람들이 보여주는 모습을 보았을 때에 ‘참으로 보기 좋다’고 느꼈을 테지요. 참으로 보기 좋은 ‘아름다운 삶’을 느꼈으리라 생각합니다. 도무지 사진으로 담지 않고서는 배길 수 없구나 싶은 모습이었을 테며, 몰래찍기·훔쳐찍기·도둑찍기를 안 할 수 없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 몰래찍기·훔쳐찍기·도둑찍기를 다른 이름으로 나타내자면 ‘스냅 샷’입니다. 누군가는 ‘결정적 순간’이라 할 테지요. 내 마음속으로 사무치도록 파고드는 아름다운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아 사진을 찍습니다. 내 마음에만 담기에 더없이 크며 어여쁘기에 사진으로도 옮깁니다. 나 혼자만 보고 즐기기 아쉬워 여럿한테 보여주려고 사진에 싣습니다.

 사진이란 내가 사랑하는 삶입니다. 내가 사랑하지 않는 삶을 사진으로 담으려 하면 아주 따분합니다. 달품을 받는 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하며 찍어야 하는 사진이라면 ‘내가 좋아하지 않는 모습’이거나 ‘내 가슴이 사무치게 저리는 모습’이 아니더라도 ‘그럴듯하게 보이도록 찍’어야 합니다. 돈을 받고 찍으니까요.

 이리하여, 웬만한 여느 신문사진은 웬만한 여느 패션사진과 다를 바 없이 예술사진이 되지 못할 뿐 아니라, 사진이라 말하기 부끄럽습니다. 사진을 찍은 사람 스스로 마음에서 샘솟는 아름다움을 느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조선일보〉 사진기자 채승우 님이 여섯 달 동안 유럽으로 사진마실을 다녀오며 내놓은 책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들여다보면, 이 책 370쪽에 실린 사진 가운데 초점이 안 맞으면서 흔들린 사진은, 바로 〈셰익스피어 앤 컴퍼니〉에서 몰래 찍은 한 장뿐입니다. 맨 마지막 버스인지 자동차인지 창문으로 바라본 사진은 바람결이 묻는 사진이지 흔들린 사진이 아닙니다. 꼭 요 한 장만 초점 안 맞으면서 흔들린 사진입니다. 그런데, 370쪽에 이르는 채승우 님 사진으로서 ‘유럽마실을 다년 여섯 달 이야기’ 가운데 채승우 님 삶과 이야기와 가슴과 사랑이 묻어난 사진은 꼭 요 한 장뿐입니다.

 다른 사진들은 하나같이 ‘나 여기 갔다 왔어!’ 하는 느낌이 묻어납니다. ‘난 말이야, 이런 데까지 샅샅이 훑으며 돌아보았다구!’ 하는 몸짓이 깃듭니다. 그래요, 유럽을 갔다왔으니 유럽 모습을 사진으로 보여줄 만하겠지요. 이런 길도 보여주고 저런 사진관이나 전시관도 보여줄 만합니다. 이름난 이런 사람들 모습이라든지, 손꼽히는 저런 작품 모습을 얼마든지 사진으로 내놓을 만합니다.

 여섯 달 동안 떠난 사진마실은 ‘구경하기’로 그칠 수 있습니다. 구경하기로 그친대서 나쁠 일이 없습니다. 여섯 달 동안 유럽사람 사진삶을 훔쳐보아도 괜찮습니다. 여섯 달 동안 하는 일 없이 유럽 맥주를 마시면서 후끈후끈한 밤을 보낸대서 나쁠 까닭이 없어요. 사진이란 굳어진 작품이나 틀에 박힌 예술이 아니니까요. 사진이란 이렇게 태어나 이렇게 살아온 한 사람 발자국이고, 저렇게 태어나 저렇게 부대낀 한 사람 손때입니다. 네덜란드에서 태어난 고흐한테 일본 판화 같은 그림을 그리라 할 수 없습니다. 일본에서 태어난 판화쟁이한테 고흐처럼 그림을 그리라 할 수 없어요.

 덴마크사람은 덴마크땅에서 사진을 합니다. 중국사람은 중국땅에서 사진을 합니다. 북녘사람은 북녘에서, 남녘사람은 남녘에서 사진을 합니다.

 미국이나 일본이나 유럽은 틀림없이 한국보다 사진 솜씨나 문화나 예술이나 문명이나 기술이나 재주나 제도나 정책이나 교육이나 잡지나 책이나, 어느 모로 보나 한국보다 빼어나거나 뛰어납니다. 한국 사진밭은 나라밖에서 배워야 할 대목이 참으로 많습니다. 그런데, 이것을 배우거나 저것을 배우거나, 한국에서 사진을 할 사람은 한국사람입니다. 한국말을 하면서 한국사람을 이웃으로 삼는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한국사진을 합니다.

 채승우 님은 무슨 사진을 어디에서 어떻게 하고플까 잘 모르겠습니다. 사진을 찾아 유럽으로 여섯 달을 떠났다가 돌아왔는데, 막상 한국에서 하고픈 사진이란 무엇인지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유럽에서 유럽나라 사진 이야기를 풀어내든, 유럽에서 손꼽히는 사진쟁이 이야기를 묶어내든, 이러한 이야기를 읽을 사람은 한국땅에서 살아갈 한국사람이고 한국 사진쟁이입니다. 일본사람이나 중국사람이 《사진을 찾아 떠나다》를 읽을 일이나 까닭은 하나도 없다 해도 틀리지 않습니다. 아니, 남한테 읽히기 앞서, 채승우 님 스스로 되읽을 때에 《사진을 찾아 떠나다》라는 책으로 무슨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어 하는지를 곰곰이 새겨야 할 노릇이라고 느낍니다.

 사진을 찾아 떠났습니다. 길을 떠났기에 보금자리로 돌아왔습니다. 예전에도 사진을 했고, 오늘도 사진을 합니다. 오늘 하루, 채승우 님은 어디에서 누구하고 즐겁게 나눌 사진을 어떠한 넋과 손길과 마음밭으로 마주하시는가요. (4344.4.3.해.ㅎㄲㅅㄱ)


― 사진을 찾아 떠나다 (채승우 글·사진,예담 펴냄,2010.6.10./15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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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 일기 어린이를 위한 사진 동화 시리즈
이상교 지음, 황헌만 사진 / 소년한길 / 2007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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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들레꽃 한해살이를 사진으로 싣는 넋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 2 : 황헌만·이상교, 《민들레 일기》(소년한길,2007)



 어느 한 해 4월 20일부터 이듬해 2월 2일까지 민들레꽃 한 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본 발자취를 담은 사진책 《민들레 일기》(소년한길,2007)는 이 땅 어린이가 이 땅 터전을 고이 돌아보도록 도우려는 작은 책입니다. 이 땅 어린이한테 이 땅 터전을 고이 느끼도록 돕는 이야기책이 퍽 드문 한국인데, 《민들레 일기》는 《민들레의 꿈》과 《내 이름은 민들레》하고 나란히 나오면서 ‘민들레꽃 한 송이로 읽는 자연’을 베풉니다.

 어린이가 보는 사진책을 내놓은 황헌만 님은 《섬서구메뚜기의 모험》(소년한길,2009)이라든지 《날아라, 재두루미》(소년한길,2010)라든지 《춤추는 저어새》(소년한길,2011)를 내놓기도 합니다. 앞으로도 꾸준히 ‘어린이가 읽는 사진책’을 내놓겠구나 싶은데, 우리 어른들이 사진을 한다고 하면서 늘 놓치는 대목 가운데 하나인 ‘누구한테 사진을 읽히려 하고 누구하고 함께 볼 사진을 찍으려 하는가’를 슬기롭게 풀어내려 하는구나 하고 느낍니다. 우리 아이들한테는 글로 빚은 아름다운 책을 비롯해서 그림과 만화로 이루는 어여쁜 책에다가 사진으로 일구는 아리따운 책을 선물해야 하거든요. 어른들 스스로 ‘글만 있는 책’을 차츰 적게 즐기고 ‘사진을 함께 곁들이거나 사진을 퍽 많이 넣는 책’을 즐기면서, 막상 아이들한테는 ‘사진으로 이루어진 책’을 베풀지 않는 일은 알맞지 않습니다. 오늘날처럼 숱한 아이들이 손전화 사진기로도 사진을 찍을 뿐 아니라, 사진을 가까이에서 늘 마주하는 터전에서 ‘어린이 사진책’이 없거나 모자란 일은 몹시 안타깝거나 슬프다 할 만합니다. 왜냐하면, 여느 어른이 그려서 아이한테 보여준다는 그림이나 만화를 보면 ‘일부러 유치하게 그리는’ 그림이나 만화가 참 많거든요. 아이들한테 삶을 삶 그대로 보여주면서 삶을 찬찬히 읽거나 느끼도록 이끄는 그림이나 만화가 꽤 드뭅니다. 이런 흐름에서 어른들이 아이 앞에서 할 몫 가운데 하나는, 글은 글대로 그림은 그림대로 만화는 만화대로 사진은 사진대로 가장 훌륭하면서 어여쁜 이야기꽃을 피우는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는 이제 막 꽃을 피운 민들레 꽃송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으면서 이야기를 엽니다. 시골자락 논둑에 피어난 민들레 꽃송이를 살며시 들여다봅니다. 시골자락에서 논을 갈고 눈삶이를 하며 모를 심어 돌보다가 벼베기를 하는 분들은 민들레를 잡풀로 여겨 뽑을 수 있지만, 그냥 그대로 꽃구경을 하려고 둘 수 있습니다. 서양민들레가 짓궂게 널리 퍼지니까 때로는 ‘요놈 서양민들레!’ 하면서 뽑을 테지만, 서양민들레이건 아니건 고운 꽃이라 여기며 얌전히 지켜볼 수 있습니다.

 논둑에 피어난 민들레는 논둑에 피어났기에 다른 자리에 피어난 민들레보다 좋은 보금자리를 얻었다 할 만합니다. 논에는 늘 물을 대니까 이곳 민들레는 물 걱정이 없겠지요. 게다가 논은 다른 흙땅보다 기름질 테니 먹이 얻기에 한결 나을 테고요.

 《민들레 일기》를 들여다보면, 흙을 일구는 일꾼이 이 사진책 때문에 민들레 꽃송이만 뽑지 않았구나 하고 느낍니다. 사진으로 보이는 민들레 둘레 논둑은 말끔하게 풀베기를 해 놓았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자연스레 담은 민들레 사진은 아닙니다. 《민들레 일기》를 펼칠 때에도 사진이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다고 느낍니다. 작은 꽃송이와 넓은 무논을 보여주고자 광각렌즈를 써야 할는지 모르지만, 민들레를 바라보는 거리하고 뒤편 무논하고 어우러진 모습이 살짝 어중간하지 않나 싶습니다. 같은 자리에서 같은 민들레를 바라보며 담는 사진이기는 하되, 바라보는 눈길이 너무 틀에 박혔다 할 만합니다. 그리고 너무 맑은 날에만 사진을 담아서, “민들레 일기”라는 이름이 썩 어울리지 않을 수 있겠다고 느낍니다. 흐린 날이 있고 궂은 날이 있으며 비오는 날이 있습니다. 바람이 몰아치는 날이라든지 아주 쨍쨍한 날이 있을 테지요.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에서는 따로 ‘날짜 일기’를 옆에 보여주지 않는다면 언제쯤 모습일는지를 읽기 어렵습니다. 이 사진책을 읽을 눈높이는 높은학년 어린이만이 아니요, 낮은학년 어린이부터 읽는 줄을 헤아린다면, 또 이 그림책을 볼 어린이란 시골 어린이가 아닌 도시 어린이임을 살핀다면, 사진 찍음새와 책 엮음새에 더 마음을 쏟았어야 했다고 느낍니다.

 그냥 ‘논둑에 핀 민들레 한해살이’만 들여다본다면, 굳이 시골자락까지 찾아가서 민들레를 찍을 까닭이 없습니다. 도시 어디에서나 보는 민들레를 찍어도 됩니다. 어쩌면, 도시 어린이한테는 도시 어디에서나 보는 민들레 한해살이를 담을 때에 더 남다르거나 돋보인다 할 수 있어요. 도시 어린이로서는 길가 한 귀퉁이에서 애처롭거나 간당간당 뿌리를 내려 줄기를 올리고 꽃을 피운 민들레가 어찌저찌 살아남는가를 지켜보면서 ‘민들레를 비롯한 숱한 풀꽃과 자연을 사랑하는 마음’을 북돋울 수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민들레 일기》는 일부러 논둑 민들레 하나를 마주하면서 사진으로 이야기를 빚는 뜻을 더욱 끌어내야 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논둑에 민들레 한 송이만 남기고 다른 풀은 모조리 베어낸 썰렁한 모습 때문에 사진을 찍는 틀이 딱딱하게 굳을밖에 없다 여길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어느 농사꾼이건 논둑밀이를 다 합니다. 논둑에 난 풀을 다 뽑아내지는 않으나(이렇게 하다가는 큰비가 찾아올 때에 논둑이 무너지니까요), 낫으로 풀을 다 베어요. 외려 ‘논둑 다른 풀은 모두 베었으나 민들레 한 송이만큼은 남긴 모습’을 찬찬히 보여주면서 또다른 이야기라든지 새로운 이야기를 길어올릴 수 있습니다. 논둑 풀을 베는 모습도 보여주면서 ‘아, 민들레는 농사꾼 아저씨 낫질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하는 말을 넣을 만하며, ‘이야, 농사꾼 아저씨는 노랗고 예쁜 꽃 한 송이는 곱게 남겨 놓았습니다.’ 하는 말을 넣을 수 있어요. 이렇게 하면서 농사짓기를 하면서 풀베기란 얼마나 고된 일인지 느끼도록 할 테고, 농사를 지을 때에 민들레 또한 벨 수밖에 없는 풀이 되기도 하겠다고 느끼도록 할 테며, 우리 삶터와 자연과 풀꽃이 어떤 이음고리로 이어지는가를 살피도록 할 터입니다.

 한 자리에서 찍자면 말 그대로 아주 똑같은 한 자리에서만 찍을 노릇이지, 살짝 한쪽으로 기울인다든지 뒷모습이 자꾸 조금씩 움직인다든지 하는 일은 썩 반갑지 않습니다. 아예 똑같은 한 자리를 못을 박고 찍거나, 민들레 둘레 시골 논밭자락을 두루 느끼도록 이끌 때에 반갑습니다.

 요즈음 초등학교에서도 ‘식물 관찰 일기’를 쓰도록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요즈음 아이들이 둘레 터전에서 ‘스스로 자라 스스로 씨앗을 맺고 스스로 흙으로 조용히 돌아가는 들꽃’을 얼마나 지켜볼 수 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한 해를 두루 통틀어 꽃송이 하나를 바라보며 아이 스스로 아이 마음밭을 한 해를 통틀어 곱다시 보살피도록 돕는 어른이 얼마나 될까 궁금합니다. 어린이 사진책 《민들레 일기》는 민들레꽃 한 송이를 빌어 민들레 한 송이만 예쁘장하게 바라보자는 사진이야기가 아니요, 민들레꽃 한 송이와 마찬가지로 어여쁘면서 착하고 좋은 내 ‘어린 나날’ 삶임을 깨닫거나 느끼도록 이끄는 사진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한국땅에서 사진을 한다는 이가 꽤나 많은 만큼, 한국땅에서 사진을 한다는 이들 가운데 1/10이든 1/100이든 어린이를 사랑하는 넋을 기르는 사진을 할 수 있으면 참 좋겠다고 꿈을 꾸어 봅니다. 황헌만 님은 민들레이니 저어새이니 두루미이니 섬서구메뚜기이니를 찍었지만, ‘민들레 사진이든 메뚜기 사진이든 이렇게 달리 찍을 수도 있습니다’ 하는 매무새로 새롭게 민들레 사진책을 빚는 젊은 사진쟁이가 태어난다면 기쁘겠습니다. 냉이라든지 꽃다지라든지 쑥을 들여다보는 ‘어린이 사진책’을 일구어도 기쁘겠습니다. 개구리라든지 지렁이라든지 참새라든지 까마귀라든지 다람쥐라든지 참나무라든지 두릅나무라든지 은행나무라든지 얼마든지 살필 수 있으며, 우리 둘레 수수한 목숨붙이를 ‘어린이 사진책’ 눈높이와 눈썰미와 눈결을 돌아보면서 사진이야기를 빚으면 참으로 기쁘겠어요.

 틀에 박지 않으면서 틀에 매이지 않는 좋은 어린이 사진책을 기다립니다. 다 다른 어린이가 다 다른 삶틀을 스스로 가꾸면서 나날이 좋은 마음밭 일구는 목숨빛을 내도록 어여쁜 빛그림을 베푸는 한국땅 사진쟁이를 기다립니다. (4344.3.31.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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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매방 : 승무 - 춤과 그 사람
정범태 사진, 구히서 글 / 열화당 / 199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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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은 바로 오늘 바로 여기에 있다
 [따순 손길 기다리는 사진책 20] 정범태, 《춤과 그 사람, 이매방 : 승무》(열화당,1992)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함께 지냅니다. 오늘날 여느 아버지는 어느 일터 하나를 붙잡아 새벽바람으로 일 나갔다가는 밤 늦게 돌아오곤 하지만, 저는 아이를 처음 배어 낳을 때부터 집에서 일하고 집에서 살림하며 집에서 아이를 돌보았습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와 함께 지내다 보면, 아이한테서 느낄 좋으며 살가운 모습부터 궂으며 미운 모습까지 샅샅이 마주합니다. 주말에만 살짝 보는 아이가 아니라 날마다 보는 아이일 때에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 온 모습을 사진으로 담기 일쑤입니다. 제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라면 아침부터 저녁까지 아이 삶을 그림으로 그리느라 몹시 바쁠 뿐 아니라 팔이 빠질 만큼 힘들었으리라 생각합니다.

 예나 이제나 우리 삶터는 그닥 남녀평등이 이루어졌다고 느끼기 어렵습니다. 남자 권리와 여자 권리를 헤아린다는 이들치고 아이를 낳아 돌볼 때에 서로서로 어버이로서 어떻게 해야 즐거우며 좋은가를 살피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아이를 낳기 앞서도 남자 쪽 어버이인 아버지들은 집살림이나 사람살림을 마음쓰지 않습니다. 그렇다고 여자 쪽 어버이인 어머니라 해서 어머니가 되는 길을 제대로 마음쓴다고는 느끼기 어렵습니다. 아이를 배었으니 술담배를 줄이고 달 맞추어 병원에서 환한 불빛을 쬐며 회음부를 자르고 진통제를 맞추어 쑤욱 하고 아기를 잡아당겨서는 예방주사를 발바닥에 찰싹 꽂는다고 애낳이가 되지 않아요. 내 아이가 아닌 내가 어떻게 태어났으며, 내가 어떻게 태어나야 좋을는지를 생각한다면, 또 내 아이가 아닌 내가 어린 나날 어떻게 자라면 좋을까를 돌아보면서 내 아이를 마주할 수 있어야 참다이 애낳이를 한달 수 있습니다. 남녀평등이란 육아휴직이나 가사노동분담이 아니라 삶을 함께하는 길입니다.

 이제부터 제 사랑스러운 짝꿍보다 훨씬 오래 늘 곁에서 돌봐야 할 사람은 아이인 만큼, 아이하고 살아가려 한다면 내 삶을 크게 바꾸거나 아주 바꾸거나 새로 바꾸지 않고서는 아이를 맞이할 수 없어요.

 아이는 하루하루 새로운 모습입니다. 아니, 하루 사이에도 1분마다 1초마다 새로운 모습입니다. 아이는 끝없이 자라며, 끝없이 자라기 때문에 아이요, 우리 어른들처럼 키가 더 안 큰다든지 뼈가 더 굵어지지 않는다든지 하지 않습니다. 아이는 숨을 한 번 들이쉴 때마다 자랍니다.

 집에서 아이와 살아가며 아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다 보면, 고작 하루치 아이 모습이라 하지만 백 장을 거뜬히 넘곤 합니다. 《윤미네 집》이라는 살가운 사진책이 한 권 있습니다만, 누구나 제 아이를 사랑하며 살아간다면 꼭 하루 동안 제 아이 모습을 아침부터 저녁까지 찍어서 사진책 하나 빚을 수 있습니다. 누구나 내 아이 이야기 하루치로 사진책 하나 빚을 만하며, 이름있는 사진쟁이이건 이름없는 사진쟁이이건 이러한 ‘내 아이 삶자락 이야기’ 사진책은 둘레 사람 누구한테나 아름다우며 빛고운 넋을 나누어 줍니다.

 사진기자 정범태 님은 사진기자로서 여러 가지 사진책을 내놓았습니다. 이 가운데 “춤과 그 사람”이라는 이름으로 내놓은 열 권짜리 사진책은 한겨레 옛춤을 오늘날에도 멋들어지게 추는 열 사람 이야기를 열 가지 이야기로 묶습니다. ‘한국 전통춤’이라는 이름을 붙여 그냥 한 권짜리 사진책으로 내놓아도 될 법하다 여길 수 있으나, 정범태 님은 굳이 한 사람 한 사람을 따로따로 나누어 낱권책으로 일굽니다. 한영숙 님은 살풀이요, 하보경 님은 밀양 북춤이요, 김숙자 님은 도살풀이요, 안채봉 님은 소고춤이요, 하면서 “춤과 그 사람” 열 권마다 춤쟁이 이름과 춤사위 이름을 하나하나 들면서 사진이야기로 선보입니다.

 정범태 님은 사진책 머리말에 “사십여 년 동안 ‘이 소중함들을 어떻게 간직할 것인가’라는 나 자신에게 던진 이 질문에 대한 답변”으로 사진책을 묶었다고 밝힙니다. 이 소담스럽거나 대수롭거나 놀랍거나 아름답거나 거룩하거나 살뜰한 춤사위를 홀로 알기에는 아쉬울 분더러 홀로 필름에만 얹혀 놓기에는 안타까웠으리라 생각합니다.

 나누고 싶기에, 보이고 싶기에, 또 함께 즐기거나 누리고 싶기에, 사진이란 무엇인가를 말하면서 사진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몸소 느끼고 싶기에 “춤과 그 사람” 열 권이 태어날 수 있었구나 생각합니다.

 다만, 정범태 님 스스로 밝히듯 “그러나 나는 그들의 춤 그릇과 움직임만을 이곳에 풀어 놓을 뿐 그들의 길고도 깊은 한의 이야기로 묶인 정신세계는 내가 가지고 있는 카메라로는 담아낼 수가 없었음을 고백해야겠다”는 말처럼, 춤쟁이 넋과 얼은 이 사진책에 담지 않습니다. 한편, “현대화에 발맞추어 변질되어 가는 우리 춤들 중에서 원형에 가장 가까운 몸짓들을 이 책에 담았다는 자부심은 있다”는 말처럼 한겨레 옛춤을 있는 그대로 잘 담습니다.

 사진책 《춤과 그 사람, 이매방 : 승무》이건 《춤과 그 사람, 김덕명 : 양산 사찰학춤》이건 《춤과 그 사람, 강선영 : 태평무》이건, 이와 같은 춤사위가 어떠한 가락에 따라 어떠한 멋과 몸짓으로 이루어지는가를 살뜰히 보여주는 정범태 님 사진책입니다. 이와 함께 이러한 춤사위마다 어떠한 넋과 얼이 깃들었는가는 짚지 못하는 정범태 님 사진책이에요.

 사진기자 정범태 님이 머리말에서 밝히는 말마디를 그저 ‘고개숙이기’로만 여겨서는 안 된다고 느낍니다. 정범태 님은 정범태 님으로서 할 수 있는 온힘과 온땀을 들여 이 사진책 열 권을 이룹니다. 나머지 몫, 그러니까 오늘날까지 이들 춤쟁이가 춤사위를 꾸준히 잇는 길과 결을 고이 살펴, 이들 춤쟁이 넋과 얼을 사진으로 알뜰히 담아 ‘한겨레 춤사위를 즐기는 사람들은 어떠한 넋으로 어떠한 사랑을 어떠한 얼에 따라 어떠한 몸짓으로 펼치는가’를 보여줄 만한 새로운 사진을 선보여 준다면, 남보다 먼저 한겨레 춤쟁이 모습을 사진으로 담은 사람으로서 고마우며 기쁘겠다는 이야기로 읽어야 한다고 느낍니다.

 《춤과 그 사람, 이매방 : 승무》를 비롯한 춤사위 사진책 열 권은 이 나라에서 사진길을 걷는 젊은이한테 물려주는 선물이자 빛이자 열매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찾아나서면서 밝히거나 나눌 이야기가 참으로 많은데, 이 가운데 춤 하나만 꼽아도 춤꾼마다 사뭇 다르며 서로 놀랍도록 아리따운 모습이 넘치니, 이러한 춤길에서 사진길을 길어올릴 수 있다고 물려주는 선물입니다. 누군가는 이매방 님 발자취 하나만 좇을 수 있고, 누군가는 강선영 님 발자국 하나만 살필 수 있겠지요. 한 사람 발자취만 좇더라도 사진책으로 열 권 스무 권이 태어날 만합니다. 춤꾼 한 사람이 마흔 해 예순 해를 춤사위에 넋을 실어 춤을 빚는다면, 사진꾼 한 사람은 마흔 해 예순 해를 사진사위에 넋을 실어 사진을 빚을 수 있습니다. 춤쟁이 한 사람이 하루 한 자리에서 펼치는 춤놀이를 가만히 바라보면서, 사진쟁이 한 사람은 하루 한 자리에서 느끼는 춤놀이 이야기를 한 자리에서 필름 열 통이든 스무 통이든 쓰면서 사진놀이 한 자락 일굴 수 있습니다. 또한, 젊은 사진쟁이 누군가는 ‘까망하양 빛깔로 담는 춤 사진’을 넘어 ‘무지개 빛깔로 싣는 춤 사진’을 꽃피울 수 있어요.

 책상맡으로 스미는 햇볕 흐름을 좇으면서도 사진책을 하나 마련할 수 있습니다. 시골집 우리 텃밭에 비치는 햇살을 새벽부터 밤까지 돌아보며 사진책 하나 엮을 수 있습니다.

 이야기는 늘 우리 둘레에 있습니다. 삶은 바로 내 손으로 일굽니다. 사진기를 쥔 내 손은 내가 이름난 쟁이가 아니더라도 빛납니다. 사진기 단추를 어루만지는 내 손가락은 내가 손꼽히는 꾼이 아니어도 예쁩니다. 사진은 바로 오늘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4344.3.23.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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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 우리 시대 가장 뜨겁게 활동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들의 삶과 사진 이야기
송수정 글, 강재훈 외 사진 / 포토넷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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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즐거운 내 삶길에 즐거운 내 사진길
 [찾아 읽는 사진책 22] 송수정,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


 “그들의 인생을 이해하지 않고서는 사진을 얘기할 수 없(머리말)”다고 깨달은 이야기를 들려주는 사진책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포토넷,2009)를 읽습니다. 두 권으로 이루어진 책인데, 1권과 2권이 일곱 사람씩 나누어 보여주는 대목만 다르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가볍고 작게 둘로 나누었다 여길 수 있고, 열네 사람을 두 갈래로 바라보며 열네 가지 다 다른 목소리와 숨결을 느낄 만하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사진을 한다는 열네 사람을 만난 송수정 님은 사진길을 걷는 사람들마다 어떤 이야기를 길어올리려 하는가 궁금해 합니다. 송수정 님 스스로 궁금한 이야기를 물으며, 송수정 님 사진길을 북돋우고 싶어 합니다.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은 송수정 님이 북돋우는 사진길을 따라 걸으면서 도움이 되는 길잡이말을 들을 수 있기도 할 테고, 나로서는 다른 길을 걷고 싶다고 생각하기도 할 테지요.

 어느 쪽이든 즐겁고, 어느 쪽이든 좋습니다. 어느 한 갈래 길만 사진길일 수 없으니까요. 어느 한 가지 길만 걸어야 비로소 사진길이 되지는 않으니까요.

 “세바스티앙 살가도, 조셉 쿠델카, 앙리 카르티에브레송의 사진을 분석하며 ‘에이, 나는 왜 그들처럼 안 될까’ 고민했던 흔적이 그 속에 다 묻어 있습니다(성남훈/2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입니다. 사진책 《유민의 땅》을 보면서 아쉽다고 느낄 수밖에 없었구나 싶어 거듭 고개를 끄덕입니다.

 마땅한 소리인데, 성남훈은 성남훈이지 성남훈이 살가도가 될 수 없을 뿐더러 살가도처럼 되어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으로 살아야지 쿠델카처럼 살 수 없을 뿐더러 쿠델카처럼 살아서도 안 됩니다. 성남훈은 성남훈 값을 해야지, 브레송 같은 이름값을 얻거나 브레송처럼 돈을 벌기를 바라도 되겠습니까.

 저는 제 사진을 찍으며 제 사진길을 걷고, 성남훈 님은 성남훈 님 사진을 찍으며 성남훈 님 사진길을 걸으면 즐겁습니다. 목회자는 목회자 길을 걸을 노릇이요, 교사는 교사 길을 걸을 노릇이며, 공무원은 공무원 길을 걸을 노릇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일하고 생활하면서 자연스럽게 내 몸 안으로 들어온 방법론입니다. 어떤 대상이가 상황 앞에서 스스로가 용인하지 않는 촬영 방법으로는 도저히 찍을 수가 없습니다(서헌강/3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살며시 고개를 끄덕입니다.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보면서 그닥 내키지 않던 까닭을 어렴풋하게 짚습니다. 그러나 내가 서헌강 님 사진을 내켜 하지 않는대서 서헌강 님이 사진을 못 찍는다거나 잘못 찍지 않습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좋아할 테지만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을 안 좋아합니다. 누군가는 최종규 사진이 괜찮다 할 테지만, 누군가는 풋내기 티 풀풀 난다며 손가락질하겠지요.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 삶을 일구며 서헌강 님 사진을 찍을 뿐입니다. 서헌강 님한테 안승일이나 김기찬이 되라 할 수 없습니다. 서헌강 님이 강원도 깊은 멧골자락 멧골집을 사진으로 담을 때에 안승일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고, 서헌강 님이 서울 골목길을 찍을 때에 김기찬 님처럼 찍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헌강 님은 서헌강 님이 살아온 결에 따라 당신 사진감을 찾아 당신 사진이야기를 길어올릴 당신 사진길을 걸어야 가장 아름다우면서 좋아요. 사진을 읽는 내가 다 다른 사진쟁이 다 다른 사진길을 느끼며 다 다른 맛과 멋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사진 찍는 이와 사진 즐기는 이가 나란히 아름다울 노릇입니다.

 “맨 마지막으로 체에 걸러진 흙이 제일 고운 것처럼 나는 그냥 오랫동안 작업을 하고 싶어요. 그러면 이 주제로 잠깐씩 거쳐 간 작업들과 자연스럽게 차이점이 생기겠지요(류은규/6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고개가 쭈뼛쭈뼛합니다. 어딘가 아리송합니다. 흙을 체로 거를 때에 맨 나중에 나오는 흙이 가장 곱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장 고운 흙은 맨 먼저 떨어집니다. 맨 나중에 떨어지며 걸러지는 흙은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입니다. 가장 굳거나 단단하게 뭉쳤던 녀석이 ‘곱게 걸러지기’까지 더디 걸리고 오래 걸립니다. 그러니까, 사진길에서는 ‘가장 곱게 걸러내어 사진으로 담기 힘든 사진이야기’일수록 오래 걸릴 뿐입니다. 오래도록 더 많은 품과 더 많은 사랑과 더 많은 손길을 들여 이룰 사진열매가 있습니다. 이와 함께, 금세 빛과 꿈과 뜻을 이루어 살가이 나눌 사진열매가 있어요.

 모든 사진이야기가 모두 오래오래 삭여야 잘 태어나지 않습니다. 한두 해만 사진을 찍든 한두 달만 사진을 찍든 하루이틀만 사진을 찍든 한두 시간만 사진을 찍든 일이 분만 사진을 찍든 다르지 않습니다. 다 다른 사람이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달리 마주하며 보낸 삶에 걸맞게 사진이 태어납니다.

 수박은 수박만 해야 수박답습니다. 그런데 수박 가운데 참외 크기만 할지라도 수박맛을 다하는 수박이 있습니다. 살구는 살구만 해야 살구답습니다. 살구가 박만 해서 나뭇가지가 꺾이거나 나무줄기조차 휘어진다면 살구랄 수 없어요.

 곡식에는 수수가 있고 기장이 있으며 보리와 벼와 율무와 조가 있습니다. 다 다른 곡식은 다 다른 대로 값을 하며 보람이 있고 사랑스럽습니다. 오래도록 곰삭일 사진이면 오래도록 곰삭이는 대로 아름답고,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이면 짧게 스치듯 이루는 사진으로서 아름답습니다.

 “비록 사진 속 아이들이 개미처럼 작아 보여도, 그 아이들이 다 말해 줄 수 있지 않을까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어쩌면 우리가 광각렌즈를 써서 힘있게 표현한 사진에 너무 길들어 있다 싶기도 하고(강재훈/84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싱긋 웃습니다. 사람들은 광각렌즈에도 길들고 표준렌즈에도 길들며 줌렌즈나 망원렌즈에도 길듭니다. 그저 사진을 찍어 사진을 즐기면 넉넉한데, 사진이 아닌 다른 대목에 자꾸 얽매이거나 걸려 넘어집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은 사진찍기로 즐거우면 될 텐데, 자꾸만 다른 곁길로 샙니다.

 돈이 있어서 더 낫다 하는 사진장비를 쓴다면 나로서는 더 나은 사진을 낳을 수 있겠지요. 그런데 더 나은 사진을 얻은 내 삶 또한 더 낫다 할 수 있나요. 한 달에 2백만 원이 아닌 2천만 원을 벌어야 더 낫다는 삶을 꾸리겠습니까. 다달이 2천만 원을 훌쩍 넘어서는 2억 원을 번다면 아주 훌륭하다는 삶을 일구려나요. 아니, 한 달에 고작 2십만 원을 벌거나 2만 원을 번다면 아주 못난 삶으로 나뒹굴는지 궁금합니다.

 때에 따라 렌즈를 고르고, 쓰임새에 따라 사진기를 갖추며, 주머니라든지 내 몸에 맞추어 사진을 합니다. 안젤 아담스가 높은 산봉우리를 무거운 장비를 짊어지고 올라가서 사진을 찍었대서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가벼운 똑딱이를 주머니에 넣고 산에 올라 사진을 찍어도 됩니다. 안젤 아담스는 안젤 아담스대로 살며 안젤 아담스 사진을 찍고, 나는 나대로 내 삶을 즐기며 내 사진 또한 즐깁니다.

 “나한테는 이야기가 우선이고, 잘 찍는 건 두 번째 고민입니다. 어떻게 하면 잘 찍을까는 사실 헛고민이에요. 걸어다니면서 생활 현장에서 사람과 직접 부딪히며 그 사람들의 이야기를 전하는 게 제일 좋은 사진입니다. 나는 서양 사진을 약탈적 사진이라고 생각해요. 그러나 그렇다고 말할 수는 없었지요. 주류가 다 그랬으니까. 그래서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해야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육신이 힘들어야 좋은 사진이 나오는 법이지요(노익상/106쪽).” 같은 대목을 읽으며 밑줄을 긋습니다. 참말, 걸어다니지 않고서야 사진을 찍을 수 없습니다. 취재할 곳에 자가용을 몰아 씽하니 달려가면 더 빨리 더 금방 사진을 얻겠지요. 그러나 취재할 곳에 걸어가거나 자전거를 타고 가거나 시골버스를 타고 갈 때에는, 내가 취재할 곳이 어떠하며 내가 취재할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어느 동네 어떤 터전에서 살아가는가를 몸으로 받아들입니다. 바쁘면 자가용을 몰 노릇이요, 바쁘지 않으면 걸을 노릇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바쁘대서 자동차에 탄 채로 사진기 단추만 우악스레 누를 수 없어요. 사진을 찍으려면 자동차를 멈추고 차에서 내려 뚜벅뚜벅 몇 걸음 옮긴 다음 몇 초 동안이라도 가만히 멈추어 선 채로 사진기를 들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사진에는 이야기를 담지, 솜씨를 담지 않습니다. 솜씨를 보여주자면 인공지능 컴퓨터한테 맡기면 됩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서는 첫째도 둘째도 셋째도 막째도 오로지 ‘사진에 담을 이야기 하나’입니다. 흔들리면 어떻고 빛이 어긋나면 어떻습니까. 이야기가 있대서 사진인걸요.

 그림을 그리는 사람이 잘못해서 그림 한쪽이 다치면 어떻습니까. 나중에 손질해도 되고, 그저 그런 대로 잘 어울립니다. 찌개를 끓이는 데에 양념을 0.1그램 더 넣으면 맛이 확 바뀌기도 한다지만, 확 바뀌면 확 바뀌는 대로 좋고, 못 느끼면 못 느끼는 대로 좋습니다. 찌개를 끓일 때에 양념이나 건더기를 그램으로 하나하나 따질 수 없습니다. 밥을 할 때에 쌀알을 낱낱이 세며 쌀을 씻거나 밥그릇에 퍼담을 수 없습니다.

 여러 사람 목소리를 듣다 보면, 사람마다 생각과 삶이 이다지도 다르구나 하고 느낍니다. 이들 여러 사람 목소리 가운데 내 삶에 이바지한다 싶은 대목은 곱게 받아들이고, 아직 나로서는 지나친 목소리이구나 싶으면 다음에 다시 새기며, 어딘가 섣부르거나 올바르지 않다고 느끼는 목소리라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카메라를 여러 대 들고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작가들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장면은 참 좋은데 에너지가 없어요. 예전에 컬라와 흑백을 동시에 작업해 본 적 있는데, 그건 양쪽 작업을 다 버리는 일이에요. 한 가지에만 몰입해도 제대로 나오기 힘들어요(이갑철/128쪽).” 같은 대목을 읽으면서는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사진기 하나를 들고도 여기 찍고 저기 찍고 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수많은 렌즈를 갈아끼우든 렌즈 하나로 찍든, 참말 여기저기 마구 찍어대는 사람이 꽤 많아요. 그런데, 참말 마구 찍어대는 듯 보이지만 놀랍도록 사랑스러운 작품을 빚는 사람이 있습니다. 한 장 두 장 꼼꼼히 골라서 사진기 단추를 아주 적게 누르며 훌륭한 사진을 엮는 분이 있으나, 아끼며 사진을 찍는다 하나 정작 뭘 찍는지 알 노릇이 없는 사람 또한 있어요.

 사진기를 여러 대 들든 한 대만 들든 대수로울 수 없습니다. 어떤 장비를 쓰건 다를 턱이 없습니다. 중형사진기나 대형사진기를 써야 비로소 사진이 되지 않듯, 까망하양을 하건, 무지개빛을 하건, 조금도 다를 수 없습니다.

 그런데 한국에서 다큐사진을 한다는 분들은 으레 까망하양에만 기울어집니다. 무지개빛 사람들을 ‘무지개빛처럼 다 다른 모습과 삶이 어떠한가를 고스란히 읽’으며 ‘무지개빛으로 고우면서 다 다른 멋을 나누어 주’듯이 사진으로 담는 분이 아주 드뭅니다.

 까망하양이래서 무지개빛을 못 담지 않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얼마든지 하늘에 걸린 무지개라든지 구름이라든지 찍을 수 있습니다. 까망하양으로도 시냇물과 바닷물을 담을 수 있어요. 예전 사람들은 까망하양으로만 사진을 찍어야 했으니, 까망하양으로 모든 무지개빛을 다 다른 짙기와 옅기와 느낌과 결과 무늬를 담아내려고 온힘을 쏟습니다. 오늘 사람들은 까망하양이 잘 안 된다 싶으면 무지개빛으로 건너가고, 무지개빛이 좀 어지럽다 싶으면 까망하양으로 오곤 합니다. 그렇지만, 어지러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똑같이 어지럽습니다. 아름다운 사진은 무지개빛일 때이든 까망하양일 때이든 한결같이 아름다워요.

 곰곰이 생각을 가다듬습니다. 문득 느낍니다. 어쩌면, 좀 아니다 싶어 고개를 갸우뚱하는 말마디를 들었기 때문에 ‘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서, 제가 살아오며 겪거나 받아들인 사진말을 길어올립니다. 사진쟁이한테서 삶이 묻어난 이야기를 살뜰히 받아들여도 좋고, 나 스스로 내 사진길을 깨닫거나 찾으며 이야기를 펼칠 수 있어도 좋습니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는 교과서가 아닙니다. 다큐사진 열네 사람을 하늘처럼 우러르자는 책 또한 아닙니다. 다 다른 열네 사람 다 다른 사진길을 마주하면서, 다 다른 삶과 다 다른 사랑과 다 다른 사람들 다 다른 이야기꽃을 사진열매로 어떻게 영그는가를 느끼자는 책이겠지요.

 좋으면 좋은 대로 받아들여 북돋웁니다. 아쉬우면 아쉬운 대로 맞아들여 다스립니다. 사진은 어차피 내가 찍는 내 삶입니다. 사진이란 곧 내가 살아가며 사랑하는 사람과 어깨동무하는 내 길입니다.

 낱말을 바꾸어 ‘사진’ 아닌 ‘책’이든 ‘만화’이든 ‘진보’이든 ‘통일’이든 ‘민주’이든 ‘춤’이든 ‘영화’이든 ‘글쓰기’이든 ‘아이키우기’이든 ‘집안살림’이든 ‘밥벌이’이든 넣어도 매한가지입니다. 사진을 읽을 수 있으면 삶을 읽을 수 있고, 삶을 읽을 수 있을 때에는 사진이든 그림이든 글이든 똑바로 사랑스레 참답게 읽습니다. (4344.3.21.달.ㅎㄲㅅㄱ)


― 우리가 사랑하는 다큐멘터리 사진가 14인 1 (송수정 글,포토넷 기획,포토넷 펴냄,2009.3.1./130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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