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 나를 사랑하기 좋은 날
신현림 글.그림 / 현자의숲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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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81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날

―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

 신현림 글

 현자의숲 펴냄, 2012.8.12.



  해가 기웃기웃 지려고 할 즈음에 뒤꼍으로 그릇을 하나 들고 나갑니다. 곁님과 아이들이 곧 배고프다고 할 듯하다고 느껴서, 뒤꼍에서 쑥을 뜯습니다. 이월이 막 저물고 삼월로 접어들었으나 쑥은 많이 올라오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부침개 넉 장을 부칠 만큼 뜯을 수 있습니다. 아직 조그마한 쑥잎을 하나둘 뜯어서 그릇에 채웁니다. 쑥잎은 아무리 작아도 곁에 쪼그리고 앉으면 향긋한 기운이 퍼집니다. 쑥부침개를 하든 쑥국을 끓이든 쑥버무리를 하든 온통 쑥내음이요, 마당이나 뒤꼍에서 쑥을 뜯을 적에도 쑥내음입니다.



.. 세수도 안 하고 속살이 훤히 보이는 속옷을 입고 뒤척일 때 지친 하마같이도 보여요. 그래도 귀여우세요. 애써 꾸미지 않아도 당신은 아름다워요 … 사람들은 책을 봐야겠다고 늘 결심만 하죠. 정말로 실천하려면 20년은 걸릴 거예요 ..  (8, 27쪽)



  쑥을 헹군 뒤 밀가루 반죽을 합니다. 불판을 달굽니다. 기름은 아주 조금 붓습니다. 밀가루 반죽에 쑥을 넣고 더 섞은 뒤, 불판이 뜨끈뜨끈하면 이제부터 쑥부침개를 합니다. 기름이 자글자글 익는 부침개는 부엌을 지나 마루를 거쳐, 아이들과 곁님이 있는 방으로 퍼집니다. 아이들은 어느새 알아챕니다. “우와, 맛있는 냄새 난다! 아버지가 뭐 하나 봐!” 두 아이는 마루를 쿵쾅쿵쾅 뛰면서 부엌으로 달려옵니다. “아버지, 오늘 저녁은 무슨 밥?” 두 아이는 부침개 익는 냄새만으로도 배가 살살 고픕니다.


  한 장을 부쳐서 동그란 꽃접시로 옮깁니다. 두 장째 부치려고 반죽을 불판에 붓고 나서 아이들을 부릅니다. 자, 이제 먹자! 따끈하게 덥힌 국을 그릇에 담아 밥상에 올립니다. 아이들은 밥과 국과 부침개를 바지런히 먹습니다. 부침개 담은 접시가 빌 무렵 다음 부침개를 따끈하게 올립니다.


  이제 석 장째 부치고, 부침개를 먹는 젓가락은 조금 느슨합니다. 마무리로 넉 장째를 부친 뒤 설거지를 합니다. 두 아이는 조잘조잘 떠들면서 천천히 밥술을 뜹니다.



.. 딸아이를 부려먹거나 일 시켜먹으려 낳은 건 아닙니다. 일하는 법을 가르치긴 합니다. 엄마가 없을 때 혼자 있게 되면 뭐라도 해야 할 테니까요 … 고난마저 사랑하면 인생길이 더 잘 보이듯, 온전히 다 사랑하면 후회가 없습니다 … 자신의 가치가 다른 사람들의 험담으로 낮아져서는 안 돼요. 자신을 어여삐 보는 사람의 눈에 비친 자신의 어여쁨을 보세요 ..  (50, 61, 76쪽)



  신현림 님이 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현자의숲,2012)을 읽습니다. 새빨간 옷을 입은 가볍고 앙증맞은 책에 조그마한 그림이 깃듭니다. 무슨 그림일까 하고 가만히 쳐다봅니다. 아하, 신현림 님이 그린 그림이지 싶습니다. 하늘로 쪽 뻗은 파르스름한 머리카락이 돋보이는 그림이 예쁩니다. 신현림 님은 파랑을 사랑하는군요. 그러고 보면 ‘사과 여행’ 사진에서도 ‘파랑 능금’이 곧잘 나옵니다.



.. 서른 살을 보냈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최소한의 생계비만 벌고 고시공부하듯 탐구하고 창작열을 불태우는 것뿐이었어요 … 마음속을 가난이 아니라 풍요로움, 행복, 자유의 이미지로 채워 보세요. 내가 꿈꾸는 이미지와 말로 내 속을 채워 나가면 삶은 바뀌더군요 ..  (112, 127쪽)



  파랑은 모든 목숨을 살리는 빛깔입니다. 우리는 흔히 ‘푸른 빛깔’이 모든 목숨을 살린다고 여길 테지만, 푸름과 파랑은 목숨을 살리는 구실이 다릅니다. 푸름은 ‘밥’으로 목숨을 살리고, 파랑은 ‘바람’으로 목숨을 살립니다. 아니, 푸름은 목숨을 살린다기보다 몸을 살찌우는 밥입니다. 파랑은 그야말로 목숨을 살리는 ‘숨결’입니다. 왜냐하면, ‘파란 하늘’을 가로지르는 바람은 ‘파란 기운’을 가득 담아서 우리한테 새로운 숨결로 깃들거든요. 밥은 며칠을 굶거나 보름을 굶더라도 목숨이 안 끊어지지만, 바람(숨)은 몇 초만 끊어도 곧바로 목숨을 잃어요. 그만큼 파랑이라는 빛깔은 우리 목숨하고 크게 잇닿습니다.



.. 한옥의 즐거움은 마당을 거닐거나 마루에 앉아 마당을 바라볼 수 있다는 거예요 … 통지표를 보다 보니 엄마 생각이 밀물처럼 밀려옵니다. 고등학교 입학 후 성적이 뚝 떨어져 의기소침한 나를 편안히 대해 주던 엄마 ..  (138, 142쪽)



  이야기책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은 책이름처럼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 어떤 날일까 하고 수수께끼를 내고는 스스로 수수께끼를 풉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란 무엇일까요? 모든 것을 하고 싶은 날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란 무엇일까요? 남이 나를 종(노예)처럼 부리면서 시키는 일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란 무엇일까요? 사랑이 없으면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입니다.


  그러니까, 내가 나로 우뚝 서서 홀가분하게 사랑을 꽃피울 수 있는 날이라면, 우리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내가 나답게 노래하고 춤추면서 빙그레 웃음을 터뜨릴 수 있는 날이라면, 우리는 그야말로 모든 것을 아름답게 할 수 있습니다.


  삶을 지으면 모든 날이 기쁨입니다. 사랑을 지으면 어느 날이나 노래입니다. 꿈을 지으면 온 날이 웃음입니다. 아무것도 하기 싫은 날이란, 내 삶을 잃거나, 내 사랑을 잊거나, 내 꿈을 놓친 날입니다.


  하늘을 보면서 바람을 마셔요. 별을 보면서 바람을 느껴요. 해님과 마주보면서 바람을 누려요. 구름하고 동무하면서 바람을 불러요. 내 가슴 가득 파랗게 눈부신 바람을 담으면서 오늘 하루를 새롭게 맞이해요. 그러면, 오늘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아침을 열 수 있어요. 4348.3.6.쇠.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문학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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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사의 민낯 - 패망한 일본은 한반도의 권력 구도를 어떻게 바꿨나 철수와 영희를 위한 대자보 시리즈 7
김삼웅.장동석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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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5



정치·사회·경제가 걸어온 발자국

― 한국 현대사의 민낯

 김상웅·장동석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3.1.



  ‘역사’라는 이름을 써서 우리가 걸어온 발자국을 살핀 지 얼마 안 됩니다. 이 땅에서 오래도록 살아온 사람은 ‘역사’라는 낱말을 쓴 적이 없고, 쓸 일이 없으며, 쓸 까닭이 없습니다. 그러나, 정치나 사회나 경제에서 권력을 거머쥐면서 이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쓰는 이들은 ‘역사’를 만들어서 퍼뜨려야 한다고 여깁니다.


  권력을 쥔 임금은 이녁 발자국을 돌에 새깁니다. 이 빗돌은 오늘날 문화재나 유적이나 유물이 됩니다. 권력을 쥔 임금 옆에서 고물을 받아서 챙기는 신하나 양반은 이녁 발자국을 족보에 남깁니다. 이러면서 이녁 무덤에 빗돌을 세웁니다. 이 빗돌은 문화재나 유적이나 유물이 되지 않으나, 두고두고 제삿상을 차려서 쳐다보도록 합니다.


  권력을 쥐지 않을 뿐 아니라, 권력을 아예 생각조차 하지 않는 여느 사람들은 날마다 삶을 새로 짓습니다. ‘어제(지나간 일)’를 구태여 붙잡을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새롭게 흙을 갈고 보듬으면서 밥을 지으면 즐겁기 때문입니다.


  오늘 새밥을 먹을 텐데 어제 먹은 밥을 떠올려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저녁이 되어 새밥을 먹는데 아침에 먹는 밥을 되새겨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흙과 함께 사는 사람은 역사도 족보도 빗돌도 없습니다. 이것이 모두 부질없는 줄 잘 압니다.



.. 모든 사람이 진실이 아니라고 인정한 식민지사관까지도 그런 식으로 정당화하는 게 이 땅의 보수 세력입니다. 엄격히 따지면 보수도 아니죠. 극우 세력입니다 … 역사에서 배워야 하는데, 자세한 상황과 내용을 알려고 하지 않아요. 역사적 진실이 오롯이 전해지지도 못하는 실정입니다. 이를테면 미국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었다는 인식 같은 것 말입니다 … 우리 헌정사가 불안한 이유는 시작부터 첫 단추를 제대로 꿰지 못한 데 있습니다. 한 사람의 야욕에 의해서 국가의 기본인 헌법이 애초부터 망가졌으니까요 ..  (11, 27, 51쪽)



  ‘학문’을 하는 이들은 옛날에 남겨진 빗돌이나 책을 살피려고 눈에 불을 켭니다. 그런데, 옛날 빗돌이나 책은 오로지 ‘정치·사회·경제 권력자 발자국’입니다. 권력자 눈에는 권력자만 보이기 때문에 다른 발자국은 못 남깁니다. 이를테면, 임금 자리에 앉아서 흙 한 줌 만진 적이 없는 사람은 ‘씨앗’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낫도 모를 테고, 괭이도 모를 테며, 솥도 모를 테지요. 신하나 양반이 아궁이를 알까요? 부지깽이를 알까요? 솔가지를 알까요? 짚신을 알까요? 메주를 알까요? 콩꽃을 알까요? 아무것도 모릅니다. 그래서, 삼국사기이든 조선왕조실록이든, 이런 책에는 ‘삶을 지은 사람들이 날마다 기쁨으로 누린 이야기’가 한 줄도 없습니다.


  ‘정치·사회·경제 권력자 발자국’인 옛 역사책에는 그저 권력자 발자국만 적혔으니, 이를 학문으로 삼아서 살피는 사람은 언제나 권력자 이야기만 늘어놓습니다. 한겨레에서 99.99%를 이루었다고 할 만한 시골사람 이야기를 밝히거나 다룰 수 있는 역사학자나 인문학자나 문화인류학자는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여느 시골사람 이야기는 글 한 줄로도 안 남았기 때문입니다. 여느 시골사람을 옆에서 구경한 뒤 적은 글은 몇 줄 있어요. 그나마 귀양살이를 하던 몇몇 지식인이나 학자가 이런 글을 남깁니다. 서울 한복판 궁궐 언저리에서 임금바라기를 하던 지식인이나 학자는 여느 사람들 이야기를 글로 안 씁니다. 알지 못하고 보지 못했으니 글로 쓸 수 없습니다.


  이는 오늘날에도 엇비슷해요. 벼꽃이 언제 피는지 아는 지식인이나 학자는 없습니다. 벼꽃이 어떻게 생겼는지 아는 지식인이나 학자는 없습니다. 날마다 밥을 먹으면서, 밥이 되는 쌀은 어떻게 나오고, 쌀이 되는 벼는 어떻게 얻으며, 벼가 되는 나락은 언제 누가 어떻게 심어서 어느 만큼 돌보아서 자라는가를 제대로 아는 지식인이나 학자는 없습니다.



.. 해방공간에서 역량이 있던 〈동아일보〉에서 이렇게 보도가 되다 보니 김구·이승만·박헌영 등 좌우익 인사들이 모두 반탁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신문 기사 하나가 한민족 역사의 물꼬를 돌려놓고 민족의 운명을 바꾼 것입니다. 〈동아일보〉에서 왜 이런 보도를 했는지, 혹시 미국의 힘이 작용한 건지, 아니면 열악한 통신 사정에 의한 오보인지 아직까지 밝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 해방정국에서 가장 중요한 쟁점은 통일정부 수립과 친일파 청산이었습니다. 그런데 엉뚱하게 찬탁이냐 반탁이냐로 흘러가 버렸습니다 … 경찰, 정치깡패, 반공청년단, 군대, 그리고 주한미군까지 있었는데, 거기에 민주적으로 맞서 싸워 승리한 것이 바로 4·19혁명입니다..  (41, 78쪽)



  김상웅·장동석 두 분이 주고받은 이야기를 묶은 《한국 현대사의 민낯》(철수와영희,2015)을 읽습니다. 김삼웅 님은 수많은 자료와 책을 살피면서 ‘한국 현대사’ 발자국을 좇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를 거머쥔 권력자가 거짓스레 뒤바꾸거나 감추려는 역사가 아닌, 사람들이 이 땅에서 살아온 발자국을 드러내려는 역사를 밝히려고 합니다.


  오늘날은 지난날과 달리, 시골사람도 글을 읽을 수 있고, 시골사람 이야기를 책으로 쓰기도 하며, 지식인이나 학자가 된 사람 가운데에는 시골살이를 오래 누리고 나서 도시로 온 사람이 있습니다. 이제는 지난날과 조금 다릅니다. 다만, 이렇다고 하더라도 오늘날에도 지식이나 학문을 다루려면 죄다 시골을 떠나 도시에서만 사는데, ‘한국 현대사’를 읽으려는 이들은 틈틈이 시골을 찾아다니면서 ‘시골사람 목소리’를 곧바로 귀여겨들으려 합니다. 이를테면 ‘증언’을 듣지요.



.. 백범 선생 암살 관련 자료를 찾다 보니까 안두희는 테러 집단인 서북청년단 핵심 요원이었어요 … 그때 88구락부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대부분 친일파 출신으로 이승만의 핵심 측근들이었죠. 이 사람들이 비밀회의를 거듭해서 암살 적임자를 선발했는데, 그게 바로 안두희입니다. 안두희는 우리 육군에 입대하기 전에 미국방첩대(CIC)의 정보원이자 요원으로 활동했어요. 이런 복잡한 인맥을 가진 안두희를 택한 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안두희의 아버지가 북한 출신인데, 아주 악질적인 친일파로 못된 짓을 많이 해서 재산을 크게 불렸어요 ..  (46∼47쪽)



  김구와 여운형이라는 분이 죽은 앞뒤를 살던 할매와 할배는 아직 이 땅에 있습니다. 이승만이라는 사람이 독재정권을 움켜쥐다가 사월혁명을 맞아서 부랴부랴 대통령 자리를 내려놓은 언저리에 살던 할매와 할배는 꽤 많이 이 땅에 있습니다. 군사쿠테타로 정치권력을 가로채서 그악스러운 독재를 일삼던 박정희라는 사람이 춤추던 무렵을 살던 아재와 아지매는 이 땅에 대단히 많습니다. 시골에는 새마을운동 부스러기가 짙게 남았으며, 오늘날 도시에도 새마을운동 찌끄러기가 곳곳에 그대로 있습니다.


  정치와 사회와 경제에서 권력을 주름잡는 이들이 거짓말로 역사책을 꾸미려 하면, 이제 이런 거짓말은 아주 쉽게 들통납니다. 이제는 ‘책’과 ‘자료’로도 참과 거짓이 환하게 있습니다. 지난날에는 ‘사람(시골지기)’과 ‘학자(지식인·신하·관료)’와 ‘임금(권력자)’이 따로 놀았다면, 오늘날에는 사람 사이에 학자가 있고 학자 사이에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 사이에 있는 학자나, 학자 사이에 있는 사람은, 임금(권력자)이 저지르는 짓을 꼼꼼히 알아채서 낱낱이 밝힐 수 있습니다.



.. 이승만으로서는 기반이 없으니 그들을 등에 업을 수밖에 없었죠. 친일파들은 일제가 항복하자 하늘이 무너진 것 같은 불안과 공포를 느꼈을 겁니다. 젊은 층은 대부분이 군대나 경찰에 입대해서 자기 전과를 숨겼어요. 이승만에게 줄을 선 사람들을 한번 보세요. 정권을 잡기 전부터 돈과 정보를 갖다주고, 라이벌을 죽여 주기까지 했죠. 이승만 주변에는 일제 치하에서 관리나 법관, 경찰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이승만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고, 친일파들은 자기 구명을 할 수 있으니 절묘하게 궁합이 맞은 거죠 … 국회 프락치 사건이 터진 것이 1949년 5월 초였고, 6월에는 반민특위가 해체됩니다. 6월 26일에는 김구 선생이 암살당하죠. 이승만 정권 핵심부는 절묘한 공안 시스템을 가동해서 국회를 무력화한 것입니다 ..  (55, 59쪽)



  《한국 현대사의 민낯》이라는 조그마한 책에서 모든 이야기를 샅샅이 드러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큰 실마리를 짚어 줍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사는 우리를 둘러싼 숨겨진 그림자를 우리가 스스로 캐내어 밝힐 수 있는 실마리를 건드립니다. 우리가 스스로 눈을 뜨지 않기에 그동안 못 보거나 안 보던 그늘이 무엇인가 하는 실마리를 가만히 보여줍니다.


  참을 보려고 하는 사람은 참을 봅니다. 거짓을 보면서 거짓인 줄 알아채려 하지 않는 사람은 거짓이 마치 참인 줄 잘못 받아들입니다. 이를테면, 교과서에 나온 지식이라고 해서 이 ‘교과서 지식’이 다 옳을까요? 교과서 지식은 그저 ‘교과서에 적힌 지식’일 뿐입니다. 교과서를 엮는 사람이 어떤 정치권력 입맛에 맞게 춤추느냐에 따라서 교과서 지식이 달라집니다.


  이웃 일본에서는 ‘엉터리 역사 교과서’가 나오지 않습니다. 바로 한국에서도 얼마 앞서까지 ‘엉터리 역사 교과서’로 아이들을 가르쳤고, 이런 지식으로 대입시험을 치르게 했고, 대입시험을 누구나 치러야 하는 지옥으로 굴레를 만들어서. ‘교과서 지식이 옳든 그르든 맞든 틀리든 따지지 말고 외우도’록 길들였어요.


  요즈음은 한국에서 엉터리 교과서가 나오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엉터리 교과서는 아니어도 ‘참으로 담을 이야기’는 담지 못합니다. 아니, 안 담는다고 해야 맞겠지요. 엉터리는 아니어도 참다운 이야기는 아닙니다. 앞으로는 교과서도 참다운 이야기를 담을 수 있도록 거듭나야 해요.



.. 미국 국무성 등이 파악한 박정희는 대단히 권력지향적인 인물입니다. 교사 생활을 하다가 일본 군인들이 칼 차고 다니는 게 매력적으로 보여서 일본군에 지원했을 정도니까요. 그때 나이가 스물네 살이었고 기혼인 상태였습니다. 두 가지 모두 만주군관학교 결격사유인데 혈서까지 써 가며 일본에 충성하기로 맹세합니다. 하지만 일본 패망 후 재빨리 변신해서 광복군에 이어 국군에 입대하고, 군부 내 남로당 세력의 핵심 책임자가 됩니다. 북에서 온 형의 친구 황태성을 처형하는 매정함도 보입니다 … 박정희는 미국에 자신의 반공정신을 보여주기 위해서 그를 처형해 버리지요 … 세계적인 개발 붐과 저유가 정책이 이어지면서 경제가 발전한 건데, 이것을 모두 박정희 정권의 공으로 돌릴 수는 없는 거죠. 박정희가 한일 굴욕 회담 결과 일본으로부터 받은 건 고작 5억 달러입니다 … 독도 문제나 일본군 위안부 문제, 강탈해 간 문화재 환수 문제, 사할린 동포 문제, 재일교포 법적 지위 문제 등은 거론조차 안 했어요. 오히려 굴욕 회담을 반대하는 국민들의 정항을 계엄령을 내려 진압했습니다 ..  (80∼81, 83∼84쪽)



  권력바라기 정치꾼이 나쁘다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권력을 바라면 그저 권력을 바랄 뿐입니다. 그런데, 권력바라기 정치꾼은 권력을 손에 쥐면 으레 바보짓을 일삼습니다. 아니, 바보짓이라기보다 멍청한 짓을 일삼아요. 한 줌조차 안 될 그런 권력으로 마치 ‘모든 것을 다 거머쥐었다’는듯이 여기면서 독재를 일삼으려 합니다.


  가만히 보면, 권력바라기는 어쩔 수 없는지 모릅니다. 내가 거머쥔 권력을 다른 사람도 바라기 마련일 테니, 권력을 쥔 정치꾼은 다른 사람을 모두 맞수(적)로 삼아서 무찔러야 한다고 느낄 만해요. 독재가 될밖에 없습니다.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나 경제권력이나 문화권력이나 교육권력이나 종교권력 모두, 혼자 무시무시한 힘을 휘둘러서 모든 사람이 이녁 앞에서 무릎을 꿇도록 짓누르려 합니다.


  다시금 이야기하지만, 씨앗 한 톨을 손수 흙에 심는 사람은 권력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권력자가 총칼을 들이밀면서 시골지기더러 ‘너 말야, 내가 시키는 일만 해. 왜 씨앗을 심으려고 해? 씨앗 심지 말고 군복 입고 총 들어!’ 하고 윽박지른들, 시골지기는 이런 권력자 말을 안 듣습니다. 그저 한 마디 해 줄 테지요. ‘얌마, 네가 대통령놈이고 임금년이고 뭐고 말이야, 내가 이 씨앗을 심어서 열매를 거두지 않으면 굶어죽을 텐데, 나더러 총을 들라고? 총 들고 싶으면 너 혼자 들어!’ 하고요.


  권력이나 독재나 군대나 전쟁무기가 생기는 까닭은 ‘손수 씨앗을 심으려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권력자나 독재자나 군인은 씨앗을 안 심습니다. 씨앗을 안 심기도 하고, 씨앗을 돌보지 않기도 합니다. 이들은 아이를 낳지도 않고, 아이를 돌보지도 않으며, 아이를 가르치지도 않습니다. 권력자가 아이를 낳은들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칠까요? 권력자는 독재 짓거리를 아이한테 보여주거나 가르칠 뿐일 테지요.


  역사를 읽은 사람이라면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역사를 더 깊이 파헤쳐서 더 많은 역사 지식을 알아도 나쁘지 않습니다만, 역사를 읽어서 스스로 깨달았다면, 이제 책은 그만 내려놓고, 씨앗을 심으러 가야 합니다. 어디로 가느냐 하면, 흙이 있고 풀과 나무가 우거진 숲으로 가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에 내 보금자리가 달라지고, 내 마을과 고장이 달라지며, 내 나라가 달라집니다. 참민주를 이루려면, 뛰어나거나 훌륭한 ‘정치 지도자’가 나오기보다는, 우리가 다 함께 흙을 가꾸면서 씨앗을 심을 노릇입니다. 4348.3.2.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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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디스커넥트 - 자본주의는 어떻게 인터넷을 민주주의의 적으로 만들고 있는가
로버트 맥체스니 지음, 전규찬 옮김 / 삼천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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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4



정치권력은 민주와 평화를 안 바란다

― 디지털 디스커넥트

 로버트 W.맥체스니 글

 전규찬 옮김

 삼천리 펴냄, 2014.12.12.



  홀가분하게 앞을 바라보다가 문득 두 손을 바닥에 대고 두 발을 하늘로 뻗으면 가볍게 물구나무서기가 됩니다. 이때에는 벽에 두 발이 닿지 않아도 몸이 가만히 선 채 무척 느긋하게 두 팔로 땅을 짚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바닥을 살피다가 영차 하고 힘을 주면 물구나무서기가 안 되거나 두 발이 벽에 쿵 소리를 내면서 닿아요.


  물구나무서기를 할 적마다 느끼는데, 힘으로 하려 하면 안 됩니다. 그리고, 힘으로 하려 하면 힘이 들어요. 힘을 굳이 주지도 빼지도 않으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아늑하고 느긋하면서 재미있습니다. 즐거우면서 신나는 놀이입니다.


  셈틀을 켜서 인터넷을 열 적에도 늘 같아요. 홀가분하게 인터넷을 누비면 내 마음 그대로 즐겁게 여러 가지를 누립니다. 홀가분하지 않은 마음으로 셈틀을 켜서 이것저것 하려고 들면 여러모로 골이 아프기도 하고, 막상 하려던 일도 엉키거나 힘이 들기 일쑤입니다.



.. 학자들이 자신이 살고 있는 사회를 조사하고 탐색할 때, 정치적으로 민주적인 국가에서조차 상층부를 차지한 채 현 상태에서 이익을 보는 사람들의 특권에 도전하는 것은 일반적으로 금기 사항이다. 구소련에서와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이런 상황은 거의 진실에 가깝다. 미국에서 진짜 권력은 가장 많은 돈을 소유한 자들에게 있다는 점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 경제학은 기업이 비용보다 더 큰 수익을 창출하는 한도 안에서만 노동자를 고용한다는 사실을 잘 보여준다 … 기업들은 경쟁 업체와 차별화된 것으로 인식될 브랜드를 창조하는 데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광고는 상표에 일종의 아우라를 부여하는 데도 매우 중요하다 … 상표에 내재하는 제품의 차별성은 거의 피상적인 수준에 그칠 뿐이며, 효용성과는 사실상 아무 관련이 없을 것이다 ..  (48, 69, 88, 89쪽)



  시골에는 사람이 적습니다. 시골에는 젊은이가 매우 적습니다. 시골에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참으로 적습니다. 사람도 적고, 젊은이도 적으며, 어린이와 푸름이도 참으로 적은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는 사람이 대단히 드뭅니다. 집집마다 텔레비전은 있으나, 셈틀을 놓아 인터넷을 살피는 사람도 퍽 드뭅니다. 시골마을 할매나 할배는 텔레비전에 기대어 ‘새로운 정보’를 얻습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정보가 아니라면 듣지 않고 믿지 않으며 생각하지 않습니다. 여기에 하나 더 있다면, 군청이나 면사무소 공무원이 알려주는 정보를 듣습니다. 이밖에는 다른 길이 없습니다.


  도시에는 사람이 많습니다. 도시에는 젊은이도 매우 많습니다. 도시에는 어린이도 푸름이도 참으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신문 읽는 사람도 많으며, 아침마다 거저로 나눠 주는 신문도 많고, 텔레비전뿐 아니라 인터넷으로 이것저것 살피는 사람도 몹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정보를 얻는 길이 참으로 많습니다. 도시에서는 온갖 정보가 넘치고 또 넘치며 자꾸 넘칩니다. 도시에는 극장도 많고 문화시설도 많습니다. 도시에는 찻집이나 옷집이나 온갖 가게도 많습니다. 그야말로 도시에서는 ‘알아야 할 것’투성이입니다.


  나는 시골에서 살며 둘레를 가만히 돌아봅니다. 시골에서는 신문을 읽을 일이 없고, 텔레비전을 들여다볼 일이 없습니다. 우리 집에 텔레비전이 없기도 하지만, 어쩌다가 이웃집에 들러서 텔레비전을 함께 들여다보노라면, 참말 볼거리가 없습니다. 시골사람한테 이바지할 만한 이야기는 어느 한 가지조차 없다고 할 만한 텔레비전입니다.


  도시에서 사는 이웃은 무엇을 그리 많이 알아야 할까 궁금합니다. 사건과 사고를 왜 그리 많이 살펴야 할까 궁금합니다. 정치와 경제와 교육과 문화와 예술과 과학을 왜 그리 많이 헤아리면서 갖가지 ‘새 정보’를 날마다 머릿속에 넣으면서 ‘어제 정보’는 곧바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지 궁금합니다. 하루가 지나서 쓰레기통에 넣어야 하는 정보라면, 처음부터 쓰레기통에 넣을 정보이지 싶습니다. 몇 시간쯤 지나면 쓰레기통에 들어가는 소식이나 기사나 이야기라면, 이런 소식이나 기사나 이야기는 처음부터 만들지도 퍼뜨리지도 읽지도 않아야 홀가분한 노릇이지 싶습니다.



.. 기업체들이 경쟁사로부터 자사의 제품을 차별화하기 위해 더 많은 광고를 하면 할수록 미디어와 문화에는 더 많은 상업적 ‘정보 혼란’ 상태가 야기된다 … 정치경제의 기본 내용들에 관해 민주당과 공화당 양당은 사실상 뜻을 같이한다. 따라서 이런 내용이 공적인 토론이나 논쟁의 테이블 위에 오르는 경우가 드물다. 맥퍼슨의 견해에 따르면, 양당 시스템은 특히 경제 스펙트럼의 밑바닥에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시민의 무관심과 탈정치화를 조장하고 엘리트의 지배를 유지하는 데 아주 이상적이다 … 지금도 소수의 대형 업체들이 영화 제작과 네트워크 텔레비전, 케이블 텔레비전 시스템과 채널, 출판, 음반 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 생산자 주권이 소비자 주권을 대신하게 된다. 미디어 기업들은 이제 자신들이 무엇을 제작하고 무엇을 제작하지 않을지에 관해 상당한 권력을 갖게 된다 ..  (90, 117, 137쪽)



  로버트 W.맥체스니 님이 쓴 《디지털 디스커넥트》(삼천리,2014)를 읽습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민주주의를 어떻게 좀먹는가 하는 대목을 밝히는 이야기를 들려주는 책입니다. 미국이라는 나라에서 자본주의가 인터넷을 앞세워 민주주의를 어떻게 갉아먹거나 무너뜨리려 하는가를 알려주려는 책입니다.


  마음 착한 사람이 인터넷을 다루면, 인터넷으로 사랑과 평화를 이룬다고 합니다. 마음 궂은 사람이 인터넷을 다루면, 인터넷으로 전쟁과 차별과 독점을 이룬다고 합니다.


  깊이 헤아리지 않아도 아주 마땅한 노릇입니다. 돈만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을 거머쥔다면, 오직 돈굴리기에 매달릴 테지요. 권력만 밝히려고 하는 사람이 인터넷을 손아귀에 넣는다면, 오로지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더 세게 움켜쥐려고 할 테지요.


  《디지털 디스커넥트》는 ‘미국’ 이야기를 다루는데, 미국에 있는 회사 이름을 한국에 있는 회사 이름으로 바꾸면, 이 책에서 흐르는 이야기는 ‘한국’ 이야기라고 할 만합니다. 아니, 자본주의와 민주주의가 함께 있는듯이 보이는 모든 나라에서 똑같이 벌어지는 이야기입니다.



.. 실제에서는 결국 사람들이 지속적으로 노출되는 게 그들이 이후에 원하게 되는 바를 중요하게 결정한다 … 오늘날 미국의 초등교육은 사실상 상업주의 가치관에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듯하다 … 대다수 사람들이 어린 시절부터 기억하고 있던 상표를 주로 이용하며, 어린이들 또한 부모들의 구매에 상당한 영향을 끼친다 … 이익에 굶주린 몇몇 발행인들은 황색 저널리즘이라 이름 붙여질 선정주의가 돈 되는 길이라는 점을 곧 깨닫는다 … 오늘날 미국에는 민주적 지배 구조에 관한 이해할 만한 수준의 냉소주의가 팽배하다. 권력을 가진 상업적 이해 당사자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발언권을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이 사실상 희망을 포기해 버린 탓이다 … 독점 방송 면허권과 저작권 연장, 세금 보조 같은 특혜가 항상 베풀어진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다 ..  (140, 141, 155, 165쪽)



  한국이라는 나라에 민주가 있을까요? 이를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우리한테 있을까요? 투표하는 민주 제도는 있으나, 이 다음으로 정치권력이나 경제권력을 지켜보는 민주 제도는 있을까요? 평화로 나아가도록 북돋우는 민주 제도가 한국에 있을까요? 전쟁무기와 군대와 경찰이 맡는 몫은 ‘평화’가 아닌 ‘전쟁’이 아닌가요? 전쟁무기와 군대와 경찰이 ‘지키는’ 자리는 정치권력자와 경제권력자 울타리일 뿐 아닌지요? 우리는 우리 주머니를 털어서 권력자 울타리를 지키는 허수아비나 꼭둑각시 노릇만 하지 않나요?


  사회에서도 민주를 찾아보기 어려운 한국이요, 학교에서도 민주를 찾아내기 어려운 한국입니다. 초등학교이든 중·고등학교이든 모두 매한가지입니다. 한국에 있는 학교에서는 입시교육만 있습니다. 입시교육에 따라 아이들을 줄세우고, 똑같은 제복(죄수 옷차림)을 비싼 값을 치러서 입도록 내몰면서 ‘다 다른 모든 아이’들을 ‘다 같은 종(노예)’이 되도록 길들입니다.


  아이들은 삶을 배우지 못합니다. 집에서는 어버이가 집 밖으로 나가서 돈을 버느라 바빠 아이한테 삶을 물려주거나 가르치지 못합니다. 학교에서는 어른들이 입시지도만 하느라 아이들한테 삶을 보여주거나 알려주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그저 시험공부만 합니다. 아이들은 동네나 마을에서도 아무런 삶을 보거나 배우거나 익히지 못합니다. 아이들은 언제 어디에서나 그저 물질문명과 소비사회만 바라보고 이런 흐름에 젖어듭니다.



.. 정부 규제의 핵심은 한마디로 기업이 기익을 극대화시킬 수 있도록 도움 주는 게 되어 버렸다. 이게 바로 새로운 공익 개념이다 … 규제가 더욱 줄어든 상태에서, 더 적은 수의 거대기업들만 살아남게 된다 … 미디어 기업들이 지난 15년 동안 사실상 인터넷의 개방성과 평등성을 제한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시스템을 최대한 폐쇄하고 사적으로 소유할 수 있도록 하고, 기업이나 국가가 인터넷 이용자들을 은밀하게 모니터링하도록 하며 … 1970년대 베트남전쟁 직후의 짧은 기간을 제외하면 이 군산복합 시스템은 그 어떤 도전도 받지 않았다. 군사와 안보 예산 지출이 계속해서 늘어났으며, 경제의 상당하고 지속적인 일부로서 자리잡아 왔다 ..  (192, 197, 219, 278쪽)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신문도 방송도 볼 일이 없습니다. 더 헤아린다면, 시골에서는 인터넷도 할 일이 없습니다. 더 들여다본다면, 시골에서는 전화를 할 일이 없습니다. 시골에서는 그저 시골살이만 하면 넉넉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시골에서는 왜 신문도 방송도 학교도 인터넷도, 여기에 전화도 책도 부질없을까요? 시골에서는 사람들 누구나 ‘삶’을 이루는 얼거리가 어떠한 줄 몸과 마음으로 깨달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만, 이를 깨닫자면 겉치레를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를 알아차리려면 겉옷을 벗어야 합니다. 남들과 비슷한 모습이 되어 ‘모난 돌’이 되지 않겠다고 하는 생각을 털어야 합니다.


  나는 너하고 다릅니다. 나는 너하고 다르기에 나입니다. 나는 나입니다. 너는 너입니다. 내가 너와 똑같은 차림새로 있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네가 나와 똑같은 몸짓이나 얼굴짓을 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씨앗을 심을 적에도 너와 내가 똑같이 해야 하지 않습니다. 호미질도 낫질도 삽질도 괭이질도 저마다 다르게 제 보금자리 밭을 일구는 몸짓으로 하면 됩니다.


  주어진 틀에 맞추어 밥을 빨리 먹어치워야 하지 않습니다. 하루 세 끼니를 맞추어야 하지 않습니다. 나이에 맞추어 어떤 학교에 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이가 되면 시집장가를 보내야 하지 않습니다. 어느 나이가 되면 죽어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죽음으로 달리는 사람이 아니라, 날마다 새로운 하루를 지으며 살 사람입니다.



.. 미국식 선거라는 웃기지도 않은 모습을 생각해 보자. 대통령 선거를 제외한 거의 모든 선거에서 지역 선거는 뉴스로 잘 보도되지 않는다. 일반적으로 무의미한 것들, 종종 TV 광고가 만들어 내는 것들이 선거 뉴스가 된다. 홍보 전략에 대한 평가나 후보자의 말실수, 여론조사 따위가 선거 뉴스를 이룬다 … 우리는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넘쳐나는 뉴스에 파묻혀 산다. 그러나 이런 뉴스의 상당수는 기업과 정부가 은밀히 생성하여 기자에 의해 전혀 걸러지지 않은 홍보성 기사들이다 … 미국은 역사상 가장 큰 경제적 잠재력을 지닌 나라가 아니라 점점 발전도상국을 빼닮아 가고 있다.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라면 거의 모두 사유화하거나 아웃소싱시켜 버리는 그런 나라이다 ..  (316∼317, 318, 389쪽)



  《디지털 디스커넥트》는 “지금대로 내버려진 채 자본의 필요에 따라 계속 달리게 한다면, 인터넷은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놀랍도록 위배한 채 좋은 삶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방식으로 굳어질 수 있다(400쪽).”와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면서 책을 맺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우리가 스스로 삶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이야기를 찬찬히 들려주려 합니다. 자본주의 노예가 되어 내 삶을 잊으려 하겠는지, 내 삶을 손수 짓는 씩씩하고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거듭나려 하겠는지, 어느 길로 가든 내 몫이니, 스스로 슬기롭게 생각하라는 이야기를 밝힙니다.


  우리 삶은 자유로울 때에 자유입니다. 우리 삶은 평화로울 때에 평화입니다. 우리 삶은 민주로 이루어질 때에 민주입니다. 자유도 평화도 민주도 남이 우리한테 선물로 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씨앗을 뿌리고 가꾸고 일구고 보듬고 돌보고 거두고 갈무리하고 손질할 때에 비로소 모든 자유와 평화와 민주를 기쁘게 누립니다.


  손수 짓는 삶일 때에 자유와 민주와 평화입니다. 정치권력이 우리한테 자유를 주지 않습니다. 학교교육이 우리한테 민주를 주지 않습니다. 전쟁무기가 우리한테 평화를 주지 않습니다. 내가 나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내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며 어깨동무할 수 있는 마음으로 삶을 가꿀 때에, 비로소 자유와 민주와 평화가 내 보금자리에서 깨어납니다. 바로 오늘 이곳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신문을 읽든 텔레비전을 켜든 인터넷을 열든, 나 스스로 오늘 이곳에서 눈을 떠야 합니다. 4348.3.1.해.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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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 - 미술 치료사 정은혜의 공감 노트
정은혜 지음 / 샨티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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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80



즐거움과 두려움은 늘 함께

―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

 정은혜 글

 샨티 펴냄, 2015.1.30.



  물구나무서기를 하면 내 팔과 다리가 거꾸로 섭니다. 그런데, 물구나무를 서서 가만히 있다 보면, 거꾸로 서는 모습이란 무엇인가 하고 다시금 돌아보곤 합니다. 거꾸로란 무엇일까요. 어떤 모습이 거꾸로일까요. 두 다리로 땅을 디디면 ‘바로’이고, 두 팔로 땅을 디디면 ‘거꾸로’일까요. 동그란 모습인 지구별에서 북녘과 남녘은 서로 어떤 자리가 되고, 어느 쪽이 ‘바로’이고 어느 곳이 ‘거꾸로’일까요. 지구별 바깥쪽과 안쪽은 서로 어떤 터전일까요.


  몸이 무거울 적에는 물구나무를 서기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몸이 무겁다면, 몇 킬로그램쯤 되어야 무거운 셈일까 궁금합니다. 무겁다와 가볍다를 가를 만한 잣대나 틀이 있을까요. 키가 몇 센티미터에 몸무게가 몇 킬로그램이면 무겁거나 가벼울까요.


  힘이 있으면 물구나무서기를 잘 할는지 궁금합니다. 힘이 없으면 물구나무서기를 못 할는지 궁금합니다. 힘이 있거나 없다는 잣대는 어떤 크기로 따질 만한지 궁금합니다. 어느 만큼 힘이 있으면 힘이 ‘있’거나 ‘없’어서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나 ‘못 할’까요.



.. 이러한 일들을 계속 겪으니 짜증이 났다. 그런데 시간이 조금 지나고 나자 이것이 왜 그 사람들 잘못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돈 없고 가족 없고 소외당하고 무시당하고 정신병이 있어서 사회의 언저리에서 멍하게 삶을 보내는 그들이 그렇게나마 나에게 관심을 보이는 것 아닌가? 하는 일 없이 하루 종일 미국의 쓰레기 같은 낮 텔레비전 방송을 보며 시간을 보내고 홍콩 무술 영화 비디오를 보고 또 보는 이들이 이렇게라도 나에게 관심을 갖는 것 아닌가 … ‘당신은 참 아름다운 사람이에요.’ 이 말을 열심히 텔레파시로 보내니 그것을 받았는지 어쨌는지 그녀의 입술꼬리가 미세하게 올라간다. 내가 따라서 살짝 웃으니 그녀도 살짝 웃는다 ..  (31, 50쪽)



  밥을 잘 짓는 길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잘 지으면 됩니다. 밥을 못 짓는 길도 어렵지 않습니다. 그냥 못 지으면 됩니다. 잘 지으려고 하면 잘 지을 수 있지만, 못 지으려고 하면 못 지을 수 있습니다. 불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밥을 못 짓고, 물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밥을 못 짓습니다. 다 그렇습니다. 국을 끓일 적에도 이와 같아요. 간을 살짝 잘못 맞추어도 국맛이 떨어지고, 간을 살짝 잘 맞추어도 국맛이 나아져요.


  그러니까, 언제나 내 마음에 따라서 달라지는 삶이라고 느낍니다. 내 마음이 너그럽다면,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너그럽습니다. 내 마음이 괴롭거나 고단하다면, 내가 하는 일은 언제나 괴롭거나 고단합니다. 내 마음이 사랑으로 가득하다면, 내가 하는 말은 언제나 사랑으로 가득해요. 내 마음이 미움이나 시샘으로 넘친다면, 내 입에서 흐르는 말은 으레 미움이나 시샘이기 마련입니다.



.. 정상인이든 정신병자이든 “당신은 미쳤소. 그러니 당신 이야기도 다 미친 거요.”라고 하면 대화할 여지가 없어진다 … 그들의 작품을 보면 우리가 그들을 정신병이 있는 사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정신병과 동일시하는 건 아닌가 하는 부끄러운 생각이 들곤 한다 … 실제로 우리와 같은 방법으로 느끼지 못한다고 해서 감정이 없는 사람으로 치부되어 어렸을 때부터 엄하고 호된 행동 요법을 치료라는 이름으로 받아 온, 그래서 마치 사육당하다시피 살았다며 그러한 치료를 거부하는 자폐운동가의 말이 생각난다 ..  (67, 83, 130쪽)



  정은혜 님이 쓴 《행복하기를 두려워 말아요》(샨티,2015)를 읽습니다. 정은혜 님은 ‘미술 치료사’로 일한 이녁 삶을 조곤조곤 들려줍니다. 이 책은 ‘미술 치료’란 무엇이고, ‘미술 치료’를 어떻게 했는가를 밝힌다고 할 만합니다.


  그러나, 미술 치료는 그리 대수롭지 않습니다. 미술 치료이면 어떻게 마술 치료이면 어떠하겠습니까. 글쓰기 치료도 사진찍기 치료면 또 어떠하겠어요. ‘무엇’으로 ‘치료’를 하든 대수롭지 않습니다. 대수롭게 돌아볼 대목은, ‘무엇’을 다루어서 ‘어떤 일’을 하든, 이러한 일을 하는 사람이 어떤 마음이 되어 어떤 삶을 짓느냐에 있습니다.


  스스로 즐겁게 삶을 일구면 삶이 즐겁습니다. 스스로 고단하게 삶을 돌보면 삶이 고단합니다. 스스로 웃음으로 삶을 엮으면 삶에 웃음이 가득하고, 스스로 눈물로 삶을 쥐어짜면 삶에 눈물만 흘러요.



.. 중심으로 들어가 보면 우리가 정말로 두려워하는 것은 손에 꼽힐 정도의 몇 가지 주제의 변주일 뿐이라는 사실이다 … 제일 어려웠던 일은 바늘에 손가락이 찔리지 않게 하는 것이 아니라 꼬맹이 남자애들에게 바느질은 여자만 하는 게 아니라 멋있는 남자도 하는 것이라고 꾀는 일이었다 … 내게 선물로 주어진 간결한 음식을 앞에 놓고, 그 음식이 어디서 왔는지, 이 나무 그릇이 어디서 왔는지, 이 음식을 키운 땅이 어떻게 왔는지 등을 생각하면 감사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  (177, 199, 232쪽)



  귀를 기울여 소리를 듣습니다. 귀가 있으니 소리를 듣지요. 눈을 크게 뜨고 온갖 모습을 봅니다. 눈이 있으니 온갖 모습을 보아요. 그러면, 우리는 또 무엇을 할까요? 살갗이 있어서 서로 만지거나 쓰다듬거나 얼싸안습니다. 머리가 있어서 생각을 합니다. 마음이 있으니 사랑을 길어올립니다.


  곰곰이 보면, 우리는 우리한테 있는 모든 것을 골고루 써서 삶을 아름답게 누릴 수 있습니다. 돈이 있으면 돈을 다루어 삶을 누릴 테지요? 그런데, 돈은 있되 사랑이 없다면? 이때에는 돈은 넘쳐도 사랑이 메말라서 삶이 썩 아름답지 않습니다. 거꾸로, 사랑은 가득하되 돈이 없으면?


  사랑은 가득하면서 돈이 없을 적에도 삶이 메마를까 궁금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이때에도 삶이 메마르리라 여길 수 있으나, 정작 ‘사랑 가득 돈 없는’ 사람들을 보면, 삶이 메마르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밥은 돈이 있어야 먹지 않거든요. 손수 흙을 일구어도 밥을 먹어요. 손수 집을 지어서 살림을 하지요.



.. 밖에 나가는 시간이 아주 적고, 나가도 단체로 우르르 가거나 운동을 하는 것이 대부분이므로, 이렇게 남몰래 꽃 한 송이를 옮겨 심고 돌보고 있다는 것은 참 대단한 일이다 … 다른 날은 비가 내렸는데, 숲에 누워서 빗방울 하나가 높은 나무 꼭대기에서 더 이상 볼 수 없을 때까지 떨어지는 것을 바라보았다. 마치 비가 오는 것을 태어나서 처음 보는 것마냥 신비로웠고, 그 신비로운 경험에 눈물이 났다 … 대다수의 미술 치료사들도 자신을 위한 치유적이고 창조적인 작업을 할 시간과 여유가 없는 경우가 태반이다 … 사람들은 치료사가 없어서 불행한 것이 아니라 친구가 없어서 불행하다 ..  (247, 255, 278, 314쪽)



  있어야 할 것이 있을 때에 삶이 아름답습니다. 있어야 할 것이 없을 때에 삶이 고단합니다. 우리한테는 무엇이 있어야 할까 하고 생각할 노릇입니다. 우리가 먼저 갖추면서 다스릴 대목은 무엇인지 돌아볼 노릇입니다. 나 스스로 내 삶을 아름답게 가꾸려는 길에서 무엇을 즐겁게 먼저 해야 할까 하고 헤아릴 노릇입니다.


  즐거움과 두려움은 늘 함께 있습니다. 두 가지 느낌은 모두 같은 자리에 있습니다. 멀리 떨어진 데에 있는 두 마음이 아닙니다. 그래서, 똑같은 일을 놓고도 어느 때에는 즐겁고 어느 때에는 두렵습니다. 이 대목을 슬기롭게 읽어야 합니다. 똑같은 일을 마주하고도 어느 때에는 왜 즐겁고 어느 때에는 왜 두려운지 또렷하게 헤아려서 알아야 합니다.


  제대로 바라보지 못하고, 제대로 느끼지 못하며, 제대로 알지 못할 때에는, 우리 삶은 늘 즐거움과 두려움이 엇갈리고 맙니다. 제대로 바라볼 수 있다면, 즐거움이기에 더 좋고 두려움이기에 더 나쁘지 않은 줄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즐거움과 두려움을 모두 내려놓을 수 있으면, 내 삶을 슬기롭게 헤아리면서 온통 사랑으로 넘실거리는 노래를 부르면서 웃는 하루를 엽니다. 4348.2.25.물.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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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언론학의 논리 - 정보혁명 시대 네티즌의 무기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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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2



말길을 아름답게 트는 한누리

― 민중언론학의 논리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3.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딘 때를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내 어버이한테 보여주었을 때, 두 분은 비싼 배움삯을 대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며 빚을 지셨습니다. 내가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둘 무렵, 내가 대학교라는 데에 발을 걸치는 동안 들여야 한 빚(배움삯)이 얼마나 큰지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그런데,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딜 적부터 ‘꿈’이 아닌 까마득한 ‘수렁’을 느꼈습니다. 이곳 대학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려는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끔찍한 싸움터요, 온통 바보들이 득시글거리는(나 또한 바보였습니다) 중학교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싶더니, 더욱 끔찍한 싸움터이면서 더욱 바보스러운 이들이 넘치는(나 또한 더 바보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라니, 나는 나를 얼마나 괴롭혀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어요.


  중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이런 느낌이 똑같았어요.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는, 교사라는 어른들이 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우리를 개처럼 두들겨팰 뿐 아니라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갈기고 온갖 거친 말에다가 갖가지 얼차려로 괴롭히거나 들볶았어도, 동무들끼리 모여서 하하 웃고 뛰놀면 모든 앙금을 풀 만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서는 교사도 바보요 동무도 바보입니다. 나도 바보이지요. 그저 죽자 죽자 하고 뒹굴 뿐이었습니다.



.. 민중이 주체적 결단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있을 때, ‘지식인’들은 민중이 게으르고 공짜만 좋아한다고 ‘훈계’하다가 친일의 길로 걸어갔다 … 식민사관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도 양적 확대재생산의 문제도 아니다. 식민사관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체화한 한국 언론은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거나 내일을 열어 가는 데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독자의 신뢰를 받아야 할 신문기업의 성격상 자신들의 친일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강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친일의 과거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가적 차원의 진상 규명조차 ‘종북’으로 ‘마녀사냥’ 해 왔다 ..  (36, 38, 44쪽)



  나는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동무와 함께 어우러지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둘째, 따분하고 지겨운 수업을 받는 동안 나 혼자 생각에 잠겨 홀가분하게 누리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셋째, 미술 시간에 하는 그림그리기는 재미없지만, 수업을 받는 동안 공책에 몰래 그리는 그림은 아주 재미있었어요.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혼자 집과 학교 사이를 걸어서 오가는 동안 하늘을 마시고 바람을 쐬는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배웠습니다. 넷째, 함께 어우러져서 뛰논 동무는 몇 해가 흐르건 언제까지나 동무로 지낼 수 있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몇 가지를 배웠어요. 중학교에서는 아무것도 안 가르치는구나 하는 대목을 가장 크게 배웠어요. 중학교는 ‘더 큰 감옥’에 갇힐 수 있도록 길들이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어요. 중학교라는 데는 우리한테 있던 놀이를 모두 빼앗아 바보로 길들이려 하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지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놀이를 빼앗긴 몸이 되니, 동무란 없어도 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니, 동무를 짓밟고 올라서서 ‘시험성적 높이기’만 해야 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고, 동무를 짓밟아야 하며, 시험성적을 높였으니, 이제는 더 높은 대학교에 올라가서 내 밥그릇을 잘 챙기면 되는구나 하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나라와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도덕과 교육과 예술과 학문과 종교에 걸맞다 싶은 ‘종(노예)’이나 ‘기계 부속’이 되는 길을 고등학교에서 아주 또렷하게 배웠습니다.



..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를 묻는 문항에 대해 절반에 가까운 45%가 “없다”라고 답했다. 그 수치는 신뢰도 1, 2, 3위로 나타난 한겨레(15%), KBS(12.3%), MBC(5%)를 모두 합친 숫자보다 많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신문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조선일보(4%), 중앙일보(3.7%), 동아일보(2%)의 신뢰도를 합친 수치보다 한겨레의 신뢰도가 높다는 점이다 … 한국 언론은 상대적으로 미국 언론에 비해 수용자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자신에게도 더 불신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것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존재원칙을 명확히 정립하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한 과제다 ..  (49, 83쪽)



  모든 학교를 내려놓고, 모든 졸업장을 내려놓습니다. 모든 책을 내려놓고, 모든 지식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무엇이 남을까요? 학교와 졸업장과 책과 지식을 내려놓은 나한테는 무엇이 남을까요? 네, 바로 ‘내’가 남습니다. 나한테는 오직 ‘나’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허물을 내려놓은 뒤에 비로소 하나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고, 졸업장을 찢으며, 상장이나 표창장은 재활용품 사이에 끼워넣으니,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으니,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1998년 가을에 대자보를 석 장 썼습니다. 전지와 매직을 ‘근로장학생 알바를 하던’ 대학구내 서점에서 장만한 뒤, 세 시간에 걸쳐서 또박또박 대자보를 쓰고는, 대학교 도서관 앞에 있는 게시판에 씩씩하게 붙였습니다. 어떤 대자보를 썼느냐 하면, “나는 오늘 이 대학교를 그만둔다(자퇴한다)”는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서 왜 대학교를 그만두려 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으려 하느냐 하는 이야기에다가, 나와 함께 이 길(대학 자퇴)을 걸으면서 삶을 스스로 새롭게 지을 동무를 기다린다는 뜻을 또렷하게 밝혔습니다.


  이때 붙인 대자보는 한 시간쯤 뒤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수위나 교수나 학교 관계자가 뜯거나 찢지 않았습니다. 나와 함께 이 대학교를 다니던 젊은이가 뜯어서 찢었습니다. 나는 대자보도 썼고, 학과방에는 편지를 남겼는데, 편지도 갈기갈기 찢겨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더군요. 갈기갈기 찢긴 대자보와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종잇조각을 나도 밟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종잇조각에 아쉬움을 남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 정치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을 선택해 미디어법의 통과를 각각 성명과 호소문 형태로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연 사실은 그만큼 입법 의지가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과 자본이 힘을 모았을 때 여론 형성력을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영향력이 큰 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열어 낸 한목소리에 언론까지 적극 가세했다 … 실제로 국회가 미디어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자리 2만 6000개가 늘어난다는 논리는 사실과 어긋남에도 계속 부각되었고 널리 퍼져 갔다. 명백히 사실과 다른 주장을 부각해 보도했으면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진실이 밝혀졌는데 정정하거나 관련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사실 확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  (92, 97쪽)



  손석춘 님이 쓴 《민중언론학의 논리》(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교재로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나 피디나 작가가 되려고 하는 이들한테는 여러모로 길동무가 될 만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손석춘 님은 ‘민중’이라는 낱말이 ‘죽은 말’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낡거나 한물 간 이름’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틀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민중’이라는 낱말은 ‘민중이 스스로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지식인이 지었어요.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민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어떤 이름으로 가리킬까요? 시민? 서민? 대중? 군중? 국민? 백성? 노동자? 인민? …… 이도 저도 모두 아닙니다.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아무런 이름으로도 따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알쏭달쏭하지요. 아리송하지요. 그러나,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따로 다른 이름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민중인 사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멋진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거든요. ‘민중인 사람’은 이 나라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착하면서 참답고 살가운 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썼어요.



.. 후쿠자와는 “조선인민을 위하여 조선의 멸망을 축하한다”는 글까지 발표해 조선 침략론을 전개했다. 따라서 박영효에게 신문 발간을 권했던 1882년, 후쿠자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신문과 관련해서 ‘국민’을 계몽이나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박영효·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는 아래로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공론장과 중세사회의 변혁 열망을 적대시하게 된다 …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하는 국제표준에 대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개념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비판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인권과 노동을 아예 생각도 못 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제설정이론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  (165, 174, 206쪽)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온 이들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습니다. ‘민중언론학’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히려고 하는 ‘언론학 길잡이책’입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니까, 친일부역을 했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버렸으니까, 군사독재를 일으켰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등지니, 4대강사업이라든지 자유무역협정이라든지 밀양송전탑이라든지 온갖 핵발전소를 마구 밀어붙여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움을 잊으니까, 전쟁무기와 군대로 자꾸 바보짓을 일삼아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인 줄 모르니까, 폭력이나 강간이나 차별이나 따돌림 따위를 자꾸 부추기지요.


  우리는 그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살폈습니다. 두 갈래인 사람입니다. 하나는 ‘아이’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른’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한 가지로 갈립니다. 나이로? 아니에요. 아이와 어른은 나이로 가르지 않아요.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하나 ‘철’로 가릅니다.


  철이 들면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철든 사람은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철이 안 들면 철부지입니다. 철이 든 척하는 아이는 ‘애늙은이’입니다. 철부지는 떼쟁이요 바보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철 안 든 어른 모습인 사람’이 아주 많아요. 나이만 많대서 어른이 아니기에, 나이만 많으면서 ‘어른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일삼습니다.



.. 적어도 대학이 정부 및 기업과 논리를 공유하며 기업이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경향은 확인할 수 있다 … 진실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하더라도 고투의 발자국을 또렷하게 남긴 리영희는 한국현대사 전공인 역사학자 서중석과의 인터뷰에서 끝없이 공부해 나가는 자세를 밝혔다 … 경제적 이익 추구 차원이 아닌 경제적 고통을 풀어가는 ‘윤리적 차원의 사유’가 필요하다 … 이 땅의 학문적 사대주의는 조선왕조 내내 중국의 주자학을 맹신해 온 지배적 학문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습관’처럼 언제나 무시하는 일본만 하더라도 오래전부터 학문의 자주성을 일궈 가고 있지만, 한국 학계는 미국식 연구방법이나 이론적 논의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얕잡아보거나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고 폄훼하기 일쑤다 ..  (231, 266, 286, 323쪽)



  한국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정치집권자가 ‘사대주의’를 즐겼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치집권자는 스스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정치집권자는 손수 삶을 짓지 않았어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은 정치집권자나 학자나 지식인은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늘 입으로만 떠들어요. 그래서 중국을 사대주의로 모시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사대주의로 받들다가, 해방 뒤에는 미국을 사대주의로 높이지요.


  한국에서 정치집권자뿐 아니라 모든 학자와 지식인은 온갖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과 이론을 폅니다. 안타깝지만, 《민중언론학의 논리》를 쓴 손석춘 님도 ‘한국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쓰는 말’로는 이 책을 펼치지 못해요. 손석춘 님도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을 펼칩니다. 다만, 손석춘 님은 ‘제 말’을 아직 못 찾았지만, ‘제 넋’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넋을 살려서 ‘사람다운 언론’이 나아갈 길을 밝히려고 합니다.


  사대주의란 정치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니고, 언론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닙니다. 말과 넋과 삶 모두 사대주의입니다. 광고도 대학교도 교육도 문학도 문화도 모두 사대주의로 흐릅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이끌려고 하는 《민중언론학의 논리》입니다. 이 책을 읽을 젊은이라면, 또 대학생이라면, 앞으로는 ‘내 사람된 참모습’뿐 아니라 ‘내 사람된 참말’도 슬기롭게 깨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이 책을 읽을 ‘나이든 어른’이라면, 이제껏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삶을 가만히 되새기면서, 이제부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길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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