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인용 책
신해욱 지음 / 봄날의책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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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3



들꽃처럼 수수한 이야기가 바로 문학

― 일인용 책

 신해욱 글

 봄날의책 펴냄, 2015.2.23. 13500원



  어제 아침에 작은아이더러 물을 떠다 달라고 합니다. 작은아이는 그야말로 작은 물잔에 물을 찰랑찰랑 채워서 가지고 옵니다. 자전거가 논둑길에서 미끄러지는 바람에 무릎이 크게 다쳤고, 기지도 걷지도 못하다 보니 다섯 살 아이한테 심부름을 시킵니다. 오늘 아침에 큰아이한테 물을 떠다 달라고 합니다. 큰아이도 동생처럼 작은 물잔에 물을 가득 채워서 가지고 옵니다. 조금 더 큰 잔이면 좋으련만, 이만큼 마셔도 괜찮습니다.


  여러 날 끙끙 앓으며 물도 밥도 못 먹으며 드러누웠습니다. 밥도 못 짓고 빨래도 못 하고 청소도 못 합니다. 아이들하고 함께 놀지도 못 하고, 말 한 마디를 입밖으로 내놓기에도 몸이 아프니 용을 써야 합니다.


  아픈 몸으로 하루 내내 드러누워서 생각에 잠깁니다. 안 아픈 모습을 꿈꾸고, 다 나아서 아이들하고 다시 뛰노는 모습을 그립니다. 그리고, 몸이 아파서 원고지 한 장을 쓰고는 삼십 분을 누워서 쉬고, 다시 원고지 한 장을 쓰고는 삼십 분을 누워서 쉬었다는 권정생 님은 어떤 마음이었을는지 돌아봅니다.



수능시험이 있었던 몇 주 전의 어느 날은 새벽까지 흑흑 흐느끼는 소리가 들렸다. 엘리베이터에서 데면데면 마주칠 때는 어린 여학생인 줄 알았는데, 고3 수험생이었던가 보다. 시험을 얼마나 망쳤길래 세상이 무너지듯 몇 시간째 우는 걸까. (24쪽)


영화관에 간다는 건 단순히 영화를 보러 가는 게 아니라는 것을, 영화를 둘러싼 공간과 시간을 함께 호흡할 때 진정한 영화적 체험이 완성된다는 것을 나는 광주극장에서 느낀다. (33쪽)



  “아버지, 아버지가 아플 때에는 왜 어머니가 밥을 하고 빨래를 해?” 여덟 살 큰아이가 묻습니다. “아버지가 아프면 몸을 하나도 못 쓰니까 어머니가 도와주지.”


  아이들로서는 아픈 몸이 어떠한 몸인지 잘 모를 수 있습니다. 아니, 아이들로서는 아픈 몸이 어떠한 몸인지 굳이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씩씩하고 튼튼하게 뛰놀아야지요. 무엇이든 하면서 마음껏 놀아야지요.


  어떤 어버이라도 아이를 다치게 하려는 어버이는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무슨 일이 닥치면 어떤 어버이라도 아이를 감싸면서 제 몸을 던지리라 생각합니다. 나도 엊그제 자전거가 논둑길에서 미끄러질 적에 아이들이 조금도 안 다치기를 바라면서 내 몸을 던졌고, 내 몸을 던지면서 ‘내 몸도 다치지 말자’ 하고 생각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아이들 생각만 했습니다.



지하철에 자리를 잡고 소설을 펴 들었다. 몇 개의 역을 지날 즈음, 옆에 앉은 여자도 책을 읽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92쪽)


적절한 비유라 생각하며 내 말에 스스로 취해 으쓱해진 나를 퍼뜩 깨워 준 건 뒤이은 질문이었다. “그런데요, 한가운데로 들어가는 돌직구도 아름답지 않나요? 쉽지만 묵직해서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들이요.” (133쪽)



  시인 신해욱 님이 종이신문에 여러 해에 걸쳐서 짤막하게 썼던 글을 그러모은 산문책 《일인용 책》(봄날의책,2015)을 읽습니다. 신해욱 님이 쓴 책에는 시인으로서 바라본 사회, 집안 살림꾼으로서 바라본 삶, 여자로서 바라본 이웃, 여기에 사람으로서 다른 사람을 바라본 이야기가 흐릅니다.


  산문이란 그렇지요. 꾸며서 쓰는 글은 시도 산문도 아닙니다. 억지로 짓는 글은 문학도 글조차도 아닙니다. 살면서 저절로 녹아들어 흐르는 이야기일 때에 비로소 글입니다. 이웃하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삶을 글로 옮겨적기에 산문입니다.



사진의 피사체로서야 세월의 흔적이 가득 묻은 할머니 할아버지의 얼굴만큼 훌륭한 것이 없다. 주름살은 얼굴의 골목인 것도 같고 삶의 미로인 것도 같고 시간의 형상인 것도 같다. (172쪽)


남자는 밖에서 무슨 재밌는 일을 겪었는지 활짝 웃으며 여자에게 이야기를 전하기 시작했다.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면서. 여자의 손도 빠르게 움직였다. 그랬다. 수화였다. 여자가 나를 향해 펼친 손가락을 잠시나마 오해한 게 무안했다. (195쪽)



  마당에서 나비 한 마리가 날아갑니다. 아픈 무릎을 손바닥으로 감싸면서 끙끙거리는데 나비 한 마리가 보입니다. 며칠째 집 바깥으로 한 걸음도 못 떼는데, 마당에서 노니는 나비가 한 마리 보입니다.

  부추꽃이 한창이고, 고들빼기꽃이 피려고 합니다. 모시꽃은 모시잎처럼 푸른 빛깔 꽃을 가득 피우고, 쇠무릎꽃도 쇠무릎잎처럼 푸른 빛깔로 길쭉하게 꽃을 내놓습니다.


  엊그제까지 이 모든 모습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며 지냈습니다. 서지도 기지도 못하는 채 드러누워서 하루를 보내야 하니 이 모든 모습을 하나도 바라볼 수 없습니다. 아예 생각조차 할 길이 없습니다. 마루문을 열고 몇 발짝만 내려가면 만나는 들꽃이지만, 이 들꽃이 이제 너무도 먼 나라입니다.


  아픈 삶을 붙잡아야 하는 이웃들도, 고단한 삶을 날마다 되풀이해야 하는 이웃들도, 힘들고 지친 삶에서 눈물을 흘려야 하는 이웃들도, 이녁 둘레에서 피고 지는 작은 들꽃을 쳐다볼 겨를이 없을 테지요.



놀랍다.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많은 여자들이 손수 옷 만드는 기술을 기본적으로 갖추고 있었다니. 물끄러미 내 손을 들여다본다. 직접 옷을 만들어 본 적이 없는 손이다. 사실 그런 게 가능하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다. (212∼213쪽)


‘남의 나라’에서 ‘자기 말’의 데시벨을 낮추지 않는 것은 자연스러운 걸까 무례한 걸까. 이런 것도 같고 저런 것도 같고. (256쪽)



  신해욱 님 산문책에서 신해욱 님이 스스로 놀랍게 여기듯이,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이 나라 거의 모든 가시내는 옷을 손수 지었고, 이불도 손수 마련했습니다. 옷이나 이불을 돈 주고 사서 쓴다는 생각을 안 했지요.


  집은 어떠할까요?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참말 집도 누구나 손수 지었습니다. 밥도 손수 지어서 먹었지요. 냄비에 올리면 되는 밥이 아니라, 논밭을 일군 뒤 나무를 해서 불을 지피고는 솥을 써서 밥을 지었어요. 이 모든 삶이, 그러니까 ‘자급자족’을 하던 삶은 고작 한 세대만 거슬러 올라도 엿볼 수 있습니다.


  요즈음 어른들은 돈을 모아서 아파트를 장만하려고 합니다. 요즈음 어른들은 옷집을 찾아가서 돈으로 옷을 사거, 맛집을 살피면서 맛난 밥을 사 먹습니다. 뜨개질을 익히거나 텃밭을 일구려는 어른이 매우 드뭅니다. 학교에서도 아이들은 뜨개질이나 텃밭 일구기를 배우지 못합니다. 도시뿐 아니라 시골도 매한가지입니다.



집에 돌아와 단원미술관이 어디에 있나 검색해 보았다. 안산이었다. 김홍도는 안산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역시 몰랐던 사실이다. 안산의 단원이라. 그렇다면 세월호에 탑승했던 학생들이 다닌 단원고등학교의 ‘단원’도, 김홍도의 그 ‘단원’이란 말인가. (300쪽)



  《일인용 책》은 신해욱 님 한 사람 삶을 드러내 보이는 책입니다. 말 그대로 “한 사람 책”입니다. 한 사람 이야기가 흐르고, 한 사람 넋이 빛나며, 한 사람 숨결이 바람처럼 감겨듭니다.


  문학은 뭇사람한테 널리 읽히면서 사랑과 꿈을 퍼뜨립니다. 그런데 뭇사람한테 사랑과 꿈을 퍼뜨리는 모든 문학은 언제나 “작고 수수한 한 사람 삶”에서 비롯합니다. 대단하게 살았어야 쓰는 대단한 문학이 아니고, 훌륭하게 살았어야 쓰는 훌륭한 문학이 아닙니다. 도란도란 나누는 이야기꽃처럼 수수한 들꽃 같은 이야기가 바로 뭇사람 가슴을 적실 수 있습니다. 4348.9.4.쇠.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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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해한모리군 2015-09-04 13: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부터 출판사 이름까지 무척 마음에 듭니다. 봄날의 책 예뻐라. 예전에 뿌리깊은나무에서 나왔던 민중자서전(?)이 참좋았는데 이책도 한번 살펴봐야겠습니다.

숲노래 2015-09-04 15:13   좋아요 0 | URL
씩씩한 1인출판사예요.
책을 많이 펴내지는 않지만
알찬 책을 잘 골라서
앞으로도 멋진 출판사로 널리 이야기꽃을 나누어 주리라 생각해요 ^^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 잘못된 이름으로 불리는 우리 풀꽃 속의 일제 잔재
이윤옥 지음 / 인물과사상사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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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책읽기 삶읽기 202



우리 풀꽃은 참말 ‘창씨개명’되었을까?

―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이윤옥 글

 인물과사상사 펴냄, 2015.8.14.



  《사쿠라 훈민정음》하고 《오염된 국어사전》을 선보인 이윤옥 님은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인물과사상사,2015)을 선보입니다.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라는 책은 한국에서 자라는 수많은 풀꽃에 붙은 이름이 ‘한겨레 스스로 붙인 이름’이 아니라 ‘일본사람이 붙인 이름’이라고 하는 이야기를 들려줍니다. 사람들이 이 대목을 제대로 알아차리지 못하면서 ‘일본 풀이름’을 함부로 쓴다고 차근차근 밝힙니다.


  131쪽에서 다루는 ‘등대풀’ 이야기처럼, ‘등대풀’은 잘못 쓰는 풀이름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래서 풀꽃을 사랑하는 적잖은 이들은 꽤 예전부터 ‘등대풀’이라는 이름을 ‘등잔풀’로 바꾸어야 한다고 외치는데, 이러한 목소리는 아직 식물도감이나 사전에 닿지 않습니다.


  그러면, 등대풀은 등잔풀로만 바꾸면 될까요? 우리가 오늘날 새롭게 이름을 붙일 수 있을까요?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을 읽으면, 이 책에서는 ‘이윤옥 님 나름대로 스스로 새롭게 붙여 보려고 하는 풀이름’ 이야기는 딱히 안 나옵니다. 《조선식물향명집》에 나오는 풀이름과 오늘날 〈표준국어대사전〉에 나오는 풀이름을 함께 맞대면서 이야기를 풀어냅니다.



일본말을 반듯하게 옮기지 않았다는 사실도 아쉽지만 그보다 아쉬운 것은 조선인 학자로서 독자적으로 식물 이름을 짓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하지만 식민지라는 한계 상황에서 조선인이 우리 식물을 다룬 《조선식물향명집》을 만든 사실만은 높이 사야 한다. (21쪽)



(등잔풀꽃)



  ‘등잔풀’로 이름을 고쳐야 올바르다고 하는 ‘등대풀’은 새봄인 삼월에 막 꽃을 피웁니다. 이월부터 바닷바람을 맞으면서 싹이 돋고 줄기가 돋는 아주 씩씩한 들풀입니다. 이 씩씩한 아이가 꽃을 막 피운 모습을 보면 아주 곱습니다. 어떻게 고운가 하면 풀빛인 꽃받침에 마치 불꽃이 이는 듯한 모습이에요. 그러니 이 풀꽃을 보며 ‘등잔풀꽃’이라 할 수 있을 텐데, 오늘날에는 등잔불을 쓰는 집이 없다고 할 만하니, ‘불받침풀꽃’ 같은 이름을 새롭게 붙일 수 있습니다. 불을 받치는 모습으로 꽃이 피거든요.



개연꽃(가와호네川骨)은 줄기가 통통한 게 마치 뼈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인데, 물(갯)에 자란다는 뜻의 ‘갯연꽃’으로 옮기지 않고 뜬금없이 ‘개연꽃’이라는 이름으로 번역해 놓았다. 그런가 하면 개옥잠화는 개(犬)나 갯(川)과 무관한 도기보시(唐擬寶珠)의 ‘당’을 ‘개’로 번역하는 등 식물의 속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어린 시절 소꿉놀이를 할 때 달걀프라이꽃이라고 불렀던 개망초는 히메조온(姬女苑)을 옮긴 것이다. 히메는 ‘어리고 가냘프며 귀여운 것’을 뜻하므로 ‘애기망초’ 또는 ‘각시망초’로 옮겨도 좋으련만 ‘개망초’로 옮겨 놓았다. (48쪽)



  그런데,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라는 책은 ‘어떤 말을 하려는지 흐릿합’니다. 21쪽에서 말하듯이 “일본말을 반듯하게 옮기지 않았다”고 하기에 《조선식물향명집》이 얄궂을까요? 아니면 일본말 ‘히메’를 풀꽃에 따라 다 다르게 옮긴 옛 식물학자 모습이 얄궂을까요?  28쪽을 보면 “1922년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조선식물명휘》에는 ‘애기’, ‘좀’, ‘개’, ‘각시’와 같은 한글 이름이 보이지 않다가 1937년에는 부쩍 이런 이름이 늘어났다. 초기 번역자들이 일본말 ‘히메’를 옮기기 위해 고심한 흔적으로 보인다.” 같은 이야기도 흐릅니다. 21쪽에서는 “독자적으로 식물 이름을 짓지 않았다”고 비판하면서 28쪽에서는 “고심한 흔적”이 있다면서 칭찬합니다. 앞뒤가 다릅니다. 오락가락합니다.


  1930년대에 식물학자가 ‘개-’라는 말을 붙인 이름이 참으로 “식물의 속성을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고 할 만할까요? 식물 속성을 제대로 살린 이름은 무엇일까요? 여러 가지 망초 가운데 ‘개망초’를 ‘애기망초’나 ‘각시망초’라고 할 때에 이 풀이 어떤 속성인가를 제대로 살피면서 붙이는 이름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봄까지꽃)



‘조센니와후지’는 ‘땅비싸리’보다 ‘조선댑싸리’가 더욱 어울리는 이름일 것이다. 더 좋은 것은 일본인이 붙인 이름을 고집하지 말고 우리 정서에 맞는 이름으로 하나씩 바꿔 나가는 것이다. 단순히 풀꽃 이름뿐 아니라 풀꽃을 설명하는 국어사전이나 식물도감의 설명 역시 총상화서니, 육수화서처럼 일본말 찌꺼기로 설명하기보다 알기 쉬운 우리말로 풀어야 할 것이다. (51쪽)



  51쪽에서 밝히듯이 ‘총상화서’나 ‘육수화서’ 같은 일본말 찌꺼기는 하루 빨리 털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식물학자와 국어학자 모두 이런 찌꺼기를 어서 털고 한국말로 알맞고 바르게 가다듬어야지요. 그런데, ‘조센니와후지’를 왜 ‘조선댑싸리’로 써야 할까요? 일본 식물학자가 붙인 ‘조센니와후지’라는 풀이름을 굳이 한국 식물학자가 ‘일본 풀이름’하고 똑같이 써야 할는지 궁금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이윤옥 님이 이렇게 주장하는 말은 다른 대목에서 이윤옥 님이 주장하는 말하고 엇갈리기 때문입니다.

  ‘창씨개명된’ 풀꽃 이름을 올바로 되찾자고 외치는 책이라고 한다면, 일본사람이 억지로 붙인 이름대로 풀꽃 이름을 삼지 말고, 한국 식물학자가 새롭게 붙인 이름을 고맙게 여기면서 즐겁게 쓰다가, 더욱 알맞구나 싶은 이름이 있으면 그 이름을 찾아서 쓰자고 외쳐야 할 노릇이리라 느낍니다.


  지구별에 꼭 한 가지만 있다고 하는 ‘미선나무’를 놓고 ‘조선미선나무’라 하지 않습니다. 그냥 ‘미선나무’라고 합니다. 미선나무를 구태여 ‘조선미선나무’나 ‘한국미선나무’라고 해야 할 까닭이 없어요. ‘땅비싸리’도 땅비싸리라고 할 만하니 땅비싸리라고 할 뿐입니다. 서양에서 들어온 민들레를 따로 ‘서양민들레’라 하지만, 이 땅에서 오랜 옛날부터 자란 민들레는 그냥 ‘민들레’라고만 해요.



쇠방동사니, 쇠털이슬, 쇠별꽃, 쇠풀, 쇠치기풀은 모두 일본말 소에서 온 말이니 딱한 노릇이다. 쇠별꽃이라도 예전에 쓰던 우리말 ‘잣나물’로 불렀으면 좋겠다. (58쪽)



  ‘쇠별꽃’ 같은 이름은 누가 지어서 쓸까요? 바로 식물학자입니다. ‘잣나물’ 이나 ‘콩버무리’라는 이름은 시골사람이 씁니다. 이윤옥 님은 “예전에 쓰던 우리말”이라고 하지만, 잣나물이나 콩버무리 같은 이름은 “예전에 쓰던 우리말”이 아닙니다. 예나 이제나 시골사람이 쓰는 풀이름이에요. 요즈음도 적잖은 시골사람은 시골 풀이름을 씁니다.


  그러니까, 우리 풀을 놓고 먼먼 옛날부터 시골사람이 시골에서 마주하는 대로 저마다 붙인 이름이 있어요. 1930년대에 식물학자는 이 모든 풀이름을 그러모으지는 못했습니다. 오늘날에는 전국에서 다 다르게 쓰는 풀이름을 그러모으기는 하되, 시골에서 처음 붙인 풀이름을 표준으로 못 삼기 일쑤입니다. 이를테면 ‘청미래덩굴’이 있어요. 나라에서 붙인 표준은 ‘청미래덩굴’이지만, 시골에서는 ‘망개’나 ‘맹감’이나 ‘멍개’나 ‘밍감’이나 ‘깜바구’나 ‘늘렁감’ 같은 말을 씁니다. 이밖에도 고장과 마을마다 쓰는 말이 다 달라요.



〈표준국어대사전〉에는 며느리배꼽을 ‘사광이풀’이라 하고 며느리밑씻개는 ‘사광이아재비’로 설명하면서 북한어라고만 할 뿐 이름의 유래에 대해서는 침묵하고 있다. 김종원 교수는 사광이란 말은 삭광이, 삵괭이(살쾡이)에서 나온 것으로 보고 있다. (117쪽)


이상하게도 식물도감을 만드는 사람들은 잘못된 식물 이름이라도 옛 이름을 그대로 써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식물 이름을 자꾸 바꾸면 헷갈리겠지만 옛 표기법을 오늘날에 맞게 바꾸는 정도는 이해할 수 있다고 본다. 더 나아가 표기보다 중요한 오기 문제도 살펴볼 일이다. ‘예전에 그렇게 불렀으니 잘못되었다 해도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은 이상한 똥고집이다. (125쪽)



  나라에서 엮은 〈표준국어대사전〉은 국어사전입니다. ‘식물도감’이나 ‘백과사전’이 아닙니다. 그러니, 아무리 〈표준국어대사전〉이라 하더라도 사광이풀이나 사광이아재비가 어떤 이름이고 ‘며느리밑씻개’나 ‘며느리배꼽’ 같은 이름이 어떻게 태어났는가 같은 이야기를 못 다루기 마련이지요. 이 같은 대목은 김종원 님이 빚은 《한국 식물 생태 보감》(자연과생태,2013)라는 책에서 잘 갈무리해 주었습니다. 적잖은 학자는 우리 풀이름을 놓고 제 뿌리를 들여다보지 못한다고 할 테지만, 우리 풀이름을 놓고 깊이 살피면서 올바로 추스르려고 하는 분이 꽤 많습니다. 국어학자가 풀이름을 놓고 입을 다무는 모습을 나무라기보다는, 식물학자가 풀이름을 잘 살피고 추슬러서 올바로 아로새기는 일을 하는 모습을 북돋우면서, 이러한 일에 힘을 보탤 수 있을 때에 한결 아름다우리라 생각합니다. 그리고, 국어학자와 식물학자가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시골말을 찬찬히 살피고 시골 풀이름을 샅샅이 헤아려서 우리 풀과 꽃에 오랜 사랑을 담은 이름을 새롭게 붙일 수 있겠지요.


  그런데,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115쪽을 보면 아주 크게 잘못 쓴 대목이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115쪽에 나온 이 대목이 이윤옥 님 마음에 크게 아로새겨졌지 싶습니다. 우리 풀이름이나 꽃이름은 ‘창씨개명되지’ 않았는데, 이윤옥 님이 처음부터 잘못 바라보았구나 싶습니다.


(코딱지나물-광대나물)



《조선식물향명집》을 만든 정태현, 도봉섭, 이덕봉, 이휘재는 ‘머리말’에 “조선에서 일반적으로 사용하는 조선명은 그대로 이용하되 이름을 알 수 없는 것은 총독부에서 만든 《조선어 사전》이나 일본인이 쓴 식물도감을 토대로 이름을 붙였다”고 썼다. (115쪽)



  이윤옥 님은 《조선식물향명집》에 실린 머리말에서 1930년대 한국 식물학자가 ‘조선총독부 사전’과 ‘일본인 식물도감’을 바탕으로 삼아서 풀이름을 붙였다고 적었어요. 따옴표를 붙이면서 이렇게 적습니다. 그러나, 이는 아주 틀린 말입니다. 디지털 한글박물관에 들어가면 《조선식물향명집》 원본을 읽을 수 있습니다. (http://www.hangeulmuseum.org/sub/information/bookData/total_List.jsp?d_code=00524&g_class=07)



* 《조선식물향명집》 머리말에서 따옴

그런데朝鮮産植物의鄕土名은鄕藥採集月令, 鄕藥本草, 東醫寶鑑, 山林經濟 濟衆斬編, 方藥合編等古籍에散見되는外에總督府編朝鮮語辭典, 森博士著朝鮮植物名彙, 石戶谷·鄭台鉉兩氏編朝鮮森林樹木鑑要, 中正博士著朝鮮森林植物編等에記載된것이重要한것이다. 그러나此等名稱中에는同物異名, 或은異物同名의것과又는同一種에數個의地方名稱이있는것도있으며, 朝鮮語에生疏한內外先學들의誤傳誤記도不小하야錯雜하기이를데없다.玆에編者等은從來부터硏究調査하여오든次에一層採集과調査에盡力하는한편連三年間百餘回의會合에서編者等의蒐集한方言을土臺로하고前記文獻을參考로하여植物名稱을査定하기凡二千餘種에達하였다. 그러나아직査定未完된것은漸次調査를거듭하야未久에續編이發行되기를自期하는바이다.



  모두 붙여서 적었고, 한자가 가득하지만, 이 머리말을 살피면, “朝鮮産 植物의 鄕土名은 鄕藥採集月令, 鄕藥本草, 東醫寶鑑, 山林經濟 濟衆斬編, 方藥合 編 等 古籍에 散見되는 外에 總督府 編 朝鮮語辭典, 森博士 著 朝鮮植物名彙, 石戶谷·鄭台鉉 兩氏 編 朝鮮森林樹木鑑要, 中正 博士 著 朝鮮森林植物 編 等에 記載된 것이 重要한 것이다” 하고 나옵니다. 총독부에서 낸 사전이라든지 일본 학자 식물도감도 살폈으나, 한국 학자가 펴낸 자료를 함께 살폈다고 밝히는 머리말이고, 동의보감과 산림경제를 비롯한 여러 책을 두루 살폈다고 나오지요. 더군다나 “數個의 地方 名稱이 있는 것도 있으며”라든지 “連 三年間 百餘 回의 會合에서 編者 等의 蒐集한 方言을 土臺로 하고 前記 文獻을 參考로 하여”와 같이, 시골말(방언)을 바탕으로 해서 여러 책에 나온 이름을 살폈다고 나옵니다.


  이는 이윤옥 님이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 115쪽에서 따옴표로 옮긴 말하고 달라도 아주 다르지요. 그리고, 이윤옥 님은 우리 풀꽃 이름을 잘 모르기까지 합니다.



한국인이 이 꽃에 이름을 붙였다면 열매를 보고 붙이기보다는 꽃을 보고 이름을 붙였을지 모른다. 큰개불알꽃은 요즘에는 봄까치꽃이라고도 불린다. (111쪽)



  111쪽에서 ‘큰개불알꽃’을 ‘봄까치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고 적지만, 이는 틀린 이야기입니다. ‘봄까치꽃’은 ‘봄까지꽃’을 잘못 알고 잘못 쓰는 이름입니다. 이해인 수녀님이 쓴 시가 널리 퍼지면서 그만 ‘봄까치꽃’으로 아는 사람이 늘었는데, ‘봄까지꽃’은 왜 봄까지꽃인가 하면, 겨울이 저물 무렵 들과 논둑마다 하나둘 피어나서 봄이 지는 오월까지만 꽃이 피기 때문입니다. 봄까지꽃이라고 하는 들꽃은 참말 봄 석 달이 지나면 사라지는 꽃이에요. 그래서 ‘봄까지’라는 이름이 붙습니다. ‘까치’가 아닌 ‘까지’입니다. 추운 바람은 견디지만 뜨거운 볕에는 모두 흐물흐물 녹아서 사라지는 봄까지꽃이에요. 이 풀은 아직 겨울이 물러나지 않은 한겨울에조차 볕이 여러 날 따뜻하면 어느새 잎이 돋고 꽃까지 터뜨립니다. 아주 씩씩하게 봄을 부르는 꽃인데 꼭 봄에만 살기에 시골사람이 붙인 이름인 ‘봄까지꽃’입니다.



광대나물도 우스운 번역이다. 광대나물의 일본 이름은 호토케노자(佛の座)인데 직역하면 부처자리란 뜻이다. 꽃을 받쳐 주는 부분이 불상을 받치는 대좌와 닮아서 붙은 이름인데 무슨 까닭인지 우리나라에서는 광대나물로 부르고 있다. (143쪽)



  ‘광대나물’은 우스운 번역이 아닙니다. 한국 식물학자가 왜 ‘광대나물’로 이름을 붙였는가 하면, 광대나물에 피는 꽃이 ‘광대가 입는 옷처럼 알록달록 고운 빛깔’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윤옥 님 주장대로라면 일본 학자가 붙인 ‘부처자리꽃’으로 해야 할 텐데, ‘부처자리꽃’으로 풀이름을 붙였으면 그야말로 우리 풀이름이 ‘창씨개명된’ 셈이겠지요. 한국 식물학자가 우리 풀이름을 꿋꿋하게 잘 붙인 ‘광대나물’인데, 왜 이 풀이름이 우스운 번역이라고 할까요? 이는 참으로 말이 될 수 없는 말입니다.


  한 가지를 덧붙이면, 시골에서는 광대나물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시골에서는 ‘코딱지나물’이라고 합니다. 저희 식구가 사는 시골(전남 고흥)이든 다른 고장 시골이든 비슷합니다. 마을 할매나 할배더러 ‘광대나물’이라고 여쭈면 아무도 못 알아들어요. ‘코딱지나물’이라고 여쭈어야, “아, 그 풀!” 하면서 알아들으시지요. 우리 집 아이들은 ‘코딱지나물’이라는 이름보다는 ‘분홍꽃나물’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가리킵니다.


(1972년에 나온 <민간약 개발에 관한 조사 연구>에 나오는 풀이름을 보면, '학술 이름'을 밝힐 적에 제대로 흘림꼴로 적는다. 이렇게 해야 올바르다. 그리고, 풀이름이나 나무이름을 살피면 '일본 학자' 이름뿐 아니라 '서양 학자' 이름도 많다. 서양 학자 이름도 따져야 하는가?)

(이윤옥 님은 책에서 '학술 이름'을 제대로 흘림꼴로 안 적었다. 편집 잘못이라고만 볼 수 없다)



개쓴풀Swertia tosaensis Makino은 마키노가 일찌감치 자신의 이름을 학명에 올렸다. 개쓴풀과 같이 용담과에 속하는 칼잎용담Gentiana uchiyamai Nakai의 학명에는 나카이의 이름이 올라가 있다. (147쪽)


우리 풀꽃의 학명이 일본인 이름으로 등재된 것도 속상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어떠한 식물이 일본 학자의 이름으로 등재되었는지 알려주는 대중서적 한 권 없다는 사실이다. (228쪽)



  이윤옥 님은 아무래도 ‘일본 식물학자’가 한국 풀이름에 ‘학명’으로 이름을 올린 대목을 안타깝게 여기는 듯합니다. 《조선식물향명집》에 실린 풀이름을 비롯해서 한국에서 널리 쓰는 풀이름 가운데 ‘아직 옳게 바로잡지 못한 풀이름’이 제법 있습니다. 그러나 ‘거의 모든 풀이름’이 창씨개명되었다는 주장은 올바르지 않습니다. 바로잡아야 할 풀이름은 틀림없이 바로잡아야 합니다.


  그리고 ‘학명’은 학술논문으로 처음 올린 사람 이름이 붙으니 어쩔 수 없지요. 이윤옥 님은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라는 책에서 일본 식물학자만 안타깝게 바라보는데, 한국 풀이름이나 나무이름을 찬찬히 살피면 ‘일본사람 이름’만 있지 않아요. ‘서양사람 이름’도 많습니다.


  학명에 서양사람 이름이 들어갔으면 ‘영어로 창씨개명된 풀이름’이 될까요? 한국에서 나는 모든 풀에는 ‘한국 식물학자 이름’만 들어가야 할는지요?


  일본 식물학자 이름을 굳이 알아야 하지 않습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한국을 식민지로 삼으면서 온갖 자원을 빼앗고 괴롭힌 일은 얼마든지 나무라거나 꾸짖을 만합니다. 그러나, 한국 식물학자가 일제강점기라는 서슬 퍼런 그때에 제 나라와 제 겨레 넋을 지키려고 애쓴 땀방울을 섣불리 깎아내리지 않기를 빕니다. 그리고, 풀마다 붙는 ‘학술 이름’을 책에 제대로 적어야 합니다. 풀이름에 붙는 학술 이름을 밝힐 적에는, 가운데 영문은 흘림꼴로 적습니다. 그러나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은 이를 모두 어겼습니다. 그저 편집 잘못일까요? 아니면 풀과 식물학을 아직 잘 모르기 때문일까요?



책 한 권 낸 사람들은 저마다 ‘야생화 박사’ 행세를 했다. 하지만 ‘들꽃’이라는 우리말을 두고 ‘야생화’라는 한자어를 붙인 책들은 대동소이했고, 풀꽃 이름에는 관심 없는 그야말로 ‘사진 자랑 도감’에 지나지 않았다. (6쪽)



  일제강점기에 나온 책 한 권을 놓고서 ‘일본 식물학자’가 그들 이름을 얼마나 많이 ‘학술 이름에 붙였는가’ 하는 대목을 살핀 보고서로 보자면 《창씨개명된 우리 풀꽃》이 여러모로 뜻이 있다고 느낍니다. 그러나, 한국 식물학자가 옳고 바르게 잘 붙인 풀이름이 훨씬 많을 뿐 아니라, 한국 식물학자 나름대로 시골말을 두루 살펴서 붙인 풀이름도 많은데, 더욱이 요즈음에도 풀이름을 제대로 갈무리하려고 힘쓰는 분들도 많은데, 이 풀도 저 풀도 모두 ‘일본 식물학자가 붙인 풀이름을 번역했다’고만 주장할 뿐 아니라 ‘일본 식물학자가 붙인 풀이름을 제대로 번역하지 않았다’고까지 주장한다면, 더욱이 풀꽃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애쓰는 땀방울을 제대로 돌아보지 못한다면, 무엇이 ‘창씨개명’이고 무엇이 ‘주권 찾기’가 될는지 아리송할 뿐입니다. 4348.9.1.불.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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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그로 -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
W. E. B. 듀보이스 지음, 황혜성 옮김 / 삼천리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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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4



‘검은땅’에는 어떤 사람이 살았을까?

― 니그로,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

 W.E.B.듀보이스 글

 황혜성 옮김

 삼천리 펴냄, 2013.8.29.



  ‘-둥이’라는 말은 ‘귀염둥이’나 ‘막내둥이’처럼 씁니다. 때로는 ‘바람둥이’나 ‘쌍둥이’처럼 쓰고, ‘사랑둥이’라든지 ‘예쁜둥이’처럼 쓰기도 합니다. 영화를 좋아해서 ‘영화둥이’라 하고, 만화를 좋아해서 ‘만화둥이’라 하며, 책을 좋아해서 ‘책둥이’라 합니다.


  살갗이 하얗기에 ‘하얀둥이’나 ‘흰둥이’가 되는데, 살갗이 검다면 ‘까만둥이’나 ‘검둥이’나 ‘깜둥이’가 되어요.


  여러 ‘둥이’를 헤아리면 알 수 있듯이, ‘둥이’라는 이름은 아무 곳에나 붙이지 않습니다. 꽃둥이·노래둥이·자전거둥이·잠둥이·밥둥이처럼 쓰기도 하는 둥이는 귀여운 모습이거나 사랑스러운 몸짓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즐겁게 쓴다고 할 만합니다.



오늘날 우리는 사람을 구분하는 고정된 인종 유형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있다. 인종은 고정된 개념이 아니라 변화하는 개념이며, 모름지기 인종이란 섞이거나 분화하면서 늘 변화하고 발달한다. (16쪽)


아득히 먼 옛날에 세 가지 유형의 니그로가 출현했다. 즉 피부색이 밝고 키가 작은 원시 니그로, 몸집이 크고 숲속에 사는 중앙과 서쪽 해안 지대의 니그로, 그리고 동부 수단의 키 크고 검은 닐로트 니그로가 등장했다. (25쪽)



  인문책 《니그로, 아프리카와 흑인에 관한 짧은 이야기》(삼천리,2013)를 읽습니다. 이 책은 1915년에 처음 나왔다고 합니다. 모두 열두 가지 꼭지로 나누어서 ‘니그로’ 또는 ‘흑인’을 이야기하는 책으로, 아프리카 역사와 흑인 문화와 문명과 종교 전쟁과 인종 전쟁과 노예무역과 라틴아메리카 식민지와 미국 남북전쟁 이야기까지 두루 다룹니다. 기나긴 역사와 문화와 얽혀서 삶과 죽임이 갈려야 했던 ‘살갗 검은 사람들’ 이야기를 들려주지요.


  어느덧 백 해가 묵은 책을 읽으면서 생각합니다. ‘negro’는 영어입니다. ‘黑人’은 한자말입니다. ‘검둥이·깜둥이’는 한국말입니다. 그저 다른 말입니다. 나라가 달라서 달리 쓰는 말일 뿐입니다. ‘검둥이’도 ‘흰둥이’도 어떤 겨레를 깔보거나 낮잡거나 깎아내리는 말이 될 수 없습니다. 그저 ‘눈으로 바라본’ 그대로 가리키는 말일 뿐입니다.


  시골에서 사는 사람은 ‘시골사람’이고 ‘시골내기’입니다. ‘시골사람·시골내기’가 어떤 사람들을 갂아내리거나 낮잡는 말이 되어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서울사람·서울내기’도 그렇지요. 다만, 오늘날 사회에서 아무래도 ‘검둥이’가 낮잡는 말처럼 퍼졌다면 ‘검은이’나 ‘검은사람’처럼 쓸 수 있어요. 한국사람으로서 한국말 ‘검다’는 낮잡는 말이라고 멀리하면서 ‘黑’이라는 한자여야 높이거나 여느 말이라고 할 까닭이 없습니다.



노예무역은 인간을 사고팔 뿐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조직화된 부정 거래를 부추기고, 이와 더불어 거의 모든 다른 상업 활동에 대한 관심과 에너지를 모두 바꾸어 버린다. 이렇게 해서 파생되는 부산물들은 전쟁에 대한 가장 잔혹한 열정을 부추긴다. (66쪽)


라이베리아 독립이 선포되자 영국과 프랑스는 라이베리아의 영토와 주권을 제한하기 위해 이런저런 공격을 시작했다. 라이베리아는 조약으로 영토의 상당 부분을 잃었고, 남은 지역의 발전을 위해 자본을 구하려는 노력을 기울이는 가운데 40만 달러의 빚을 졌다. (69쪽)



  어떤 이름을 쓰느냐가 안 대수롭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니그로’나 ‘흑인’이라는 이름을 써서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마음으로 서로 아끼려고 하지 않는다면 언제나 겉치레나 껍데기입니다. 어떤 이름을 쓰든, 마음으로 서로 아끼면서 보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따스함이 우러나오는 말을 쓸 줄 알아야 하며, 사랑이 피어나는 말로 어깨동무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흰사람’은 ‘검은사람’을 사로잡거나 죽이면서 종(노예)으로 팔아넘기는 짓을 했을까요? 왜 ‘검은사람’은 같은 ‘검은사람’끼리 서로 사로잡거나 죽이면서 다른 검은사람이나 흰사람한테 종으로 내다팔려고 했을까요?


  안타깝게도 ‘검은땅’에는 평화나 사랑보다 전쟁과 미움이 흘렀습니다. 서로 하나가 되면서 아끼려는 꿈이 아니라, 어느 한 가지 종교만이 참되다고 여기는 바보스러운 몸짓에 사로잡혔습니다. 권력자는 더 큰 권력을 바라면서 이웃나라로 쳐들어갈 생각만 키웠습니다. 작은 마을을 이루는 작은 사람을 아끼는 정치나 사회나 문화나 행정이 자라지 않고, 그저 군대와 전쟁무기를 키워서 ‘사람을 물건이나 돈처럼 다루는 노예무역’이 불거지고 말았습니다.



이들 부시먼은 남아프리카에 자신들에 앞서 고대 인종이 살았다고 믿었다. 그들은 이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마술적 힘이 있었고, 그들 중에는 죽어서 하늘의 별이 된 사람들이 있다고 생각했다 … 이주가 계속 이어지고 남아프리카가 정복되면서 가장 큰 고통을 받은 부족이 부시먼족이었다. 그들은 방어를 위해 필사적으로 싸웠지만 여자와 아이들이 노예로 끌려가는 것을 지켜보아야 했고, 남자들도 들짐승처럼 사냥당했다. 야만인과 문명인 모두가 그들의 땅을 제 것으로 만들었다. (92쪽)



  우리는 흔히 ‘검은땅’ 사람들만 ‘검은사람’인 줄 압니다. 그러나, 이 나라 사람도 예전에는 ‘살갗이 까무잡잡’했습니다. 한겨레나 아시아 여러 겨레를 ‘황인종(누런사람)’으로 가르지만, 고작 1900년대 언저리 한겨레도 ‘살갗이 검다’고 할 만큼 까무잡잡했어요. 검은땅 사람들처럼 새까맣지는 않았어도 무척 까맣게 그은 겨레였어요.


  왜 한겨레는 ‘까맣게 그은 살갗’이었을까요? 하루 내내 들에서 일하며 지냈으니 까맣게 그은 살갗입니다. 요새야 챙 넓은 모자에 긴 소매에 수건까지 두르지만, 옛사람은 이렇게 할 겨를이 없습니다. 요새는 들일을 어느 만큼 하더라도 집에서 하는 일도 많습니다. 지난날에는 새벽에 일어나서 해가 떨어지고 나서까지도 마당이나 들이나 밭이나 숲을 다니면서 일하거나 지냈습니다. 어른도 아이도 모두 바깥에서 하루 내내 햇볕을 쬐며 일하거나 놀았어요.


  한국이나 아시아뿐 아니라 유럽이나 북미에서도 ‘흰사람’ 가운데 시골에서 흙을 만지면서 들일을 하던 사람은 ‘흰 살갗’이 아니었습니다. 하루 내내 햇볕을 쬐면서 일하고 지내는 ‘유럽이나 북미 시골사람’도 까무잡잡하게 햇볕에 그은 살갗이에요.


  그러니까, 들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라면 유럽에서도 한국에서도 ‘흰 살갗’입니다. 희다기보다는 파리한 살갗입니다. 아파 보이는 살갗이에요. 손수 흙을 일구지 않던 이들이기에 희거나 파리해 보이는 살갗입니다.



우리는 피부색에 대한 현대인이 가지고 있는 편견의 원인을 신체나 문화적 요인이 아니라 역사적 사실에서 찾아야 한다. 그리고 그 대답을 현대 니그로 노예제도와 노예무역에서 찾아야 한다. (141쪽)


아프리카에 대한 착취는 이교도에 대한 기독교의 태도뿐 아니라 개종하지 않은 니그로에 대한 이슬람의 앙심에 의해 더욱 촉진되었다. 결국 현대의 위대한 두 종교가 이교도 흑인을 노예화하는 정책에 적어도 동의한 것이 분명하다. (145쪽)


노예무역은 포르투갈 사람들이 시작했지만, 네덜란드인에 의해 확장되었고, 영국인에 의해 절정에 달했다 … 노예 한 명이 무사히 수입되었다고 한다면 그 이면에는 아프리카 또는 거친 바다에서 사망한 평균 5명의 노예가 있었을 것이다. (153, 155쪽)



  인문책 《니그로》를 곰곰이 읽습니다. 아름다운 평화나 사랑 이야기는 흐르지 못하고, 슬프고 끔찍하며 아픈 이야기만 내내 흐르는 책을 찬찬히 읽습니다. 아무래도 ‘책에 적힌 기록’은 슬픈 이야기만 가득하리라 봅니다. 권력자가 ‘검은땅 시골사람’을 전쟁무기를 앞세워서 죽이거나 괴롭히면서 종으로 부리려고 했던 발자국을 살필 수밖에 없으리라 봅니다.


  그런데, 종으로 붙들리지 않은 검은땅 시골사람을 만난다면, 검은땅 골골샅샅을 누비면서 ‘전쟁이 아닌 평화’로 삶을 지은 검은사람을 만난다면, ‘전쟁무기 아닌 흙 연장’으로 살림을 가꾼 검은사람을 만난다면, 아주 다른 이야기가 흐를 수 있겠지요. 권력자 뜻에 따라 움직여야 하는 마을사람이 아니라, 서로 아끼고 돕는 품앗이와 두레로 사랑을 키우는 마을사람 이야기를 헤아린다면, 《니그로》라고 하는 책은 사뭇 다른 길을 보여주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겨레가 걸어온 길에서도 이와 같습니다. 남녘과 북녘으로 갈려서 수백만 사람이 서로 죽이고 죽으면서 아프게 생채기를 입었습니다만, 이렇게 싸워야 하면서도 서로 돕고 보살핀 이웃이 대단히 많습니다. 그저 싸움박질만 하면서 제 밥그릇만 챙기려 했다면, 한겨레는 일찌감치 싸그리 사라졌겠지요. 그야말로 콩 한 톨을 나누고, 쪽잠이라도 함께 자면서, 따스한 마음으로 서로 아끼는 수수한 이웃으로 어깨동무한 사람이 훨씬 많기에 한겨레 역사와 문화는 고이 흐를 수 있으리라 느낍니다.



이 전쟁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전쟁이 아니었다. 노예와 경쟁하는 자유 백인 노동자를 보호하기 위한 전쟁이었고, 노예제도를 남부에 한정시킴으로써 백인 노동자를 보호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201쪽)


187000명의 니그로가 북군에 입대했다. 그들 가운데 7만 명이 전사하거나 부상당했다. (202쪽)



  검은땅에는 검은사람이 살았습니다. 오늘도 검은땅에는 검은사람이 삽니다. 그러나, 검은땅 가운데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곳은 흰사람이 차지하면서 아주 오래도록 인종차별을 일삼았습니다.


  흰사람이 검은사람을 따돌리거나 괴롭히는 짓을 일삼았는데, 권력을 쥔 검은사람은 권력이 없는 검은사람을 똑같이 따돌리거나 괴롭혔습니다. 살빛은 같더라도 마음이 달랐다고 할까요.


  우리가 눈을 감고 마주한다면 살빛을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만난다면 살빛뿐 아니라 나이도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사귄다면 살빛에다가 나이에다가 돈이나 몸매나 가방끈이나 그 어느 것으로도 따질 수 없습니다. 우리가 눈을 감고 함께 살려고 하면, 그야말로 오직 사랑으로 함께 삽니다.


  겉으로 보이는 모습은 ‘겉모습’입니다. 겉모습은 겉모습일 뿐, 사람이나 삶을 이루는 바탕이 아닙니다. 겉모습이 보기 좋대서 아무 버섯이나 먹지 않습니다. 겉모습이 보기 예쁘대서 모든 밥이 맛있지 않습니다.


  한 사람이 다른 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들볶거나 짓밟으려 한다면, 이 한 사람한테 착하거나 참답거나 고운 마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으로 함께 사는 길을 배우지 못한 탓에 다른 한 사람을 괴롭히거나 따돌리거나 들볶거나 짓밟지요.



백인 선교사 집단은 아프리카에서 1년에 500만 달러나 되는 돈을 소비하며 꽤 좋은 일을 성취하고 있다. 그와 동시에 백인 상인들은 해마다 적어도 2천만 달러에 이르는 유럽 술을 아프리카로 보내고, 거의 제한이 없는 럼주 밀매로 인해 방탕과 유흥이 선교사들의 노력을 상쇄할 정도로 이루어지고 있다. (238∼239쪽)



  우리 지구별에는 오직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한국 사회에도 오직 사랑이 흘러야 합니다. 백 해 즈음 묵은 《니그로》라는 인문책을 애써 한국말로 옮겨서 펴낸 뜻이라면,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뜻이라면, 아프고 다치며 슬픈 넋을 되새기면서 이 지구별과 한국에서 우리가 어떤 마음을 품어야 하는가를 돌아보도록 이끌기 때문이라고 느낍니다.


  다 함께 햇볕을 쬐면서 까무잡잡하게 튼튼한 몸이 되는 길을 슬기롭게 찾을 수 있기를 빕니다. 시골에서나 도시에서나 어른과 아이 모두 햇볕을 기쁘게 쬐면서 싱그럽고 맑은 까무잡잡한 살갗이 되어서 신나게 어깨동무할 수 있기를 빕니다. 까만 흙이 좋은 흙이듯이, 햇볕에 그은 까만 살갗인 이웃은 아름다운 벗님입니다. 4348.8.30.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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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처럼 여행하기
전규태 지음 / 열림원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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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201



‘죽음’ 아닌 ‘삶’을 생각하는 여행길

― 단테처럼 여행하기

 전규태 글·그림

 열림원 펴냄, 2015.7.30. 13000원



  전규태 님이 암이라는 병에 걸린 뒤 고작 석 달을 살고 죽는다는 말을 듣고 나서 한 일은 ‘집을 나서기’라고 합니다. 앞으로 고작 석 달을 산 뒤에 죽는다면, 굳이 ‘집에 머물’거나 ‘병원에 드러누울’ 까닭이 없다고 여겼다고 합니다.


  전규태 님은 ‘집을 나서’면서 삶을 새롭게 바라보는 눈길이 되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눈길로 날마다 새롭게 태어나면서 ‘석 달 남았다는 삶’은 석 달 뒤에도 끝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아마 전규태 님 스스로 생각하지 못하셨을 테지만, ‘할아버지 여행가’가 되어서 《단테처럼 여행하기》(열림원,2015)라는 책까지 선보입니다.



나는 외할머니의 빈 젖을 빨며 외롭게 자랐다. 어린 내가 어머니 생각으로 울먹일 때면 외할머니는 옛날이야기를 들려주거나 동요와 아리랑 같은 민요를 구성지게 불러 주었다. 그리고 나를 데리고 여행을 다녔다. (18쪽)


여행을 통해 나 자신을 기쁘게 하면서, 명승고적뿐 아니라 오지도 마다 않고 넓은 세상을 만나며 문득문득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을 지니게 되었다. 발끝부터 머리카락 한 올까지 내 몸 곳곳에 말을 걸고 격려해 주며 감사의 마음을 표현했다. (34쪽)




  비가 오는 날에 아이들한테 비옷을 입히고 우산을 스스로 들도록 하면서 마을을 한 바퀴 돌곤 합니다. 비옷이랑 우산이 재미있고 즐거운 아이들은 긴신을 꿴 발로 마음껏 찰방거리면서 뛰놉니다. 어느 모로 보면 ‘고작 마을 한 바퀴’이지만, ‘고작 마을 한 바퀴’를 도는 데에 한 시간이 더 걸립니다. 아이들은 비를 맞으면서 ‘비놀이’를 하느라 한 시간 남짓 보내는 셈입니다.


  가끔 아이들하고 면소재지까지 걸어갑니다. 오 킬로미터쯤 되는 길을 물 한 모금 마실 겨를만 쉬고 바지런히 걸으면 사십 분이 걸리지만, 아이들이 꽃도 보고 벌레도 보며 하늘도 보고 춤도 추면서 놀듯이 걸어가면 한 시간 남짓 걸립니다. 어느 모로 보면 ‘그냥 논둑길 걷기’이지만, ‘그냥 논둑길 걷기’를 하는 동안 올려다보는 새파란 하늘에 눈부신 구름빛과 햇살은 오래도록 가슴에 남습니다. 그리고, 싱그러운 들과 하늘하고 곱게 어우러지는 아이들 웃음을 찍은 사진은 두고두고 마음에 남습니다.



상원사에서 암자로 가는 산길은 몹시도 가파르고 숲이 우거져 으스스할 법도 했지만 달빛이 유난히도 밝아 아늑했다 … 혼자만의 오솔길에서 홀로 만난 단 하나의 달을 숱한 세계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우러러볼 수 있다는 것은 신비하다. (43쪽)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젊은 여행가’도 아니고, ‘문학교수 여행가’도 아니며, ‘전문 여행가’도 아닌, ‘그저 삶을 마지막으로 돌아보려는 할아버지’로서 여행길에 나선 전규태 님이 마음으로 받아들인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죽음을 앞두었다고 여긴 할아버지한테 ‘무서움’이란 무엇일까요? 깊은 숲이 으스스하다고 느낄 만할까요? 깊은 숲은 으스스하고, 암은 안 으스스할까요? 처음에는 으스스하구나 싶던 깊은 숲도 걷고 걷다가 어느새 ‘혼자만 누리는 호젓한 숲길’로 다시 느끼고, 이 호젓한 숲길에서 올려다보는 달빛을 지구별 어디에서나 저마다 다른 눈길하고 마음으로 올려다보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여행이 우리를 해방시켜 주는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여행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완전히 자유로워진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다. (90쪽)



  스스로 새롭게 거듭나려고 길을 나서기에 여행이 되리라 느낍니다. 스스로 새롭게 살려고 마음을 먹기에 여행을 하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비행기를 타고 열 몇 시간을 날아가야 여행이지 않습니다. 두 다리로 한 시간을 걸어도 여행입니다. 지구 맞은편까지 가야 여행이지 않습니다. 낯익은 마을길을 새로운 마음이 되어 걸어가도 얼마든지 여행입니다.



걷다가 숲이 있으면 쉬었다 가기도 하고, 산이 있으면 오르기도 하며, 개울을 만나면 다리 난간에 기대어 물속의 잡초나 느긋하게 노니는 물고기들을 들여다보기도 한다. (97쪽)




  요 며칠 동안 우리 집 곁님이 몹시 아픕니다. 허리가 몹시 결려서 아예 걸음을 떼지 못합니다. 여느 때에도 집일이나 집살림을 제가 도맡아 하는데, 걸음조차 못 떼는 곁님은 마룻바닥을 엉금엉금 기어서 쉬를 하러 가야 합니다. 곁에서 누가 거들거나 돕지 않으면 거의 아무것도 못 하는 몸이 됩니다.


  방바닥과 마룻바닥 사이를 겨우 기어다니는 몸이 되면, 이러한 몸인 사람한테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자리에 드러누워 방에서 꼼짝을 못하는 사람한테 여행이란 무엇일까요?


  여행은 대단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행은 안 대단하지도 않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이나 중국이나 대만쯤 가 보아야 여행이 아닙니다. 미국이나 프랑스나 영국쯤 가 보아야 여행기를 쓸 만하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낯설다고 하는 나라를 다녀와야 다큐멘터리를 찍을 만하지 않습니다.


  집에서 마당을 한 바퀴 돌 수 있어도 ‘대단히 고마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대문 밖을 나서서 마을을 한 바퀴 돌 수 있어도 ‘아주 뜻있는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버스를 한 번 타고 이십 분 남짓 되는 길을 다녀와도 ‘몹시 새로운 여행’이 될 수 있습니다.



터널이 많고 직선으로 질주하는 KTX보다는 포물선을 그려 가며 산을 돌고 전답을 누비는 보통열차의 리듬이 생각에 잠기는 데 안성맞춤이다. 나이 들고 보니 객차 안의 혼잡이 오히려 안락의자처럼 육체와 정신을 지탱해 준다. 아이들 울음소리가 듣기 싫어 되도록 KTX를 탄다는 친구도 있지만 내게는 그 소리 역시 자장가로 들린다. (114쪽)


그냥 예사롭게 돌아다니기만 해도 마음의 감각들이 되살아난다. 하지만 새롭고 값진 것을 찾기 위해, 좀더 넉넉한 기쁨을 맛보기 위해, 또는 예기치 못한 아이디어나 느낌을 떠올리고 생각을 가다듬기 위해 여행을 하다 보면 스스로도 놀랄 만한 새로운 발견과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 (129쪽)



  전규태 님은 ‘아픔(병)’을 몸에 달고 난 뒤에 ‘집을 나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슬픔(죽음)’을 뼛속 깊이 깨닫고 난 뒤에 ‘연필 아닌 붓을 드는’ 사람이 되었다고 합니다.


  어떤 기록을 남기는 전문가로 살려는 여행이 아니라, 나 스스로 되돌아보고 내 이웃을 다시 바라보려는 여행입니다. 예술가나 화가라는 이름을 얻으려는 그림그리기가 아니라, 그저 전규태 님 삶을 새롭게 되새기고 전규태 님 이웃을 사랑스레 바라보려는 그림그리기입니다. 《단테처럼 여행하기》를 보면, 전규태 님이 찾아다닌 여러 마을(한국이든 외국이든, 다만 책에 실린 그림은 거의 모두 외국이지 싶습니다)에서 마주친 아름다운 모습을 손수 그린 그림으로 담았습니다.




시간을 대하는 각자의 방식에 따라 그것은 늘어나기도 하고 줄어들기도 한다는 것 역시 여행을 통해 배웠다. 한순간이 영원이 될 수도 있고 하루가 일 년이 될 수도 있다. (213쪽)



  우리는 누구나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야 합니다. 왜 그러한가 하면,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즐겁기 때문입니다. 즐거운 삶일 때에 웃음이 나오고, 웃을 수 있는 삶일 때에 노래가 흐르며, 노래가 흐르는 삶일 때에 사랑을 스스로 깨닫습니다.


  이 지구별에서 목숨 하나 얻어서 태어난 우리들은, ‘가장 하고 싶은 일’이 아닌 어떤 일을 할 만한지 돌아볼 수 있어야 합니다. 참말 어떤 일을 해야 할까요? 가장 하고 싶은 일은 나중으로 미루다가 끝내 한 번도 못 하지는 않는가요? 가장 하고 싶은 일,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은, 나중으로 미루고 미루다가 그만 잊지는 않는가요?


  돈을 많이 벌고 나서야 비로소 꿈을 이룰 수 있지 않습니다. 바쁜 일을 다 끝내야 비로소 꿈으로 갈 수 있지 않습니다. 오늘 이곳에서 해야 할 뿐입니다. ‘석 달 시한부인생 선고’를 받고 나서야 ‘가장 하고 싶은 일’을 하려고 한다면, 그래서 참말 석 달만 살고 죽어야 한다면, ‘가장 이루고 싶은 꿈’은 언제 이룰 수 있을까요?



사람이 ‘떨림’을 갖는 것은 그 사람의 마음이 아름다운 탓이다. (145쪽)



  여든 살 나이에 돌아보는 이웃마을 모습은 마흔 살 나이에 돌아보는 이웃마을 모습하고 느낌부터 다릅니다. 스무 살 나이에 바라보는 고향마을 모습은 쉰 살이나 일흔 살 나이에 돌아보는 고향마을 모습하고 사뭇 다르기 마련입니다. 열 살 나이에 바라보는 다른 고장 모습은 서른 살이나 예순 살이 되어 바라볼 때하고 참으로 다른 모습이 됩니다.


  ‘떨림’을 가슴에 품으려고 삽니다. ‘떨림’을 온몸으로 느끼려고 여행길에 나섭니다. ‘떨림’을 사랑으로 키우려고 오늘 하루를 새롭게 맞이합니다. 아름다운 삶을 이루려는 꿈을 헤아리면서 가장 하고 싶은 일을 찾아서 한 걸음씩 나아가는 사람은 머잖아 꿈을 누리는 웃음꽃을 피웁니다. 4348.8.22.흙.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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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항하는 평화 - 전쟁, 국가, 권력에 저항하는 평화주의자들의 대담 대한민국을 생각한다 21
전쟁없는세상 엮음, 엄기호 외 지음 / 오월의봄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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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5



‘사랑하는 평화’와 ‘저항하는 군대’

― 저항하는 평화

 전쟁없는세상 엮음

 오월의봄 펴냄, 2015.1.12. 16000원



  한자말 ‘저항’은 어떤 힘에도 굽히지 않으면서 거스르거나 버티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평화’는 평온하거나 화목한 모습이라든지 전쟁이나 갈등이 없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평온’은 조용하고 평안한 모습을 가리키고, ‘화목’은 서로 뜻이 맞고 정다운 모습을 가리키며, ‘갈등’은 서로 적으로 여기거나 부딪히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평안’은 걱정이 없는 모습을 가리키고, ‘정다움’은 따뜻한 마음이 흐르는 모습을 가리킵니다.


  이제 “저항하는 평화”란 무엇인가를 헤아려 봅니다. 조용하면서 따뜻한 마음이 흐르고 걱정없이 서로 아끼는 삶을 망가뜨리거나 어지럽히려는 어떤 힘이나 무리가 있기에, 이에 맞서려고 하는 몸짓을 놓고 “저항하는 평화”라고 말하는구나 싶습니다. 평화를 깨거나 무너뜨리려고 하니 이에 맞서려고 하는구나 싶어요.



대학생들은 자신과 비슷한 나이 대에 고졸이나 중졸이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안 해 본 것입니다. 만나 본 적도 없고요. 그런데 군대에 갔더니 정말 다양한 사람들이 있는 거예요. (18쪽)


우리의 삶이 힘들고, 사회적 안전망은 다 망가졌고, 사회가 엉망진창이 되어 먹고살기 어려워도 결국 군대는 필요하고 좋은 무기는 사야 한다는 생각으로 연장되는 것 같아요. 별다른 고민 없이 군대는 당연히 필요한 존재라고 생각하게 되면 그 군대를 유지시키기 위해 비용을 지출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것이 되죠. (30쪽)



  권력자한테는 노예반란이 ‘평화를 깨는’ 일이 되리라 봅니다. 기득권자한테는 기득권 울타리를 허무는 몸짓이 ‘평화를 깨는’ 일이 되겠지요. 독재자한테는 독재를 나무라거나 꾸짖는 손짓이 ‘평화를 깨는’ 일이 될 테고요.


  양반 제도가 있던 지난날에는 양반 제도를 거스르는 평민이나 ‘상놈’ 몸짓이 바로 ‘평화를 깨는’ 일이라 할 만합니다. 임금님이 시킨 일을 안 하는 평민이나 상놈 몸짓이란 언제나 ‘평화를 깨는’ 일이었으리라 느낍니다.


  그런데 노예가 되어 짓눌리는 사람은 ‘처음부터 평화를 못 누리’며 삽니다. 권리를 빼앗긴 사람은 기득권자가 가로챈 권리 때문에 ‘처음부터 평화를 모르’며 살아요. 독재권력이 서슬 퍼렇기에 사람들이 아무 대꾸조차 못 하면서 숨을 죽이는 모습은 ‘평화’가 아닙니다.


  사람들 스스로 어느 자리에 서느냐에 따라서 ‘평화’와 ‘평화가 깨진 모습’을 바라보는 눈길이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애들이 약하기 때문에 강하게 키워야 한다는 것은 폭력을 정당화하죠 … 현실적으로는 힘있는 사람은 보호받고 힘없는 사람은 아무런 보호도 받지 못해요. (34, 39쪽)


우리나라는 근대화되면서 군대를 국민 자격증을 부여하는 기관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말하자면 국가가 군대를 통해 ‘시민’이 아니라 ‘식민’을 양성하는 것이죠. 국가적 규율에 복종하는 기재로서 군대가 작동합니다 … 군대는 합법적인 살인 조직입니다. 어느 나라 군대이건 그 본질은 똑같죠. 다만 한국 상황에서 다른 점은 그런 군대에 갈 수도 있고, 가지 않을 수도 있다는 선택권 자체가 없다는 점이죠. (63, 71쪽)



  ‘전쟁없는세상’이라는 모임에서 엮은 《저항하는 평화》(오월의봄,2015)를 읽으며 생각합니다. 군대를 거느리는 권력자한테는 병역거부를 하는 사람들이 ‘저항하는 반역자’처럼 보이리라 느낍니다. 그리고, 군대를 지구별에서 몰아내어 서로 아끼는 사랑으로 나아가려고 하는 사람들한테는 군대와 권력자야말로 ‘저항하는 반역자’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면, 군대는 왜 있어야 할까요? 적군이 있으니 아군이라고 하는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아군한테 적군이 될 그곳 사람들은 왜 군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할까요? 이쪽 아군한테는 적군이 될 그쪽 아군한테는 바로 이쪽 아군이야말로 적군입니다.


  이쪽에 군대가 있으니 저쪽에서도 군대를 거느립니다. 저쪽에 군대가 있으니 이쪽에서는 군대를 더 키우려고 하며 전쟁무기도 더 갖추려고 합니다. 다시 말하자면, 서로가 서로한테 핑계입니다. 서로서로 너희가 군대와 전쟁무기를 없애지 않으니 우리도 군대와 전쟁무기를 안 없앤다고 핑계를 댑니다.



국가 안보라는 개념은 오랜 반공주의 속에서 오염되어서 모든 인권을 억압할 수 있는 만능 면허로 느껴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국가 안보라기보다는 정권 안보, 권력 안보의 측면에서 늘 사용되어 왔죠. (87쪽)


국가주의와 종교의 긍정적 관계 형성에서 반공주의와 군종 제도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 종교인들은 선악 이원론을 이용하여 ‘반공주의 종교화’에 앞장섰을 뿐 아니라, 자체적으로 구축한 방대한 ‘반공 인프라’를 통해 끊임없이 반공주의를 재생산해 왔습니다. (150쪽)



  곰곰이 돌아보면, 권력자는 모두 한통속입니다. 권력자는 서로 군대를 거느리면서 ‘한 나라를 이루는 여느 사람들’을 휘어잡습니다. 군대는 평화를 지키는 구실을 하지 않습니다. 군대는 권력자를 지키는 울타리 노릇을 합니다. 군대는 평화가 아닌 권력을 지키면서 평화를 늘 억누르는 노릇을 합니다.


  우리는 잘 알아야 합니다. 사회의식이나 학교교육이나 정치지도자가 길들이려는 지식이 아닌, 우리 삶으로 제대로 바라보면서 잘 알아야 합니다.


  땅을 일구어 밥을 거두는 시골사람은 전쟁무기를 손에 안 쥡니다. 우리가 밥을 먹으려면 두 손에 호미와 삽과 낫과 쟁기가 있어야 합니다. 밭일이나 논일을 하는 사람이 허리에 권총을 찰까요? 아닙니다. 시골사람을 소작인이나 노예로 부리려고 하는 권력자가 허리에 권총을 찹니다. 시골에서 들일을 하는 사람은 웃통을 벗고 맨발에 맨몸에 맨손으로 오직 흙을 만질 뿐입니다.


  참다이 삶을 지으면서 아름답게 밥을 나누려고 하는 사람은 언제나 맨손입니다. 잘 바라보고 알아야 합니다. 나락을 거두고 푸성귀를 돌보는 시골사람은 늘 맨손이요 아무런 무기가 없습니다. 나무를 때어 밥을 짓던 먼먼 옛날 옛적 시골사람부터 오늘날 시골사람까지 언제나 가장 사랑스러운 손으로 밥을 짓습니다. 손에 총을 거머쥐면서 밥을 짓는 사람은 없습니다.



병역거부라는 것은 대한민국이라는 틀 안에서 병역제도의 비합리성, 폭력성에 저항하는 것이겠지만, 그것을 넘어서 국민화하려는 폭력에 저항하는 것은 물론 이런 국민화 과정이 아닌 다른 사회, 다른 나라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행위라고 생각합니다. (244∼245쪽)


학교가 폭력적인 구조 안에 있으니까 학교 폭력도 비일비재했죠 … 증상은 폭력적인 학교 문화, 입시 교육이라는 환경의 결과인데, 폭력의 결과를 오히려 폭력의 원인으로 지목하는 셈이죠 … 폭력적인 아이들의 모습은 제대로 된 삶을 살고 싶다는 절규일 수도 있는데, 구조가 그것을 들어주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폭력은 사랑이 없는 상태로 볼 수 있습니다. (269, 271, 275쪽)



  《저항하는 평화》라고 하는 이야기책은 평화가 무엇이고 전쟁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밑바닥을 샅샅이 훑고 헤아리면서 다룹니다. 폭력이 왜 태어나는가 하는 대목을 짚고, 폭력을 저지르는 사람들 마음이 얼마나 메마른가 하는 대목을 건드리며, 폭력으로 삶을 무너뜨리려는 전쟁이 왜 군대를 키우면서 이 사회와 나라를 집어삼키려 하는가 하는 대목을 돌아봅니다.


  젊은이는 군대에 가야 하지 않아요. 젊은이는 사랑스러운 보금자리에서 살림을 가꾸어야지요. 젊은 사내와 가시내는 모두 군대 문제 때문에 휘둘리거나 휩쓸리지 말아야 합니다. 젊은 사내와 가시내는 서로 아끼고 돌보면서 사랑스러운 마을을 일구는 슬기를 모아야 합니다.


  삶을 노래할 때에 평화입니다. 삶을 노래하지 않으면 평화가 아닙니다. 사랑을 꿈꿀 때에 평화입니다. 사랑을 꿈꾸지 않으면 평화가 아닙니다.


  살인 훈련은 평화가 아닌 전쟁입니다. 이제 갓 스무 살밖에 안 된 어린 사내한테 총칼을 쥐어 주면서 ‘어디에도 없는 적군’을 머릿속에 바보스레 만들어서 이웃을 잊고 동무를 밟고 올라서도록 길들이는 짓은 바로 권력자가 온누리 사람들을 억누리려고 하는 쳇바퀴 같은 제도입니다.



권력에 복종하니까 권력이 유지된다는 거예요. 따라서 민중들이 복종하길 거부한다면 권력은 서서히 무너질 수밖에 없죠 … 정치적으로만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항하는 사람들이 자기 완결적인 삶의 구조를 갖춘다면 지배자의 입장에서는 가장 말을 안 듣는 세력이 될 수 있죠. (297∼298, 311쪽)


2008년 촛불은 계속 광화문으로만 집결하는 방식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까 광화문만 명박산성으로 막으면 된다, 아주 쉽죠. (316쪽)



  사랑은 평화로 가고, 평화는 사랑으로 갑니다. 전쟁은 군대로 가고, 군대는 전쟁으로 갑니다. 사랑스러운 평화가 이루어지는 마을에는 전쟁도 군대도 없습니다. 사랑스러운 평화하고 동떨어진 곳에는 전쟁과 군대가 나란히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왜 성노예가 생겨야 했을까요? 이웃나라를 군대를 앞세운 총칼로 짓밟은 이들은 마음속에 오직 전쟁 생각만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을 맞이한 한국에도 왜 성매매가 있을까요? 이 나라에 참다운 평화가 없는 채 군대가 골골샅샅 또아리를 틀기 때문입니다.


  모든 폭력은 사랑이 없는 곳에서 싹트고, 사랑이 없는 곳에서 싹트는 폭력은 다른 폭력으로 자꾸 이어집니다. 모든 폭력을 잠재우는 사랑은 새로운 사랑으로 이어지면서 평화로운 삶과 마을과 보금자리로 거듭납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려면, 폭력이 아닌 사랑을 배우면서 찾을 노릇입니다. 사람이 사람다이 삶을 가꾸려면, 전쟁은 그치고 군대를 없애면서 두레와 품앗이로 숲과 들을 일굴 수 있어야 합니다.



전쟁은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모든 악의 총합이라고 할 수 있죠. 가난이나 기근, 굶주림, 인격 모독, 폭력, 거짓, 파괴, 아동학대, 강간과 매춘 등등. 거의 모든 나쁜 것이 전쟁 속에 들어 있습니다 … 인간을 인격으로 존중하지 못하는 공간에서 나도 모르게 내 말이나 행동에서 그런 악함이 나타나게 되는 것은 아닐까요? (354쪽)



  군대가 그대로 있는 사회에서는 핵발전소도 그대로 있기 마련입니다. 군대를 차츰 줄여서 마침내 없애려고 하는 사회에서는 핵발전소도 물리치면서 없애려 하기 마련입니다.


  평등하고 평화와 동떨어진 나라에서는 폭력과 차별이 춤춥니다. 평등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에서는 참말 언제나 평등하고 평화가 따사로이 흐릅니다.


  아이들을 생각하고, 이 아이들이 자라서 낳을 아이들을 생각해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전쟁무기와 군대와 폭력을 물려줄 생각인지, 아니면 아이들한테 꿈과 사랑과 평화와 평등을 물려줄 생각인지, 오늘 이곳에서 어른들 스스로 똑똑히 헤아려야 합니다. 아이들한테 전쟁무기와 군대를 물려준대서 평화로울까요? 아이들한테 참다운 사랑을 슬기롭게 물려주어야 비로소 평화롭지 않을까요? 4348.8.17.달.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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