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중언론학의 논리 - 정보혁명 시대 네티즌의 무기
손석춘 지음 / 철수와영희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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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02



말길을 아름답게 트는 한누리

― 민중언론학의 논리

 손석춘 글

 철수와영희 펴냄, 2015.2.13.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딘 때를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대학교 합격 통지서를 받고 내 어버이한테 보여주었을 때, 두 분은 비싼 배움삯을 대려고 이리저리 알아보며 빚을 지셨습니다. 내가 대학교를 다섯 학기만 다니고 그만둘 무렵, 내가 대학교라는 데에 발을 걸치는 동안 들여야 한 빚(배움삯)이 얼마나 큰지 새삼스레 느꼈습니다. 그런데, 나는 대학교라는 곳에 첫발을 디딜 적부터 ‘꿈’이 아닌 까마득한 ‘수렁’을 느꼈습니다. 이곳 대학교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도록 가르치려는 기운이 하나도 없다고 느꼈습니다.


  고등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또렷하게 떠올릴 수 있습니다. 끔찍한 싸움터요, 온통 바보들이 득시글거리는(나 또한 바보였습니다) 중학교를 가까스로 벗어났다 싶더니, 더욱 끔찍한 싸움터이면서 더욱 바보스러운 이들이 넘치는(나 또한 더 바보스러웠습니다) 고등학교라니, 나는 나를 얼마나 괴롭혀야 하는가 하고 생각했어요.


  중학교에 첫발을 디딘 때도 이런 느낌이 똑같았어요. 국민학교를 다닐 적에는, 교사라는 어른들이 늘 몽둥이를 들고 다니면서 우리를 개처럼 두들겨팰 뿐 아니라 손바닥으로 뺨을 후려갈기고 온갖 거친 말에다가 갖가지 얼차려로 괴롭히거나 들볶았어도, 동무들끼리 모여서 하하 웃고 뛰놀면 모든 앙금을 풀 만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에서는 교사도 바보요 동무도 바보입니다. 나도 바보이지요. 그저 죽자 죽자 하고 뒹굴 뿐이었습니다.



.. 민중이 주체적 결단으로 역사에 참여하고 있을 때, ‘지식인’들은 민중이 게으르고 공짜만 좋아한다고 ‘훈계’하다가 친일의 길로 걸어갔다 … 식민사관은 단순히 과거의 문제도 양적 확대재생산의 문제도 아니다. 식민사관을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체화한 한국 언론은 우리가 현실을 바라보거나 내일을 열어 가는 데도 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 독자의 신뢰를 받아야 할 신문기업의 성격상 자신들의 친일을 은폐하려는 의도가 강할 수밖에 없기에 그들은 친일의 과거를 한사코 인정하지 않으면서 국가적 차원의 진상 규명조차 ‘종북’으로 ‘마녀사냥’ 해 왔다 ..  (36, 38, 44쪽)



  나는 국민학교를 다니는 동안 몇 가지를 배웠습니다. 첫째, 동무와 함께 어우러지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둘째, 따분하고 지겨운 수업을 받는 동안 나 혼자 생각에 잠겨 홀가분하게 누리는 놀이를 배웠습니다. 셋째, 미술 시간에 하는 그림그리기는 재미없지만, 수업을 받는 동안 공책에 몰래 그리는 그림은 아주 재미있었어요. 국민학교 여섯 해 내내 혼자 집과 학교 사이를 걸어서 오가는 동안 하늘을 마시고 바람을 쐬는 하루가 얼마나 기쁜지 배웠습니다. 넷째, 함께 어우러져서 뛰논 동무는 몇 해가 흐르건 언제까지나 동무로 지낼 수 있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중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도 몇 가지를 배웠어요. 중학교에서는 아무것도 안 가르치는구나 하는 대목을 가장 크게 배웠어요. 중학교는 ‘더 큰 감옥’에 갇힐 수 있도록 길들이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어요. 중학교라는 데는 우리한테 있던 놀이를 모두 빼앗아 바보로 길들이려 하는 곳이로구나 하는 대목을 이 다음으로 배웠지요.


  고등학교를 다니는 동안에는 무엇을 배웠을까요? 놀이를 빼앗긴 몸이 되니, 동무란 없어도 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니, 동무를 짓밟고 올라서서 ‘시험성적 높이기’만 해야 하는구나 하고 배웠습니다. 동무란 없어도 되고, 동무를 짓밟아야 하며, 시험성적을 높였으니, 이제는 더 높은 대학교에 올라가서 내 밥그릇을 잘 챙기면 되는구나 하는 대목을 배웠습니다. 나라와 사회와 정치와 경제와 문화와 도덕과 교육과 예술과 학문과 종교에 걸맞다 싶은 ‘종(노예)’이나 ‘기계 부속’이 되는 길을 고등학교에서 아주 또렷하게 배웠습니다.



.. 가장 신뢰하는 언론사를 묻는 문항에 대해 절반에 가까운 45%가 “없다”라고 답했다. 그 수치는 신뢰도 1, 2, 3위로 나타난 한겨레(15%), KBS(12.3%), MBC(5%)를 모두 합친 숫자보다 많다. 또 하나 주목할 것은 신문 시장에서 큰 영향력을 지닌 조선일보(4%), 중앙일보(3.7%), 동아일보(2%)의 신뢰도를 합친 수치보다 한겨레의 신뢰도가 높다는 점이다 … 한국 언론은 상대적으로 미국 언론에 비해 수용자들은 물론이고 언론인 자신에게도 더 불신받고 있는 상황이기에, 그것을 개혁하는 과정에서 저널리즘의 존재원칙을 명확히 정립하는 것은 그만큼 더 중요한 과제다 ..  (49, 83쪽)



  모든 학교를 내려놓고, 모든 졸업장을 내려놓습니다. 모든 책을 내려놓고, 모든 지식을 내려놓습니다. 그러면 우리한테 무엇이 남을까요? 학교와 졸업장과 책과 지식을 내려놓은 나한테는 무엇이 남을까요? 네, 바로 ‘내’가 남습니다. 나한테는 오직 ‘나’ 하나가 남습니다.


  나는 나를 둘러싼 모든 허물을 내려놓은 뒤에 비로소 하나부터 차근차근 배울 수 있습니다. 학교를 떠나고, 졸업장을 찢으며, 상장이나 표창장은 재활용품 사이에 끼워넣으니, 비로소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고, 내가 누구인지 바라볼 수 있으니, 삶과 사랑과 사람을 배울 수 있습니다.


  나는 1998년 가을에 대자보를 석 장 썼습니다. 전지와 매직을 ‘근로장학생 알바를 하던’ 대학구내 서점에서 장만한 뒤, 세 시간에 걸쳐서 또박또박 대자보를 쓰고는, 대학교 도서관 앞에 있는 게시판에 씩씩하게 붙였습니다. 어떤 대자보를 썼느냐 하면, “나는 오늘 이 대학교를 그만둔다(자퇴한다)”는 이름을 큼지막하게 써서 왜 대학교를 그만두려 하고, 앞으로 어떤 길을 걸으려 하느냐 하는 이야기에다가, 나와 함께 이 길(대학 자퇴)을 걸으면서 삶을 스스로 새롭게 지을 동무를 기다린다는 뜻을 또렷하게 밝혔습니다.


  이때 붙인 대자보는 한 시간쯤 뒤 갈기갈기 찢겼습니다. 수위나 교수나 학교 관계자가 뜯거나 찢지 않았습니다. 나와 함께 이 대학교를 다니던 젊은이가 뜯어서 찢었습니다. 나는 대자보도 썼고, 학과방에는 편지를 남겼는데, 편지도 갈기갈기 찢겨서 쓰레기통에 들어갔더군요. 갈기갈기 찢긴 대자보와 편지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이 종잇조각을 나도 밟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나는 이런 종잇조각에 아쉬움을 남길 까닭이 없기 때문입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로운 길을 갈 생각이기 때문입니다.



.. 정치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을 선택해 미디어법의 통과를 각각 성명과 호소문 형태로 발표하고 기자회견을 연 사실은 그만큼 입법 의지가 강력했음을 의미한다. 한국 사회에서 정치권력과 자본이 힘을 모았을 때 여론 형성력을 클 수밖에 없다. 그런데 사회적 영향력이 큰 권력과 자본이 같은 날 기자회견을 열어 낸 한목소리에 언론까지 적극 가세했다 … 실제로 국회가 미디어법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일자리 2만 6000개가 늘어난다는 논리는 사실과 어긋남에도 계속 부각되었고 널리 퍼져 갔다. 명백히 사실과 다른 주장을 부각해 보도했으면서도 그것이 사실이 아니라는 진실이 밝혀졌는데 정정하거나 관련 내용을 보도하지 않은 것은 단순히 사실 확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  (92, 97쪽)



  손석춘 님이 쓴 《민중언론학의 논리》(철수와영희,2015)를 읽습니다. 여러모로 재미있는 책입니다. 이 책을 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교재로 쓸 수 있기를 바랍니다. 기자나 피디나 작가가 되려고 하는 이들한테는 여러모로 길동무가 될 만한 아름다운 책입니다.


  손석춘 님은 ‘민중’이라는 낱말이 ‘죽은 말’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낡거나 한물 간 이름’이 아니라고 외칩니다. 틀리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다만, ‘민중’이라는 낱말은 ‘민중이 스스로 지은 이름’은 아닙니다. 민중이라는 낱말은 지식인이 지었어요.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민중’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어떤 이름으로 가리킬까요? 시민? 서민? 대중? 군중? 국민? 백성? 노동자? 인민? …… 이도 저도 모두 아닙니다.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아무런 이름으로도 따로 가리키지 않습니다.


  알쏭달쏭하지요. 아리송하지요. 그러나, ‘민중인 사람’은 이녁 스스로 따로 다른 이름을 쓸 까닭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땅에서 ‘민중인 사람’은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아름다우면서 사랑스럽고 멋진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거든요. ‘민중인 사람’은 이 나라에서 아주 오랜 옛날부터 가장 착하면서 참답고 살가운 이름을 스스로 지어서 썼어요.



.. 후쿠자와는 “조선인민을 위하여 조선의 멸망을 축하한다”는 글까지 발표해 조선 침략론을 전개했다. 따라서 박영효에게 신문 발간을 권했던 1882년, 후쿠자와의 의도가 어디에 있었는지는 굳이 설명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 신문과 관련해서 ‘국민’을 계몽이나 교육의 대상으로 바라보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함으로써, 박영효·유길준을 비롯한 개화파는 아래로부터 형성되고 있었던 공론장과 중세사회의 변혁 열망을 적대시하게 된다 … 한국의 신문과 방송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을 평가하는 국제표준에 대해 의도적이든 아니든 개념 파악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고 해도 지나친 비판이 아니다. 사회 구성원들로 하여금 기업의 사회적 책임과 관련해 인권과 노동을 아예 생각도 못 하게 만들고 있다는 점에서 의제설정이론이 정확하게 맞아떨어지고 있다 ..  (165, 174, 206쪽)



  우리는 모두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태어나 살아온 이들은 ‘사람’이라는 이름을 손수 지어서 썼습니다. ‘민중언론학’이란,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길을 밝히려고 하는 ‘언론학 길잡이책’입니다.


  사람이 사람답지 않으니까, 친일부역을 했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버렸으니까, 군사독재를 일으켰어요. 사람이 사람다움을 등지니, 4대강사업이라든지 자유무역협정이라든지 밀양송전탑이라든지 온갖 핵발전소를 마구 밀어붙여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다움을 잊으니까, 전쟁무기와 군대로 자꾸 바보짓을 일삼아요. 사람이 스스로 사람인 줄 모르니까, 폭력이나 강간이나 차별이나 따돌림 따위를 자꾸 부추기지요.


  우리는 그저 ‘사람’입니다. 그리고, 한겨레는 ‘사람’을 둘로 나누어서 살폈습니다. 두 갈래인 사람입니다. 하나는 ‘아이’입니다. 다른 하나는 ‘어른’입니다.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한 가지로 갈립니다. 나이로? 아니에요. 아이와 어른은 나이로 가르지 않아요. 아이와 어른은 오직 하나 ‘철’로 가릅니다.


  철이 들면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철든 사람은 어른입니다. 나이가 아무리 많아도 철이 안 들면 철부지입니다. 철이 든 척하는 아이는 ‘애늙은이’입니다. 철부지는 떼쟁이요 바보입니다. 이리하여, 우리 사회에서 ‘철 안 든 어른 모습인 사람’이 아주 많아요. 나이만 많대서 어른이 아니기에, 나이만 많으면서 ‘어른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은 온갖 차별과 불평등을 일삼습니다.



.. 적어도 대학이 정부 및 기업과 논리를 공유하며 기업이 요구하는 지식을 생산하는 경향은 확인할 수 있다 … 진실을 추구해 가는 ‘과정’에서 당대의 다른 지식인들과 비교하더라도 고투의 발자국을 또렷하게 남긴 리영희는 한국현대사 전공인 역사학자 서중석과의 인터뷰에서 끝없이 공부해 나가는 자세를 밝혔다 … 경제적 이익 추구 차원이 아닌 경제적 고통을 풀어가는 ‘윤리적 차원의 사유’가 필요하다 … 이 땅의 학문적 사대주의는 조선왕조 내내 중국의 주자학을 맹신해 온 지배적 학문 전통과 무관하지 않다. 우리가 ‘습관’처럼 언제나 무시하는 일본만 하더라도 오래전부터 학문의 자주성을 일궈 가고 있지만, 한국 학계는 미국식 연구방법이나 이론적 논의를 절대적 기준으로 삼음으로써 우리 현실을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는 연구를 얕잡아보거나 ‘학문적 논의’가 아니라고 폄훼하기 일쑤다 ..  (231, 266, 286, 323쪽)



  한국이라는 나라는 예부터 정치집권자가 ‘사대주의’를 즐겼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정치집권자는 스스로 ‘사람’인 줄 몰랐어요. 정치집권자는 손수 삶을 짓지 않았어요. 밥과 옷과 집을 손수 지은 정치집권자나 학자나 지식인은 아직 하나도 없습니다. 이들은 늘 입으로만 떠들어요. 그래서 중국을 사대주의로 모시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을 사대주의로 받들다가, 해방 뒤에는 미국을 사대주의로 높이지요.


  한국에서 정치집권자뿐 아니라 모든 학자와 지식인은 온갖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과 이론을 폅니다. 안타깝지만, 《민중언론학의 논리》를 쓴 손석춘 님도 ‘한국에서 사람이 사람답게 살며 쓰는 말’로는 이 책을 펼치지 못해요. 손석춘 님도 ‘중국 한자말’과 ‘일본 한자말’과 ‘영어’로 이녁 학문을 펼칩니다. 다만, 손석춘 님은 ‘제 말’을 아직 못 찾았지만, ‘제 넋’은 스스로 생각하기에, 제 넋을 살려서 ‘사람다운 언론’이 나아갈 길을 밝히려고 합니다.


  사대주의란 정치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니고, 언론에서만 사대주의가 아닙니다. 말과 넋과 삶 모두 사대주의입니다. 광고도 대학교도 교육도 문학도 문화도 모두 사대주의로 흐릅니다. 이 대목을 제대로 바라보도록 이끌려고 하는 《민중언론학의 논리》입니다. 이 책을 읽을 젊은이라면, 또 대학생이라면, 앞으로는 ‘내 사람된 참모습’뿐 아니라 ‘내 사람된 참말’도 슬기롭게 깨달을 수 있기를 빌어요. 이 책을 읽을 ‘나이든 어른’이라면, 이제껏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삶을 가만히 되새기면서, 이제부터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삶길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디딜 수 있기를 바랍니다. 4348.2.16.달.ㅎㄲㅅㄱ


(최종규/함께살기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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