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우연성
니콜라스 지생 지음, 이해웅 외 옮김, 김재완 감수 / 승산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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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20



꿈꾸는 사람이 꿈을 이루는 ‘양자우연성’

― 양자우연성

 니콜라스 지생 글

 이해웅·이순칠 옮김

 승산 펴냄, 2015.7.6.



  아침마다 꿈을 꾸면서 일어납니다. 오늘 하루 누릴 삶을 마음속으로 가만히 그립니다. 어떤 일을 할는지 생각하고, 어떤 하루를 보내면서 기쁘게 웃고 노래할 만한가 하고 헤아립니다.


  밤마다 꿈을 꾸면서 잠듭니다. 오늘 하루 누린 삶을 마음속으로 차근차근 그리면서 이튿날 새롭게 맞아들일 이야기를 그립니다. 즐겁게 누린 삶을 되새기고, 아쉽게 보낸 삶을 돌아봅니다.


  틈틈이 종이에 그림을 그립니다. 내가 스스로 이루려는 꿈을 그립니다. 앞으로 이루려는 꿈을 담은 그림을 늘 새롭게 바라보면서 마음속에 아로새깁니다. 몸과 마음이 오롯이 꿈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내 그림’을 기쁘게 노래하고 웃으면서 바라봅니다.



고전물리학은 서로 끌어당기는 양전하와 음전하로 구성된 물질이 왜 붕괴하지 않는지를 설명하지 못했었다. 양자역학은 물질의 전기적, 광학적 특성의 정밀하고 정량적인 기술을 가능하게 했고, 초전도나 소립자들의 특이한 특성과 같은 놀라운 현상들을 기술하는 데 필요한 개념적 틀을 마련해 준다. (16쪽)


잠시 한 발짝 물러서서 보면 양자 비국소성의 이야기가 사실은 단순하고 매우 인간적임을 알게 될 것이다 … 우리는 특별한 시대에 살고 있다. 멀리 떨어져 있는 물체들은 ‘상호작용’을 할 수 없다는 우리의 확고했던 직관이 옳지 않다는 사실이 물리학에서 발견되었다. (26, 27쪽)



  니콜라스 지생 님이 쓴 《양자우연성》(승산,2015)을 읽습니다. 이 책은 ‘양자’가 얽히는 물리학 가운데 ‘양자우연성’이 무엇인가를 놓고 벌이는 ‘벨 상자 게임’을 이야기합니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이론이나 양자역학이라는 이름으로도 알려지고, 이 책에서 밝히듯이 양자우연성으로도 알려집니다. 어떤 이름으로 알려지든, 가장 깊이 들여다볼 대목은 ‘양자’입니다. 오늘날 물리학뿐 아니라 과학은 ‘양자’를 한복판에 두지 않고서는 아무런 이야기도 할 수 없다고 할 만하며, ‘양자’를 알지 못하고서는 아무것도 알지 못한다고까지 할 만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양자’ 이야기가 비로소 불거진 뒤 다른 모든 이론을 버티던 바탕이 무엇인가 하는 대목이 낱낱이 드러났을 뿐 아니라, ‘양자’를 다루는 이야기는 ‘끝이 없는 끝’으로 온갖 이야기를 모조리 들려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자네들이 메커너즘을 찾지 못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야. 왜냐하면 메커니즘이 없기 때문이지 … 순수한 창조작용에 의해서 만들어질 때까지 존재하지 않아.” (40쪽)



  《양자우연성》은 아주 쉬운 길잡이책입니다. 양자물리학이나 양자과학이나 양자역학이 낯선 사람한테는 아무튼 어려울는지 모르고, 양자물리학이든 양자과학이든 양자역학이든 새롭게 배우는 사람한테까지 이래저래 어려울 수 있으나, 이 책은 아주 쉽게 풀어서 쓴 길잡이책입니다.


  요즈막에 선보인 〈인터스텔라〉 같은 영화는 바로 양자역학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낸다고 여길 수 있습니다. 예전에 나온 〈컨택트〉라는 영화라든지 〈사랑의 블랙홀〉 같은 영화도 바로 양자역학을 잘 보여주는 영화라고 할 만합니다.


  ‘양자’ 이론은 언제나 ‘관찰자(보는 눈·보는 이)’가 모든 것을 이루거나 짓습니다. ‘관찰자(보는 눈)’가 없으면 아무것도 나오지 않습니다. 관찰자가 실험을 하면서 ‘이러한 결과’를 바란다면, 이러한 결과대로 이룹니다. 관찰자가 똑같은 실험을 다시 하면서 ‘저러한 결과’도 나올 수 있지 않나 하고 생각하면, 저러한 결과대로 이룹니다.



어떤 결과는 단지 우리 자신의 선택에 의해서만 결정되지만, 어떤 결과는 우리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선택에도 영향을 받는다. (46쪽)


모든 과학 수업은 이야기로 시작된다. 이야기 없이 어떻게 에너지, 분자, 지질층, 상관관계 같은 새로운 개념들을 소개할 수가 있겠는가? (50쪽)



  흔히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고 합니다. 한겨레 옛말입니다. 그러면, 왜 콩 심은 데에 콩이 날까요? 콩을 심으면서 콩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팥 심은 데에 팥이 나는 까닭도 팥을 심은 줄 지켜보면(관찰)서 알기 때문입니다.


  이와 달리, 콩을 심었으나 팥으로 여기면서 ‘팥을 키우듯이’ 돌보면, 콩씨가 팥씨로 바뀔 수 있습니다. 콩을 심고 팥으로 여겼으나 ‘아무래도 팥이 아닌 듯한데’ 하고 생각하면, 콩씨 그대로 나오지요. 콩을 심고 팥인 줄 알면서 팥으로 거두려 하면, ‘콩도 팥도 아닌 새로운 열매’를 얻기도 합니다.


  먼 옛날 한겨레 어느 스님이 이웃나라로 먼 길을 나섰다가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아주 시원하게 마셨다지요. 이 스님은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을 아주 달게 여겼습니다. 이러한 생각이 바로 ‘실험을 하는 관찰자 뜻’입니다. 그러니, 이 스님은 아주 시원하고 좋은 물로 알고 밤새 달콤하게 잤어요. 이러다가 이튿날 아침 해골 바가지인 줄 알고 우웩거리지요. 이때에 이 스님은 깨닫습니다.


  해골 바가지에 담긴 물이라 하더라도 스스로 ‘달고 시원한 물’로 여기면, 그저 달고 시원한 물로 내 몸에 스며들어서 내 몸을 살립니다. 한낮에 멀쩡한 바가지에 담긴 물을 바라보면서 ‘맛없어’ 같은 생각을 하면, 그냥 멀쩡한 물이지만 내 몸에 나쁘게 스며들어서 내 몸을 망가뜨려요.



우연히 일어나는 일의 결과는 예측할 수 없다. 그러나 누가 예측할 수 없다는 것인가? 예측할 수 없는 많은 일들이 존재하지만 그 일들이 이해하기 너무 복잡한 과정들의 결과로 나타나기 때문에, 또는 그러한 결과가 나오도록 영향을 준 모든 세부사항들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기 때문에 예측하지 못한다. 그러나 ‘진정한’ 우연성에 의해서 발생되는 진실로 우연적인 결과는 본질적으로 예측이 불가능하므로 예측할 수 없다 … 진정으로 우연한 결과는 이것이 나타나기 전까지는 존재하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순수한 창조 작용에 의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예측 불가하다. (59쪽)



  ‘양자’ 이야기는 ‘물 결정’에서도 쉽게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일본에는 물 결정을 얼려서 사진으로 찍는 과학자가 있습니다. 마사루 에모토 님이라고 하는데 한국에도 《물은 답을 알고 있다》는 책이 여러 권 나왔습니다. 이 일본 과학자는 물한테 좋은 말하고 궂은 말을 따로따로 들려준 뒤 하룻밤을 그대로 두고는 이튿날 결정을 얻어서 사진으로 찍어요. 어떻게 될까요?


  좋은 말을 들은 물은 대단히 아름다운 결정이 됩니다. 궂은 말을 들은 물은 결정이 나오지 않거나 일그러집니다. 아름다운 노래를 들은 물은 아름다운 결정이 되고, 시끄러운 소리를 들은 물은 시끄럽거나 일그러진 결정이 됩니다.


  이러한 ‘물 결정’ 모습이란, 양자우연성이나 양자역학이라고 할 ‘양자’ 이야기가 무엇인가 하는 대목을 짚거나 밝히는 여러 보기 가운데 하나입니다. 내가 마시는 물 한 방울을 고마이 여기면서 기쁘게 웃으면서 꿀꺽꿀꺽 받아들이면, 이 물은 달디단 샘물이 될 뿐 아니라, 포도술도 되고 맥주도 됩니다. 그러나, 깊은 두멧자락 정갈한 샘물에서 길은 물이라 하더라도 찡그리거나 골을 내면서 마시면, 이 물은 지저분한 공장 폐수하고 똑같은 물로 바뀝니다.



이 부등식을 보면 그 의미를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더라도 좋은 음악의 아름다움을 인식하듯이 이 부등식의 아름다움을 인식할 수 있을 것이다. (63쪽)


더구나 앨리스와 밥은 서로가 어디에 있는지 알 필요도 없다. 그들은 각자 상자를 가지고 아무도 모르는 송수신처로 갈 수 있다. (72쪽)


벨 게임과의 차이점은 벨 게임에서는 이기기 위해서 통신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결과가 무작위적으로, 그러나 계획된 방식에 따라 나오기만 하면 된다. 앨리스와 밥의 상자들은 상대방이 뭘 하고 있는지 ‘알아야’ 하지만, 앨리스와 밥은 이 ‘아는 것’을 이용해서 정보를 전달할 수는 없다. (83쪽)



  ‘양자우연성’이라고 하는 ‘우연’이란, 미리 못박지 않은 대로 이루어지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미리 못박은 대로 반드시 그렇게 되어야 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이 지구별 자연은 사람(관찰자)이 바라는 대로 모두 이룰 수 있다는 뜻입니다. ‘누가나 똑같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러니, 우리(관찰자)는 마음속으로 꿈을 지어서 생각으로 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관찰자)가 스스로 생각하는 대로 마음에 깃들어, 이처럼 깃든 생각이 씨앗이 되어 삶(현실)에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양자우연성》에서 다루는 ‘벨 상자 실험’은 ‘생각을 지어서 마음에 담아 삶을 짓는 흐름’을 과학 실험과 수식으로 보여줄 뿐입니다.



그 후의 많은 실험들이 아인슈타인의 직관에는 위배되며, 양자이론이 옳음을 증명하는 결과들을 보여주었다. 자연은 멀리 떨어진 두 상자가 하나의 물체인 것처럼 조직적인 행동을 하는 것을 허용한다. (84쪽)


아인슈타인처럼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대신, 오히려 “왜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는가”라고 묻자. 그에 대한 답은, 자연은 전달 없는 통신의 가능성 없이도 비국소적일 수 있다는 것이다 … 진정한 무작위성은 여러 장소에서 동시에 나타날 수 있다. (93쪽)



  생각하여 꿈을 꾸는 사람은 생각을 엮어서 꿈을 이룹니다. 생각하지 않고 꿈을 안 꾸는 사람은 생각도 없고 꿈도 없으니, 스스로 이루는 삶이 없습니다. 생각하는 사람은 생각을 꿈으로 가꾸면서 새로운 하루를 짓습니다. 생각이 없고 꿈이 없는 사람은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나 문화권력이나 종교권력 따위가 시키는 일만 하는 쳇바퀴 놀음에 얽매일 뿐입니다.


  영화 〈인터스텔라〉를 보면, 첫머리에서 재미난 대목이 나옵니다. ‘예전 교과서’는 모두 거짓된 지식과 정보를 다루기 때문에 ‘미래 세계에서는 새로운 교과서를 쓴다’고 합니다. 그런데 미래 세계에서 쓰는 교과서도 ‘미래 세계를 이끄는 정치권력자 입맛에 맞게 조금 고친 교과서’일 뿐이에요.


  이런 대목을 우리는 얼마나 알아채거나 느낄까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가르치는 교과서가 ‘진실·진리’로 여기면서 아이들을 학교에 보내고 입시지옥에 내몰아 대입시험을 치르도록 하나요? 아니면, 교과서가 진실도 진리도 아니지만, 대학교 졸업장이 없이는 한국 사회에서 살아남을 수 없으니 억지스레 아이들을 학교에 내모는가요?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합니다.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매우 즐깁니다. 아인슈타인이 한 말과 달리, 하느님(신)은 언제 어디에서나 기쁘게 주사위 놀이를 합니다. 왜 하느님(신)은 주사위 놀이를 기쁘게 즐길까요? 재미있기 때문이고, 삶을 새롭게 짓고 싶기 때문입니다.



양자물리의 기묘한 이론은 멀리 떨어진 두 물체가 하나의 실체로서 행동하는 것이 가능할 뿐 아니라, 흔하다고까지 얘기한다! 그것이 얽힘이다 … 양자이론은 각각의 결과들이 측정될 확률을 정확하게 예측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어떤 결과가 선택되는지는 우연이며, 따라서 얽혀 있는 실체가 단일체로서 반응한다는 사실을 이용해서 정보를 보낼 수는 없다. (109∼110쪽)



  사람(관찰자)들이 양자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달을 수 있다면, 거짓된 지식이나 정보에 휘둘릴 까닭이 없습니다. 사람(관찰자)들이 양자 이야기를 제대로 바라보면서 깨닫는다면, 스스로 꿈을 짓는 길을 걸어가겠지요.


  어마어마한 돈을 바라든 커다란 집을 바라든 다 괜찮습니다. 우리가 꿈을 꾸는 대로 모두 이룹니다. 다만, 꿈을 꾸되 ‘못미덥다(의심)’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됩니다. 꿈을 꾸기는 했으나 ‘아마 안 이루어지겠지’ 하고 생각하면 안 이루어지지요.


  꿈을 꾸는 사람은 ‘이 꿈은 꼭 이룬다!’ 하고 생각해야 합니다. 아니, 꿈을 꾸는 사람은 꿈만 꿀 노릇입니다. 꿈을 꾸고서 ‘안 이루어져’ 하고 생각하면 이 생각대로 안 이루어져요. 그러니까, 지구별 아주 많은 사람들은 꿈을 못 이룹니다. 내가 꾸는 꿈만 깊은 마음으로 헤아리고 언제나 되새겨야 합니다.


  우리 사회를 살펴보면, 아주 많은 사람들이 꿈을 꾸고 싶기는 하지만 스스로 ‘꿈’을 터무니없다고 여기거나 ‘배부른 소리’로 여기고 말아, 처음부터 아예 아무 꿈을 꾸지 않기 일쑤입니다.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기를 바라는 ‘소박한 꿈’을 꾼다고 하지요. 그러니, 거의 모든 사람들은 ‘그저 월급이나 꼬박꼬박 받는’ 꿈을 이룹니다.



양자상태의 형태로 보내지는 것은 물질의 궁극적 구조이다. 마지막 큐비트가 처음 큐비트의 상태를 지닐 뿐만 아니라 모든 면에서 완벽히 동일하다 … 송신자와 수신자조차도 이동되는 큐비트의 내용을 모른다. 그러므로 앨리스와 찰스에게 메시지를 전달하고 찰스가 밥에게 전달하게 할 수 있다. (163쪽)



  사회가 달라지거나 거듭나는 까닭을 생각해야 합니다. 사회를 바꾸려고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사회가 바뀝니다. 그런데, 사회를 바꾸려는 꿈을 꾸는 사람은 언제나 얼마 안 됩니다. 사회를 바꾸려는 꿈이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늘 아주 많습니다. 대안언론이나 독립언론은 말도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도 많고, 대안학교나 독립학교도 터무니없다고 여기는 사람이 많아요.


  자, 그러면 어떻게 될까요? 꿈을 바라보면서 나아가는 사람은 꿈을 이루는 길로 갑니다. 꿈을 이루려고 언제나 씩씩하고 즐겁게 부딪히지요. 꿈을 안 바라보고 꿈이 아예 없는 사람은 ‘이루려는 꿈이 없’으니 ‘무엇을 해야 하는가’조차 모르고,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바보스러운 사회가 무너지는 까닭은, 또 그악스러운 독재자를 몰아낼 수 있는 까닭은, 바로 사람들(관찰자)이 스스로 생각을 짓고 꿈을 빚어서 가슴에 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보스러운 사회를 무너뜨리고 독재자도 거꾸러뜨렸으나, 사회가 다시 바보스럽게 뒤집어지면서 독재자가 나타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사람들(관찰자)이 다시 생각도 꿈도 접거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통과하려는 두 학생이 서로의 답안을 베끼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들을 반드시 공간적 간격으로 떨어뜨려 놓아야만 하는 것은 아님을 실험을 준비하는 과학자들이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177쪽)


영향이 임의의 먼 지역을 순식간에 연결할 수 있다면 도대체 우리는 공간을 어떤 식으로 이해해야 할까? 이런 영향을 비국소적 상관관계의 설명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이런 영향이 공간을 퍼져나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 공간의 바깥으로 거리 0인 지름길을 따른다는 말하고 같다. (185쪽)



  양자우연성은 물리학이나 과학에서만 다루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우리 사회 모든 곳에서 다룰 이야기입니다. 사회나 권력이나 교육이나 문화나 종교에서 양자 이야기를 다루려 하지 않는다면, 사람들(관찰자)이 생각도 꿈도 없이 ‘맹신·맹종·복종’하기를 바라기 때문입니다.


  생각 없는 사람은 바보처럼 휘둘립니다. 이른바 ‘종(노예)’이 됩니다. 꿈이 없는 사람은 ‘남이 시키는 일’만 합니다. 스스로 하고 싶은 일을 못 찾습니다. 꿈을 키우지 않는 사람은 정치권력이나 사회권력이 시키는 대로만 움직이는 ‘톱니바퀴’가 되고 말아요.


  아이들이 꼭 대학교에 가야 하나요? 아이들을 꼭 대학교에 보내야 하나요? 대학교 없이 아름다운 사회를 일굴 꿈을 못 꾸나요? 수출이나 수입이 없이 한국 사회가 저마다 자급자족을 하면서 아름다운 숲집과 보금자리를 누리면서 맛있는 밥을 즐기는 삶을 꿈꿀 수 없나요? 도시에서도 누구나 ‘마당 있는 집’에 나무를 심고 아이들이 실컷 놀도록 하는 꿈을 꿀 수 없나요?


  꿈을 꾸지 않으니 꿈을 이루지 못하는 줄 알아야 합니다. 바로 이것이 양자이론이고 양자과학입니다. 생각을 하지 않으니 생각을 아예 잊고 말아서, 스스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채 삽니다. 아인슈타인 같은 사람이 뇌를 많이 썼다고 하지만, 아인슈타인도 정작 뇌를 다 쓰거나 많이 쓰지는 못했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이 까닭은 한두 가지가 아닐 테지만, 아인슈타인은 양자과학을 받아들이지 못했거나 안 받아들였습니다. 스스로 한계를 지은 셈이지요. 스스로 생각을 넓게 뻗지 않았지요. 스스로 한계를 지으면 뇌를 그만큼 못 쓰고, 스스로 생각을 더 넓게 뻗으려 하지 않으면 그만큼 뇌를 조금만 쓰기 마련입니다. 뇌를 쓰는 이야기는 영화 〈루시〉에서 잘 드러나기도 합니다.



우리에게 자유의지가 없다면 우리는 절대 자연과학 이론을 테스트할 수 없을 것이다 … 나는 당신이 자유의지를 가지고 있다는 증명을 할 수 없음을 인정하지만, 나는 확실히 자유의지를 즐기고 있으며 당신은 절대 그 사실이 틀렸다고 증명할 수 없을 것이다 … 자유의지는 존재할 뿐 아니라 이것은 과학과 철학 그리고 우리가 의미 있게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능력의 전제조건이다. 자유의지 없이는 이성적 사고란 없다. 따라서 과학과 철학에서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그냥 불가능하다. (190∼191쪽)


측정의 결과란 것 자체가 없다고 가정한다. 이 가설에 따르면 우리가 N가지 가능한 결과가 있는 측정을 행한다는 환상을 가질 때마다, 우주가 모두 다른 결과를 갖고 있으며, 또한 똑같이 실재적인 N개의 가지로 갈라진다. 실험도 N개의 복사본으로 갈라지고 각자가 N개의 가능한 결과 중 하나를 ‘본다’. 이것이 다중세계 해석 혹은 다중우주 해석으로. (196쪽)



  서양에서는 ‘하늘은 스스로 돕는 이를 돕는다’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스스로 돕는다’가 무슨 뜻인가 하면, ‘스스로 무엇이든 하려는 생각을 품는다’는 뜻입니다. 스스로 무엇을 하려는지 생각을 품을 적에, 이러한 생각을 도와줄 이웃이 나타납니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모르면, 이웃은 나를 못 돕지요.


  자, 생각해 보셔요. “이봐, 뭘 도와줄까?” “응, 도와줘. 그런데 뭘 도와 달라고 해야 할는지 모르겠네?” “뭐라구? 도와 달라는 소리야, 아니야?” “나도 내가 무슨 도움을 받아야 할는지 모르겠다니까?” 이런 이야기가 오가면 어찌 될까요? 나는 내가 나를 돕지도 못하고, 내 이웃도 나를 못 돕습니다.


  도움을 바란다면 내가 바라는 도움이 무엇인지 생각해야 하고, 이 생각을 꿈으로 지어서, 이 꿈과 생각대로 살아야 합니다. 그러면, 맨 먼저 나 스스로 이 꿈대로 나아가는 길을 찾습니다. 스스로 꿈길을 찾으면 이웃이 하나둘 나타나서 어느새 내 짐을 덜어 줍니다.



자연은 진짜로 우연적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다. (219쪽)



  《양자우연성》은 아주 쉽고 가벼운 이론을 딱 한 가지(벨 상자 실험)만 보여주는 얇은 책입니다. 이 대목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양자 이야기를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언제나 너무 어렵기 때문에 하나도 못 알아듣습니다. 양자 이야기는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라고 여기는 사람은 참말 수많은 이야기 가운데 하나로구나 하고 느끼면서 배웁니다. 그리고, 양자 이야기를 ‘내 삶과 꿈을 짓는 이야기’로 여기는 사람은 저마다 스스로 삶과 꿈을 어떻게 지어서 스스로 기쁘며 아름답게 하루를 열까 하는 길을 여는 실마리를 얻습니다.


  우리(관찰자)는 누구나 무엇이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실패도 할 수 있고 성공도 할 수 있습니다. 다만, 실패이거나 성공일 뿐입니다. 실패나 성공은 좋지도 나쁘지도 않습니다. 실패이든 성공이든 모두 ‘스스로 지은 꿈’으로 가는 길목에서 겪는 온갖 일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러니, 꿈을 바라는 사람은 실패를 몇 차례 했대서 주눅 들 일이 없고, 가볍게 성공을 몇 가지 했대서 자랑할 일이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고요하면서 사랑스러운 숨결이 되어 ‘하늘을 가르는 작은 새처럼 홀가분하게 구름을 타’고서 꿈을 지으면 됩니다. 4348.8.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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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한도숙 지음 / 민중의소리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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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8



농사꾼은 없이 ‘맛집·쉐프’만 있는 한국

―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한도숙 글

 민중의소리 펴냄, 2015.7.3. 15000원



  우리 집 꽃밭에 맥문동이 보라빛 꽃송이를 터뜨린 지 열흘쯤 됩니다. 작은아이는 마당에서 놀 적마다 “보라 꽃이 피었네?”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가만히 숙여서 들여다봅니다. 한여름에 피어나는 맥문동 보라빛 꽃송이는 새삼스럽도록 시원합니다. 그런데 맥문동 꽃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꽃송이 한복판에 노란 무늬처럼 꽃가루가 있어요. 먼발치에서는 안 보이지만 코앞에서 들여다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벌이나 나비가 찾아들어서 이 노란 꽃가루를 살살 건드려서 암술이랑 수술이 만나도록 하면, 맥문동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황금 들녘이 점점 좁아져 간다. 들판은 풍년인데 농심은 흉흉하다. 정부의 거짓말에 넌더리가 난단다. 언제나 관료 권력은 거짓으로 점철했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이 농심이다. (36쪽)


구조적으로 근대농업은 자본의 수탈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된 것이다. 보라, 농사를 짓는 농민보다도 농사 주변의 것들이 농사를 통해 이익을 보고 있지 않는가. 종자, 농약, 비료, 자재 어느 하나도 농민들이 직접 만들어 쓰지 못하는 구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환경농업도 다르지 않다. 친환경 농약, 자재, 비료들이 생산되고 농민은 그저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되고 있다. (48쪽)



  농민운동을 오랫동안 하셨다는 한도숙 님이 쓴 글을 묶은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민중의소리,2015)를 읽습니다. 630쪽을 웃도는 두툼한 글꾸러미를 찬찬히 돌아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아무런 농사 정책이 없는 정부를 나무라고, 농사꾼을 옥죄거나 단물을 쪽쪽 빨기만 하는 농협을 꾸짖습니다.


  한국에도 틀림없이 ‘농업을 다루는 부서’가 있습니다. 농림부장관이라든지 수많은 공무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농사꾼을 헤아리는 정책은 없다시피 하다고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농림부장관이 되는 분 가운데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농림부 공무원이 되는 분 가운데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공무원 시험을 치러서 공무원이 될 뿐이니, 책이나 법전은 뒤적일 줄 알아도 땅을 살피거나 헤아릴 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지식은 갖추었을지라도, 시골에서 흙을 부치며 살아온 사람들 마음을 읽거나 살피는 길은 모릅니다.



우리가 미신이라고 배운 것은 민족혼의 말살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도 미신으로 규정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 보니 엄청난 철학과 실천이 그것(굿)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우선은 하늘에 대한 경배의식이다. 하늘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근신의 철학이다. (62쪽)


1980년 토종벌이 40만군이었던데 비해 작년에는 약 4만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30년 만에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 꽃가루 매개충의 대표적인 벌이 없으면 과일과 곡류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먹거리에 치명적이다. 벌이 없어지는 이유는 다 아는 대로 농약 때문이다. (84∼85쪽)



  시골 읍사무소나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분들도 공무원 공부를 한 분들뿐입니다. 시골 군청에서 일하는 분들도 하나같이 공무원 공부를 한 분들뿐입니다. 흙 한 줌을 아끼거나 고깃배를 몰거나 나물을 캐면서 이 땅을 사랑하는 길을 걷다가 공무원이 된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흙을 모르던 이들이 공무원이 되고 정치 일꾼이 되었기에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풀 지붕’을 ‘슬레트 지붕’으로 바꾸었고, ‘흙 고샅’을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꾸었습니다. 요즈음은 ‘흙 도랑’을 ‘시멘트 도랑’으로 바꾸는 토목건설을 벌이고, 골짜기 바닥을 까뒤집어서 시멘트를 깔아 놓는가 하면, 깊디깊은 시골까지 샘물이 아닌 수돗물을 쓰도록 하는 토목건설을 벌입니다.


  샘물은 ‘안전하지 않다’고 하면서 ‘수도물을 마시라’고 하는데, 정작 시골마을을 흐르는 샘물이 어떤 성분인지 살펴서 밝히는 공무원은 없습니다. 게다가 샘물이 안전하지 않다면, 수많은 대기업이 이 나라 땅과 바다를 파헤치면서 뽑아올리는 ‘먹는샘물’은 어떻게 값을 붙여서 페트병에 담아 가게에서 파는지 아리송한 노릇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먹는 모든 밥과 반찬은 ‘샘물과 빗물’에 기대어서 얻습니다. 벼농사도 밭농사도 모두 ‘땅밑을 흐르는 물’을 길어올려서 댑니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쌀 생산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농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농업에 대해 이런 막말을 할 수 있으려면 충분한 논거가 있어야 한다 … 논조인즉 운동장에 남아도는 쌀이 썩어 가고 있는데 보조금 줘 가며 쌀을 생산하는 것은 세금 낭비란 것이다. 대안으로 콩이나 잡곡 채소들로 대체하면 된다고 했다 … 이는 임모다. 분명. 정부는 올해도 700억 원 정도의 식용쌀 수입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182∼183쪽)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를 쓴 한도숙 님은 ‘어려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쌀조차 자급률이 100퍼센트가 아닐 뿐 아니라 80퍼센트 언저리로 떨어지는 판에, 정부는 해마다 거의 천 억원에 이르는 돈을 들여서 다른 나라에서 쌀을 사들인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쌀이 모자라서 쌀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는 시골지기를 하루 빨리 짓밟아 죽이려는 생각으로 쌀을 거의 천 억원에 이르는 세금을 들여서 사들입니다. 이렇게 외국 쌀을 사들이면 한국 쌀은 값이 ‘똥값’이 되지요. 그러니까 한국 정부는 한국이라는 나라 스스로 ‘식량자급’도 ‘식량안보’도 하나도 안 헤아리는 꼴이니, 적어도 이런 바보짓을 멈출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를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을 빌어서 털어놓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하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 공부만 하느라 막상 시골일을 모르는 이들이 도시로 가서 공무원이 되고 장관이 되며 법관이 되고 시장이나 군수가 됩니다. 고향이 시골이라고 해서 시골일을 알지 않습니다. 고향만 시골일 뿐, 시험공부만 하느라 모내기도 모르고 풀베기도 모르며 ‘나물로 삼는 풀’이나 ‘약으로 얻는 풀뿌리’를 하나도 모르기 마련입니다. 이런 정치 일꾼이나 공무원한테서 제대로 된 농사 정책이 나오기를 바라기는 대단히 어려울 만합니다.


  그러니, 아예 생각이 없다면 아예 아무 정책이 없는 쪽이 훨씬 나을 수 있어요. 농협을 거쳐서 시골 농사꾼이 도시 소비자한테 쌀이나 푸성귀를 팔도록 하지 말고, 시골 농사꾼이 곧바로 도시 소비자한테 쌀이나 푸성귀를 팔면 됩니다. 농협은 농사꾼하고 소비자 사이에 서면서 ‘귓돈’만 신나게 떼며 배가 부르거든요. 농협이 가로챌 귓돈을 농사꾼이 받고, 도시 소비자는 ‘농협이 붙인 귓돈 바가지’를 쓰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먹을거리가 어디서 나고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도통 없다는 것이다. 제 생명을 이어 주는 먹을거리가 음식점에 있고 돈을 주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씨앗에서부터 물, 바람, 농부의 땀, 지렁이와 베짱이의 노랫소리가 음식재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사라진 채 오늘 점심은 어쨌느니 저쨌느니 강평으로 재잘댄다. (246∼247쪽)


양복을 입은 관료들이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경쟁체제가 세상 모든 이치의 중심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농민들이 국민으로 보이지 않고 오로지 경제 대상으로만 보여,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농사를 퇴출시킬 것인가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03쪽)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농사꾼은 없이 ‘맛집·쉐프’만 있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으니 볼 일이 없습니다만, 이웃집이나 친척집에 찾아가면 으레 텔레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흐르는 온갖 이야기 가운데 맛집 이야기나 요리사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어디에 가면 어떤 맛집이 있다는 이야기가 방송하고 인터넷에 넘칩니다. 어떤 솜씨를 부려서 어떻게 요리를 하면 훌륭하다는 요리사나 쉐프 이야기가 방송과 인터넷에 차고 흐릅니다.


  맛집이나 쉐프는 으레 ‘깨끗한 식재료’를 말합니다. 유기농이라든지 친환경이라든지 자연식 같은 말도 요즈음 곳곳에서 흘러넘칩니다. 그런데, 정작 손수 땅을 일구어 ‘깨끗한 식재료’를 얻는 몸짓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손수 땅을 일구어 밥을 얻는 사람들 이야기는 방송에도 인터넷에도 없다시피 합니다.


  농사꾼이 없이 무슨 ‘식재료’가 있을까요? ‘깨끗한 식재료’이건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에 절디전 식재료’이건, 농사꾼이 있어야 있습니다. 농사꾼 없는 맛집과 쉐프 이야기는 ‘도시 소비자’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이러한 방송과 인터넷이 우리 삶을 제대로 밝힐 수 있을까요? 정규직하고 비정규직을 갈라서 푸대접하는 사회 얼거리뿐 아니라 ‘농사꾼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사회 얼거리’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이라도 대북지원을 시급해 재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에 동포들이 쌀이 모자라 전전긍긍하는 터에, 쌀이 남아 개사료 돼지사료로 쓰겠다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밥을 굶는 서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421쪽)


농업 문제를 대하는 국민 다수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자본시장에 농업을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다. 또한 일부 농민들도 기업농을 통한 농업적 성공을 확신하면서 정부 정책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조건반사적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만다. (615쪽)



  한국에서 쌀은 남아돌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쌀 자급률이 80퍼센트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이제 끝없이 떨어질 텐데, 쌀을 뺀 곡식은 자급률이 아주 바닥을 칩니다. 시골지기는 돈이 안 된다고 여겨서 다른 농사는 안 짓는 흐름이고, 도시 소비자는 가게에 온갖 푸성귀가 골고루 있으니 그냥 골고루 사다 먹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맥주를 많이 마셔도 맥주에 쓰는 보리를 한국에서 거두지 못하고 외국에서 사들이기만 합니다. 빵에 쓰는 밀은 자급률이 1퍼센트도 안 됩니다. 이웃나라에서 한국에 밀을 하루라도 안 판다고 한다면 한국에 있는 모든 빵집이랑 피자집은 문을 닫아야 할 테지요.



거머리가 없어진 농사가 오래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진즉에 하지 못했다. 거머리가 없어 논에 들어갈 때 맘이 놓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았다. 그러는 동안에 자본이라는 거머리에 둘러싸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려고 안 했고 알지도 못했다. (143쪽)



  맥문동꽃이 피는 요즈음은 까마중꽃도 함께 핍니다. 아니, 까마중꽃은 훨씬 일찍부터 피었습니다. 까마중은 아직 조그마한 풀포기일 적부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키를 부쩍 키웁니다. 새까만 까마중알을 바지런히 훑어서 먹으면 까마중풀은 일 미터가 넘게까지 자라서 마치 나무처럼 되다가 한겨울로 접어들어 된서리가 내려야 비로소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주 조그맣고 하얀 까마중꽃은 사람이 손으로 하나하나 꽃가루받이를 해 줄 수 없습니다. 온갖 풀벌레와 개미와 진딧물과 딱정벌레와 무당벌레와 나비와 벌과 파리가 오가면서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감꽃도 모과꽃도 탱자꽃도 모두 온갖 ‘숲이웃’이 꽃가루받이를 해 주어요.


  이웃마을에 사는 여러 시골지기도 이웃입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사람도 이웃입니다. 그리고 들과 숲에서 조용조용 삶을 잇는 온갖 크고작은 목숨들도 이웃입니다. 저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감자꽃이 피고 지면서 감자알이 굵고, 고추꽃이 피고 지어야 고추알이 붉으며, 오이꽃이 피고 지어야 오이알이 소담스럽습니다. 농업 정책을 맡는 공무원이 되는 분들은 해마다 ‘농활’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농활보다는 ‘농업 정책 공무원’ 스스로 텃밭을 일구면서 ‘밥이란 참말 무엇인지’ 스스로 몸으로 느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지 않고서야 시골 농사꾼이 등허리가 휘면서 농약에 찌들다가 쓸쓸히 숨을 거두어 마을이 하나둘 사라지는 흐름은 멈출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4348.8.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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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문학의 거짓말 -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
정문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7월
평점 :
절판



책읽기 삶읽기 196



‘참말’이 없는 문단권력은 ‘돈만 잘 번’다

― 한국문학의 거짓말

 정문순 글

 작가와비평 펴냄, 2011.12.30. 17000원



  아이들은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매직으로 벽에다 그림을 그리든, 물잔이나 접시를 떨어뜨려서 깨뜨리든, 열매를 맺어야 할 꽃송이를 함부로 꺾는다든지, 작은아이가 누나를 때리거나 큰아이가 동생을 때린다든지, 돈을 떨어뜨려서 잃는다든지, 이런저런 몸짓은 ‘잘못’일 수 있으나 ‘아무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무엇을 알면서 어떤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저희 나름대로 부아가 나서 일부로 돌을 뻥 차다가 유리가 깨지더라도 이를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탓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더욱 따스하고 너그럽게 아끼면서 돌보지 못한 ‘어른(어버이) 탓’을 할 만한데, 어른(어버이) 탓도 굳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유리가 깨졌구나, 유리가 깨졌으면 갈면 되지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방바닥에 물을 가득 쏟았으면 물을 가득 쏟았구나, 물을 가득 쏟았으면 신나게 치우면 되지 하고 여길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배웁니다. 다만,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온갖 일’을 스스로 겪으면서 배웁니다.



신경숙은 1980년대의 민중가요, 정확하게는 민중문학이 사람을 ‘억압’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1980년대 문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그녀의 소설은 둥지를 틀고 있다 … 〈딸기밭〉 말미의 각주에는 본문 중 ‘유’의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의 출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소설이 처음 발표될 때는 이런 문구조차 없었다. 신경숙이 남의 글에서 멋있는 부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따온 것이 문제가 생기자 책으로 낼 때야 밝힌 것이다. (13, 26쪽)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이 다른 사람 글을 훔쳤다(표절)는 이야기가 2015년에 크게 불거집니다. 이 이야기는 열 몇 해 앞서부터 불거졌다고 하지만, 그동안 한국 사회에 ‘터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학인이나 비평가 가운데 이를 따지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다고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모르는 척 넘어간다든지 여러 출판사와 언론사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든지 아예 꾹 눌러서 감추려고 했답니다.


  2015년에 신경숙 님 표절문학을 말하는 분들은 ‘문단권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단권력 이야기도 요즈음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꽤 예전부터 문학인과 비평인 사이에서 오르내린 이야기입니다. 요즈막에는 ‘문학인 아닌 일반 독자’까지 이를 느낄 만큼 말썽이 터졌을 뿐입니다.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이녁이 한 일은 얼마나 ‘잘못’일까요? 다른 사람이 쓴 글이나 책을 ‘있는 힘껏 옮겨쓰기(필사)를 하면서 글솜씨(문장실력)를 키우려고 했던 몸짓’은 어느 만큼 ‘잘못’이라고 할 만할까요?


  어린이문학에서 이원수나 권정생을 사랑하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린이문학을 하는 어른이 된다면, 어릴 적부터 즐겨읽고 사랑한 ‘옛 작가’ 글투하고 사뭇 닮거나 비슷한 느낌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이 감돌면 ‘새로운 젊은 작가’를 두고 ‘아무개 작가 흐름을 이어받는다’고 말하지요. 어른문학에서도 이 같은 결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신경숙 소설문학을 놓고 ‘미시마 유키오를 이어받은 작품’을 선보였다고도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미시마 유키오를 이어받은 작품’을 쓴다는 말을 반길 만할까요? 아니면 이러한 문학길은 아니라고 할 만할까요? 이때에 신경숙 소설문학은 ‘누군가를 이어받은 문학길’이 아닌 ‘표절을 저지른 문학길’이라고 따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쓴 글이나 책에서 많이 배운 숨결이나 글멋을 제 나름대로 삭힌 새로운 글이 아니라 한다면, ‘베낀 글’이나 ‘훔친 글’일 테니까요.




신경숙이 어떤 연유로 군국주의를 한껏 미화한 소설의 인물들을 비판 없이 따왔는지 참으로 괴이쩍은데 … 신경숙이 견고한 작품 세계를 갖춘 작가라도 표절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을까? 또 문단이 실력보다 무늬가 큰 작가를 자기네 취향과 상품성을 고려하여 띄워 준 점이 과연 표절을 낳은 요인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 신경숙이 표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도 허약한 그녀의 내면이 밟아 갈 수순이었다. (30, 31, 32쪽)



  2015년 여름에 이응준 님이 ‘신경숙 표절 문제’를 인터넷신문 한 곳에 올렸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깃거리는 아니지만, 그동안 아주 조용하게 파묻히다시피 하던 말썽거리가 비로소 널리 알려졌습니다.


  정문순 님이 쓴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거짓말》(작가와비평,2011)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문학인 신경숙’ 님이 어떤 표절을 얼마나 했고, 표절하는 문학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내는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응준 님이 2015년에 따지기 앞서, 정문순 님은 2011년에 비평집을 내놓았고, 이 비평집에 실은 글(신경숙 표절 비판)도 2000년에 선보였습니다.



은희경이나 공지영을 포함하여 상품성이 뛰어난 작가로 떠올랐던 이들의 작품에서도 통념에 대한 거부나 사회 변화에 대한 소망을 읽어내기는 매우 어렵다. 시장과 문단이 원하는 소설은 중산층의 안일한 욕망에 부합하는 작품이면 족했다. 그러나 문학이 잘 팔리는 데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은 드물었다. (47쪽)


불행히도 기존의 평론 중에는 천운영 서사의 특이한 소재에 압도되어, 작품을 비평하기보다 글쓴이 자신이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급급하거나, 서사의 이면에 도사린 세계를 읽어내지 못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99쪽)



  문학비평 《한국문학의 거짓말》을 들여다보면 ‘신경숙 표절 비판’만 있지 않습니다. ‘조경란 표절 비판’도 이 책에 함께 나옵니다.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이웃나라 일본’에서 문학을 하던 다른 사람 글을 훔쳤고, 소설을 쓰는 조경란 님은 ‘같은 나라 한국’에서 문학을 하던 다른 사람(신인 작가, 또는 미등단 작가) 글을 훔쳤다고 합니다.


  평론가 정문순 님은 “한국문학의 거짓말”이라는 이름을 이녁 평론집에 붙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거짓말을 일삼아도 거짓말이 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책만 신나게 잘 팔아’서, 한국에서 온갖 문학상을 타고 ‘문학상 심사위원’까지 맡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니, 게다가 이런 모습을 비평하는 글을 꾸준히 써도 하나도 안 바로잡히는 한국문학을 쳐다보아야 하니,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답답할까 싶습니다. 아니, 한국문학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허술하거나 바보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만하니, ‘노벨문학상을 노릴 만한 때가 되었다’ 같은 말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표절 논란 작품’이든 ‘표절 확정 작품’이든 ‘표절 비판’을 받을 적에 출판사와 문단권력은 무엇을 했을까요? 《한국문학의 거짓말》이라는 평론집에도 잘 나옵니다만, ‘인기작가 책을 펴낸 출판사’하고 ‘한국에서 이름난 어르신 작가 자리에 선 문단권력’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입을 다물기만 했습니다.



공지영이 정말 말하고 싶은 건 역사상의 한 시대가 아니다. 그가 그 시대에 집착하고 매달릴수록 젊은 날 한때 떵떵거리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청춘을 바친 자기 세대를 특권화하고 싶은 욕망과 함께 남들이 자신들을 몰라줄 것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감을 숨기지는 못한다. (130∼131쪽)



  한국문학은 왜 거짓말을 일삼는 권력이 되었을까요? 한국문학은 왜 참말을 널리 나누는 문화하고 멀어질까요? 한국문학은 왜 거짓말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한국문학은 왜 참다운 넋을 북돋우는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지 못할까요?


  돈 때문일까요? 이름값 때문일까요? 권력 때문일까요? 아마 이 세 가지 모두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이문열 자신이 아무리 수구 보수세력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들, 그가 정치를 챙기느라 소외시켜 버린 소설은 되레 그의 정치평론이 가리는 본색을 들추어낼 수밖에 없다. (268쪽)



  글을 쓰는 사람은 돈을 벌려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문학상을 타려고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갈래를 보아도 이와 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사진작가)은 돈을 벌려고 사진을 찍을까요? 사진작가는 사진상을 타려고 사진작품을 선보이거나 전시회를 열까요?


  한국 사진계를 돌아보면, 널리 이름난 사진상조차 ‘사진계 중견끼리 나누어 받기’를 벌인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한국 사진계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제대로 비평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문학에는 문단권력이 있다면, 사진계에는 ‘사단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진계에서 ‘중견끼리 나눠 받는 사진상 논란’은 사진잡지 《포토닷》에서 2015년 7월호에서 공식으로 처음 다루었고(‘최민식 사진상’ 논란), 2015년 7월 24∼26일에 벌어진 ‘동강사진축제’ 워크샵에서 여러 사진비평가가 낱낱이 다루었습니다.


  사진과 문학을 견주어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본다면, 사진에서도 ‘표절 논란’이 무척 잦습니다. 외국 작가가 선보인 작품을 한국 작가가 슬그머니 흉내내어 찍은 뒤 사진공모전 같은 곳에서 상을 받는 일이 흔합니다. 이러다가 수상 취소가 되기도 하지요.


  글이나 사진을 ‘창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똑같거나 비슷한 작품을 선보일까요? ‘창작하는 사람’은 왜 ‘창작’이 아닌 ‘흉내내기’나 ‘베끼기’를 해야 할까요? 아름답거나 멋진 글을 옮겨쓰기(필사)를 해 보아야 글솜씨가 늘어날까요? 아름답거나 멋진 사진을 똑같이 흉내내어 찍어 보아야 사진솜씨가 늘어날까요? 옮겨쓰기나 흉내내기를 하는 동안 ‘작가 스스로 깨닫지 않는 사이에 훔치기’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나중에는 ‘여느 독자가 이 대목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품으면서 ‘슬그머니 훔치기’를 하지는 않을까요?




두 작품 〈혀〉(주이란)와 《혀》(조경란,문학동네,2007)는 여러모로 유사하다. 조경란은 둘이 별개라고 강하게 반발하지만, 이는 어느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닮았다는 것이 표절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베끼지 않는 한 대개의 표절작은 베낀 것과 닮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274쪽)


조경란의 책 뒷표지에는 “사랑하고, 거짓말하고, 맛보는 혀”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이것은 주이란의 소설을 정확히 세 마디로 축약한 문구일 뿐, 조경란의 소설과는 틈새 없이 맞물리지 않는다. (279쪽)



  한국문단에 권력이 없다면, 표절 같은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문학을 아끼는 독자가 ‘우상 섬기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인기작가 자리에 들어선 이들이 섣불리 표절 같은 글쓰기를 안 하리라 느낍니다.


  문단권력은 독자를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문단권력은 권력을 더 키워서 장사(상품 팔기, 다시 말하자면 ‘책 팔기’)를 신나게 할 생각일 뿐입니다. 독자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인기작가는 표절을 조용히 저지르고, 문단권력은 이를 눙치거나 못 본 척합니다.


  인기작가이든 기성작가이든 원로작가이든, 참말 ‘작가’라 한다면, ‘창작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한다면, 이들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고, ‘내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느 시인이 외친 말마따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몸짓이 없도록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 글투를 흉내내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필사 아닌 창작’을 하는 몸짓이어야 합니다.


  내 글을 읽어 주는 수많은 사람이 바로 ‘이웃’이요 ‘동무’인 줄 가슴 깊이 깨달아야지요. 이웃한테 읽힐 글을 ‘훔친 글(표절)’로 건넬 생각은 아니겠지요? 더 생각해 본다면, 내가 쓴 모든 글을 ‘아이한테 물려주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마 아이한테 ‘훔친 글’을 물려줄 마음은 아니겠지요?



만약 섬에 사는 사람이 서울을 경이롭고 낯선 세계로 다룬다면 응당 촌스럽다는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도시 사람이 지방을 다루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보고 듣는 것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촌스러움은 역사와 현실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태도와 연결되기도 한다. (312쪽)



  평론집 《한국문학의 거짓말》은 한국문단이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저지른 슬픈 모습을 찬찬히 따지고 나무랍니다. 여기에 숱한 기성작가와 인기작가가 시장 논리에 얽매여 ‘아름다운 문학’이 아닌 ‘팔리는 문학’에 기울어진 대목을 낱낱이 짚고 꾸짖습니다.


  ‘잘 팔리는 문학’이 나쁘다거나 잘못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잘 팔리는 문학은 잘 팔리는 문학일 뿐, ‘아름다운 문학’이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잘 팔리면서 아름다운 문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문학일 때에 나중에 잘 팔리는 문학이 되어도 아름다운 숨결을 잇습니다. 처음부터 잘 팔리기만 하는 문학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겉치레와 껍데기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은 ‘멋진 글’이나 ‘빼어난 작품’을 선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 스스로 ‘아름다운 삶’으로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 되면, 독자는 이내 이러한 글을 알아봅니다. 독자가 재빠르게 알아볼 수도 있고, 독자가 알아보기까지 여러 해가 걸리거나, 때로는 백 해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문학을 하는 사람, 창작을 하는 사람)은 ‘잘 팔릴 만한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오직 ‘글(창작)’을 쓰는 사람입니다. 온 넋을 기울여 아름다운 꿈을 사랑스레 빚어서 글로 선보이는 사람이 바로 ‘작가’입니다.


  작가는 연예인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며 대통령이나 기자도 아닙니다. 작가는 언제나 작가입니다. “짓는 사람”은 이웃한테서 배우고, 나무와 꽃한테서 배웁니다. “짓는 사람”은 아이한테서도 배우고, 하늘과 우주한테서도 배웁니다. “짓는 사람”은 너른 마음으로 기쁘게 배운 뒤에 ‘새로운 이야기를 짓’습니다. “짓는 사람”은 “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짓는 사람”은 삶과 꿈과 사랑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칼의 노래》와 《검은 꽃》이 독자의 인식적 지평을 넓혀 주거나 무언가 깨달음을 줄 만한 대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를 푸념하는 통속적인 수준의 소설로도 평단의 주목과 독자의 환호를 받는 것이 오늘날 한국문학의 현실이다. (336쪽)



  ‘표절 논란’이 불거진 뒤에도 문단권력은 바뀌지 않습니다. 문단권력이나 상업 출판사가 바뀐 모습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주 단단하고 무시무시한 쇠밥그릇입니다. 표절 논란이 조용히 잊혀지는 이즈음에도 ‘표절 작가 책’은 잘 팔립니다. 아무래도 문단권력과 상업 출판사는 이 대목을 노리겠지요. 지난 2000년부터 ‘표절 비판’이 있어도 이를 모르쇠로 넘어온 까닭은, 2015년에 아주 크게 표절 비판이 일어도 꿈쩍하지 않는 까닭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인기작가 상품’은 잘 팔려서 돈이 됩니다.


  “훔친 글”로 돈을 잘 벌고 이름값하고 권력도 그대로 이어가는 모습을 이 나라 아이들과 젊은 작가들이 고스란히 지켜봅니다. 문단권력 어르신하고 인기작가 어른들은 아이들과 젊은 작가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셈일까요? 참말이 없는 문단권력은 돈만 잘 법니다. 4348.7.3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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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포로 - 송관호 6.25전쟁 수기
송관호 지음, 김종운 정리 / 눈빛 / 201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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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기 삶읽기 195



국가권력에 포로가 된 젊은이

― 전쟁포로, 송관호 6·25전쟁 수기

 송관호 글

 김종운 정리

 눈빛 펴냄, 2015.6.25. 13000원



  일제강점기에서 벗어난 지 얼마 안 되어 한겨레는 남녘과 북녘으로 갈린 채 서로 죽이고 죽는 싸움을 벌였습니다. 한국은 그저 한국일 뿐이지만,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미국과 소련이라고 하는 커다란 나라를 등에 업고서 반으로 쪼개지는 길을 가고야 말았습니다. 한국이라는 나라가 남·북녘으로 쪼개지기를 바라지 않던 독립운동가는 해방 뒤에 하나둘 총에 맞아 숨을 거두어야 했고, 남녘과 북녘에서 저마다 정치권력을 거머쥔 이들은 이녁 힘을 더욱 키우려고 끝없이 숙청을 일삼았습니다. 이리하여 남녘하고 북녘은 ‘사회 얼거리’하고 ‘정치 틀’이 사뭇 다르다고 하는 두 나라가 됩니다.


  그런데, 아무리 ‘한 나라’가 ‘두 나라’가 되었다고 하더라도, 두 나라를 이룬 ‘여느 사람(일반 시민)’은 정치 틀이나 사회 얼거리를 따지지 않습니다. 1940∼50년대만 하더라도 남녘과 북녘은 거의 모든 사람이 시골에서 흙을 일구었습니다. 흙을 일구는 사람한테는 민주주의나 공산주의나 사회주의나 자본주의 같은 말이 살갗에 와닿지 않습니다. 그저 한겨레이고, 이웃입니다. 남녘에서 군대로 끌려가거나 북녘에서 군대로 끌려간 사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남녘 군인이니 북녘에 있는 한겨레하고 이웃을 ‘죽여도 될 만한 놈’으로 여겼을까요? 북녘 군인이니 남녘에 있는 한겨레하고 이웃을 ‘하루아침에 나쁜 놈’으로 바라보았을까요?



행군 도중 우리 일행 다섯은 하도 배가 고파서 길가 무밭에서 무를 뽑아 먹었다. 그런데 갑자기 적기가 나타나 기총사격을 해 왔다. 우리 모두는 재빨리 밭두렁에 엎드려 꼼짝도 않고 죽은 체하였다. (55쪽)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인민군 전사들이 차에 치어 신음하는 부상병을 치료하기는커녕 바로 그 자리에서 총창으로 찔러 죽이는 것이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행군을 재촉하여 원산 방향으로 전투를 하러 간다고 하였다. 나는 처음에는 아군이 아군을 죽이는 모습에 영문을 몰라 어리둥절하였다. 이유를 들어 본즉 사랑하는 전우이지만 중상을 당한 그들을 후방으로 후송할 시간도 없고, 그렇다고 놔두면 적군에게 포로가 될 것이므로 불가피하게 죽인 것이라고 했다. (57쪽)



  송관호 님이 남긴 글을 갈무리해서 책으로 묶은 《전쟁포로》(눈빛,2015)를 읽으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북녘 시골마을에서 태어난 송관호 님은 북녘에서 인민군으로 끌려갔다가 몸이 튼튼하지 않아서 싸움터로 나가지는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끝내 고향으로는 돌아가지 못하고 ‘북진하는 남녘 군인’한테 붙잡혀서 포로가 됩니다.


  포로가 된 송관호 님은 실컷 두들겨맞은 뒤 부산으로 갔고, 부산에서 거제도로 옮겨서 ‘포로 스스로’ 포로수용소를 짓는 일을 합니다. 포로수용소에서 전쟁이 끝나는 날을 맞이하고 난 뒤에는 북녘 고향으로 가지 않고 남녘에 남습니다. 북녘에서 다른 인민군이 동료 인민군을 아무렇지 않게 죽이는 모습을 보고는, 또 포로수용소에서 지내는 동안 포로 스스로 좌익하고 우익으로 갈려서 서로 괴롭히거나 죽이는 모습을 보면서, 도무지 북녘 고향집으로 갈 엄두를 못 냅니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남녘에서 어쨌든 살아남자고 생각합니다.



하루는 피난민 하나가 산으로 오르다가 우리를 보고 말했다. “아래서는 치안대가 애국자를 죽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악질 행동을 저지르고 있어요. 지금 위대한 애국투사들이, 혁명가들이 죽어 가고 있어요. 나도 죽을 걸 피해 간신히 도망쳐 있어요.” 그는 치를 떨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인민군이었던 나도 살아날 수 있을까?’ 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87쪽)


나는 난생 처음으로 그곳에서 한국군과 헌병을 보았는데 여기저기서 개머리판이 마구 날아와 사정없이 온몸을 후려쳤다. 개머리판에 이어 총구로도 찔렀다. 얼마나 아픈지 처음에는 입이 딱 벌어져 비명도 나오지 않았다 … 귀순하면 국군이 환대해 줄로만 알았지, 이렇게 죽어라 매타작을 할 줄은 전혀 몰랐다. (91, 92쪽)



  전쟁수기인 《전쟁포로》에 나오는 이야기는 역사책에 한 줄로도 안 나옵니다. 역사책은 송관호 님 같은 사람이 쓰지 않기 때문입니다. 역사책은 여러 지식인이 여러 자료와 책을 바탕으로 쓰기 때문입니다.


  전쟁수기 《전쟁포로》에 나오는 이야기는 ‘정치권력하고는 한 번도 줄이 닿은 적 없는 여느 사람’인 송관호 님이 한국전쟁 싸움터에서 기적처럼 살아남고, 또 인민군과 국군으로 지내야 하면서도 놀랍게 살아남은 뒤, 이녁 스스로 이 이야기를 남겨야겠구나 하고 느껴서 혼자서 남긴 글입니다. 책으로 나올는지 안 나올는지 모르지만, 아무튼 남긴 글입니다. 그래서 《전쟁포로》를 읽다 보면, 남녘이나 북녘이 서로 똑같이 ‘이념에 휩쓸려서 사람다운 삶을 잃거나 놓친 대목’을 찬찬히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서로 ‘이웃’으로 바라보지 않으니 죽이려고 합니다. 서로 ‘적’으로 바라보니까 온갖 욕지꺼리를 늘어놓으면서 두들겨패려고 합니다.


  북녘 군인은 북녘 군인대로 남녘 군인을 죽이려 합니다. 남녘 군인은 남녘 군인대로 북녘 군인을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서로 군인옷을 벗고 마주하면 ‘똑같은 한겨레’입니다. 이름을 트고 고향을 묻다 보면, 서로 알 만한 사이입니다. 군인옷을 입은 채 서로 적으로 마주해야 하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채 살인’을 저질러야 합니다. 아름다운 삶이 아니라 슬픈 벼랑으로 굴러떨어져야 합니다.



북으로 간 친구들의 대부분은 공산주의가 좋아서 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가족이 그리워서 북으로 간 것이었다. 나는 마음속으로 이남에 남기로 한 것을 참 잘했다고 생각하였다. 북으로 송환되더라도 “포로가 되어 얼마나 고생이 많았소” 하고 위로하며 우릴 가족의 품으로 절대 돌려보내 주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167쪽)


나는 그때까지만 해도 인민군이 무력이 강하고 사상이 강해 모든 면에서 국군보다 우월하여 초기에 남진을 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무슨 말이냐고 반문을 했다. 강대국은 약소국의 민족성을 말살하고 나라를 예속시키기 위해 동족 간에 사상 싸움을 일으키어 전쟁이 나게 한 후 쌍방을 강대국에게 예숙시켜 민족주의 애국자를 제거하고 자기 앞잡이들을 내세워 정권을 잡게 한 후 그를 지원하면서 동족을 죽이는 데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숙청하여 분단을 영원하게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강대국의 속성이라는 것이다. (180쪽)



  한국이라는 나라가 둘로 갈라져야 할 까닭은 없습니다. 그러나 한국이라는 나라는 그만 둘로 갈라졌습니다. 둘로 갈라지는 동안, 남·북녘(이 아닌 그냥 한국)에서 저마다 씩씩하고 훌륭히 독립운동을 펼치다가 해방공간에서 참다운 평화를 바라던 이들은 하나씩 이슬처럼 사라집니다.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독재정치가 이루어집니다. 남녘에서도 북녘에서도 군사주의가 하늘로 치솟으면서 군대만 얄궂게 커집니다.


  《전쟁포로》를 쓴 송관호 님은 ‘국가권력에 포로가 된 젊은이’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저 ‘한국사람’일 뿐이고, ‘한겨레’일 뿐이지만, ‘전쟁포로’라고 하는 뜬금없는 이름을 얻어야 하던 슬픈 나라에서 살아야 하는 사람입니다.


  이리하여, 이 나라에는 ‘전쟁영웅’이라고 하는 여러모로 안타까운 사람이 함께 생겨야 합니다. 적군을 많이 죽인 이를 가리켜 전쟁영웅이라고 하는데, 남·북녘이 서로 맞붙어서 죽이고 죽인 ‘적군’이란 누구였을까요? 바로 우리 이웃이요 한겨레입니다. 국가권력이나 정치권력은 남녘이나 북녘으로 갈라져서 저마다 다른 정치나 사회인 듯이 내세웠지만, 막상 남녘하고 북녘에서 살던 여느 사람들은 민주주의자도 공산주의자도 아닙니다. 정치 틀이 이렇다고 해서 사람까지 그렇게 달라질 수 없습니다. 사회 얼거리가 저렇다고 해서 사람까지 다르게 볼 수 없습니다.



나는 거기(전남 해남 시골마을)서 추석을 맞이했다. 주민들이 모처럼 좋은 음식을 차려 단정한 옷을 입고 제사를 지내는 것을 보았는데, 불과 삼사 년 전에 좌익 또는 우익으로 몰려 무더기로 죽은 사람들 제사를 함께 지내는 것이었다. 유족들이 서로 천추의 한을 품고 원수 대하듯 할 만도 한데, 서로 반목하지 않고 다정히 정을 나누는 것을 보고 한편으로는 ‘아, 저렇게 순진하고 착한 농민들을 어째서 전쟁 따위로 서로 죽게 하였단 말인가?’ 하고 시절을 원망했다. (209쪽)


우리 중대는 “대통령에게 이 박사를 찍어 줘라”라는 지시로 대부분 이승만에게 투표를 했다. 후에 다른 중대가 투표하러 내려왔다가 다 끝났으니 돌아가라고 해서 투표도 못하고 그냥 올라갔다. 알고 보니 표를 다 이승만을 지지하는 것으로 찍어 놓고 올라가라고 한 것이었다. 결국 이승만 대통령이 조봉암 후보를 물리치고 제3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90쪽)



  《전쟁포로》 끝자락을 보면, 1950년대 부정선거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1990년대 부정선거 이야기를 떠올립니다. 어떤 부정선거인가 하면, 나는 1997년 12월 31일에 군대에서 전역을 했는데, 바로 이무렵 1997년에 대통령선거를 했습니다. 내가 군대에 있을 적에 군인은 ‘군 부재자 선거’를 했습니다. 그런데, 군 부재자 선거를 어떻게 했느냐 하면, 비무장지대에 있던 부대마다 ‘휴지상자’를 ‘투표함’으로 만들어서 했습니다. 소초마다 빈 휴지상자를 하얀 종이로 감싸서 구멍을 냈고, 철책에 있던 군인들은 ‘투표용지’를 이 휴지상자에 넣었습니다. 그러고는 이 휴지상자를 중대본부에서 거두었고, 행정보급관이 모아서 이녁 자가용에 싣고 대대로 가져갔지요. 대대에서는 또 이렇게 ‘부대마다 휴지상자로 만들어서 투표용지를 모은 투표함’을 모아서 연대로 가져가고요.


  ‘휴지상자 투표함’은 선거관리위원회에 제대로 건넸을까요? ‘휴지상자 투표함’에 담긴 투표용지는 처음부터 ‘제대로 된 투표용지’였을까요?


  평화를 바라지 않은 국가권력은 전쟁을 일으켰습니다. 민주를 생각하지 않는 정치권력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평화로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포로가 된 사람도, 영웅으로 훈장을 얻은 사람도, 희생이 된 사람도, 모두 우리 이웃입니다. 한겨레는 서로 아낄 이웃이지, 서로 적이 되어 싸워야 할 사람이 아닙니다. 이제 한국 사회부터 평화와 민주가 자라서, 지구별 어디에서나 아름다운 삶을 일굴 수 있기를 빕니다. 4348.7.22.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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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지음, 김경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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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뜻한 삶읽기, 인문책 117



나는 왜 골짜기에서 한나 아렌트를 읽는가?

―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

 나카마사 마사키 글

 김경원 옮김

 갈라파고스 펴냄, 2015.7.3. 13000원



  나카마사 마사키 님이 쓴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갈라파고스,2015)를 읽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숲바람을 쐬면서 이 책을 읽습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골짜기로 마실을 간 뒤, 아이들하고 한동안 물놀이를 하고 나서, 조용히 물가로 나와서 손을 말린 다음에 천천히 읽습니다.


  아이들은 저희 아버지가 책을 읽건 말건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제 아이들은 저희끼리 신나게 놉니다. 몸을 담그면 이가 딱딱거릴 만큼 차가운 골짝물하고 하나가 된 아이들은 우리 말고는 아무도 없는 깊은 숲속 골짜기에서 노래하면서 웃습니다.


  골짜기에서 책을 읽는 내 팔뚝에 잠자리에 내려앉습니다. 나는 내 팔뚝에 앉은 잠자리를 보느라 책을 못 봅니다. 잠자리가 날아간 뒤에는 멧제비나비가 팔랑거리면서 눈앞을 맴돕니다. 이제 나는 제비춤을 보느라 책을 못 봅니다. 제비나비가 저만치 떠난 뒤에는 흰나비하고 노랑나비가 날아듭니다. 아무리 봐도 배추흰나비 같은데 이 깊은 골짜기까지 어인 일일까 싶어 고개를 갸우뚱합니다. 참말 나비를 쳐다보느라 책은 옆으로 밀어놓습니다.



한나 아렌트의 말로 짚어 보자면, 이해관계 때문에 ‘선’의 탐구를 내버리면 안 되고, 특정한 ‘선’의 관념에 지나치게 갇혀도 안 된다.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선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마음을 열고 계속 토의하는 것이 중요하다. (23쪽)


대중사회 안에서 지식인은 책을 쓰거나 강연을 하거나 ‘일반인’의 상담을 해 주면서, 다시 말해 세계적인 서사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지위를 확보했기 때문에 일반 대중 이상으로 알기 쉬운 서사에 민감하고, ‘시류에 편승하고 싶다’는 욕구에 말려들기 쉽다. (71쪽)



  2009년에 일본에서 처음 나온 《왜 지금 한나 아렌트를 읽어야 하는가?》는, 일본에서는 “지금이야말로 아렌트를 다시 읽어야 한다” 같은 이름이 붙었다고 합니다. ‘바로 오늘이야말로’ ‘다시 읽어야’ 한다는 한나 아렌트라고 한대요.


  골짜기에서 책읽기를 하는 내 모습을 돌아보면서 생각에 잠깁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낮에 땀을 뻘뻘 흘리면서 자전거를 몰아서 가파른 멧길을 넘습니다. 숨을 가쁘게 몰아쉬면서 ‘우리가 늘 노는 깊은 골짜기’에 닿으면, 자전거는 풀밭에 눕힙니다. 귀가 멍할 만큼 쩌렁쩌렁 울리는 물소리를 들으면서 땀을 씻고 웃옷을 빨래합니다. 볕이 잘 드는 넓적한 바위에 옷을 올려놓으면, 집으로 돌아갈 무렵 옷이 다 마릅니다.


  참말 나는 이 시골자락에서 한나 아렌트를 왜 다시 읽으려 하는가 하고 돌아봅니다. 씨앗 심기하고 나무 가꾸기하고 화덕 짓기 같은 책을 더 깊이 읽어야 할 노릇 아닌가 하고 되새깁니다. 그래도 씩씩하게 책을 넘깁니다. 글쓴이(일본 가나자와대학교 법학부 교수)는 한나 아렌트한테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엿봅니다. 글쓴이가 한나 아렌트를 일본에서 2009년에 ‘다시 읽자’고 말한 까닭은 바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 때문입니다. 이 책을 옮긴 분이나, 이 책을 한국에서 펴낸 출판사도, 2015년 오늘날 한국에서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다 함께 키우자는 마음이리라 느낍니다.



‘전체주의’는 전근대적 야만의 발현이 아니라, 도리어 서구사회의 근대화, 대중의 정치 참여가 이루어지는 대중민주주의 사회에서 기인하는 문제라고 본 것이다. (41쪽)


19세기의 제국은 종주국인 국민국가의 번영을 위한 식민지 지배 시스템이다. ‘제국’의 주체는 어디까지나 영국인, 프랑스인, 독일인, 네덜란드인 같은 ‘국민’이며, 그들은 식민지 사람들을 간단히 자기 편이라는 울타리 안에 넣어 주지 않는다. 그런 뜻에서 그것은 ‘동일성’의 원리에 기초한 폐쇄적인 제국이다. 더구나 이렇게 닫혀 있는 ‘제국’은 식민지를 경영하기 위해 본국에서 일자리를 얻지 못했거나 사회적으로 손해를 끼쳐 잉여인력으로 취급받는 사람을 동원한다. 이리하여 실업 문제 같은 국민의 사회적 불안을 해소함과 동시에 국민이 한 덩어리가 되어 해외에 진출하고 있다는 자신감을 고양시킬 수 있다. (56쪽)



  지식인뿐 아니라 여느 자리에서 삶을 짓는 모든 사람들은 ‘시류에 휩쓸리지’ 않아도 됩니다. 아니 ‘세상 흐름에 휘둘리면서’ 살아야 할 까닭이 없습니다. 우리는 누구나 ‘시사상식’을 알거나 외우거나 익혀야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저마다 ‘내 삶’을 제대로 바라보면서 알아야 합니다. 이를테면 ‘골든벨’ 같은 경연대회에서 1등을 할 만큼 지식이나 시사나 상식을 머릿속에 집어넣어야 하지 않습니다.


  괭이질을 할 줄 모르고, 호미질하고 낫질을 할 줄 모른다면, 씨앗을 심을 줄 모르고, 풀을 뽑을 줄 모르며, 나물을 무쳐서 먹을 줄 모르는데다가, 열매를 갈무리할 줄 모른다면, 수많은 시사상식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나무를 다룰 줄 모르고, 불을 피울 줄 모르며, 전기가 없을 적에 어떻게 살림을 꾸려야 하는가를 알지 못한다면, 온갖 지식은 어디에 쓸 수 있을까요?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분은 사람들이 ‘고인 지식’에 갇히지 않기를 바랐다고 느낍니다. 한나 아렌트를 우리가 다시 읽도록 도와주려고 하는 글쓴이(일본사람)하고 옮긴이(한국사람)는 지구별 사람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는 이웃이 되어, 생각을 깊이 가꾸고 눈썰미를 너르게 살찌우면서 아름답게 살아가기를 꿈꾼다고 느낍니다.



모든 사람에게 ‘시민’으로서 정치에 참가하고 선거 때 투표할 자격이 주어진다. 그렇게 되면 역설적으로, 이미 국내에서는 자유를 위한 투쟁이라는 긴장감이 사라진 결과, 정치를 남의 손에 맡겨도 괜찮다고 여기는 수동적인 사람들도 늘어난다. (60쪽)


공장의 컨베이어벨트에 올려놓은 상품처럼 자기 앞을 지나가는 살아 있는 인간을 대상으로 담담하게 작업할 수 있다는 말은, 물건을 다루는 자신도 기계의 부품처럼 되어버려 스스로의 머리로 생각하거나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함의한다. (73쪽)



  골짜기에 가면 더위를 생각하지 않습니다. 나무가 드리우는 그늘은 한 겹일 수 있고 여러 겹일 수 있습니다. 고작 나무 몇 그루가 한 겹으로 그늘을 드리워도 더위가 생각나지 않습니다.


  도시에서 건물이 만드는 그림자는 그늘이 되지 못합니다. 아무리 높은 건물이 있어서 햇볕을 가려 준들 시원하지 않습니다. 왜 그러할까요? 흙이 없고 풀이 없기 때문이에요. 숲에서는 흙이 볕을 빨아들입니다. 숲에서는 나무가 볕을 먹고 짙푸르게 자랍니다. 바람은 풀하고 나무 사이를 흐르면서 싱그러운 기운을 베풉니다.


  시골뿐 아니라 도시에서도 골짜기를 누릴 수 있다면, 도시에서 한밤에 불볕더위 때문에 잠을 못 이루는 일은 없으리라 느낍니다. 잠 못 이루는 불볕더위가 생기는 까닭은, ‘흙이 있고 풀하고 나무가 우거진 숲’과 같은 싱그러운 터전이 없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햇볕을 기쁘게 받아들여서 무럭무럭 자라는 풀이나 나무가 없으니 복사열이 고스란히 도시 한복판에 갇혀서, 에어컨이나 선풍기로는 도무지 더위를 잠재우지 못합니다.


  발전소를 지어서 전기를 많이 쓸 수 있는 사회가 되어 도시를 에어컨으로 식힐 수 있어야 여름이 시원하지 않습니다. 발전소를 지을 돈으로 도시 한복판에 있는 ‘금싸라기 땅’을 사들여서 너른 숲으로 가꿀 수 있을 때에 도시에서도 즐겁고 시원한 여름을 누립니다.



‘인간성’을 갖추기 위해서는 ‘자유 공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한나 아렌트는 자유 공간을 파괴하고 ‘복수성’을 쇠퇴시키는 사상에 강하게 저항한다 … 일견 ‘자유주의적’으로 보이는 사상에 대해서도 ‘행위’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고 공화주의적 정신을 정체시키는 측면은 가차 없이 비판한다. (143쪽)


‘공감’을 ‘정치’의 무대 위로 끌고 들어오면 자신들과 똑같이 공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에 대해 관용이 없어지는 한편, ‘사이’를 두고 논의할 수 없게 된다. (153쪽)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골짜기를 오가면서 생각합니다. 자동차가 한 대조차 안 다니는 논둑길하고 숲길을 자전거로 다니자면 싱싱 내달리지 못합니다.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운 어버이가 자전거를 싱싱 달릴 까닭도 없습니다.


  도시에서도 여느 어버이가 아이들을 자전거에 태워서 느긋하게 달릴 만한 자리가 넉넉하다면, 굳이 자가용을 몰아야 하지 않습니다. 버스나 전철도 나쁘지 않지만, 바람을 가르면서 한들한들 달리면서 함께 이야기하고 노래할 수 있는 자전거마실은 아이와 어버이 모두한테 기쁘리라 느껴요.


  어쩌면 꿈 같을는지 모르나, 버스전용차선이 아닌 ‘자전거만 달릴 수 있는 찻길’이 도시 한복판에 있다면 어떻게 될까요? 자동차는 그만큼 훨씬 줄어야겠지요? 골목길에는 자동차를 세울(주차) 수 없도록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아이들은 골목에서도 마음껏 놀 수 있고, 어른들은 골목에 평상을 놓고 도란도란 이야기꽃을 피우면서 삶을 누릴 만하겠지요.



한나 아렌트는 ‘관객 = 관찰자’가 지금 ‘행위’하는 사람들보다 사태를 ‘공평하게’ 볼 수 있다는 것을 연극의 메타포를 통해 설명한다. 연극에서 자신이 연기하는 역할과 일체화되어 있는 배우는 이야기의 흐름을 자기 역할의 입장에서 부분적으로밖에 볼 수 없다. 그러나 ‘관객’은 이야기 속에서 특정한 역할을 맡지 않고 연극 전체를 바깥쪽에서 보기 때문에 이야기의 맥락 전체를 조망하면서 극 속에서 일어나는 개개의 사건을 비역할적으로, 즉 공평하게 평가할 수 있다. (237쪽)


‘현장을 아는 사람의 목소리’를 거스르면 안 된다는 풍조가 강해진다면 (그 문제에 관련하여 무척 전문적인 지식을 가진 사람까지 포함하여) 방관자는 발언할 자격도 없다는 말이 된다. 이래서야 ‘정치’의 ‘복수성’을 유지하기 어려워진다. (240쪽)



  문화나 복지는 꼭 돈을 들여야 이룰 수 있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아름다운 삶으로 가는 길은 돈이 많아야만 즐긴다고 느끼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를 왜 다시 읽어야 할까요?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지식인’을 알아야 하기 때문에 한나 아렌트를 다시 읽지 않습니다. 한나 아렌트라고 하는 ‘사람’이 ‘사람으로서’ 너와 내가 서로 아끼고 보듬을 줄 아는 ‘사랑’을 가꾸는 길에 이바지할 수 있는 ‘깊은 생각’하고 ‘너른 눈썰미’를 ‘정치철학’이라고 하는 틀거리로 마련해서 책으로 썼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아버지 골짜기에 언제 가요?” 하고 묻습니다. 낮 한 시 반에 자전거 타고 가기로 했는데, 그만 두 시가 넘습니다. 아이들한테 미안합니다. 얼른 가자고 하면서, 아이들더러 갈아입을 옷을 스스로 챙기도록 합니다. 한나 아렌트 이야기를 마저 읽고 덮습니다. 오늘은 골짝마실을 가면서 다른 책 한 권을 챙기려 합니다. 이 깊고 고즈넉한 시골자락에서 살면서 나 스스로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꿈을 키우는 보금자리에서 길동무가 될 어여쁜 책 하나를 가방에 꾸리려 합니다. 골짜기에 닿으면 먼저 삼십 분 동안 아이들하고 물놀이를 즐긴 뒤, 삼십 분 동안 조용히 책을 읽고, 다시 삼십 분 동안 물놀이를 즐기고는 집으로 돌아와야지요. 4348.7.16.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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