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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한도숙 지음 / 민중의소리 / 2015년 7월
평점 :
품절
책읽기 삶읽기 198
농사꾼은 없이 ‘맛집·쉐프’만 있는 한국
―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
한도숙 글
민중의소리 펴냄, 2015.7.3. 15000원
우리 집 꽃밭에 맥문동이 보라빛 꽃송이를 터뜨린 지 열흘쯤 됩니다. 작은아이는 마당에서 놀 적마다 “보라 꽃이 피었네?” 하고 말하면서 고개를 가만히 숙여서 들여다봅니다. 한여름에 피어나는 맥문동 보라빛 꽃송이는 새삼스럽도록 시원합니다. 그런데 맥문동 꽃송이를 가만히 들여다보면 꽃송이 한복판에 노란 무늬처럼 꽃가루가 있어요. 먼발치에서는 안 보이지만 코앞에서 들여다보면 알아볼 수 있습니다. 벌이나 나비가 찾아들어서 이 노란 꽃가루를 살살 건드려서 암술이랑 수술이 만나도록 하면, 맥문동도 열매를 맺을 수 있습니다.
황금 들녘이 점점 좁아져 간다. 들판은 풍년인데 농심은 흉흉하다. 정부의 거짓말에 넌더리가 난단다. 언제나 관료 권력은 거짓으로 점철했다. 알고도 속고 모르고도 속는 것이 농심이다. (36쪽)
구조적으로 근대농업은 자본의 수탈을 허용하는 방식으로 된 것이다. 보라, 농사를 짓는 농민보다도 농사 주변의 것들이 농사를 통해 이익을 보고 있지 않는가. 종자, 농약, 비료, 자재 어느 하나도 농민들이 직접 만들어 쓰지 못하는 구조가 되었다. 그러다 보니 친환경농업도 다르지 않다. 친환경 농약, 자재, 비료들이 생산되고 농민은 그저 그것을 소비하는 소비자가 되고 있다. (48쪽)
농민운동을 오랫동안 하셨다는 한도숙 님이 쓴 글을 묶은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민중의소리,2015)를 읽습니다. 630쪽을 웃도는 두툼한 글꾸러미를 찬찬히 돌아보면, 처음부터 끝까지 한목소리를 들려줍니다. 아무런 농사 정책이 없는 정부를 나무라고, 농사꾼을 옥죄거나 단물을 쪽쪽 빨기만 하는 농협을 꾸짖습니다.
한국에도 틀림없이 ‘농업을 다루는 부서’가 있습니다. 농림부장관이라든지 수많은 공무원이 있습니다. 그렇지만 정작 농사꾼을 헤아리는 정책은 없다시피 하다고 합니다. 왜 그러할까요?
농림부장관이 되는 분 가운데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은 없다고 할 만합니다. 농림부 공무원이 되는 분 가운데 농사꾼으로 살아온 사람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공무원 시험을 치러서 공무원이 될 뿐이니, 책이나 법전은 뒤적일 줄 알아도 땅을 살피거나 헤아릴 줄 모릅니다. 여러 가지 지식은 갖추었을지라도, 시골에서 흙을 부치며 살아온 사람들 마음을 읽거나 살피는 길은 모릅니다.
우리가 미신이라고 배운 것은 민족혼의 말살에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방 후 대한민국도 미신으로 규정하고 가르쳤다. 그러나 가만히 따져 보니 엄청난 철학과 실천이 그것(굿)을 통해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게 됐다. 우선은 하늘에 대한 경배의식이다. 하늘의 이치를 제대로 이해하고 거기에 따라 행동한다는 근신의 철학이다. (62쪽)
1980년 토종벌이 40만군이었던데 비해 작년에는 약 4만군으로 추정하고 있다. 30년 만에 10분의 1로 줄어든 것이다 … 꽃가루 매개충의 대표적인 벌이 없으면 과일과 곡류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 이는 인간의 먹거리에 치명적이다. 벌이 없어지는 이유는 다 아는 대로 농약 때문이다. (84∼85쪽)
시골 읍사무소나 면사무소에서 일하는 분들도 공무원 공부를 한 분들뿐입니다. 시골 군청에서 일하는 분들도 하나같이 공무원 공부를 한 분들뿐입니다. 흙 한 줌을 아끼거나 고깃배를 몰거나 나물을 캐면서 이 땅을 사랑하는 길을 걷다가 공무원이 된 사람은 거의 아무도 없다고 할 만합니다.
흙을 모르던 이들이 공무원이 되고 정치 일꾼이 되었기에 1970년대에는 새마을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풀 지붕’을 ‘슬레트 지붕’으로 바꾸었고, ‘흙 고샅’을 ‘시멘트 포장도로’로 바꾸었습니다. 요즈음은 ‘흙 도랑’을 ‘시멘트 도랑’으로 바꾸는 토목건설을 벌이고, 골짜기 바닥을 까뒤집어서 시멘트를 깔아 놓는가 하면, 깊디깊은 시골까지 샘물이 아닌 수돗물을 쓰도록 하는 토목건설을 벌입니다.
샘물은 ‘안전하지 않다’고 하면서 ‘수도물을 마시라’고 하는데, 정작 시골마을을 흐르는 샘물이 어떤 성분인지 살펴서 밝히는 공무원은 없습니다. 게다가 샘물이 안전하지 않다면, 수많은 대기업이 이 나라 땅과 바다를 파헤치면서 뽑아올리는 ‘먹는샘물’은 어떻게 값을 붙여서 페트병에 담아 가게에서 파는지 아리송한 노릇입니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먹는 모든 밥과 반찬은 ‘샘물과 빗물’에 기대어서 얻습니다. 벼농사도 밭농사도 모두 ‘땅밑을 흐르는 물’을 길어올려서 댑니다.
조선일보가 사설을 통해 쌀 생산을 더 이상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해 농민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농업에 대해 이런 막말을 할 수 있으려면 충분한 논거가 있어야 한다 … 논조인즉 운동장에 남아도는 쌀이 썩어 가고 있는데 보조금 줘 가며 쌀을 생산하는 것은 세금 낭비란 것이다. 대안으로 콩이나 잡곡 채소들로 대체하면 된다고 했다 … 이는 임모다. 분명. 정부는 올해도 700억 원 정도의 식용쌀 수입 예산을 책정하고 있다. (182∼183쪽)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를 쓴 한도숙 님은 ‘어려운 말’을 하지 않습니다. 쌀조차 자급률이 100퍼센트가 아닐 뿐 아니라 80퍼센트 언저리로 떨어지는 판에, 정부는 해마다 거의 천 억원에 이르는 돈을 들여서 다른 나라에서 쌀을 사들인다고 합니다. 한국에서 쌀이 모자라서 쌀을 사들이지 않습니다. 한국에 있는 시골지기를 하루 빨리 짓밟아 죽이려는 생각으로 쌀을 거의 천 억원에 이르는 세금을 들여서 사들입니다. 이렇게 외국 쌀을 사들이면 한국 쌀은 값이 ‘똥값’이 되지요. 그러니까 한국 정부는 한국이라는 나라 스스로 ‘식량자급’도 ‘식량안보’도 하나도 안 헤아리는 꼴이니, 적어도 이런 바보짓을 멈출 수 있어야 하지 않느냐는 목소리를 《고구마꽃이 피었습니다》라는 책을 빌어서 털어놓습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시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고 하더라도 아침부터 저녁까지 학교 공부만 하느라 막상 시골일을 모르는 이들이 도시로 가서 공무원이 되고 장관이 되며 법관이 되고 시장이나 군수가 됩니다. 고향이 시골이라고 해서 시골일을 알지 않습니다. 고향만 시골일 뿐, 시험공부만 하느라 모내기도 모르고 풀베기도 모르며 ‘나물로 삼는 풀’이나 ‘약으로 얻는 풀뿌리’를 하나도 모르기 마련입니다. 이런 정치 일꾼이나 공무원한테서 제대로 된 농사 정책이 나오기를 바라기는 대단히 어려울 만합니다.
그러니, 아예 생각이 없다면 아예 아무 정책이 없는 쪽이 훨씬 나을 수 있어요. 농협을 거쳐서 시골 농사꾼이 도시 소비자한테 쌀이나 푸성귀를 팔도록 하지 말고, 시골 농사꾼이 곧바로 도시 소비자한테 쌀이나 푸성귀를 팔면 됩니다. 농협은 농사꾼하고 소비자 사이에 서면서 ‘귓돈’만 신나게 떼며 배가 부르거든요. 농협이 가로챌 귓돈을 농사꾼이 받고, 도시 소비자는 ‘농협이 붙인 귓돈 바가지’를 쓰지 않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쉬운 것은 먹을거리가 어디서 나고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관심은 도통 없다는 것이다. 제 생명을 이어 주는 먹을거리가 음식점에 있고 돈을 주면 먹을 수 있다는 것을 알 뿐이다. 씨앗에서부터 물, 바람, 농부의 땀, 지렁이와 베짱이의 노랫소리가 음식재료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사라진 채 오늘 점심은 어쨌느니 저쨌느니 강평으로 재잘댄다. (246∼247쪽)
양복을 입은 관료들이 생각하는 것은 서양의 경쟁체제가 세상 모든 이치의 중심으로 보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농민들이 국민으로 보이지 않고 오로지 경제 대상으로만 보여, 어떻게 하면 경쟁에서 뒤떨어지는 농사를 퇴출시킬 것인가에 머리를 싸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03쪽)
오늘날 한국 사회를 보면, 농사꾼은 없이 ‘맛집·쉐프’만 있다고 할 만합니다. 우리 집에는 텔레비전을 들이지 않았으니 볼 일이 없습니다만, 이웃집이나 친척집에 찾아가면 으레 텔레비전을 볼 수 있습니다. 텔레비전에 흐르는 온갖 이야기 가운데 맛집 이야기나 요리사 이야기가 아주 많습니다. 어디에 가면 어떤 맛집이 있다는 이야기가 방송하고 인터넷에 넘칩니다. 어떤 솜씨를 부려서 어떻게 요리를 하면 훌륭하다는 요리사나 쉐프 이야기가 방송과 인터넷에 차고 흐릅니다.
맛집이나 쉐프는 으레 ‘깨끗한 식재료’를 말합니다. 유기농이라든지 친환경이라든지 자연식 같은 말도 요즈음 곳곳에서 흘러넘칩니다. 그런데, 정작 손수 땅을 일구어 ‘깨끗한 식재료’를 얻는 몸짓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손수 땅을 일구어 밥을 얻는 사람들 이야기는 방송에도 인터넷에도 없다시피 합니다.
농사꾼이 없이 무슨 ‘식재료’가 있을까요? ‘깨끗한 식재료’이건 ‘농약과 비료와 항생제에 절디전 식재료’이건, 농사꾼이 있어야 있습니다. 농사꾼 없는 맛집과 쉐프 이야기는 ‘도시 소비자’한테 어떤 이야기를 들려줄 만할까요? 이러한 방송과 인터넷이 우리 삶을 제대로 밝힐 수 있을까요? 정규직하고 비정규직을 갈라서 푸대접하는 사회 얼거리뿐 아니라 ‘농사꾼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는 사회 얼거리’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하지 않을까요?
지금이라도 대북지원을 시급해 재개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북에 동포들이 쌀이 모자라 전전긍긍하는 터에, 쌀이 남아 개사료 돼지사료로 쓰겠다는 것은 누구도 이해하기 어려운 일이다. 어떤 이유에서든 밥을 굶는 서러움이 없도록 하는 것은 하늘의 이치이기 때문이다. (421쪽)
농업 문제를 대하는 국민 다수의 의식도 마찬가지다. 자본시장에 농업을 맡기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며 그것을 확대, 재생산하는 데 여념이 없다. 또한 일부 농민들도 기업농을 통한 농업적 성공을 확신하면서 정부 정책을 쌍수를 들고 환영하는 조건반사적 반응에 할 말을 잃고 만다. (615쪽)
한국에서 쌀은 남아돌지 않습니다. 한국에서 쌀 자급률이 80퍼센트 언저리에서 맴돌다가 이제 끝없이 떨어질 텐데, 쌀을 뺀 곡식은 자급률이 아주 바닥을 칩니다. 시골지기는 돈이 안 된다고 여겨서 다른 농사는 안 짓는 흐름이고, 도시 소비자는 가게에 온갖 푸성귀가 골고루 있으니 그냥 골고루 사다 먹기만 합니다. 사람들이 맥주를 많이 마셔도 맥주에 쓰는 보리를 한국에서 거두지 못하고 외국에서 사들이기만 합니다. 빵에 쓰는 밀은 자급률이 1퍼센트도 안 됩니다. 이웃나라에서 한국에 밀을 하루라도 안 판다고 한다면 한국에 있는 모든 빵집이랑 피자집은 문을 닫아야 할 테지요.
거머리가 없어진 농사가 오래갈 수 없을 것이란 생각을 진즉에 하지 못했다. 거머리가 없어 논에 들어갈 때 맘이 놓이는 것에만 정신을 팔았다. 그러는 동안에 자본이라는 거머리에 둘러싸이고 있었다. 아무도 그런 사실을 알려고 안 했고 알지도 못했다. (143쪽)
맥문동꽃이 피는 요즈음은 까마중꽃도 함께 핍니다. 아니, 까마중꽃은 훨씬 일찍부터 피었습니다. 까마중은 아직 조그마한 풀포기일 적부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데,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으면서 키를 부쩍 키웁니다. 새까만 까마중알을 바지런히 훑어서 먹으면 까마중풀은 일 미터가 넘게까지 자라서 마치 나무처럼 되다가 한겨울로 접어들어 된서리가 내려야 비로소 숨을 거두고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주 조그맣고 하얀 까마중꽃은 사람이 손으로 하나하나 꽃가루받이를 해 줄 수 없습니다. 온갖 풀벌레와 개미와 진딧물과 딱정벌레와 무당벌레와 나비와 벌과 파리가 오가면서 꽃가루받이를 해 줍니다. 감꽃도 모과꽃도 탱자꽃도 모두 온갖 ‘숲이웃’이 꽃가루받이를 해 주어요.
이웃마을에 사는 여러 시골지기도 이웃입니다. 도시에 사는 수많은 사람도 이웃입니다. 그리고 들과 숲에서 조용조용 삶을 잇는 온갖 크고작은 목숨들도 이웃입니다. 저마다 사랑스러운 이웃입니다.
감자꽃이 피고 지면서 감자알이 굵고, 고추꽃이 피고 지어야 고추알이 붉으며, 오이꽃이 피고 지어야 오이알이 소담스럽습니다. 농업 정책을 맡는 공무원이 되는 분들은 해마다 ‘농활’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싶지만, 농활보다는 ‘농업 정책 공무원’ 스스로 텃밭을 일구면서 ‘밥이란 참말 무엇인지’ 스스로 몸으로 느껴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이러지 않고서야 시골 농사꾼이 등허리가 휘면서 농약에 찌들다가 쓸쓸히 숨을 거두어 마을이 하나둘 사라지는 흐름은 멈출 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4348.8.5.물.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책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