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거짓말 - 2000년대 초기 문학 환경에 대한 집중 조명
정문순 지음 / 작가와비평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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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말’이 없는 문단권력은 ‘돈만 잘 번’다

― 한국문학의 거짓말

 정문순 글

 작가와비평 펴냄, 2011.12.30. 17000원



  아이들은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다만,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으면 잘못이 아닙니다. 아이들이 매직으로 벽에다 그림을 그리든, 물잔이나 접시를 떨어뜨려서 깨뜨리든, 열매를 맺어야 할 꽃송이를 함부로 꺾는다든지, 작은아이가 누나를 때리거나 큰아이가 동생을 때린다든지, 돈을 떨어뜨려서 잃는다든지, 이런저런 몸짓은 ‘잘못’일 수 있으나 ‘아무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아이들은 무엇을 알면서 어떤 일을 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아이들이 저희 나름대로 부아가 나서 일부로 돌을 뻥 차다가 유리가 깨지더라도 이를 ‘잘못’이라고 여기면서 탓할 수 없습니다. 아이를 더욱 따스하고 너그럽게 아끼면서 돌보지 못한 ‘어른(어버이) 탓’을 할 만한데, 어른(어버이) 탓도 굳이 할 까닭이 없습니다. 유리가 깨졌구나, 유리가 깨졌으면 갈면 되지 하고 여길 수 있습니다. 방바닥에 물을 가득 쏟았으면 물을 가득 쏟았구나, 물을 가득 쏟았으면 신나게 치우면 되지 하고 여길 만합니다.


  어느 모로 본다면, 아이들은 잘못을 저지르면서 배웁니다. 다만, ‘잘못이라고 여기지 않는 온갖 일’을 스스로 겪으면서 배웁니다.



신경숙은 1980년대의 민중가요, 정확하게는 민중문학이 사람을 ‘억압’했다고 인식하고 있으며, 이러한 1980년대 문학에 대한 전면적 부정에서 그녀의 소설은 둥지를 틀고 있다 … 〈딸기밭〉 말미의 각주에는 본문 중 ‘유’의 어머니가 ‘나’에게 보낸 편지의 출처가 간략히 언급되어 있다. 소설이 처음 발표될 때는 이런 문구조차 없었다. 신경숙이 남의 글에서 멋있는 부분을 출처도 밝히지 않고 무단으로 따온 것이 문제가 생기자 책으로 낼 때야 밝힌 것이다. (13, 26쪽)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이 다른 사람 글을 훔쳤다(표절)는 이야기가 2015년에 크게 불거집니다. 이 이야기는 열 몇 해 앞서부터 불거졌다고 하지만, 그동안 한국 사회에 ‘터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문학인이나 비평가 가운데 이를 따지는 사람이 드문드문 있었다고 하지만, 다른 많은 사람들은 모르는 척 넘어간다든지 여러 출판사와 언론사에서는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든지 아예 꾹 눌러서 감추려고 했답니다.


  2015년에 신경숙 님 표절문학을 말하는 분들은 ‘문단권력’을 말합니다. 그런데 문단권력 이야기도 요즈음 처음 나온 이야기가 아닙니다. 꽤 예전부터 문학인과 비평인 사이에서 오르내린 이야기입니다. 요즈막에는 ‘문학인 아닌 일반 독자’까지 이를 느낄 만큼 말썽이 터졌을 뿐입니다.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어떤 ‘잘못’을 저질렀을까요? 이녁이 한 일은 얼마나 ‘잘못’일까요? 다른 사람이 쓴 글이나 책을 ‘있는 힘껏 옮겨쓰기(필사)를 하면서 글솜씨(문장실력)를 키우려고 했던 몸짓’은 어느 만큼 ‘잘못’이라고 할 만할까요?


  어린이문학에서 이원수나 권정생을 사랑하는 아이가 무럭무럭 자라서 어린이문학을 하는 어른이 된다면, 어릴 적부터 즐겨읽고 사랑한 ‘옛 작가’ 글투하고 사뭇 닮거나 비슷한 느낌이 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런 느낌이 감돌면 ‘새로운 젊은 작가’를 두고 ‘아무개 작가 흐름을 이어받는다’고 말하지요. 어른문학에서도 이 같은 결은 마찬가지입니다. 이를테면, 신경숙 소설문학을 놓고 ‘미시마 유키오를 이어받은 작품’을 선보였다고도 할 만하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미시마 유키오를 이어받은 작품’을 쓴다는 말을 반길 만할까요? 아니면 이러한 문학길은 아니라고 할 만할까요? 이때에 신경숙 소설문학은 ‘누군가를 이어받은 문학길’이 아닌 ‘표절을 저지른 문학길’이라고 따질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쓴 글이나 책에서 많이 배운 숨결이나 글멋을 제 나름대로 삭힌 새로운 글이 아니라 한다면, ‘베낀 글’이나 ‘훔친 글’일 테니까요.




신경숙이 어떤 연유로 군국주의를 한껏 미화한 소설의 인물들을 비판 없이 따왔는지 참으로 괴이쩍은데 … 신경숙이 견고한 작품 세계를 갖춘 작가라도 표절의 유혹을 피할 수 없었을까? 또 문단이 실력보다 무늬가 큰 작가를 자기네 취향과 상품성을 고려하여 띄워 준 점이 과연 표절을 낳은 요인과 무관하다고 볼 수 있을까 … 신경숙이 표절의 유혹을 이기지 못한 것도 허약한 그녀의 내면이 밟아 갈 수순이었다. (30, 31, 32쪽)



  2015년 여름에 이응준 님이 ‘신경숙 표절 문제’를 인터넷신문 한 곳에 올렸습니다. 새삼스러운 이야깃거리는 아니지만, 그동안 아주 조용하게 파묻히다시피 하던 말썽거리가 비로소 널리 알려졌습니다.


  정문순 님이 쓴 문학평론집 《한국문학의 거짓말》(작가와비평,2011)을 읽습니다. 이 책을 읽어 보면, ‘문학인 신경숙’ 님이 어떤 표절을 얼마나 했고, 표절하는 문학인이란 어떤 사람인가 하는 실마리를 차근차근 풀어내는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이응준 님이 2015년에 따지기 앞서, 정문순 님은 2011년에 비평집을 내놓았고, 이 비평집에 실은 글(신경숙 표절 비판)도 2000년에 선보였습니다.



은희경이나 공지영을 포함하여 상품성이 뛰어난 작가로 떠올랐던 이들의 작품에서도 통념에 대한 거부나 사회 변화에 대한 소망을 읽어내기는 매우 어렵다. 시장과 문단이 원하는 소설은 중산층의 안일한 욕망에 부합하는 작품이면 족했다. 그러나 문학이 잘 팔리는 데 대해 의구심을 갖는 시선은 드물었다. (47쪽)


불행히도 기존의 평론 중에는 천운영 서사의 특이한 소재에 압도되어, 작품을 비평하기보다 글쓴이 자신이 작품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 급급하거나, 서사의 이면에 도사린 세계를 읽어내지 못하는 글들이 적지 않다고 본다. (99쪽)



  문학비평 《한국문학의 거짓말》을 들여다보면 ‘신경숙 표절 비판’만 있지 않습니다. ‘조경란 표절 비판’도 이 책에 함께 나옵니다. 소설을 쓰는 신경숙 님은 ‘이웃나라 일본’에서 문학을 하던 다른 사람 글을 훔쳤고, 소설을 쓰는 조경란 님은 ‘같은 나라 한국’에서 문학을 하던 다른 사람(신인 작가, 또는 미등단 작가) 글을 훔쳤다고 합니다.


  평론가 정문순 님은 “한국문학의 거짓말”이라는 이름을 이녁 평론집에 붙일 수밖에 없었으리라 느낍니다. 거짓말을 일삼아도 거짓말이 알려지지 않을 뿐 아니라, ‘책만 신나게 잘 팔아’서, 한국에서 온갖 문학상을 타고 ‘문학상 심사위원’까지 맡는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니, 게다가 이런 모습을 비평하는 글을 꾸준히 써도 하나도 안 바로잡히는 한국문학을 쳐다보아야 하니, 얼마나 아프고 괴롭고 답답할까 싶습니다. 아니, 한국문학은 ‘고작 이것밖에 안 되’는 허술하거나 바보스러운 모습이라고 할 만하니, ‘노벨문학상을 노릴 만한 때가 되었다’ 같은 말은 그야말로 우스꽝스럽다고까지 할 수 있습니다.


  ‘표절 논란 작품’이든 ‘표절 확정 작품’이든 ‘표절 비판’을 받을 적에 출판사와 문단권력은 무엇을 했을까요? 《한국문학의 거짓말》이라는 평론집에도 잘 나옵니다만, ‘인기작가 책을 펴낸 출판사’하고 ‘한국에서 이름난 어르신 작가 자리에 선 문단권력’은 아무 일도 안 하고, 입을 다물기만 했습니다.



공지영이 정말 말하고 싶은 건 역사상의 한 시대가 아니다. 그가 그 시대에 집착하고 매달릴수록 젊은 날 한때 떵떵거리며 편하게 살 수 있는 기회를 버리고 대의를 위해 기꺼이 청춘을 바친 자기 세대를 특권화하고 싶은 욕망과 함께 남들이 자신들을 몰라줄 것에 대한 두려움과 초조감을 숨기지는 못한다. (130∼131쪽)



  한국문학은 왜 거짓말을 일삼는 권력이 되었을까요? 한국문학은 왜 참말을 널리 나누는 문화하고 멀어질까요? 한국문학은 왜 거짓말에서 벗어나지 못할까요? 한국문학은 왜 참다운 넋을 북돋우는 아름다운 길로 접어들지 못할까요?


  돈 때문일까요? 이름값 때문일까요? 권력 때문일까요? 아마 이 세 가지 모두 때문이라고 할 테지요.



이문열 자신이 아무리 수구 보수세력이 아니라고 손사래를 친들, 그가 정치를 챙기느라 소외시켜 버린 소설은 되레 그의 정치평론이 가리는 본색을 들추어낼 수밖에 없다. (268쪽)



  글을 쓰는 사람은 돈을 벌려고 글을 쓰지 않습니다. 문학을 하는 사람은 문학상을 타려고 문학을 하지 않습니다. 다른 갈래를 보아도 이와 같습니다. 사진을 찍는 사람(사진작가)은 돈을 벌려고 사진을 찍을까요? 사진작가는 사진상을 타려고 사진작품을 선보이거나 전시회를 열까요?


  한국 사진계를 돌아보면, 널리 이름난 사진상조차 ‘사진계 중견끼리 나누어 받기’를 벌인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한국 사진계에서도 이런 이야기는 그동안 제대로 비평이 나오지 못했습니다. 문학에는 문단권력이 있다면, 사진계에는 ‘사단권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한국 사진계에서 ‘중견끼리 나눠 받는 사진상 논란’은 사진잡지 《포토닷》에서 2015년 7월호에서 공식으로 처음 다루었고(‘최민식 사진상’ 논란), 2015년 7월 24∼26일에 벌어진 ‘동강사진축제’ 워크샵에서 여러 사진비평가가 낱낱이 다루었습니다.


  사진과 문학을 견주어 한 가지 이야기를 덧붙여 본다면, 사진에서도 ‘표절 논란’이 무척 잦습니다. 외국 작가가 선보인 작품을 한국 작가가 슬그머니 흉내내어 찍은 뒤 사진공모전 같은 곳에서 상을 받는 일이 흔합니다. 이러다가 수상 취소가 되기도 하지요.


  글이나 사진을 ‘창작하는 사람’은 어떻게 똑같거나 비슷한 작품을 선보일까요? ‘창작하는 사람’은 왜 ‘창작’이 아닌 ‘흉내내기’나 ‘베끼기’를 해야 할까요? 아름답거나 멋진 글을 옮겨쓰기(필사)를 해 보아야 글솜씨가 늘어날까요? 아름답거나 멋진 사진을 똑같이 흉내내어 찍어 보아야 사진솜씨가 늘어날까요? 옮겨쓰기나 흉내내기를 하는 동안 ‘작가 스스로 깨닫지 않는 사이에 훔치기’가 이루어지지 않을까요? 나중에는 ‘여느 독자가 이 대목까지 알아차리지 못하리라’는 생각을 품으면서 ‘슬그머니 훔치기’를 하지는 않을까요?




두 작품 〈혀〉(주이란)와 《혀》(조경란,문학동네,2007)는 여러모로 유사하다. 조경란은 둘이 별개라고 강하게 반발하지만, 이는 어느 누가 봐도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물론 닮았다는 것이 표절의 진위를 가릴 수 있는 유일한 근거는 아니다. 토씨 하나 다르지 않게 베끼지 않는 한 대개의 표절작은 베낀 것과 닮으면서도 닮지 않았다. (274쪽)


조경란의 책 뒷표지에는 “사랑하고, 거짓말하고, 맛보는 혀”라는 문구가 박혀 있다. 이것은 주이란의 소설을 정확히 세 마디로 축약한 문구일 뿐, 조경란의 소설과는 틈새 없이 맞물리지 않는다. (279쪽)



  한국문단에 권력이 없다면, 표절 같은 일은 생기지 않으리라 느낍니다. 문학을 아끼는 독자가 ‘우상 섬기기’를 바라지 않는다면, 인기작가 자리에 들어선 이들이 섣불리 표절 같은 글쓰기를 안 하리라 느낍니다.


  문단권력은 독자를 무서워 하지 않습니다. 문단권력은 권력을 더 키워서 장사(상품 팔기, 다시 말하자면 ‘책 팔기’)를 신나게 할 생각일 뿐입니다. 독자를 무서워하지 않기 때문에 인기작가는 표절을 조용히 저지르고, 문단권력은 이를 눙치거나 못 본 척합니다.


  인기작가이든 기성작가이든 원로작가이든, 참말 ‘작가’라 한다면, ‘창작하는 사람’이라 한다면, ‘글을 쓰는 사람’이라 한다면, 이들은 누구보다 ‘나 스스로’를 똑바로 바라보아야 하고, ‘내 글을 읽어 주는 사람’을 제대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어느 시인이 외친 말마따나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운 몸짓이 없도록 글을 쓸 수 있어야 합니다. 나 스스로를 속이는 짓을 일삼지 말아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다른 사람 글투를 흉내내는 버릇’이 들지 않도록 ‘필사 아닌 창작’을 하는 몸짓이어야 합니다.


  내 글을 읽어 주는 수많은 사람이 바로 ‘이웃’이요 ‘동무’인 줄 가슴 깊이 깨달아야지요. 이웃한테 읽힐 글을 ‘훔친 글(표절)’로 건넬 생각은 아니겠지요? 더 생각해 본다면, 내가 쓴 모든 글을 ‘아이한테 물려주겠다’고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설마 아이한테 ‘훔친 글’을 물려줄 마음은 아니겠지요?



만약 섬에 사는 사람이 서울을 경이롭고 낯선 세계로 다룬다면 응당 촌스럽다는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도시 사람이 지방을 다루는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할 수 있다. 자기가 보고 듣는 것만이 세상의 중심이라고 생각하는 촌스러움은 역사와 현실을 피상적으로 다루는 태도와 연결되기도 한다. (312쪽)



  평론집 《한국문학의 거짓말》은 한국문단이 거짓말을 일삼으면서 저지른 슬픈 모습을 찬찬히 따지고 나무랍니다. 여기에 숱한 기성작가와 인기작가가 시장 논리에 얽매여 ‘아름다운 문학’이 아닌 ‘팔리는 문학’에 기울어진 대목을 낱낱이 짚고 꾸짖습니다.


  ‘잘 팔리는 문학’이 나쁘다거나 잘못이라고는 느끼지 않습니다. 다만, 잘 팔리는 문학은 잘 팔리는 문학일 뿐, ‘아름다운 문학’이 될 수 없다고 느낍니다.


  잘 팔리면서 아름다운 문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처음부터 아름다운 문학일 때에 나중에 잘 팔리는 문학이 되어도 아름다운 숨결을 잇습니다. 처음부터 잘 팔리기만 하는 문학은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겉치레와 껍데기가 드러나기 마련입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은 ‘멋진 글’이나 ‘빼어난 작품’을 선보이려고 애쓰지 않아도 됩니다. 문학을 하는 이들 스스로 ‘아름다운 삶’으로 ‘사랑을 담아 쓰는 글’이 되면, 독자는 이내 이러한 글을 알아봅니다. 독자가 재빠르게 알아볼 수도 있고, 독자가 알아보기까지 여러 해가 걸리거나, 때로는 백 해가 걸릴 수도 있습니다.


  글을 쓰는 사람(문학을 하는 사람, 창작을 하는 사람)은 ‘잘 팔릴 만한 상품’을 만드는 사람이 아닙니다. 글을 쓰는 사람은 오직 ‘글(창작)’을 쓰는 사람입니다. 온 넋을 기울여 아름다운 꿈을 사랑스레 빚어서 글로 선보이는 사람이 바로 ‘작가’입니다.


  작가는 연예인도 아니고 배우도 아니며 대통령이나 기자도 아닙니다. 작가는 언제나 작가입니다. “짓는 사람”은 이웃한테서 배우고, 나무와 꽃한테서 배웁니다. “짓는 사람”은 아이한테서도 배우고, 하늘과 우주한테서도 배웁니다. “짓는 사람”은 너른 마음으로 기쁘게 배운 뒤에 ‘새로운 이야기를 짓’습니다. “짓는 사람”은 “훔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짓는 사람”은 삶과 꿈과 사랑을 지으면서 이야기를 노래하는 사람입니다.



《칼의 노래》와 《검은 꽃》이 독자의 인식적 지평을 넓혀 주거나 무언가 깨달음을 줄 만한 대단한 작품이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그런데도 뜻대로 되지 않는 세상살이를 푸념하는 통속적인 수준의 소설로도 평단의 주목과 독자의 환호를 받는 것이 오늘날 한국문학의 현실이다. (336쪽)



  ‘표절 논란’이 불거진 뒤에도 문단권력은 바뀌지 않습니다. 문단권력이나 상업 출판사가 바뀐 모습은 아직까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아주 단단하고 무시무시한 쇠밥그릇입니다. 표절 논란이 조용히 잊혀지는 이즈음에도 ‘표절 작가 책’은 잘 팔립니다. 아무래도 문단권력과 상업 출판사는 이 대목을 노리겠지요. 지난 2000년부터 ‘표절 비판’이 있어도 이를 모르쇠로 넘어온 까닭은, 2015년에 아주 크게 표절 비판이 일어도 꿈쩍하지 않는 까닭은, 이러거나 저러거나 ‘인기작가 상품’은 잘 팔려서 돈이 됩니다.


  “훔친 글”로 돈을 잘 벌고 이름값하고 권력도 그대로 이어가는 모습을 이 나라 아이들과 젊은 작가들이 고스란히 지켜봅니다. 문단권력 어르신하고 인기작가 어른들은 아이들과 젊은 작가들한테 무엇을 보여주거나 가르치는 셈일까요? 참말이 없는 문단권력은 돈만 잘 법니다. 4348.7.30.나무.ㅅㄴㄹ


(최종규/숲노래 . 2015 - 시골에서 인문책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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