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른 하늘 클리닉 8 - 완결
카루베 준코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푸른 하늘 클리닉 (8)
- 그린이 : 카루베 준코
- 옮긴이 : 최미애
- 펴낸곳 : 학산문화사(2006.2.25)
- 책값 : 3500원


 저는 의사를 믿지 않습니다. 저처럼까지는 아니나 의사를 못 믿는 사람이 제법 많습니다. 대한민국 사회에서 의사는, ‘아픈 사람 몸을 돌보거나 따뜻하게 보듬는’ 일보다는 ‘높다란 사회계층을 차지하면서 돈-이름-힘을 긁어모으는’ 쪽이라고 보아야 옳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거의 모든 사람들은 울며 겨자먹기처럼 병원 나들이를 합니다. 병원을 굳게 믿고 다니는 분도 있고요. 하지만 지금처럼 의사라는 일이 돈-이름-힘에 가깝다면, 또 의사들 스스로 이런 얼개를 무너뜨리며 보통사람과 자기들 사이에 놓인 높다란 벽을 허물지 않는다면, 앞으로는 어찌 될까요?


 [151쪽] 환자와의 만남은, 보통 사람을 의사에 가깝도록 만들어 주는구나.
 [145쪽] 설비가 없는 쪽이 실력이 느는 경우도 있어.
 [139쪽] 자연이. 이 섬이. 바꿔 줬어.
 [87쪽] 누구를 위해서도 아니다. 다만 눈앞에 있는 생명을 위해서. 그것만을 위해서.
 [57쪽] 간호사도 할 수 있어. 사람의 마음을 고치는 것. 고치는 방향으로 이끌어 주는 것.
 [32쪽] 사람은 가끔 기적을 보여준다. 그리고 그것은 남겨진 자에게 희망을 준다. 진실한 웃음을 준다.


 한국처럼 사회봉사에 힘쓰는 의사가 적은 나라도 없다고 합니다. 제3세계나 어려운 나라에 의료봉사를 나가는 의사도 대단히 적지만(아예 없지는 않으니 다행일까요? 하긴 의사가 되기까지 쏟아부은 돈을 거둬들이자면 사회봉사할 틈이 어디 있겠어요. 나중에 그럭저럭 돈이 모인 뒤에는 놀러다니느라 바쁠 테고요), 나라안 구석구석 의료 혜택을 조금도 못 받는 곳으로 기꺼이 나아가는 의사도 참 적습니다. 교사들이 시골 외진 학교로 가기를 꺼리는 것처럼, 의사들도 섬마을 진료소나 시골 보건소로 일하러 가기를 꺼립니다. 하지만 교사나 의사뿐일까요? 버스기사는, 게임방은, 구멍가게는, 이발소는, 옷가게는 어떻지요? 모두들 도시로, 좀더 큰 마을로, 시내 중심지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지요? 의사만 탓할 일이 아니라고 느낍니다.

 《푸른 하늘 클리닉》이라는 만화 8권이 나왔습니다. 이 만화는 8권이 끝입니다. 줄거리를 잠깐 간추리겠습니다. 도쿄라는 큰도시를 떠나 훗카이도에서도 안쪽으로 더 들어가는 외진 섬마을에 보건소 의사로 가게 된 ‘유우’라는 젊은 여의사가 있습니다. 환자들이 앓고 있는 병은 척척 알아맞추면서 기계처럼 빈틈없이 약을 쓰던 사람인데, 자기가 왜 의사로 일하는지를 찾아보려고 어느 날 도시에서 아주 외진 섬마을 보건소로 스스로 나서서 갑니다. 이 만화는 젊은 여의사 유우가 보고 듣고 겪고 만나고 부대끼는 이야기를 하나하나 보여줍니다. 다른 꾸밈이나 겉치레를 들씌우지 않고 모든 것을 보여줍니다. 아픔, 슬픔, 기쁨, 즐거움, 부딪침, 싸움…

 사람들이 살아가는 사회 구석구석을 찬찬히 헤아리면서 만화를 그린다고 할까요? 그림결은 오롯한 순정만화라서, 만화에 나오는 사람들은 거의 다 비슷한 모습이라고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이 순정만화는 여느 순정만화와는 좀 다릅니다. 이이 그림은 그렇게까지 ‘예쁘다’ 할 만한 주인공을 그리지 않거든요. 파란 하늘, 파란 바다에 둘러싸인 파랗게 보이는 조그마한 섬마을 진료소를 둘러싼 사람들과 삶터와 자연이 있는 그대로 나타납니다. 의사인 유우도, 만화에 나오는 수많은 사람들도 어떤 실마리를 붙잡거나 마무리를 짓지는 않습니다. 다만 한 가지. 저마다 자기가 ‘살아가는 뜻’을 어렴풋하게 느끼면서도 잘 알지 못하고, 잘 알지 못하지만 소중히 여기면서 놓지 않으려고 해요.

 8권을 덮으면서 ‘여기서 끝나다니 참 아쉽구나’ 하는 생각이 짙게 듭니다. 그래도, 이이가 그렸던 다른 만화 《당신의 손이 속삭일 때》는 10권에서 번역이 끝나 버려서 그 뒤로 어찌 되었는가를 보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참 얄궂어요. 아무리 이야기가 훌륭하고 줄거리가 살뜰해도 ‘많이 팔리지 않으면’ 제대로 번역을 하지 않는 이 나라 만화산업이거든요. 만화가 문화가 아니라 ‘산업’이니 그럴 수밖에 없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7권이 나오고 한참 동안 8권이 안 나와서 ‘이 만화도 여기까지인가 보다’ 하고 한숨을 쉬던 때에 드디어 만난 《푸른 하늘 클리닉》은 새삼스레 반갑고 고맙습니다. (4339.2.28.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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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 유쾌한 정신장애인들의 공동체 '베델의 집' 이야기
사이토 미치오 지음, 송태욱 옮김 / 삼인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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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책이름 :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
- 글쓴이 : 사이토 미치오
- 옮긴이 : 송태욱
- 펴낸곳 : 삼인(2006.1.5)
- 책값 : 10000원

 우리 나라에도 틀림없이 ‘장애인 공동체’라는 곳이 있습니다. 장애인을 아끼고 돌보며 비장애인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하고픈 일을 하면서 꿈을 펼치도록 도우려는 손길도 제법 있습니다. 하지만 장애인이 살아가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느끼거나 바라보아 주는 마음길이란 찾아보기 아주 어렵습니다.


.. 만약 관리 규칙이 있다면, 모든 것이 ‘규칙에 이렇게 쓰여 있으니까’라고 정리해 버려서, 한 사람 한 사람의 자유롭게 활달한 의견이나 발상이 파묻혀 버릴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  〈37쪽〉


 정신장애인들이 모여서 산다는 ‘베델의 집’. 정신장애면 어떻고 다른 장애면 어떻습니까. 문제는 장애인이 아닙니다. 장애인을 바라보는 우리들이 문제이고 골치입니다. ‘이런 장애인이 있대’가 아니라 ‘장애인이네’ 하고 바라보기만 하지 못하는 비장애인 문제입니다. 치우치거나 비뚤어진 생각을 씻지 못하는 우리들 문제입니다.

 장애인은 장애인입니다. 장님은 장님이고 귀머거리는 귀머거리입니다. 앞을 못 보니 장님이고 소리를 못 들으니 귀머거리예요. 이런 낱말은 사람을 차별하거나 괴롭히려는 말이 아닙니다. 그런데 ‘장님’을 깔보는 말로 여겨서 ‘시각장애인’으로 돌려서 말하고 ‘장애인’을 ‘장애우’로 돌려서 말합니다. 우리는 낱말만 바꾸려 하고 우리들 생각과 몸짓은 하나도 안 바꿉니다. 비장애인 삶에만 맞춘 제도 또한 그대로 두려 합니다. 이러면서 무엇을 하지요? 껍데기만 그럴싸하면 되나요? 요즘 지하철에는 꽤나 큰돈을 들여서 ‘스크린도어’라는 것을 만드는데, 이것은 ‘비장애인 안전’만 생각하는 시설일 뿐 장애인도 함께 헤아리는 시설은 아닙니다(여기에 들이는 돈과 잽싼 움직임과 어떻게 짓는가를 보면 훤히 알 수 있어요). 더구나 우리네 교통 현실은 장애인이고 비장애인이고 사람 대접을 못 받게 되어 있습니다. 자가용 중심이고, 관리자 중심이거든요. 버스타는곳이고 전철역이고 앉을 자리, 걸상이 몇 없습니다. 사람들 거님길에 ‘턱’이 너무 높거나 많으면 휠체어 타기 아주 안 좋습니다. 게다가 비장애인들이 자전거를 타고 다니기에도 아주 안 좋고 아버지나 어머니가 유모차를 끌기에도 참 나쁩니다. 그런데 이런 시설은 좀체로 바뀌지 않습니다. 우리 스스로도 못 느끼고 건의도 제대로 안 하지만, 건의를 받는 공무원들은 움직이지 않을 뿐더러 스스로 문제를 찾거나 고치려고도 하지 않아요. 이러니까 장애인 문제는 ‘그들한테만 문제인 것’쯤으로 여겨 버리겠지요?

 《지금 이대로도 괜찮아》는 작은제목으로 “문제투성이 ‘베델의 집’ 사람들의 놀라운 회사 창업 성공기”라는 말이 붙어 있습니다. 네, 이런 창업성공기도 좋고 재미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을 읽으며 더 재미있고 좋은 대목은 ‘장애인이면 어떻고 비장애인이면 어떠냐? 똑같이 세상을 즐기는 사람들이다’ 하는 이야기를 차분하게 건네는 데에 있습니다. 그저 즐겁게 어울리는 사람들, 규칙이나 틀로 서로를 옭아매려 하지 않는 사람들 이야기예요. ‘우리는 우리 나름대로 이렇게 산다구’ 하며 이야기를 건넵니다. 딱히 따뜻하지 않게, 그러나 구태여 차갑지도 않게. 있는 그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남김없이 보여주면서 손을 내밉니다. 이 손을 장애인들 손으로 느끼지 말고 ‘당신과 똑같은 사람 손’이라고 생각해 주기를 바라는 이야기책입니다. (4339.2.19.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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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은 기적이다 - 현대의 미신에 대한 반박
웬델 베리 지음, 박경미 옮김 / 녹색평론사 / 2006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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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 책이름 : 삶은 기적이다
- 글쓴이 : 웬델 베리
- 옮긴이 : 박경미
- 펴낸곳 : 녹색평론사(2006.2.15)
- 책값 : 7000원


 우리 나라에 참된 과학이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과학뿐 아닙니다. 문학도 사상도 철학도 역사도 참답게 자리잡고 있을는지요? 글쎄. 그러면 책은 어떻습니까? 그림이나 사진은? 교육이나 사회는? 정치나 경제는? 노동은? 운동경기는 어떨까요? 올바르게 나아가고 있습니까? 우리 모두 즐겁게 맞이하면서 너나없이 고르게 함께할 수 있는가요?


.. 과학은 인간적 한계를 지니며, 늘 인간의 무지와 오류를 포함한다. 과학이 발명해내거나 발견해낸 해결책들이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고, 또 그 자체가 새로운 문젯거리가 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과학자들은 특정한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핵에너지를 사용하는 방법을 발견해냈지만, 핵의 사용은 우리 모두에게 대단히 위험하다. 그리고 과학자들은 핵폐기물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아직까지 알아내지 못했다. (그들은 폐타이어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지 못한다) 항생제의 사용은 항생제의 남용을 가져왔고, 계속 이런 식이다. 우스꽝스럽게도 우리는 일상적 삶 속에서 황당한 과학지식에 매달린다. 가령 우리는 유전자의 위치를 정확하게 알게 되었지만, 우리 가운데 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식이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한다 ..  〈53∼54쪽〉


 한 달쯤 앞서, 서울역에서 전철을 탈 때입니다. 저는 멀리 가는 길이라서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전철을 탔는데 마침 유모차를 끌고 계단 앞에서 허둥지둥하는 젊은 어머니 한 분을 만났습니다. 한쪽 어깨에는 자전거를 메고 있었지만 한쪽 손은 자유로워서, “아주머니, 같이 들어 드릴게요” 하고는 꽤나 긴 계단을 타고 내려왔습니다. 저는 표를 끊고 안으로 들어갔고, 아이 어머니는 표를 사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유모차를 어떻게 개찰구를 넘어 나오는가로 힘들어합니다. 아마, 전철역까지 오는 동안 꽤나 애먹고 힘들었는가 보군요. 그런데 서울역 개찰구에는 휠체어나 유모차가 지나갈 수 있도록 ‘뚫려 있는 다른 문’이 없습니다. 표를 끊고 지나가는 자리도 대단히 좁습니다. 그래, 하는 수 없이 유모차를 들어서 안쪽으로 옮겨야 했고, 아이도 누군가 들어 주어야 했습니다. 하지만 아까 계단에서도 그랬으나, 이 개찰구 앞에도 사람들로 북적거리기는 했어도 누구 하나 손을 거들거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침 이날만 이렇게 돕는 손길이 없는지도 몰랐겠지만요.


.. 다행스러운 것은 과학자들조차도 자신들이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 말할 때에는 “한 여성”, “한 남성”, “한 아이”, “한 사례”와 같은 범주의 언어를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애정을 느낄 때 우리는 추상과 추상화의 범주들을 깨부수고, 고유한 생명과 장소를 지닌 피조물 그 자체와 대면하고 싶어한다 ..  〈65쪽〉


 아기를 제가 안고 있는 동안 젊은 어머니는 유모차를 낑낑거리며 개찰구 아래로 밀어서 가까스로 빼냅니다. 겨울이지만 얼굴엔 땀이 줄줄 흐릅니다. “아유, 서울 한번 나오면 힘들어서 못 다니겠어요. 다니기 너무 불편해요!” 하는 아이 어머니. 저는 4호선을 타고 아이 어머니는 1호선을 탑니다. 길이 엇갈려서 걱정스러운데, 저 어머니가 가는 길에 도와줄 사람이 있을는지…


.. 삶을 경험한다는 것은 뭔가를 “알아내거나”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고통받는 것이며, 동시에 있는 그대로 삶을 기뻐하는 것이다. 고통받으면서, 또 있는 그대로 기뻐하면서 우리는 삶을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하고, 이해할 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나아가서 우리는 생명을 이해했다는 누군가의 주장에 의해 생명이 소유되기를 원하지도 않는다. 생명은 우리가 향유하는 것이지만, 우리 너머에 있다 ..  〈18쪽〉


 《나에게 컴퓨터는 필요없다》(양문), 《생활의 조건》(산해) 같은 책에 이어 우리 말로 번역된 ‘웬델 베리’ 님 책 《삶은 기적이다》입니다. 과학기술이라는, 또 물질문명이라는 허울좋은 껍데기에 마음을 빼앗기고 제정신을 잃어버린 우리들한테 참으로 소중한 것이 무엇이며, 어떻게 살아가야 즐거운가를 자기 경험을 밑바탕 삼아서 들려주는 이야기책입니다. 소중한 나를 찾고, 내 삶터를 찾을 때는 우리 삶을 ‘기적’이라 할 만하지만, 나 자신을 소중히 느끼지 못하고 내 삶터를 소중히 느끼지 못한다면, 우리를 억누르는 권력자들 배만 불려 주는 ‘기적’을 낳는다는 이야기도 담아요. (4339.3.9.나무.ㅎㄲㅅㄱ)

 

**

다만 번역은... 다른 녹색평론사 책과 마찬가지로 엉망입니다. 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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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나귀님님의 "몇 년 만에 다시 읽고 시비 걸기.."

"호안 마르토렐"보다는 "후안 마르토렐"이 알맞지 싶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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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어도 괜찮아 막내 황조롱이야 - 우리어린이 자연그림책, 도시 속 생명 이야기 2
이태수 지음 / 우리교육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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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 책이름 : 늦어도 괜찮아 막내 황조롱이야
- 글/그림 : 이태수
- 펴낸곳 : 우리교육(2005.9.30)
- 책값 : 9800원


 우리들 사람도 자연 가운데 하나입니다. 자연이 있기 때문에 사람이 있지, 사람만 달랑 있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어떤 과학자는 자연을 사람힘으로 다스리려고 애를 쓰고, 어떤 과학자는 자연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사람끼리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려고도 합니다.

 제가 죽은 뒤에는 이 세상이 어떻게 달라질는지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제가 살아 있는 동안에도 세상이 크게 달라질 수 있어요. 그래서 우리는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 수도 있습니다. 무슨 약을 먹는다면 말이지요. 그래, 이럴 때,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 수 있다는 약이 있다면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저는 예전에, 그러니까 이제 갓 열 살 남짓 할 만큼 어릴 적에 `죽지 않고 언제까지나 살 수 있는 약'을 만들거나 찾고 싶다고 꿈꾸었습니다. 중국 아무개 왕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1000년을 살고 1만 년을 살면 무엇무엇을 해야지… 하고도 꿈꾸었고 돈을 어마어마하게 벌어서 무엇무엇을 해야지… 하는 꿈도 꾸었습니다.

 언뜻 보면 부질없는 헛꿈이지만, 달리 생각하면 철없는 사람으로서 품음직한 꿈이기도 하지 싶습니다. 아무튼, 이런 마음, 나 혼자 안 죽고 언제까지나 살고 싶다는 마음은 내 자신을 `자연 가운데 하나'라고 느끼지 않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런 마음으로 살아갈 때는 이웃이나 동무나 식구를 제대로 거들떠보지 못하기 일쑤입니다. 살려면 같이 살아야지, 나 혼자만 안 죽으면 되나요? 이리하여 이제는 죽음을 꿈꿉니다. 너무 오래 살지 말자고, 일찌감치 죽자고 말입니다. 그러다가 어느 날부터인가 `살 만큼만 살자. 더도 덜도 말고 나한테 주어진 만큼 살자'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군말이 길었습니다. 하지만 군소리 좀 늘어놓고 싶었습니다. 그림책 《늦어도 괜찮아 막내 황조롱이야》를 이야기하자니 이런 군소리가 없고는 도무지 이 책 이야기를 못할 것 같았어요. 이 그림책은 아파트로 숲을 이룬 어느 도심지 툇마루 창가에 둥지를 튼 황조롱이 이야기를 다룹니다. 이 황조롱이 식구는 어쩌다가 아파트숲에서도 그림을 그리는 사람 집 툇마루 창가에 둥지를 틀었고, 마침 그 그림쟁이는 이런 새나 벌레나 꽃이나 나무를 찬찬히 그림으로 담아내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래, 실제로 자기가 보고 겪은 황조롱이 식구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담았어요.

 풀이나 나무라고는 아파트를 새로 지을 때 돈 주고 옮겨다 심은 것밖에 없는 곳에서, 시멘트와 아스팔트로 흙이고 땅이고 다 뒤덮은 곳에서, 나뭇가지 하나, 먹잇감 하나 찾기 어려운 그 아파트숲에서 황조롱이는 새끼를 치고 길러냅니다. 그리곤 떠나지요.

 사람만 살겠다고 만든 아파트숲입니다. 그런데 이런 아파트숲 한켠에 어렵사리 자리를 얻어서 사는 `사람 아닌 목숨', 사람과 똑같이 `자연 가운데 하나'인 목숨이 있습니다. 이 짐승들 목숨은 우리 사람 목숨하고 저울로 달았을 때 어느 쪽이 더 무겁게 나올까요? 어느 쪽으로 기울어질까요?

 글쎄, 잘 모르겠지만 둘 모두 똑같지 않을까요? 누가 더 소중하고 덜 소중할 것 없이 말입니다. 아파트 툇마루 창가에 비둘기가 둥지를 틀었든 참새가 둥지를 틀었든 마찬가지입니다. 모두 똑같이 소중한 새입니다. 그 새 가운데 비둘기가 `닭'처럼, 아니 `사람이 고기닭으로 길들여 버린 그 닭'처럼 바닥에 떨어진 모이만 찾아 먹는다고 해도 똑같이 소중한 새입니다. 일자리와 잘곳을 잃은 한뎃잠이가 길바닥에서 뒹굴어도 모두모두 똑같이 소중한 사람이듯 말입니다.

 그림책 《늦어도 괜찮아 막내 황조롱이야》를 즐기면서 우리들 사람 목숨, 자연 목숨, 사람 삶터, 자연 삶터를 차분하게 돌아볼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이 세상이 사람만 살아도 좋은 세상인지, 사람이 자연과 함께 오순도순 지내면 좋은 세상인지 느긋하게 되새기면서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4339.1.10.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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