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집
르 꼬르뷔제 지음, 황준 옮김 / 미건사 / 1993년 6월
평점 :
품절


- 책이름 : 작은 집
- 글쓴이 : 르 꼬르뷔제
- 옮긴이 : 황준
- 펴낸곳 : 미건사(1994.5.10.)
- 책값 : 5000원


 ‘르 꼬르뷔제’가 누구인지, 또 어떤 일을 한 사람인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어디에선가 이름을 익히 들었다는 생각에 《작은 집》이라는 작은 책을 덜컥 집어듭니다. 사진이 많고 글은 적은 책, 으흠, 이이 르 꼬르뷔제는 집짓는 일을 하는 사람이로군요.


.. 사람들이 말하기를 “호수에서 4m라구? 그 사람들 미쳤군! 류머티즘에 걸리고, 무엇보다 호수면의 반사 때문에.” ‘모두들’ 자세히 관찰도 하지 않고, 잘 생각해 보려고도 하지 않았다. 류머티즘이라고? 예컨대 남비에 물을 끓여 보면 된다. 수증기는 어느 쪽으로 흘러가는가. 남비 위쪽으로 올라가지, 절대로 남비 측면으로는 돌지 않는다. 통상 ‘습윤성 류머티즘 증상’은 표고 50미터 내지 100미터 전후의 구릉지에서 많이 발생한다 ..  〈13쪽〉


 온 나라 구석구석 아파트가 들쑥날쑥 들어서는 이 나라 대한민국입니다. 이 나라 대한민국에서 아파트를 짓는 사람들은 얼마나 ‘생각’을 해 보며 아파트를 지을까요. 아파트가 들어서는 땅, 기운, 햇볕, 바람을 조금이나마 헤아려 볼까요. 아파트가 들어서며 달라질 그곳 삶터, 자연, 사람 들을 헤아려 보았을까요. 아파트를 세우면 집값이 얼마가 오르고, 돈을 얼마 버는 데에만 눈길을 쏟지 않았을까요.


.. 이 집의 개가 기뻐하도록(이렇게 말하는 것은 이 개도 가족의 일원이므로),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밑을 볼 수 있는 높이에 울타리가 있는 구멍을 뚫고 작은 발판을 설치해 주었다. 이렇게 해 두면 개가 싫증을 내지 않고 놀게 될 것이다. 대문 울타리에서 이 발판이 있는 구멍까지 개는 계속해서 20미터나 뛸 수 있고, 또 거리낌없이 짖을 수도 있다 ..  〈27쪽〉


 요사이는 집에서 애완동물이라고 하는 짐승을 기르는 이들이 부쩍 늘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지난날에도 집집마다 개며 닭이며 고양이며 돼지며 소며 염소며 토끼며 온갖 짐승을 길렀습니다. 지난날 짐승기르기는 우리가 먹는 고기짐승이기도 했지만, 한식구로 여기는 살가운 동무이기도 했습니다. 한편, 지난날 우리가 기르던 짐승들은 딱히 ‘목에 줄이 매여 좁은 집구석에 갇히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일소를 부리고 돼지를 친다고 해도 이들 집짐승이 어느 만큼 자유롭게 움직이고 돌아다닐 수 있도록 마음을 썼어요.

 오늘날 애완동물은 아파트 구석에서 눈치를 받으며 살그머니 키워야 하거나 좁은 시멘트 소굴에 갇힌 채 온삶을 마치게 되어 있습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집짐승이 그곳에 사람과 함께 살겠거니 생각하는 ‘건축가’란 없고, ‘아파트 회사’에서도 이런 데에는 마음을 안 쓰니까요.

 집짐승을 기를 수 없는 집이라면, 사람도 사람답게 숨구멍을 트며 살 만한 집이 아니라 할 수 있을까요. 사람이 사람답게 숨구멍을 트며 살 만한 집이라면, 어떤 집짐승도 즐겁게 어울려 살 수 있는 집이라 할 수 있을까요. 마당이 있는 집에는 개나 고양이를 키우기 좋습니다. 개나 고양이를 키우지 않아도 마당이 있는 집에 살면, 이 집에서 지내는 사람들도 한결 마음을 부드럽게 다스리고 조촐하게 지낼 수 있습니다.


.. 이제 벌써 9월 말이 되었다. 가을 화초가 피기 시작한 옥상에는 다시 푸르름으로 가득 찼다. 야생 제라늄도 빽빽히 자라서 이곳 한쪽 면을 뒤덮고 있다. 정말 아름다운 광장이다. 또 봄에는 어린 풀들이 자라고, 작은 화초가 피고 진다. 여름에는 키가 큰 잡초가 무성해 초원을 방불케 한다. 옥상 정원은 이렇게 자생하고 있다. 태양과 비와 바람과 씨앗을 날라다주는 새들 마음대로(아주 최근, 1954년 4월의 일이었는데, 이 옥상 한쪽 면은 원추리로 파랗게 뒤덮였었다. 원추리가 어떻게 해서 여기에 옮겨졌는지는 아무도 모르지만) ..  〈46∼47쪽〉


 아파트에도 뜰이 있습니다. 아파트 관리인은 틈틈이 뜰을 돌보며 ‘자기들이 심은 나무나 꽃’ 아닌 풀이 자라는가 빈틈없이 살피며 풀뽑기를 합니다. 꽃나무는 자기가 뻗고픈 대로 가지를 뻗을 수 없고, 1층과 2층, 또는 3층에 해를 가린다며, 위로 줄기를 올릴 수 없습니다. 바람을 타고 민들레 씨앗이 날아와도, 지나가는 새한테 묻어 온 들꽃이 뿌리를 내려도 어김없이 뽑힙니다.

 아파트 뜰은 겉보기로는 예쁘장하게 꾸민 푸름이 있는 듯 보이지만, 속을 살펴보면 끙끙 앓는 나무와 무서움에 벌벌 떠는 풀들이 잔뜩 옹크린 채 숨을 죽이고 있는 감옥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런 감옥 같은 데에서 자라는 풀들이 푸르다면 얼마나 푸를 수 있을까요. 이런 풀을 보며 푸름을 느끼는 아파트사람들은 얼마나 마음에 푸름을 담을 수 있을까요.


.. 1924년에 이 작은 집이 완성되어 내 양친이 이사하려고 할 무렵, 이곳 촌장은 마을 주민들을 모아 놓고 이 땅에 이런 건축물은 ‘자연에 대한 모독’이 아닌가라고 논의했다. 또 이 집이 이 땅에 세워짐으로써 앞으로 이런 종류의 건물이 (어쩌면) 몇 채나 더 지어질 것이 아니겠는가고 걱정하고, 이것이 다시는 더 모방되지 않도록 하자고 이런 건물의 건축을 금지했다 ..  〈82쪽〉


 르 꼬르뷔제라는 이가 지은 집은 ‘실패’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이이 부모님은 이곳에서 마지막 삶을 아늑하게 보냈지만, 마을사람들하고 어우러지지 못했으니까요. 그렇다면, 이때부터 여든 해가 훌쩍 지난 2007년 오늘 르 꼬르뷔제를 돌아본다면, 지금도 르 꼬르뷔제가 지은 이 집은 ‘실패’일까요. 오늘 이 나라에서 아파트를 꾸역꾸역 온갖 곳에 세우는 ‘건축가’들은 ‘성공한 집’을 짓고 있을까요. 이집트에서 집짓는 일을 하는 하싼 화티는 ‘의사들이 맹장수술을 한다고 할 때 똑같은 자리에 똑같은 길이로 살을 갈라 똑같은 크기대로 맹장을 덜어내지 않는다’고 말하며, ‘사람이 살 집을 그곳에 깃들 사람들 형편에 따라 다 다르게 짓지 않는 사람은 건축가라고 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 나라 구석구석 들어서는 아파트는 사람이 살라고 지은 집일까요. 죽은 르 꼬르뷔제가 본다면, 이 나라 사람들이 좋아하며 너나 할 것 없이 찾아드는 그 수많은 아파트는 어떠한 집일까요. 아니, 집이라 할 수 있을까요. 사람도 집짐승도 깃들 수 없는 시멘트 소굴이거나, 사람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잃고 하루하루 마음이 병들고 몸은 찌들며 죽어가야 하는 시멘트 무덤은 아닐는지요. 우리가 깃들어 살아갈 집이라면, 돈으로 마련하는 집이 아니라, 그곳에서 누가 무엇을 하며 얼마 동안 어떻게 지낼까를 헤아려서 저마다 다 다르게 지을 집이 아닐는지요. (4340.3.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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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중고등학교 아이들이 보는 ‘교과서 참고자료’를 가리켜 ‘학습지’라고 합니다. ‘학습(學習)’은 ‘배울 학 + 익힐 습’을 쓰는 한자말입니다. 그러니까, ‘학습지’란, 쉬운 우리 말로 풀면 “배우는 책”, “배움책”입니다. 그러면 우리들이 사서 본다고 하는 그 학습지들은 우리들한테 얼마나 “배움을 선사하는 책, 배우는 책”이 되고 있을까요.

 시험 한 번 치고 나면 버리는 책, 시험점수 높이는 데에만 쓸모가 있는 책, 학교를 마치면 종이뭉치밖에 안 되는 책이 아닐는지요. 학년갈이나 학기갈이를 할 때마다 집밖에 통째로 내놓거나 헌책방에 팔러 가는 종이뭉치는 아닐는지요. 새것으로 온돈 주고 사기 아깝고 헌책방에서 반값쯤에 사도 아깝다고 느끼는 책은 아닐는지요. 참으로 우리들이 “배우는 책”이라 할 때에는, 그 책을 처음 살 때만이 아니라, 우리가 사랑을 하고 혼인을 하고 아이를 낳아 기르고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어 죽는 날까지 늘 곁에 놓고 틈틈이 펼치고 돌아보며 되새길 만한 책이어야 좋지 않을까 모르겠습니다. 우리들은 진짜 “배우는 책”은 무엇인지 모르는 채, 가짜 “배우는 책”에 마음이고 몸이고 푹 길들고 찌들어, 우리 세상도 우리 자신도 제대로 못 살피면서 어영부영 살고 있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학습지’를 사서 무언가 배우거나 가르친다고 할 때에 참말로 ‘무엇’을 배우거나 가르칠까요. 우리가 배우는 것은 어디에 쓸모가 있을까요. 우리는 아이들한테 무엇을 가르치려 하나요. 누구한테 쓰는 배움이나 가르침일까요. 어느 때에 쓸까요. 짤막짤막한 지식이나 상식을 잠깐 동안 머리에 담고 시험을 치를 뿐이라면, 이런 앎은 1회용품이지 싶은데. 우리 삶을 가꾸는 일이 아니라, 시간때우기이지 싶은데. 우리들 재주와 슬기는 시험을 치러서 얻는 점수로 잴 수 없잖아요. 요리대회에서 1등을 받은 사람 밥이 가장 맛있고, 예선에 떨어진 사람이 짓는 밥은 가장 맛없을까요. 요리대회에 나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사랑을 담아 짓는 밥이 참으로 맛있지 않던가요. 100만 원짜리 고급스런 상차림이 아니더라도, 고작 3000원어치 찬거리로 나물 몇 가지와 김치 몇 조각 올린 상차림이라도 신나고 맛나게 밥그릇 비울 수 있지 않나요.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은 상차림이라면, 적은 돈으로 차렸든 반찬 몇 가지 못 올렸던, 한결 아름답거나 살갑다고 느낍니다.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지 않았다면, 아무리 많은 돈을 바치고 겉보기로는 맛깔스러울지 몰라도, 조금도 안 아름답고 안 살갑다고 느낍니다. 책을 볼 때에도 똑같습니다.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담은 책 하나가 제 마음을 살찌우고 아름답게 돌본다고 느낍니다. 이런 책은 껍데기나 엮음새가 좀 어설프더라도, 책이름을 퍽 못 지었다는 생각이 들어도, 낯선 글쓴이가 쓰고 낯선 출판사에서 펴냈다고 해도, 책을 펼쳐 읽는 내내 입가에 웃음이 번집니다. 슬픈 줄거리에 눈물이 똑똑 떨어집니다. 하지만 사랑과 땀과 믿음을 고이 안 담은 책은, 아무리 번들번들 예쁘장하게 보이더라도 손이 가지 않습니다. 아무리 우리 삶을 밝힌다고 하는 훌륭한 줄거리를 담았다고 내세우더라도 웃음이나 눈물이 나오지 않습니다. 아무리 이름난 글쟁이가 글쓴이로 이름을 올리고, 아무리 잘 알려진 출판사에서 펴냈으며, 언론사 기자들이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했어도 들춰보고 싶지 않습니다.

 가만히 보면, 옷 한 벌을 입든, 밥 한 그릇을 비우든, 몸뚱이 하나 뉘일 집을 찾든, 언제나 비슷하겠구나 싶습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몸과 눈에 맞추며 우리 삶을 살찌울 사랑과 땀과 믿음을 살뜰히 찾는다면, 이런 옷과 밥과 집과 책을 스스로 찾고 느낄 수 있지 않을까요. 하지만 우리들이 사랑과 땀과 믿음을 찾기보다는 겉치레와 겉꾸밈에 매여 다른 사람들 눈치와 눈길에 발목잡힌다면, 정작 자기 삶을 살찌우는 책은 거들떠보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고, 껴안지 못하며 베스트셀러 목록만 더듬지 않을까요. 우리 마음과 머리와 생각에 맞추는 책읽기가 아니라, 세상사람들 지식수준이나 상식퀴즈 따위에 얽매이는 책읽기로 흘러 버리지 않을까요.

 우리한테 즐거울 옷밥집이어야 좋을 텐데, 우리한테 즐거운 책 한 권이어야 반가울 텐데, 우리 몸에 옷밥집을 맞추지 않고, 옷밥집에 우리 몸을 맞춘다고 할까요. 우리 삶에 맞추는 책, 우리 꿈에 맞추는 책, 우리 마음에 맞추는 책이어야 좋을 텐데, 책에 따라 우리 삶과 꿈과 마음을 맞추지는 않을까요. 나아가, 자기 삶이 무엇이고 꿈은 무엇이고 마음은 어떠한지를 제대로 못 살피며 엉뚱한 곳에서 헤매고 있지는 않을까요. 잘팔린다는, 많이 읽힌다는, 남들이 좋다는 책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 좋아할 만한 책, 자기 생각을 가다듬을 책, 자기 꿈을 다독이며 살아가도록 이끄는 책은 놓치고 있지 않을까요.

 ‘맞춤책’이라고 해서 ‘어떠어떠할 때 읽는 책’이라는 이름으로 여러 가지 책을 두루 묶어서 소개하는 일을 흔히 볼 수 있으며, ‘자기계발서’라고 해서 ‘자기한테 모자란 무엇을 느끼며 어찌어찌 자기 몸가짐과 생각을 추스른다는 책’이 자꾸자꾸 나옵니다. 그렇다면 이런 책들은 얼마나 ‘다 다른 어버이가 낳아서 다 다른 자리에서 다 다른 모습으로 자라난 뒤, 다 다른 생각으로 다 다른 밥을 먹으며 다 다른 꿈을 꾸며 살아가는 우리들’한테 알맞춤한 책일까요. ‘다 다른 우리들을 얼마나 다 다른 모습으로’ 가꾸며 키우는 자기계발 책일까요. 책에 나온 줄거리에 우리를 맞추며 자기를 돌아보고 가꿀 일이 아니라, 자기 삶이 무엇인지를 속속들이 살피고 깨닫는 가운데 자기가 미처 못 느낀 자기 모습과 우리 둘레 모습을 헤아릴 책을 찾아야 앞뒤가 맞지 않을까요.

 학습지라는 것은 얼마나 배움직한 책일까 함께 생각해 봐요. 아니, 학습지를 책이라 할 수 있을까요. 학습지는 우리가 ‘책하고 멀어지게 하는 걸림돌’은 아닐까요. 학습지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학습지를 책상맡에 많이 채우면 많이 채울수록, 정작 우리가 알아야 할 참 지식하고는 멀어지고, 우리가 느껴야 할 참 세상하고는 동떨어지며, 우리가 보아야 할 참 내 모습은 잊혀져 버리지 않나요. 시험점수에 맞추는 내 머리나 마음이 아니라, 내 삶에 맞추는 내 머리나 마음이어야지 싶은데. 시험점수야 어찌 되든, 내 갈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면서, 참다운 나를 찾고 가꿀 수 있도록 마음을 쓰고 책도 읽고 사람도 만나고 일도 하고 놀이도 즐겨야 신나고 재미있는 우리 삶으로 꾸릴 수 있지 싶은데. 우리는 초중고등학교를 거치고 대학교까지 다니고 대학원이나 유학이라는 기나긴 배움을 거치면서도 정작 ‘나를 가꾸는 배움’, ‘나를 가꾼 뒤 내가 살아갈 이 세상에서 내 꿈을 어떻게 펼치면 좋은가 하는 배움’은 못 느끼거나 안 느끼면서 살지는 않을까 모르겠어요. 처음에는 시험점수에 매였다가, 나중에는 차츰 길들고 물들어 아무 생각 없이 학습지에 따라가거나 매이며 자기 모습, 줏대, 뿌리, 줄거리, 바탕을 죄 잃고 있지 싶어요. (4340.2.23.쇠.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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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의 곡예사
R. O. 블레크먼 각색 및 그림, 박중서 옮김 / 샨티 / 2006년 12월
평점 :
절판


- 책이름 : 성모의 곡예사
- 그림ㆍ각색 : R.O.브레크먼
- 옮긴이 : 박중서
- 펴낸곳 : 샨티(2006.12.25.)
- 책값 : 8900원


 우리 나라에 종교가 있었는가 생각해 봅니다. 글쎄, 있었을까요. 집마다 업을 모시고, 새벽에 맑은 물 한 그릇 떠 놓은 뒤 비손을 하고, 서낭당이나 마을을 지킨다는 나무에 비손을 하는 일은 있었으나, 따로 종교라고 할 만한 믿음은 없었지 싶어요. ‘주 찬양’을 하지 않아도 ‘하느님 사랑’을 알았고, ‘부처님 만세’를 읊지 않아도 ‘온갖 목숨붙이를 자기 몸처럼 여기며 함부로 마주하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 캉탈베르는 서글펐다. 그는 곡예를 통해 이 세상이 달라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  〈25쪽〉


 지금도 이 나라 초중고등학교에서는 ‘콜럼버스’라는 사람이 ‘아메리카 대륙을 처음 찾은’ 사람이라거나 ‘탐험가’로 가르치는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콜럼버스의 달걀’ 이야기도 곧잘 하고요. 콜럼버스는 스페인 국왕과 계약을 맺고 돈과 영주라는 지위를 얻고자 쿠바며 북미에 있는 여러 섬 토박이를 끔찍하게 죽이고 마을을 불살랐으며, 그곳 사람을 죄 노예로 삼았습니다. 콜럼버스 뒤로도 수많은 ‘탐험가’들은 중남미 대륙에서 어마어마한 학살과 약탈을 일삼았습니다. 그러다가 이들 중남미 토박이는 아프리카 토박이처럼 노예로 붙잡아 써먹기 어려움을 깨닫고는, 이른바 ‘인종청소’를 합니다. 토박이 문화와 문명을 모두 짓밟고 불사르고 깨부수고 무너뜨리면서. 불타오르는 마을과 외마디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을 보면서 약탈자와 학살자는 한결같이 외칩니다. “하느님 이름으로! 성경 말씀으로!”

 북미에서 이루어진 약탈과 학살도 중남미와 마찬가지였습니다. 다만, 세월이 흐르는 동안 방법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고, 중남미 때보다 훨씬 꼼꼼하게 땅빼앗기와 인종청소를 이루어냈습니다. 북미는 중남미와는 달리 통째로 살갗 흰 사람들 나라가 되어 버립니다.


.. 차라리 수사가 되었더라면, 따뜻한 집에 살면서, 친구들하고도 어울리고, 새들에게 모이도 주면서, 이 세상의 불행 따위는 모르고 살아갈 수 있을 터인데. 그리고 성모님께 말씀드릴 수도 있을 터인데, 이 서글픈 마음을. 그러면 성모님께서는 모두 다 이해해 주시겠지 ..  〈49∼51쪽〉


 서양 종교가 발을 디디거나 뿌리를 내리는 나라치고, 그 나라나 겨레한테 고유하게 있던 문화와 버릇과 삶과 터전이 고이 이어가는 곳을 보지 못합니다. 앞에서는 사랑을 말하고 입으로는 나눔을 읊지만, 정작 이루어지는 일은 빼앗음과 괴롭힘이었어요. 마음 깊이 우러나오는 믿음으로 사랑과 나눔을 함께하려고 애쓴 마음 착한 이들은 틀림없이 있습니다만, 권력을 쥐고 사회를 움직이며 사람들한테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휘두르는 종교라는 방망이는 여린 이를 내리치거나 짓누르거나 울궈내는 연장일 뿐입니다.

 하느님은 바퀴벌레도 사랑하고 까마귀도 아끼며 구렁이도 어여삐 여기리라 믿습니다. 닭공장에서 전기불빛에 눈이 벌건 채 알만 낳고 잠을 못 자는 어미닭도 사랑하고, 비닐집에서 사료와 농약을 끊임없이 먹어야 하는 딸기며 토마토며 푸성귀도 사랑하시겠지요. 개미는 개미라서 사랑하고, 비둘기는 비둘기라서 사랑하며, 고등어는 고등어라서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독일사람은 독일사람이라서, 네덜란드사람은 네덜란드사람이라서, 헝가리사람은 헝가리사람이라서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이리하여 키체 부족 사람은 키체사람이라서 사랑하고, 이러쿼이 부족 사람은 이러쿼이사람이라서 사랑하며, 류우큐우 부족 사람은 류우큐우사람이라서 사랑하리라 믿습니다.


.. 수도원의 모든 형제들은 각자의 작업실에 틀어박혀 크리스마스를 맞아 성모 마리아께 바칠 선물을 마련하기에 바빴다. 누구는 책을 쓰고, 누구는 조각을 하고, 누구는 요리를 하고, 누구는 시를 짓고, 누구는 작곡을 하고, 누구는 그림을 그렸지만, 캉탈베르는 뭘 해야 할지 몰랐다 ..  〈82∼84쪽〉


 만화 《성모의 곡예사》에 나오는 ‘곡예사 캉탈베르’는 북중남미에 살던 토박이 같은 사람이었을까요. 자기가 할 수 있는 일, 자기가 즐길 수 있는 놀이, 자기가 가진 재주를 또렷하게 깨달으며 사는 사람. 남 앞에 우쭐거릴 줄 모르며, 자기가 기쁘고 즐겁게 맞이하는 일과 놀이를 기꺼이 이웃과 나누려는 사람. 자기가 가진 것은 자기 혼자만 누릴 것이 아니라 이웃과 스스럼없이 함께 누릴 것으로 여기는 사람. 꾸밀 줄 모르고 감출 줄 모르며 덧바를 줄 모르는 사람. 있는 그대로 내보이며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그대로 어깨동무할 수 있는 사람.

 곡예사 캉탈베르는 자기한테 하나 있는 재주 ‘곡예’로 세상을 아름답게 보듬으며 살고자 했습니다. 이 뜻이 성모 마리아님한테, 다른 수사들한테 건네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북중남미 토박이를 거의 모두 죽이고 없앤 살갗 하얀 사람들은 오늘날에 와서 ‘북중남미 토박이 슬기를 배우고 나누자’며 이들이 입으로 남긴 이야기를 책으로도 묶고 이들 삶을 좇아 자연과 함께하는 삶을 강의하고 교육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북중남미 토박이는 죽었습니다. 곡예사 캉탈베르는? (4340.3.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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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는 일이 책과 얽힌 일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이 받게 되는 책이 더러 있습니다. 이런 책이 그동안 미처 몰랐던 좋은 책이라면 참으로 반갑습니다. 하지만 딱히 내키지 않을 뿐더러, 이런 책을 왜 내는가 싶은 생각이 든다면, 받는 손이 참 멋쩍습니다. 요리조리 핑계를 대며 안 받으려고 하지만, 우편으로 보내온다면 그야말로 돌려보낼 수 없는 노릇. 이런 책은 차곡차곡 모아서 가까운 헌책방에 가져다주곤 합니다. 그러나 모든 책을 이처럼 가져다주지는 않아요. 차마 헌책방에 내놓을 수 없는 책은 그냥 껴안습니다. 이 책이 헌책방 책꽂이에 꽂혀서 사람들 눈을 더럽힌다면 슬픈 일이니까요. 새책방 책꽂이에도, 헌책방 책꽂이에도 우리 눈을 밝히고 마음을 살찌워 주는 책들이 꽂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온갖 책을 자료로 삼는 도서관이라면 간이나 쓸개가 빠진 책이 꽂힐 수 있겠지요. 어느 사무실에서 헌책방으로 책이 통째로 흘러나온다면, 얄궂은 책이 다른 책과 섞여서 꽂히거나 쌓일 수 있고요. 하지만 제 손에 쥐어진 달갑지 않은 책들까지 헌책방에 들어가도록 하고 싶지 않습니다. 차라리 제 방 한쪽 구석에 차곡차곡 쌓아둔다든지, 북북 찢어서 폐휴지에 섞어 놓고 싶습니다. (4340.2.28.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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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 : 사기 -

 내 책들은 내가 손수 찾아간 책방에서 내 손으로 끄집어내어 내 눈으로 살핀 뒤 내 마음에 파고드는 책을 내 주머니를 털어서 산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은 내가 일해서 번 돈. 이렇게 산 책은 내 가방에 담아 내 자전거를 타고 내가 즐기는 골목길을 달려서 집으로 들고 온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을 내리고 땀을 닦은 뒤 가방에서 하나하나 꺼내거나 짐받이에서 차근차근 풀어 놓은 책을, 내 손으로 빤 걸레로 깨끗이 닦아낸다.

 내가 번 돈으로 사는 책이고, 내가 좋아서 사는 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책만 산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칭찬한 책이라 해도, 내 마음에 안 들면 젖혀 놓는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고 소개해 주지 않은 책이라 해도, 내 마음에 들면 기꺼이 산다. 나는 내가 땀흘려 일해서 번 돈을, 내 마음을 채워 줄 만한 책을 사는 데에 마음껏 쓴다.


 - 2 : 읽기 -

 남이 줄을 그어 놓았든 말든 내 마음에 드는 곳에 줄을 긋고 빗금을 치고 별을 그리고 이것저것 적어 놓는다. 내 책이니까, 내가 읽는 책이니까, 뒷날 다시 돌아볼 사람도 나니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하는 일을 돌아보도록 하는 줄거리를 읽고, 내가 가는 길이 얼마나 올바른가 되새기는 줄거리를 곰곰이 새기며, 내 생각이 얼마나 고르고 알맞는가 헤아리며 줄거리를 받아들인다. 책은 껍데기로 읽지 않는다. 책꽂이를 꾸미려고 모아 놓지 않는다. 새로 나온 책이든, 헌책방에 오래도록 묵혀 있던 책이든, 내 마음을 움직이거나 내 마음을 살찌우거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잠자는 생각을 일깨울 수 있는 책이면, 나한테 고마운 책이다. 스승이 되는 책이다. 이름난 글쟁이는 이름뿐이다. 훌륭하다는 출판사 이름도 이름뿐이다. 잘팔린다며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것은 한낱 숫자놀음이다. 이름과 숫자가 밥먹여 주지 않는다. 이름과 숫자는 내게 즐거움을 선사하지 않는다. 오로지 책에 담긴 줄거리가 밥먹여 주며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가 읽는 책 하나를 엮어내려고 지은이와 엮은이가 흘린 땀방울만큼 내 마음은 들뜨고 기쁘며 아름다울 수 있다.

 
 - 3 : 묶기 -

 자취살이 열한 해 동안 아홉 차례 집을 옮겼다. 이번에 또 한번 책짐을 옮겨야 한다. 지난해 3월 아홉째 옮길 때에는 책 묶는 데에도, 나르는 데에도, 나른 책 풀어서 제자리 찾아 주는 데에도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두 더하면 반 해쯤 걸렸을 테지. 그때는 하루에 다 나르지도 못했고, 네 차례에 나누어서 모두 짐차 다섯 대 부피만큼 옮겼다. 이번에도 한꺼번에 다 나르지는 못한다. 여러 차례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책을 풀어서 쌓으면 자리를 적게 차지하지만, 책을 묶어 놓으면 자리를 훨씬 많이 차지하니까, 모든 책을 다 묶어 놓은 뒤 한꺼번에 나를 수 없다. 한 번 묶어서 쌓은 책을 한 번 덜어내고, 빈자리에 새로 묶은 책을 쌓아서 다시 한 번 나르고를 되풀이해야 한다.

 그동안 아홉 차례 책짐을 나르면서, 내가 사들여서 읽은 책은 모두 내 손으로 묶었다. 책짐은 내 등짐으로 날라서 짐차에 실었고, 다시 내 등짐으로 집에 옮겨 놓았으며, 내 손으로 풀어서 손질해서 꽂아 놓았다. 책짐을 옮길 때마다 끈이 더더욱 많이 든다. 이번에도 끈을 새로 많이 사 놓아야겠지. 책짐을 꾸릴 때는 헌 신문이 쓸모가 많다. 신문은 하루만 지나도 낡은 정보로 가득한 종이뭉치밖에 안 되지만, 꾸러미로 모아 놓으면, 책짐을 쌀 때 책이 안 다치게 해 주어서 고맙다. (4340.3.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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