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 사기 -
내 책들은 내가 손수 찾아간 책방에서 내 손으로 끄집어내어 내 눈으로 살핀 뒤 내 마음에 파고드는 책을 내 주머니를 털어서 산다. 내 주머니에 있는 돈은 내가 일해서 번 돈. 이렇게 산 책은 내 가방에 담아 내 자전거를 타고 내가 즐기는 골목길을 달려서 집으로 들고 온다. 자전거를 세우고 가방을 내리고 땀을 닦은 뒤 가방에서 하나하나 꺼내거나 짐받이에서 차근차근 풀어 놓은 책을, 내 손으로 빤 걸레로 깨끗이 닦아낸다.
내가 번 돈으로 사는 책이고, 내가 좋아서 사는 책이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눈치를 보지 않고 내 마음에 드는 책만 산다. 아무리 많은 사람이 칭찬한 책이라 해도, 내 마음에 안 들면 젖혀 놓는다. 아무도 칭찬하지 않고 소개해 주지 않은 책이라 해도, 내 마음에 들면 기꺼이 산다. 나는 내가 땀흘려 일해서 번 돈을, 내 마음을 채워 줄 만한 책을 사는 데에 마음껏 쓴다.
- 2 : 읽기 -
남이 줄을 그어 놓았든 말든 내 마음에 드는 곳에 줄을 긋고 빗금을 치고 별을 그리고 이것저것 적어 놓는다. 내 책이니까, 내가 읽는 책이니까, 뒷날 다시 돌아볼 사람도 나니까. 내가 살아 있는 동안은.
내가 하는 일을 돌아보도록 하는 줄거리를 읽고, 내가 가는 길이 얼마나 올바른가 되새기는 줄거리를 곰곰이 새기며, 내 생각이 얼마나 고르고 알맞는가 헤아리며 줄거리를 받아들인다. 책은 껍데기로 읽지 않는다. 책꽂이를 꾸미려고 모아 놓지 않는다. 새로 나온 책이든, 헌책방에 오래도록 묵혀 있던 책이든, 내 마음을 움직이거나 내 마음을 살찌우거나 내 마음 깊은 곳에 잠자는 생각을 일깨울 수 있는 책이면, 나한테 고마운 책이다. 스승이 되는 책이다. 이름난 글쟁이는 이름뿐이다. 훌륭하다는 출판사 이름도 이름뿐이다. 잘팔린다며 베스트셀러 순위에 오르는 것은 한낱 숫자놀음이다. 이름과 숫자가 밥먹여 주지 않는다. 이름과 숫자는 내게 즐거움을 선사하지 않는다. 오로지 책에 담긴 줄거리가 밥먹여 주며 즐거움을 선사한다. 내가 읽는 책 하나를 엮어내려고 지은이와 엮은이가 흘린 땀방울만큼 내 마음은 들뜨고 기쁘며 아름다울 수 있다.
- 3 : 묶기 -
자취살이 열한 해 동안 아홉 차례 집을 옮겼다. 이번에 또 한번 책짐을 옮겨야 한다. 지난해 3월 아홉째 옮길 때에는 책 묶는 데에도, 나르는 데에도, 나른 책 풀어서 제자리 찾아 주는 데에도 퍽 오랜 시간이 걸렸다. 모두 더하면 반 해쯤 걸렸을 테지. 그때는 하루에 다 나르지도 못했고, 네 차례에 나누어서 모두 짐차 다섯 대 부피만큼 옮겼다. 이번에도 한꺼번에 다 나르지는 못한다. 여러 차례 나누어야 한다. 왜냐하면, 책을 풀어서 쌓으면 자리를 적게 차지하지만, 책을 묶어 놓으면 자리를 훨씬 많이 차지하니까, 모든 책을 다 묶어 놓은 뒤 한꺼번에 나를 수 없다. 한 번 묶어서 쌓은 책을 한 번 덜어내고, 빈자리에 새로 묶은 책을 쌓아서 다시 한 번 나르고를 되풀이해야 한다.
그동안 아홉 차례 책짐을 나르면서, 내가 사들여서 읽은 책은 모두 내 손으로 묶었다. 책짐은 내 등짐으로 날라서 짐차에 실었고, 다시 내 등짐으로 집에 옮겨 놓았으며, 내 손으로 풀어서 손질해서 꽂아 놓았다. 책짐을 옮길 때마다 끈이 더더욱 많이 든다. 이번에도 끈을 새로 많이 사 놓아야겠지. 책짐을 꾸릴 때는 헌 신문이 쓸모가 많다. 신문은 하루만 지나도 낡은 정보로 가득한 종이뭉치밖에 안 되지만, 꾸러미로 모아 놓으면, 책짐을 쌀 때 책이 안 다치게 해 주어서 고맙다. (4340.3.6.불.ㅎㄲㅅ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