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노래 살림말 / 숲노래 책넋
가난하게 살면서 짓다 : 가난하지 않은 적이 있었는가 하고 돌아본다. 어릴 적부터 두 아이 어버이로 살아가는 오늘까지, 돈가뭄이 아니던 나날은 없다고 느끼지만, 돈가뭄만 ‘가난’인가 하고 돌아보면 아니라고 느낀다. 돈가뭄 탓에 책을 마음껏 사읽지 못 하는 나날이었지만, 어느새 내 곁에는 책더미가 우람하다. 가난살림이기에 밥을 굶으면서 주섬주섬 그러모은 책은 책바다나 책숲을 이룬다.
어릴 적부터 가멸살림이었다면 이렇게 책을 주섬주섬 그러모으면서 애써 읽어냈을까? 아마 가멸살림이었어도 책을 실컷 읽었을는지 모르나, 애써 읽기까지는 안 했으리라 느낀다. 주머니가 호졸곤한 터라, 책집에서 끝없이 서서읽기를 했고, 겹쳐읽기에 후딱읽기를 해내야 했다. 얼른얼른 읽어내더라도 고갱이와 줄거리를 살피는 눈썰미를 익히려고 용썼다.
늦은밤에 작은집으로 돌아와서 잠자리에 누우면, 이날 책집마실을 하며 서서읽기를 하던 책을 곱씹는데, 영 제대로 안 떠오르면 다시 책집마실을 할 적에 “살 만한 주머니가 못되는 탓에 서서읽기를 하는 책”을 되읽고 거듭읽었다. 비록 곁에 둘 수 없는 책이라 하더라도 마음에는 늘 두려고 곱읽기에 새겨읽기를 했다.
가멸살림이라면 그냥 곁에 쟁이면 되니까 그때그때 읽기는 하더라도 곱곱으로 읽는다거나 겹겹으로 새기는 버릇을 안 들였거나 아주 나중에서야 들였을 수 있다. 게다가 가난살림인 터라 늘 걸었다. 길삯까지 책값으로 탈탈 털었으니 한나절은 가볍게 걸었는데, 걷는 동안에 마을빛을 헤아리기도 하고, 책을 읽기도 하고, ‘걷는쓰기(걸으면서 글쓰기)’를 익혔다.
가멸살림으로 살았다면, 걷는읽기는커녕 걷는쓰기조차 할 까닭이 없었겠지. 가멸살림이었다면 걸을 일이 드물었을 테니, 작은마을을 끝없이 걷고 또 걸으면서 철마다 새롭게 피어나는 빛을 못 보았으리라 느낀다. 가난살림이었기에 시골로 보금자리를 옮기지 않았다. 곁님과 아이들이 하루내내 누릴 푸른빛을 헤아리며 시골로 삶자리를 옮겼다.
가멸살림이었다면 땅을 넉넉히 장만했을 테고, 아마 멧숲도 너끈히 장만했겠지. 이때에는 이때대로 푸근하며 느긋하게 살았을 텐데, 가난살림으로 시골집을 얻느라 우리 땅뙈기는 매우 작다. 그러나 매우 작은 우리 땅뙈기에서도 나무를 품고 새를 맞이하는 길을 새삼스레 배우고 새록새록 누린다.
돈가뭄이라 할 만큼 살림돈은 여태 바닥을 쳤다. 바닥치는 살림돈을 즐겁고 기쁘게 이었기에 “가난이웃이 짓는 살림”을 나란히 느끼고 살피는 마음과 눈길을 차분히 돌보면서 다독이는 손길을 익힐 만했구나 싶다. 돈가뭄인 가난살림이기에 “이웃한테 돈을 베푸는 길”은 거의 못 하면서 “이웃이 베푸는 돈을 받는 길”을 언제나 누린다. ‘주는 보람’ 못지않은 ‘받는 보람’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가멸차게 살면서도 지을 수 있다. 가멸찬 집안이어도 얼마든지 사랑을 지을 만하다. 가난하게 살면서도 지을 수 있다. 가난한 집안이어도 얼마든지 사랑을 지을 만하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는 하나도 안 대수롭다. 돈이 많기에 책을 신나게 오래오래 사읽지 않는다. 돈이 없기에 책을 신나게 오래오래 못 읽거나 못 사지 않는다. 마음에 씨앗을 꿈빛으로 심기에, 책을 신나게 오래오래 사읽으면서 새롭게 이 마음을 가꾼다. 마음에 씨앗을 사랑으로 심어서 돌보기에, 아이와 나란히 걸어가면서 이 보금자리를 보금숲으로 일구는 손길을 일으킨다. 2025.2.27.
ㅍㄹㄴ
※ 글쓴이
숲노래·파란놀(최종규) : 우리말꽃(국어사전)을 씁니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라는 이름으로 시골인 전남 고흥에서 서재도서관·책박물관을 꾸립니다. ‘보리 국어사전’ 편집장을 맡았고, ‘이오덕 어른 유고’를 갈무리했습니다.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들꽃내음 따라 걷다가 작은책집을 보았습니다》, 《우리말꽃》, 《미래세대를 위한 우리말과 문해력》, 《쉬운 말이 평화》, 《곁말》, 《곁책》, 《새로 쓰는 말밑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비슷한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겹말 꾸러미 사전》, 《새로 쓰는 우리말 꾸러미 사전》, 《책숲마실》, 《우리말 수수께끼 동시》, 《우리말 동시 사전》, 《우리말 글쓰기 사전》, 《이오덕 마음 읽기》, 《시골에서 살림 짓는 즐거움》, 《숲에서 살려낸 우리말》, 《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 《읽는 우리말 사전 1·2·3》 들을 썼습니다. blog.naver.com/hbooklo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