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개발 아파트 시 읽는 어린이 27
김영미 지음, 심보영 그림 / 청개구리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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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땀’ 없이 ‘생각’만으로 쓴 문학은 빈 껍데기
 [잠깐 읽기 36] 김영미, 《재개발 아파트》



- 책이름 : 재개발 아파트
- 글 : 김영미
- 그림 : 심보영
- 펴낸곳 : 청개구리 (2009.5.5.)
- 책값 : 8000원



 (1) 동시는 어떻게 쓰는가?


 2006년에 ‘황금펜아동문학상(동시)’을 받고, 2008년에 ‘한국일보 신춘문예(동시)’에 뽑혔으며, 광주에서 어린이집을 꾸리는 김영미 님이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를 펴냈습니다. 그무렵 신춘문예 심사를 맡은 분들은 “새로운 시적 발견인가 하는 점에서는 다소 주저되는 면이 있긴 하지만, 대상을 바라보는 시선이 따스하고 진지한 점이 돋보인다(한국일보 2008.1.2.)”고 적습니다. 출판사 인터넷방에 적힌 소개글을 살피면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인식 위에 따뜻한 희망이 얹어 있”다는 이야기가 보입니다.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는 이제까지 나온 동시모음과 견주면 이름부터 남다릅니다. 다른 동시 작품은 ‘현실을 바라보는 날카로운 인식’이 있다고는 거의 느낄 수 없는 터이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 나라에도 무언가 빛다르게 이야기를 풀어내는 작품이 선보였는가 싶어 좀더 눈길이 갑니다.

 고구마를 이야기하면서도 ‘먹기만 하는’ 고구마가 아니라, 아이가 ‘손수 호미를 쥐고 캐는’ 고구마를 이야기합니다. 재개발 아파트를 바라보면서도 여느 어른들과 달리 돈이나 싸움이 아닌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는 눈썰미를 느낍니다.


.. 나도 반가워 / 밭이랑으로 / 달려가 / 고구마 캤지요 // 아빠 고구마를 캐니 / 엄마 고구마 / 아기 고구마 / 줄줄이 따라나와요 // 고구마 식구들은 / 땅속에서도 / 날마다 꼬옥 / 손잡고 있었나 봐요 ..  (고구마)


 그렇지만 《재개발 아파트》에 실린 여러 작품을 읽고 돌아보는 동안 마음이 답답합니다. 속시원하게 뚫는 작품은 찾아보기 수월하지 않고, 책방과 도서관 책시렁을 가득 차지하고 있는 ‘말장난 동시’는 아니라고 느끼면서도 어느 구석인가 갑갑합니다.

 글쓴이는 머리말에서 신춘문예에 뽑힌 뒤 기자하고 만나던 이야기를 적어 놓습니다. 기자는 글쓴이한테 “아무리 봐도 재개발 아파트와는 상관없는 분 같은데요?” 하고 물었다는데, 글쓴이는 “그 말은 가난해 보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이런 시를 쓸 수 있냐는 것이었지요. 농담처럼 물었지만 나는 부끄러웠습니다 … 나에게도 가난한 어린 시절이 있었습니다. 풍족이라는 것은 상상 속에, 아니면 책 속에서나 가능했던 시절, 수줍고 내성적이던 나는 가난이 부끄러워 당당하지 못했습니다. 그때는 가난해서 부끄러웠고, 이제는 가난하지 않아서 부끄러운 이 아이러니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요?” 하고 생각합니다. 기자한테는 대충 얼버무리는 말만 했다고 합니다.

 머리말에서 글쓴이 스스로 밝힙니다만, 글쓴이는 ‘이제는 가난하지 않으나 어린 날에는 가난했던’ 분입니다. 아마, 오늘날 수많은 어른들이 글쓴이와 비슷하지 않으랴 싶습니다. 먹을거리 입을거리 모자라고 작은 방 한 칸에 큰식구가 끼어 살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어른은 드물리라 봅니다.

 이런 지난날은 조금도 부끄러울 까닭이 없습니다. 살림을 편 오늘날 또한 하나도 부끄러울 구석이 없습니다. 가난한 지난날은 가난한 대로 좋고, 넉넉한 오늘날은 넉넉한 대로 좋습니다. 가난하니 얻기도 하고 받기도 합니다. 넉넉하니 베풀기도 하고 주기도 합니다. 얻는다고 창피할 까닭 없고 준다고 으스댈 까닭 없습니다. 모두 똑같은 자리에서 똑같이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 현수네가 도시로 이사 가고 / 끝까지 남아서 / 집을 지켜 주던 할머니마저 / 돌아가신 후 / 집은 정말로 혼자가 되었어 // 있는 힘을 다해 / 기둥을 받치고 / 주춧돌에 힘을 줬지만 / 아주 조금식 / 집은 알몸으로 허물어져 갔지 ..  (현수네 빈집)


 가난해 보이지 않더라도, 아니 가난하게 살지 않더라도 가난은 얼마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내 가슴이 가난한 벗하고 어깨동무를 하고 있다면 얼마든지 그릴 수 있습니다. 또한 가난한 이는 못 보거나 못 느끼는 대목까지 살포시 잡아채면서 무척 싱그럽고 훌륭히 펼쳐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난하다고 하여 가난한 삶을 모두 잘 그려내지 않습니다. 스스로 굴레에 갇히거나 발목에 쇠사슬을 매어 놓고 있으면 가난이건 무엇이건 어느 하나 제대로 그려내지 못합니다.

 누구한테나 마찬가지입니다만, 가슴이 있느냐 없느냐로 시를 쓰지 머리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돈이 있느냐 없느냐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집이 크냐 작으냐로 시를 쓰지 않습니다. 골목동네에 산다 하여 골목동네 삶자락을 사진으로 더 잘 담는다든지 소설로 잘 풀어낸다든지 하지 않아요. 골목동네에 안 살고 있어도, 골목동네 사람들과 이웃이 되고 벗이 되고 언니오빠동생이 되는 매무새라면 얼마든지 사진 잘 찍고 소설 잘 쓰고 동시 잘 엮을 수 있습니다.


.. 지하도 입구에서 / 고개를 푹 처박고 / 손만 내민 아이 / 마치 손이 얼굴 같습니다 ..  (지하도의 아이)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는, 글쓴이 스스로 겪었으며 지켜보는 ‘가난한 자리’가 조촐하게 담깁니다. 그렇지만 수수하지는 않습니다. 싱그럽지도 않습니다. 꾸밈없이 담기는구나 싶지만, 꾸밈이 없다고 해서 살갑거나 따뜻한 작품이 되지는 않아요. 내미는 손길이라고 하여 늘 따뜻하지 않습니다. 맞잡는 손길이 되어도 언제나 따스하지 않습니다. 껴안는 몸짓이라 하여도 한결같이 따사롭지 않아요.

 시 하나가, 소설 하나가, 사진 하나가, 그림 하나가, 몸그림 하나가 따뜻하거나 따스하거나 따사로우려면 다른 데에서 만나고 부둥켜안아야 합니다. 아름다움을 꽃피우려면, 기쁨을 나누려면, 웃음꽃과 눈물꽃을 일구려면, 다른 곳에서 어우러지고 어깨동무해야 합니다.


.. 어른들은 모두 엉터리야! / 지구촌 한마을이니 / 사이좋게 살아야 한달 때는 언제고 // 우리 반의 코시안 영진이와 / 놀면 싫어하고 ..  (모두 한마음으로)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에 추천글을 쓴 문삼석이라고 하는 시인은 “아무튼 김영미 선생님은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이 어떤 곳인가에 대해 아주 많은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아. 그리고 우리에게 어떻게 사는 것이 옳은 것인지, 행복하게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하는지 우리들에게 끊임없이 생각하게 하고 있어(123쪽).” 하고 이야기합니다.

 곰곰이 돌아보면, 문삼석 시인이 한 말이 맞습니다. 김영미 님 동시는 ‘생각하는 동시’입니다. 아이들한테 시를 읽으며 ‘생각하도록’ 이끕니다. 다만, ‘생각만 하는’ 동시요, ‘생각에 머문’ 동시인데다가, 아이들 스스로 ‘생각에 갇히’게 하는 동시로 그칠 뿐입니다.

 내 삶, 그러니까 글쓴이 삶이 없습니다. 내 벗, 그러니까 글쓴이와 벗삼을 아이들 삶이 없습니다.


 (2) 어린이책은 어떻게 만드는가?


 이 책에는 그림이 무척 많이 실려 있습니다. 그림을 그린 분은 여러 작품을 내놓았고, 예술고등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다고 합니다. 그러한데, 이분 그림을 죽 돌아보면 ‘잘못 그린’ 그림이 곳곳에 나타납니다. 너무 많아 모두 들 수는 없고, 대표로 몇 가지만 들어 봅니다. 먼저 73쪽에 게 두 마리가 나오는데, 게는 ‘옆으로 걷’지 앞으로 걷지 않습니다. 게는 다리가 ‘열’이지 여덟이 아닙니다. 그 옆 72쪽 그림과 91쪽 그림에는 맛조개가 나옵니다만, 맛조개가 갯벌에서 뽀롱 고개를 내미는 모습이 이 그림과 같을까요? 이제는 거의 모든 갯벌이 땅메우기로 사라집니다만, 태안 앞바다만 해도 그럭저럭 남아 있으니(그나마 태안 앞바다는 기름으로 잔뜩 뒤덮이며 더러워지고 말았지만), 몸소 맛조개를 가까이에서 들여다보면 좋겠습니다. 더구나, 갯벌은 모래하고 빛깔이 아주 다르지요. 모래밭이나 ‘누런 빛’ 또는 ‘금빛’은 될지언정, 갯벌은 ‘짙은 잿빛’입니다. 때로는 ‘맑으면서 시커먼’ 빛이라 할 수 있고요. 79쪽을 보면 높자란 대나무가 나옵니다. 대나무 줄기는 잿빛으로 그려져 있습니다. 대나무가 잿빛일 수 있을까 궁금한데, 대나무가 ‘죽으면’ 잿빛이 됩니다. 대나무는 추위를 많이 타서 따뜻한 곳에서만 살아가는 나무입니다. 대나무를 쓰다듬어 본 분은 누구나 알 테지만, 대나무가 높자라면서 잎을 틔우려면 ‘푸르디푸러야’ 하고, 대나무잎은 마디마다 자랍니다. 땅바닥에 잎을 박고 있지 않아요.


.. 학교 가는 길 / 흘깃 / 건너편 근로자 대기소를 본다 // 뽑히지 못한 아저씨들이 / 옹기종기 모여 앉아 / 하얀 한숨을 날린다 // 발 앞에는 / 식구들의 숟가락 수만큼 / 꽁초가 수북이 쌓이고 // 담배 연기는 / 몽글몽글 하늘로 날아가는 / 아이들의 희망 // 쪼그려 앉은 아빠의 등 / 오늘은 / 유난히 더 좁아 보인다 ..  (근로자 대기소)


 그림 이야기를 따지자면 동시모음 두께보다 더 두꺼운 책을 써도 모자라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그만둡니다. 다만 하나, 겉그림에 나온 자전거는 안 짚을 수 없습니다. ‘체인 없는’ 자전거를 타고다닐 수 없겠지요. 이 그림 하나에 모두 다 담아낼 수 없다지만, ‘브레이크 없는’ 자전거도 못 탈 테고요. 아이 얼굴에 주근깨도 그리고 머리카락도 한 올 두 올 그렸으며, 운동화 밑창에 금까지 그어 놓는 꼼꼼함을 생각한다면, 자전거 체인과 브레이크가 없는 자전거가, 또 뒷바퀴 축이 없는 자전거가 어떻게 구를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그림만이 아닙니다. ‘노동자 대기소’가 아닌 〈근로자 대기소〉라는 작품을 보면, ‘아이가 학교 가는 길에 흘깃 건너편 근로자 대기소를 본다’가 나옵니다. 이 동시모음은 초등학생이 볼 테니, 초등학교 아이가 학교 가는 길이겠지요. 초등학교 아이는 몇 시에 학교에 갈까요? 일찍 간다 하여도 여덟 시는 넘을 테지요. 아주아주 드물게 일곱 시 반에 나서는 아이도 있을 터이나, 여덟 시가 안 되어 학교에 닿으면 학교문은 잠겨 있습니다. 초등학교 아이들은 여덟 시 반이 넘어서야 비로소 학교에 간다고 보아야 올바릅니다.

 그러면, ‘노동자 대기소’에 ‘막일 하는 아저씨들은 몇 시에 나와서 모여’ 있을는지요?


.. 섬이 / 외로워도 / 아무 불평 없이 / 저렇게 떠 있는 건 // 날마다 / 파도가 놀러 와 / 발가락 간질이며 / 놀아 주기 때문이야 ..  (섬)


 막일을 안 해 본다고 막일 이야기를 못 그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삽질을 안 해 보았다고 삽자루 쥐며 땅 파는 모습을 못 그리라는 법이 없습니다. 시이든 그림이든 마찬가지입니다.

 겪어 보지 않았다고 늘 잘못 그린다고 할 수 없지만, 제대로 알아보지 않는다면 잘못 그리고 맙니다. 찬찬히 돌아보지 않는다면 엉터리가 되고 맙니다.

 막일을 하는 사람들, ‘노동자 대기소’에 있는 사람들은 ‘늦어도 새벽 여섯 시까지’는 모여 있어야 하고, ‘여섯 시 반’이면 으레 일감 나누기가 끝납니다. 아니, 여섯 시 반이면 저마다 일할 자리에 차 타고 가 닿아서 연장통을 챙긴다고 해야 옳지요.

 일곱 시만 되어도 대기소는 텅 빕니다. 요즈음 중고등학교 아이들은 어떠할까 모르겠습니다만, 중고등학교 아이들 가운데에는 일곱 시가 되어도 잠들어 있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새벽밥 지어 먹고 나가는 중고등학교 아이들이라고 하여도 ‘노동자 대기소 일꾼’을 보기 어렵습니다.


.. 이쪽 산이 저쪽 산에게 말했습니다 / -우리 꽃놀이 할까? / -뭐라고? / 아! 봄이 왔다고! // 둘이는 / 늘 딴말만 했습니다 // 터널이 뚫렸습니다 / 이제는 / 서로의 말이 / 잘 들렸습니다 // -민들레 홀씨, 세 개만 꿔 줄래? / -내년 봄에 꼭 갚아야 돼! // 둘은 / 이제 / 조금도 심심하지 않습니다 ..  (터널)


 이렇게 잘못 쓴 작품이 어쩌다 한 번 나온다면 그러려니 넘어갑니다. 그런데, ‘갑작스레 섬이 외롭다’고 나오는 까닭이 무엇인지 알쏭달쏭합니다. 공장 굴뚝에서 나오는 연기를 바람이 손질한다는 생각은 재미있기는 하나, 재미로 그칠 뿐입니다.

 글쓴이 집이 공장하고 이웃하고 있다고 해 보십시오. 아니, 공장과 울타리를 마주한 집에서 하루쯤이라도 지내 보십시오. 저는 어릴 적 태어나서 이제까지 살아가는 집이며 동네이며, 언제나 공장이 늘 가까이 붙어 있고, 공장으로 큰짐을 실어 나르는 큰차가 언제나 싱싱 달리는 길가에서 살았으며,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폐수를 끝없이 바라보았습니다. 아침에 학교 가는 길에는 으레 온몸에 공장에서 내뿜는 연기와 폐수 냄새가 짙게 배어들었습니다.

 〈터널〉과 〈우리 동네〉 같은 작품도 안타깝기 그지없다고 느낍니다. 제 몸뚱이 한복판이 뻥 뚫린 산들이 뭐가 좋다고 즐겁게 웃으면서 ‘자동차 씽씽 달리는 구멍으로 의사소통을 할까’요? 북극이 밤낮이 따로 없는 까닭은 무엇 때문인가요?


.. 저 멀리 공장 굴뚝에서 / 연기가 머리카락처럼 나부낀다 // -깎아 드릴까요? / 볶아 드릴까요? / 미용사 바람이 다가와 / 친절하게 묻는다 // 굴뚝은 무뚝뚝 / 대답이 없다 // 화가 난 바람 / 굴뚝의 머리를 / 스트레이트로 쫙쫙 펴 버린다 ..  (바람은 미용사)


 동시를 읽고 사이그림을 보면서 한숨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책을 덮고 나서도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신춘문예 심사위원은 어떤 눈으로 작품을 가려냈는지 모르겠어서 한숨이 나오고, 이와 같은 작품을 신춘문예에 내놓을 수 있는가 싶어 한숨이 나오며, 이만한 작품을 애써 책으로 빚어내는 출판사 분들은 어떤 눈매인가 싶어 한숨이 나옵니다.

 그렇지만 아무런 빈틈이 없고 어느 하나 어설픈 대목이 없어야만 ‘대상을 주’고 ‘책으로 내’고 ‘문학을 해야 한다’란 법이 없습니다.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좋고, 어설프면 어설픈 대로 좋으니까요.

 그런데 말입니다, 맞춤법과 띄어쓰기가 잘 맞는다고 해서 좋은 작품일까요. 시를 쓰는 글감만 잘 뽑는다고 해서 훌륭한 작품일까요. 글쓴이가 드넓은 생각힘을 뽐내며 우리 삶터 이야기를 골고루 건드린다고 해서 문학이란 이름을 붙여도 될까요.


.. 우리 동네는 / 잠들지 못한다 // 24시간 pc방 / 24시간 찜질방 / 24시간 편의점까지…… // 온통 하얗게 / 대낮처럼 불을 밝혔다 // 이러다 / 달님이 길 잃고 / 못 찾아오면 / 어쩌지? // 아예 / 북극처럼 / 밤낮 없어지면 / 어쩌지? ..  (우리 동네)


 이 작품을 읽을 아이들을 걱정해 봅니다. 누구보다 이 작품을 쓴 분이 바라볼 삶터를 근심합니다. 문학에는 글쓴이 생각이 깊고 너르게 담기기 마련이지만, 생각만 담는다고 하여 문학이 되지 않습니다. 생각을 싣는다고 스스로 문학한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상 몇 가지 탔다고 자랑스러운 문학인이라고 내세울 수 없습니다. 해적이에 끄적일 만한 이름조차 되지 않습니다.

 글쟁이는 제 작품으로 말하는데, 제 작품으로 무엇을 말하느냐면 제 삶을 말합니다. 글쟁이는 제 작품으로 제 삶을 말합니다. 제 생각을 말하는 제 작품이 아니라, 제 삶을 말하는 제 작품이 되어야 하는 글쟁이입니다.

 김영미 님은 동시모음 《재개발 아파트》에서 남다른 생각을 산뜻하고 재미있게 보여주었다 할 만합니다. 그런데 그 생각주머니는 어디에서 나왔는가요? 그 생각주머니는 무엇을 하고 있는가요? 머리에서 태어내 머리에서 죽는 생각인가요? 글쓴이 생각은 어디에 발을 대고 있는지요? 글쓴이 발은 어느 자리에 있는지요?

 글쓴이가 오늘날은 부자로 살아가고 있으면 ‘부자로 살아가는 이야기’를 거리낌없이 쓰면 됩니다. 부자로 살아가고 있어도 가난한 동무하고 오순도순 벗삼으며 살아간다면 ‘가난한 동무하고 벗삼는 이야기’를 스스럼없이 쓰면 됩니다.

 가장 ‘가난한’ 문학이란, 생각주머니로만 펼치는 문학입니다. 가장 ‘넉넉한(부자인)’ 문학이란, 온몸을 움직여 땀흘린 이야기를 팔다리로 드러내는 문학입니다. 부디, 다음 작품에서는 글쓴이 ‘땀방울’을 흘리는 모습과 글쓴이 ‘땀방울이 떨어진 자리’ 삶자락이 고스란히 묻어날 수 있기를 빌어 봅니다. (4342.5.30.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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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산하세계어린이 29
세실 모지코나치.클로드 퐁티 글, 조엘 졸리베 그림, 백선희 옮김 / 산하 / 200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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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이 책 하나 107 ― 마오리족이 어른을 섬기고 젊은이는 튼튼했던 까닭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책이름 :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글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 그림 : 조엘 졸리베
- 옮긴이 : 백선희
- 펴낸곳 : 산하 (2009.3.16.)
- 책값 : 9000원



 (1) 옷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2001년부터 즐겨입어 온 반바지 하나가 있습니다. 그무렵은 출판사에 세 해째 몸담고 있던 때라 한 달 일삯을 백만 원 조금 넘게 받았습니다. 이만한 살림이라면 저한테는 돈이 꽤 남아 일삯 2/3를 은행에 집어넣고도 쓸 돈이 제법 남아, 그때까지 꿈으로만 꾸어 오던 ‘조금 값이 비싸더라도 오래오래 입을 질기고 튼튼한 반바지’ 하나 사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동무 한 사람을 불러(옷을 사러 옷집에 가 보기란 그때로서 아홉 해 만이었니까) 옷집에 찾아갔고, 이만천 원이었든가 만오천 원이었든가 하는 까만빛 반바지를 한 벌 장만했습니다. 웃도리 한 벌까지 해서 이만 원을 조금 더 치렀지 싶군요. 그무렵 입던 반바지는 하나같이 길에서 이삼천 원 하던 녀석이었는데 몇 번 빨래하니 올이 풀리고 법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반바지 한 벌 갖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자주 입고 고이 아끼며 입었는데, 지난 2008년 여름에 허벅지 쪽 실이 닳고 닳아 세 군데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엉덩이 께도 찢어집니다. 어느덧 아홉 해째 입었으니 그럴 만하다 싶습니다. 따로 두꺼운 천을 대야 할까 싶고, 앞으로는 집에서만 입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지난날 이 반바지를 아홉 해 만에 장만했으니, 이번에도 아홉 해를 기려 새로 한 벌 장만해야 할까요.


.. 마오리족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들은 말이나 행동에 나무랄 데가 없어야 했다.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려면 그래야만 했다 ..  (44쪽)


 날이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덥습니다. 여름이 코앞이니 마땅한 노릇입니다. 사람들 옷차림은 가볍습니다. 아니, 사람들 옷차림이라기보다 아가씨들 옷차림이 가볍습니다. 젊은 사내나 아저씨들 옷차림은 가볍지 않습니다. 꽤나 많은 남자들은 이 여름에도 긴소매 양복을 입습니다. 속에는 와이셔츠를 받칩니다. 아마 이 양복이나 와이셔츠는 천이 얇고 바람이 잘 들 테지요.

 그러나 서울이든 시골이든 다른 데이든 어디이든 관공서이든 여느 회사이든, 젊거나 늙은 사내들이 한결같이 판에 박은 듯 맞춰서 입는 양복은 제 눈에는 낯섭니다. 양복을 입고 일터를 오가는 분한테는 익숙할 테며 자연스럽겠지만, 저로서는 아직까지 낯설기만 합니다. 더운 여름날 왜 온몸을 이리도 꽁꽁 싸매는 까만 빛 천으로 둘러대야 할는지요. 옷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어이하여 ‘서양옷(洋 + 服)’을 입어야만 회사원이 되고 공무원이 되고 사무원이 될 수 있는지요. 서양옷을 입지 않으면 영업을 하러 다니면서 버르장머리가 없는 노릇인가요. 서양옷을 갖춰입고 책상맡에 앉아야 머리가 술술 풀리고 일을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중고등학교 아이들 옷차림도 ‘어른 서양옷 차림’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어릴 적부터 ‘서양옷이 다소곳함을 지키며 갖춰입는 옷’이라고 못박듯 길들이는 셈입니다. 우리 나라 날씨는 해마다 뜨거워지면서 벌써부터 30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는데, 그나마 여학생은 치마길이를 줄여 시원하다(여학생들은 시원하려고 치마길이를 줄이지 않습니다만) 싶도록 옷을 입는다 하는데, 남학생은 긴바지를 싹둑 잘라 반바지로 입을 수 없고, 스스로 입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 마오리족은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자연은 생명과 풍요로운 원천이기 때문이다. 숲은 사냥꾼들에게 사냥감을 주고, 사람에게 카누와 집을 만들 나무를 주며, 새들에게 멋진 깃털을 준다 ..  (67쪽)


 디제이 디오시가 부른 노래가 아니더라도, ‘청바지 입고 회사에 못 갈’ 까닭이 없고, ‘반바지 입고 동사무소에서 일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교실에서 ‘소매없는 웃도리’를 입거나 ‘아예 웃통을 벗은 채’ 공부를 하지 말란 법조차 없습니다. 회사원은 회사일을 잘해야 할 노릇이요, 공무원은 동네사람 일을 잘 다스려야 할 노릇이며,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익히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잘 삭일 노릇입니다.

 고리타분한 울타리에 갇힌 어른들은 ‘보기에 나쁘다’라든지 ‘점잖지 못하다’라든지 ‘버릇이 없다’고들 말씀하지만, 너무도 터무니없는 소리요 웃기는 소리일 뿐입니다. 왜냐고요? 교사가 장님이라면 어떻습니까.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교사라면 어떻습니까.

 헤엄터에서는 헤엄옷을 입고 알몸헤엄터에서는 알몸으로 있어야 ‘올바름’이듯, 제도권학교에서는 ‘서양옷과 똑같은 학교옷’을 갖춰 입어야 올바름이라고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등하며 통일과 민주가 살아숨쉬는 배움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시지옥을 코앞에 둔 ‘시험 전투원’이 ‘볼펜이라는 총칼’을 들고 ‘옆자리 짝꿍을 적군으로 삼아 무찔러 쓰러뜨리’도록 길들어 가는 감옥소하고 똑같은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런 감옥소 같은 학교라 할지라도, 아이들 앞에서 ‘창의’니 ‘창조’니 ‘상상’이니 ‘교육’이라는 겉발린 말이라도 읊조리고자 한다면, 더운 여름날에는 더위를 식힐 수 있게끔 ‘반바지 민소매 학교옷’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싶을 뿐입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이들 여름옷은 한결같이 반바지인데(때로는 초등학교 여름옷도), 중고등학교부터는 긴바지만 입어야 한다면 앞뒤가 어긋날 뿐더러, 사람몸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 타네 신이 이 자리에 모인 새들에게 말했습니다. “투이야, 너는 땅으로 내려가기를 그토록 겁냈으니 비겁함의 표시로 목에 흰색 깃털 두 줄을 달아 주마. 발을 적시는 게 싫다고 한 푸케코는 평생 동안 축축한 습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둥지를 만드느라 바쁘다는 피피와로로아, 너는 앞으로 둥지를 지을 필요가 없을 거다. 남의 둥지에다 알을 낳게 될 테니까. 하지만 키위야, 너는 희생의 대가로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새가 될 것이다.” ..  (71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한테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히려는 분들 스스로 한여름에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대학교수이건 초중고등학교 교사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 스스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그래야만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다소곳함을 지킨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남학교 교사들은 런닝셔츠 바람에 긴바지는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채 수업을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당신들 스스로 견디지 못하면서, 당신들 스스로를 사로잡거나 얽어매는 무시무시하고 무거운 쇠사슬을 끊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은 북중남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영국말, 프랑스말, 스페인말, 포르투갈말만 쓰도록 얽어 놓았으며, 뉴질랜드와 호주 또한 영국사람 문화가 스며들도록 했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구석구석 영국 문화, 그리고 영국에서 떨어져 나가며 새로 세웠다는 미국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했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한글과 우리 말이라는 지푸라기 하나를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마디와 글줄을 빼놓고는 온통 잡아먹혔습니다. 그나마 이 말마디와 글줄조차 아이들이 갓 태어나자마자 영어에 미쳐 버리도록 몰아세우고 있습니다만. 
 





 (2) 삶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동네 골목집이 사라집니다. 하나둘 아파트로 바뀝니다. 아파트로 바뀌지 않더라도 동네 골목집 짜임새와 얼거리는 우리네 살림집은 아니었습니다. 겉모양도 그렇고, 속내도 아니었습니다. 껍데기는 기와 얹은 집이요 풀 얹은 집이라 할지라도 속내에는 서양 살림집 차림이었습니다.

 서양사람이 처음 만들고 이 나라 사람이 고쳐 만든 갖가지 전자제품과 살림살이가 들어차 있습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쓰고 밥사발을 쓴다지만, 이런 수저와 밥그릇 어디에도 한글이 적히는 일이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만들어 한국사람한테 팔고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쓰는 한국 물건이라 하지만, 이런 한국 물건에 한국말이 한국글로 당차게 적히는 일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 하지만 마우이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형들은 물고기에 달려들었습니다. 살점을 마구 뜯어내고, 자르고, 토막 냈지요. 가엾은 물고기는 아파서 몸을 비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 북섬의 산들이 일어서고 계곡들이 패인 것입니다. 물고기를 닮은 이 섬을 이곳 사람들은 ‘테이카 아 마우이’, 즉 ‘마우이의 물고기’라고 불렀습니다. 뉴질랜드 전체는 마오리어로 ‘아오테아로아’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  (35쪽)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한글이름이 붙지도 않지만, 한글로 적더라도 속살은 서양말입니다. 한국사람끼리 주고받는 이름쪽에 어김없이 알파벳으로도 찍는 한편, ‘손전화’까지는 바라지 않으나 ‘핸드폰’이라고 한글로 적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는 거의 안 씁니다만, ‘비퍼’ 아닌 ‘삐삐’라는 우리 말로 이름쪽에 글을 박는 사람을 ‘영어도 모르는 시골놈!’이라며 우습게 깎아내리던 일은 먼 옛날이 아닙니다. 회사이름이건 운동경기 선수단이건 오로지 서양말로 제 이름을 갈아치우거나 갈아입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타는 버스이니 마땅히 ‘학교버스’인데, ‘학교버스’라 말하는 학교는 없습니다. ‘스쿨버스’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참에 학교이름도 아예 ‘스쿨’로 바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그만 좀 때려!” “네가 미친 듯이 빨리 하늘에서 돌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천천히 돌겠다고 약속하면, 너를 놓아 줄게. 하루가 길어지면,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일에 열중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네 친구가 되어 줄 거야.” 기운이 빠지고 상처를 입은 태양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제야 마우이는 형들에게 태양을 놓아 주라고 말했습니다. 이날부터 태양은 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였고, 햇빛은 따스하고 유익한 빛이 되었답니다 ..  (40쪽)


 적잖은 글쟁이와 예술가 들께서 ‘우리 말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말이라 한다면, 왜 당신들 스스로 ‘그 아름다운 말로 문학을 하건 책을 쓰건 예술을 하건’ 안 하는지 알 노릇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돈벌이가 되는 일거리는 아니라서,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서양말로 잔뜩 뽐내면서 하고, 멋부리면서 서양차 한 잔 즐길 때 가끔 시를 읊듯 읊는 소리인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누가 쓰는 말인 줄 모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지식인이라든지 많이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닌 줄을 못 깨달았으리라 봅니다. 요사이야, ‘김수영 시인이 느낀 저잣거리 장사꾼 아지매와 할매가 쓰는 말’마저 텔레비전 연속극과 우스갯소리에 물들고 찌들어 참맛과 참멋을 잃었습니다만,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란 바로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말입니다. 길바닥에서 오가는 말입니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넘나드는 말입니다. 바닷물결을 타고 시냇물결을 타는 말입니다. 새와 함께 지저귀고 들짐승과 함께 우짖는 말입니다.


.. 라타는 가장 좋은 연장들을 가져와서 곧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타는 기운은 넘쳤지만 인내심이 부족했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깜빡했지요. 조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성한 원칙을 잊었던 겁니다. 그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를 자르더라도 그 전에 식물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나무나 식물의 마음이 다치지 않고, 숲이 평화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수많은 새들과 곤충들이 풀밭에 누운 나무 위로 후드득하며 구름처럼 날아올랐습니다. 이들은 숲의 신인 타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존중하지 않는 라타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형제를 잘라내면서 허락도 받지 않았으니까요. 이들이 한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오, 라타, 이 나무를 가만 내버려 둬. 제발 가만 놓아 둬. 나무 부스러기들이 날아오르고 뿌리들이 날아올라 다시금 모여들어 나무가 된다네 …….” ..  (59, 63쪽)


 엄마와 아빠가 살아간 대로 딸과 아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대로 딸과 아들도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엄마와 아빠는 딸과 아들한테 오래도록 제 삶을 길들여 놓습니다. 맞추어 놓습니다. 물려주고 이어주고 내려줍니다. 엄마와 아빠가 읊는 말투가 아이들 말투가 되고, 엄마와 아빠가 즐겨먹는 밥이 아이들 즐겨먹는 밥이 됩니다. 집에 갖추어 놓은 엄마와 아빠 책대로 아이들은 책을 만납니다. 자동차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자동차 타기를 아주 마땅히 받아들이며 저희들도 나중에 스스로 차를 장만하여 몰고자 합니다. 자전거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전거를 즐겨탈 뿐 아니라, 자가용 한 번 얻어탈 때 대단히 고마워할 줄 압니다. 늘 걸어다니고 때때로 버스나 전철을 타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걷기를 즐기며 걷는 동안 부대끼는 사람과 삶터를 깊이 돌아볼 줄 아는 가운데, 어쩌다가 자가용을 얻어타면 참으로 고맙게 여길 줄 압니다.

 돈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길들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칩니다.

 저 혼자 하는 생각인지 모릅니다만, 이 나라에서 예부터 오래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돈으로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딸아들을 돈을 생각하면서 낳고 기른 어버이는 옛날에도 있기는 있었을 테지만, 오늘날처럼 갑작스레 늘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느끼고, 또 오늘날처럼 아주 미쳐날뛰듯 돈에만 눈알이 돌아가는 흐름을 키우지도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서양사람이 북중남미 대륙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땅으로 쳐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라고만 말하기는 뭣하지만, 이무렵부터 아주 크게 돈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우리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고 얼이 빠지고 있습니다.
 





 (3)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이라는 책


 어린이책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을 읽습니다. 어린이책인 만큼 글씨는 시원시원합니다. 금세 읽힙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뿌듯해진 가슴으로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마다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 수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쥐도록 이끈 어버이들한테도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까 하고. 어버이 스스로 가슴에 무언가 뿌듯하게 남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책을 스스로 찾아 읽지는 않겠지 하고.


.. 150여 년 전,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과 영국인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오리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오랜 항해를 거친 끝에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영국인들에게 난데없이 지배받게 된 마오리족 사람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 마오리족의 족장들은 속담을 이용하거나 신화와 전설을 끌어들이면서 걱정과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  (7∼8쪽)


 우리는 북미 토박이 이야기를 꽤나 찾아서 읽습니다. 중남미 토박이 이야기도 퍽 찾아서 읽고 노래도 제법 찾아서 듣습니다. 아프리카 토박이며, 인도 토박이며, 호주 토박이며, 태평양 섬나라 토박이 이야기며 줄줄이 찾아서 읽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 토박이 이야기는 거의 찾아 읽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토박이 노래는 한 줌조차 찾아 듣지 않습니다.

 우리네 여느 이야기는, 우리네 살아온 이야기는, 우리네 삶터를 이룬 옛이야기는 조금도 찾아 읽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단군신화’로 두루뭉술하게 엮어낼 뿐이고, 그나마 ‘그리스로마신화’에 단단히 짓눌려 있습니다. 게다가 ‘신화’라는 사슬을 차고 ‘역사’로 자리매김하지 않습니다.

 하기는요, 이 나라에서 ‘역사’라 하면 임금님 이름 외우기하고 땅따먹기하던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가야사람이 어느 곡식을 농사지으며 밥상은 어떻게 차렸는지가 역사책에 적히지 않습니다. ‘한국문화사’에도 이러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구려사람 옷차림과 신발 이야기가 ‘한국문화사’는커녕 ‘한국사’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이야기는 문화로도 예술로도 역사로도 담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북중남미 토박이와 아프리카 토박이와 인도 토박이와 태평양 토박이’ 이야기는 ‘아주 훌륭하고 거룩한’ 이야기로 떠받들면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보듬습니다.


.. 마법의 잠에서 깨어난 대제사장은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애처롭게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티니라우는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투우루우루가 좋아하는 고래인 투투누이를 죽인 사람이었으니까요. 티니라우는 그 자리에서 제사장을 때려죽인 다음, 그대로 먹어 버렸습니다. 티니라우는 이렇게 투투누이에게 복수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들 사이의 전쟁과 식인 풍습이 생겨난 것이랍니다 ..  (88쪽)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가 허술하거나 모자라거나 달갑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있고 눈물겹고 짠합니다. 기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쯤은 우리한테도 얼마든지 있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찾아내어 적바림하지 않았고, 애써 찾아내어 적바림한 사람들 손품은 거의 보람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아직 몇 군데 드문드문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오래된 골목동네’를 어떻게 간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장 가까운 곁에 있는 살갑고 푸진’ 이야기를 캐내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고운 보배로 키울 수 있기도 하지만, 가뭇없이 사라지도록 내팽개칠 수 있습니다. 우리 두 손으로 넉넉한 곡식을 거두어들여 기쁘게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한편, 알맹이인지 쭉정이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나라밖 사람들 뒤꽁무니만 좇다가 길잃은 사금파리 한 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4342.5.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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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의 쌀알
민퐁 호 지음, 최재경 옮김 / 달리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이야기로만 놓고 본다면 별 다섯을 주고 싶지만, 번역과 오탈자가 너무 많았고, 책값 12000원짜리로 만들기보다는, 이야기답게 수수하고 가벼운 책으로 엮었다면 얼마나 좋았으랴 싶은 마음에 별 하나를 덜어 넷만 붙인다................ 아쉽다.



 이 책 하나 105 - 밥 한 그릇, 농사꾼, 지식인, 군대
 : 민풍 호, 《아버지의 쌀알》



- 책이름 : 아버지의 쌀알
- 글 : 민풍 호
- 옮긴이 : 최재경
- 펴낸곳 : 달리 (2009.4.17.)
- 책값 : 12000원



 (1) 밥 한 그릇과 내 삶


 어머니한테서도 배우는 삶이요, 아버지한테서도 배우는 삶입니다. 아름다운 삶도 배우며, 얄딱구리한 삶도 배웁니다. 아름다운 삶을 저버리기도 하지만, 얄딱구리한 삶을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밥을 먹으며 밥알 하나 남기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뜨렸어도 주워먹습니다. 옆지기도 밥알을 남기지 않습니다. 바닥에 떨어뜨린 먹을거리를 모두 주워먹지는 않으나, 집에서는 으레 주워먹습니다.

 언제부터 이러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다만, 아주 어릴 적부터 밥알 하나까지 다 비워야 비로소 밥을 다 먹은 셈이었으며, 조금이라도 남기면 구두주걱이나 어떤 몽둥이로 맞았다는 일은 떠오릅니다.

 맞으면서 배우는 일이란 좋지 않습니다. 맞으면서 가르치는 일도 좋지 않습니다. 지난날 우리 삶자락은, 어버이가 아이를 손찌검과 몸둥이로 다스렸다고 하더라도 이런 가르침과 배움은 아름답지 않습니다. 더군다나, 집뿐 아니라 학교와 마을에서도 온통 손찌검과 몽둥이질만 있다면, 아이들은 아이 깜냥껏 생각힘을 키우지 못합니다.


.. 그 노래는 벼에 관한 노래였다. 그 노래는 볍씨를 뿌리고, 모판에 모종을 기른 다음 새로 갈아둔 논에 조심스럽게 모를 옮겨 심는 과정을 노래했다. 그 노래는 잡초를 뽑고, 물을 주고, 벼 포기가 높이 자라나 초록빛으로 물들기를 기다리고, 그런 다음 잘 익어 누렇게 말라가는 과정을 노래했다. 또한 추수하고, 타작하고, 키질하고, 쌀을 빻는 나날, 그러니까 한 공기의 쌀밥이 만들어지기까지를 노래했다 ..  (41쪽)


 지난날에는 잘 몰랐습니다. 이제 와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이곤 합니다. 그무렵 그렇게나 손찌검과 몽둥이질이 흔해빠진 까닭은, 다름아닌 군사독재라고 하는 서슬 퍼런 몹쓸 정치가 한몫 단단히 했습니다. 남과 북이 서로 으르릉거린다는, 아니 가난에 찌든 북녘 빨갱이가 남녘을 잡아먹으려고 더러운 침을 질질 흘리면서 노려보고 있다고 하는, 새빨간 거짓말이 거짓말 아닌 참말로 여겨지던 문화가 크게 한몫했다고 깨닫습니다.

 틀림없이 북녘에서는 간첩을 남으로 보냅니다. 간첩배도 보내고 미사일도 쏩니다. 그러면 남녘은 무엇을 할까요. 남녘에는 미국에서 가지고 온 핵무기를 곳곳에 숨겨 두고 있었습니다(저 같은 꼬맹이는 나중에 머리통이 굵어진 다음에 비로소 알았습니다만). 남녘에서도 북으로 간첩을 보냅니다. 다만, 남녘이 보내는 사람은 ‘북파공작원’이라는 이름을 붙입니다. 지난 정권 때에야 비로소 ‘북파공작원’이 있음을 나라에서 밝혔습니다만, 북녘이 남으로 보낸 간첩 숫자 못지않게, 남녘이 북으로 보낸 간첩이란 대단히 많았습니다. 저는 군대에서 세월을 보내던 1995∼97년에 북파공작원을 처음 알았는데, 그때 제가 있던 강원도 양구 산골짜기 군부대에는 “북파공작원으로 뽑아들여 가르치려 하다가 부적격판정을 받은 ‘무연고 입대차출자’(법에 따르면 군복무예외자이나 배운 것 없고 연고도 없어 말 않고 군대로 뽑아들인 사람)”가 제법 많이 들어와 있었습니다.

 운명이라면 운명이고 재수가 없다면 재수가 없는 노릇이겠지요. 저는 눈과 코가 안 좋아, 군입대 신체검사에서 면제를 받았어야 할 몸입니다. 그렇지만 줄을 잘못 선 탓에 군대에 끌려갔고, 군대에 끌려가서도 남녘땅 군부대에서 가장 깊숙한 데로 꼴아박혔으며, 이렇게 꼴아박힌 탓에 ‘어느 책에도 안 나온 갖가지 군대 비리와 잘잘못’을 몸소 부대끼고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어릴 적 살던 옛동네 이웃 아저씨가 우리 꼬맹이(국민학생이었을 때라서)를 둘러앉히고 당신이 북파공작원으로서(그때에는 북파공작원이라 하지 않고 유디티라고 말씀했습니다) 몰래 북녘으로 들어가서 평양에도 가고 김일성궁에도 가고 뭐도 하고 했다는 이야기를 입을 쩍 벌린 채 듣던 일이 무엇을 뜻했는가를 군대를 마치면서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북파간첩이건 북파공작원이건 또 알파벳으로 줄여 가리키는 무슨 이름이건, 또 남파간첩이건 남파공작원이건 또 무슨무슨 이름이건, 우리 세상은 더없이 뒤죽박죽이요 숨겨진 것투성이에다가 뒤틀린 얼거리일 뿐임을 차츰 느꼈습니다.


.. 천천히 인톤은 자신의 논 두 군데서 수확한 벼를 탈곡한 쌀더미 옆에 쪼그리고 앉았다. 자신을 촘촘히 둘러싼 사람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인톤은 한 줌 가득 쌀을 퍼서는 쌀알을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게 했다. “올해로 50년째야.” 특별히 누구에게 한 말은 아니었다. “내가 이 논에서 벼농사를 지은 지가. 그리고 50년 동안, 내가 키운 곡식의 절반을 빼앗겨 왔어.” 인톤은 눈앞에 펼쳐진, 햇볕 아래 그루터기만 남은 채 메말라 있는 논을 바라보았다. “난 이 논에 대해서라면 구석구석 모르는 게 없지. 내가 갈아엎고, 파종하고, 김을 매고, 비료를 주고, 수확하고, 그 벼를 탈곡해서 쌀을 얻었으니까. 난 이 땅을 내 땅처럼 생각했어.” 인톤의 눈에서 꿈꾸는 듯한 빛이 사라지더니, 별안간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띱.” 인톤이 가장 친한 친구에게 말을 건넸다. “자네의 그 1만 평방미터가 넘는 땅 말인데, 그거 자네 땅처럼 생각하지 않아?” 룽 띱이 고개를 끄덕였다 … “사실은 그렇지 않지. 저기 보이는 저 땅은 우리 소유가 아니라 손가락에 흙 한 톨 묻혀 본 적이 없는 어떤 사람의 것이지. 매년 우리가 수확한 곡물의 절반을 가져가는 작자 말이야 … 왜일까? … 왜 우리가 그렇게 많이 주어야 하지? 우리 자신과 우리 아이들이 먹을 것도 충분하지 않을 때조차 말이야. 왜 우리는 그렇게 용기 없고, 멍청하고, 고분고분해야만 하는 거지?” ..  (126∼128쪽)


 군대라는 곳은 군대 나름대로 저를 여러모로 가르쳤습니다. 어머니는 어머니 나름대로 저를 가르쳤고, 아버지는 아버지 나름대로 저를 가르쳤어요. 아버지는 제가 김치를 안 먹는다고 밥상머리에서 윽박지르기만 하였고, 어머니는 아버지 눈치를 보아 가며 김치를 억지로 먹이려 하시면서도 맵지 않은 김치를 얹어 주시곤 했습니다.

 나이가 들어 이제는 어릴 적처럼 밥상머리에서 꿀밤이나 회초리를 맞지 않아도 된 이즈음 제 밥버릇을 돌아봅니다. 저는 매운 먹을거리를 못 먹습니다. 고추장은 곧잘 즐기긴 했어도 고추는 못 먹습니다. 고추가루 또한 젬병입니다. 이제는 고추장에도 거의 손을 안 댑니다만, 하얀김치는 먹어도 빨간김치는 속이 뒤집어집니다. 찬국수 또한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이런 제 배속인 탓에 찬국수 물뿐 아니라 동치미 물도 몸에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한국사람이 어찌 찬국수나 동치미를 못 받아들이느냐 한다면 할 말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사람이 똑같지 않잖아요. 얼굴과 몸매와 목소리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생각과 마음과 넋만 다른 사람이 아니라, 몸속 얼거리도 다릅니다. 어떤 이는 허파가 좋아 오래 달려도 안 지칩니다. 어떤 이는 팔심이 좋다든지, 어떤 이는 간이나 염통이 안 좋다든지 합니다. 저 또한 배속 얼거리가 여느 사람과 같지 않아 ‘빨간 양념’이 깃든 반찬은 아예 손을 댈 수 없는 몸입니다. 다만, 이런 제 몸을 우리 아버지나 어머니는 조금도 알아채지 못했을 뿐 아니라, 알아채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면 군대에서 밥을 어찌 먹었느냐 궁금해 하실 분이 있으리라 봅니다. 네, 군대에서는 참말 아무 걱정 없이 밥을 먹었습니다. 제가 몸담은 군부대는 가장 ‘끄트머리에 처박힌 곳’인 탓에, 언제나 보급품은 ‘윗줄에서 다 잘라먹’어 주시면서, 찌끄레기 가지고 밥을 해 먹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군대란 데가 요즈음도 그리 나아지지 않았고, 예전에는 더 나빴잖습니까. 때때로 ‘빨간 깎두기’나 ‘빨간 배추김치’가 턱없이 모자란 만큼이기는 했지만 배급으로 티끌만큼 오기는 했으나, 우리가 쓸 수 있는 ‘빨간 양념’은 거의 없었고, 이런 까닭에 어떤 반찬도 ‘빨간 물’이 들지 않았으며, 게다가 된장국(찌개 아닌 멀건 국)은 양배추를 숭숭 썰어 때깔만 누런 국물이기만 했습니다. 다만, 군부대는 깊디깊은 산골짜기였기 때문에, 사단장이나 연대장이나 군간부들이 들이닥칠 때마다 ‘취나물 사역’을 해서 몇 마대씩 갖다 바쳤는데, 이러한 일을 겪으며 우리들(군인)은 우리 먹을거리를 산에서 얻는 슬기를 몸에 익혔습니다. 이러면서 저 또한 비로소 제 몸에 맞는 먹을거리란 들과 산에서 나는 나물임을 알았고, 날로 먹는 나물이나 살짝 데친 나물만큼 제 몸이 좋아하는 먹을거리가 따로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 빈민가를 통과하는 동안, 진다는 이상하게 편안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아기 엄마들이 방금 목욕을 시킨 아기들의 얼굴에 하얀 밥풀을 발라 주고 있는 것이 보였다. 늙은 남자들은 시골 사람들이 흔히 하는 방식대로 난초나 레몬그라스 화분에 물을 주고 있었다. 소년들은 남들이 보는 곳에서 샤워를 했고, 머리에는 하얀 비누거품이 덮여 있었다. 이 지역은 방콕에 속해 있지만, 이곳에 사는 사람들은 시골 출신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마치 그들은 대도시의 한가운데에 자기들만의 임시 마을을 만들어 둔 것 같았다 ..  (218쪽)


 저와 오래 사귀어 온 동무라고 해서 제 몸을 잘 헤아려 주지 않습니다. ‘빨간 물’ 든 먹을거리는 손도 안 대는 제 밥버릇을 모르고, 찬국수 물을 마시면 곧바로 배탈이 나 여러 날 죽은 듯 엎어져야 하는 줄 모르기 일쑤입니다. 우스갯소리를 하자면, 누군가 저를 괴롭히고 싶다면 빨간김치와 찬국수를 하루에 한 번씩만 먹여도 됩니다. 저한테 이보다 더 끔찍한 고문이란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런 밥버릇을 깨닫고 나니, 저 스스로 그리 달갑지 않게 여기던 제 몸을 바로보면서 제 몸을 옳게 사랑하는 길을 찾았습니다. 내 몸이 이러하다면 다른 사람들 몸은 어떠할까 하는 데로 눈길을 뻗칠 수 있었습니다.

 제 몸이 여느 사람들 몸과 비슷하거나 같았다면 깊이 생각하지도 않았을는지 모르고, 그렇다 하여도 깊이 생각했을는지 모르나, 아주 오래 걸려서야 비로소 이웃을 생각하지 않았으랴 싶고, 생각한다고 해 보아야 그지없이 더디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몸이 아플 때 내 몸뿐 아니라 나보다 더 몸이 아플 사람들 마음앓이와 몸앓이를 돌아본다고 하듯, 저 또한 제 몸에 깃든 온갖 모습을 느끼면서 이웃사람 마음앓이와 몸앓이를 살포시 들여다보는 눈을 기를 길머리를 텄습니다. 이 길머리는 어떤 높거나 대단한 학문자리보다는, 우리가 늘 부대끼는 가장 낮으면서 너른 자리에서 터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이를테면, 농촌봉사활동이라는 자리에 가는 동무나 선후배 가운데, ‘몸쓰는 고된 일은 마다 않는다’고 하면서도, 고맙게 받아먹는 밥상에서 밥알과 반찬을 깨끗이 비우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데에서 몸과 마음이 동떨어지거나 생각과 몸가짐이 어긋나는 대목을 느꼈습니다. 입으로는 진보니 개혁이니 떠들어도 술자리나 밥자리에서 젓가락으로 들쑤셔 놓고 다 비우지 않아 ‘밥쓰레기’가 잔뜩 나오도록 하는 분들 모습을 보며 언제부터인가 ‘밖에서 사람을 만나는 날’에는 빈 도시락통을 챙겨 ‘남는 안주나 반찬이나 밥’을 옮겨 담아 제가 집으로 가져가서 먹는 버릇을 들였습니다.


.. “정의라구요!” 진다는 격렬하게 말했다. “오빠는 정의를 맛볼 수 있나요? 평등을 냄새 맡을 수 있나요? 오빠가 말하는 그 모든 멋진 말들은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는 거죠? 난 내가 맛볼 수 없고, 냄새 맡을 수 없고, 내 손에 쥘 수도 없는 것들을 위해 내 인생을 걸 수는 없어요. 비 온 뒤의 흙이라면 너무나 촉촉해서 달콤한 냄새를 풍기죠, 그리고 타마린드 순도 우리의 혀에 환상적인 맛을 남기죠. 이러한 것들은 진짜예요. 난 이러한 것들을 위해서만 살 거예요 … 난 오빠가 나와 함께 살았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이전에 그랬던 것처럼 땅에서 농사를 지으며 일하길 바라요. 그래요, 통통한 아기들도 몇 명 함께 낳아서 키우고 싶어요. 난 살고 싶어요. 그리고 곡식을 기르고, 행복하게 살고 싶어요. 그게 그토록 잘못됐나요?” ..  (320∼321쪽)


 냉장고를 안 쓰는 삶은 옆지기가 가르쳐 주었습니다. 저한테 있던 작은 김치냉장고는 먹을거리를 담는 통이라기보다 물과 술을 시원하게 마실 수 있게끔 간수하는 통이었습니다만, 물 마시는 버릇을 조금씩 찬물 아닌 여느 물로 바꾸었고, 찬술을 마시고 싶다면 그때그때 구멍가게에서 사 오면 됨을 익혔습니다. 가게에서는 언제나 냉장고를 돌려야 하니, 냉장고를 쓰더라도 하나라도 덜 쓰도록 해야 한달까요. 그리고 우리 먹을거리는 틈틈이 저잣거리 마실을 하면서 꼭 그날이나 그 이듬날까지 먹을 만큼만 장만하고요.

 냉장고에 그득 채워 넣는 삶이 되면 더 싼 먹을거리를 찾을밖에 없고, 더 싼 먹을거리를 찾는다 하여 ‘먹을거리 사는 데 쓰는 돈이 줄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먹을 부피보다 더 사들이게’ 되고, 이렇게 싼값에 더 사들이면서, 나라안 농사짓기로는 부피가 모자라서 나라밖에서 곡식을 사들이는 얼거리로 나아가지 않으면 안 됩니다.

 으레 ‘중국산-국산’을 따집니다만, 우리 삶자락은 일찌감치 ‘중국산 없이 못 살게’ 되었습니다. 국산만으로 우리 밥상을 차릴 수 없습니다. 우리 스스로 이 나라 농사꾼이 거둔 곡식만큼 밥을 먹자면, 우리 스스로 씀씀이를 줄여야 합니다. 냉장고를 버려야 합니다. 그날그날 먹을 만큼만 알맞게 장만해서 먹어야 합니다. 이러는 가운데 갖가지 농약과 비료를 쓰며 농사꾼 스스로를 괴롭히는 농사가 되지 않도록 하자면 생활협동조합에 한손을 거들어야 하며, ‘돈 많은 이들이 사먹는다는 비싼 유기농’이 아니라 ‘돈 적은 이들 스스로 알맞는 값에 함께 나누는, 이러는 가운데 생산자와 소비자 모두한테 기쁜’ 틀거리를 더욱 튼튼히 다지는 일을 도와야 합니다.


.. “불쌍한 벼 포기들 … 난 벼 포기들이 계속 초록색이었으면 좋겠어요.” 아버지가 웃음을 터뜨렸고, 그 웃음은 시원한 바람처럼 그녀의 뒤통수를 간질였다. “하지만 계속 초록색으로 있으면 씨를 맺을 수 없단다, 꼬마야. 그리고 씨앗들이 없이는, 벼가 다음해에 곡식을 만들 수 없고, 어른 벼들이 죽어야만 새로운 벼들이 그 뒤를 이어서 다시 자랄 수 있는 거란다.” “왜요?” “삶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란다. 늙은 생명들이 그들의 힘을 포기해야만 새로운 생명들이 자랄 수 있지.” “왜요?” “그게 바로 생명이 이어지는 방식이니까.” “하지만 왜요?” “왜요, 왜요, 왜요!” 아버지는 껄껄거리며 진다를 들어올려 공중으로 몇 번 던졌다 받았다 했다. 심장이 멎을 듯 아슬아슬한 순간 동안, 그녀는 갈색 들판 위로 날아올랐다가, 다시 자신을 기다리는 아버지의 튼튼한 팔을 향해 날아갔다. “왜냐고? 왜냐하면 아버지가 널 사랑하기 때문이지. 그게 바로 이유란다!” ..  (344∼345쪽)


 그렇지만 꽤 많은 분들은, 이들 가운데 대단히 많은 숫자를 차지하는 ‘스스로 진보라고 생각하는 분들’이나 ‘스스로 가난하다고 생각하는 분들’은 생협을 가까이하지 않고, 찾아보려 하지 않으며, 어깨동무하려 하지 않습니다. 으레 바빠서 날마다 저잣거리 마실을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스스로 왜 바쁜 줄 생각하지 못하고, 그렇게 바쁘도록 매인 일이 무엇인지 헤아리지 못하며, 나 스스로 아름다운 진보를 이루어 내는 삶이 아니라면 세상사람한테도 아름다운 진보를 나눌 수 없음을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마, “밥이 하늘이다”라든지 “밥 한 그릇에 우주가 담겼다”라든지 “밥 한그릇에 담긴 즐거움과 고마움” 같은 말은 누구나 알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다만, 밥이 왜 하늘이며, 밥 한 그릇이든 나락 한 톨에든 왜 우주가 담겼는지 깨달아 보고자 나서는 몸짓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가만히 살피면, 다른 사람을 말하기 앞서 저부터 그러하였습니다. 어릴 적부터 몸에 밴 ‘밥풀떼기 하나라도 샅샅이 비우는’ 밥버릇을 왜 들여야 했는지는, 빨간김치를 먹을 수 있도록 다그친다 하여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농사는 온누리 사람이 살아가는 밑바탕”이라는 글월을 외우고 다닌다 한들, 몸과 마음이 하나되어 내 밥그릇을 보듬지 않고서야 깨달을 수 없습니다.


 (2) 아기와 내 삶


.. “저희는 학생으로서, 우리 나라의 농민들이 어떻게 살고 있는지를 더 많이 알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 “여태껏 아무도, 더욱이 방콕에서 온 대학생들이라면 말할 것도 없고, 여기서 그냥 살고 싶다고 한 적은 없었거든.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자네들은 여기서 뭘 하려는 거지?” ..  (44∼45쪽)


 아기가 잠들어 있습니다. 아기가 잠들어 주었기 때문에, 아빠는 조용히 일어나서 글을 쓰고 기저귀를 빨고 할 수 있습니다. 아기가 깨어 있을 때에는 엄마이든 아빠이든 할머니이든 외삼촌이든 누구 한 사람 옆에 붙어 함께 놀아야 합니다. 다른 일을 하면서 아기와 놀 수 없습니다. 오로지 아기를 생각하며 아기와 함께 놀아야 합니다.

 아기는 엄마젖을 물어야 비로소 새근새근 잠듭니다. 잠투정도 많고 깊이 잠들지 않고 두어 시간 자고 나면 바로 깨어나며 골머리를 앓게 하지만, 아기는 잠들 무렵에는 언제나 엄마젖을 뭅니다.

 엄마젖은 엄마가 먹는 밥으로 이루어진 젖입니다. 엄마가 제 살을 바쳐서 내어주는 먹을거리입니다. 엄마는 이 땅을 떠도는 바람을 마시고, 이 땅에 뿌리내린 곡식을 먹으며, 이 땅에 내리비치는 햇볕을 머금습니다. 아기가 먹는 젖이란 바람과 곡식과 햇볕이 고루 섞여 있습니다.


.. 닭장이 비고 돼지우리가 버려진 것은 그들(농사꾼들) 잘못이 아니었다. 그들은 가뭄 때문에 키우던 가축을 다 내다 팔지 않을 수 없었다. 그들은 최선을 다했고, 정말이지 부끄러워할 것은 전혀 없었다 … (도시에서 온 대학생) 소리는 봉지를 다 비우더니, 진다가 막을 틈도 없이 봉지를 구겨서 불 속에 던져 버렸다. 진다는 종이봉지에 불이 붙는 것을 보았다. 구멍 하나 없는 두꺼운 갈색 종이가 불타 버리다니, 그건 낭비였다! … 스리는 말끔한 하얀 손수건을 꺼내 팔에 튄 국물을 닦았다. “음식이겠지…… 그렇지?” … “당연히 이것도 음식이죠.” 진다가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스리는 여전히 얼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음식이라고…… 우리가 먹을 거야?” 스리가 물었다.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진다는 솥을 불에서 내려 구석으로 밀어넣었다. “아내, 돼지들한테나 먹여야죠!” 진다가 소리쳤다. “우리 집 마당에 있는 돼지우리에 새끼 돼지들이 우글거리는 거 못 봤어요?” … 스리는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보고만 있었다. “네드가 그랬어. 태국 대학생들은 손을 잘 쓰지 않는다고.” 스리가 중얼거리듯 말했다. “그거야말로 오늘날 태국 지식인들이 가진 가장 큰 문제의 하나라나. 우리가 이제까지 배운 거라곤 그저 생각하는 것뿐이야.” 스리가 하는 말은 교과서에서 읽은 것을 암송하는 것처럼 들렸다. ‘당연하지.’ 진다는 속으로 맞장구쳤다. ‘그러니 당신들은 우리 돼지우리들을 보고도, 텅 비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못했겠지?’ ..  (61, 64∼67쪽)


 젖을 먹는 아기는, 엄마가 싱그럽고 시원한 바람을 마시면서 싱싱하고 알찬 곡식을 먹으며 따뜻하고 맑은 햇볕을 머금어야 좋은 먹을거리를 받아들입니다. 아기 엄마가 싱그럽지도 시원하지도 못한 바람을 마셔야 한다면, 싱싱하지도 알차지도 못한 곡식을 먹어야 한다면, 따뜻하지 맑지도 않은 햇볕을 머금어야 한다면, 배는 무언가로 가득 찰는지 모르나, 아기가 아기답게 자라나는 참힘을 얻기란 수월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아기를 낳아 기르는 어버이라 한다면 마땅히 우리 세상을 읽어야 합니다. 마땅히 우리 세상을 아름다이 가꾸는 일을 해야 합니다. 마땅히 우리 세상을 깨끗하게 돌보는 매무새로 살아야 합니다. 돈만 버는 일이 아니라 돈을 벌되 세상을 맑고 밝게 키우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저 즐거운 놀이를 찾아서 누리되 내 이웃과 함께 아름다워지는 길을 걸어야 합니다. 내 살림을 알뜰히 꾸리되 우리 세상이 어찌 흐르는가를 꿰뚫으면서 바른 쪽에서 벗어나지 않게끔 다스려야 합니다.

 아기를 낳아 기르지 않는 사람이라 할 때에도, 아기란 내 아기뿐 아니라 이웃 아기가 있고, 형이나 언니네 아기가 있으며 동무나 선후배네 아기가 있습니다. 이웃집 아기가 있고,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할 세계 여러 나라 아기가 있습니다. 이리하여, 나 스스로 혼인하여 아기를 낳지 않는 살림살이라 하여도 세상을 옳게 읽어야 합니다. 우리 세상을 아름다이 가꾸는 일을 해야 합니다. 우리 세상을 깨끗하게 돌보는 매무새로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이라고 할 까닭 없이, 아기가 아기답게 살아가고 자라날 수 있는 터전이란, 어른인 우리 스스로도 더없이 즐겁고 기쁘고 신나고 아름다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니까요. 아기가 아기답게 살 수 없는 터전은 어른도 어른답게 살 수 없는 터전입니다.


.. 진다는 두려움에 찬 눈으로 그 족쇄를 쳐다보았다. 양쪽 발목에 각각 두꺼운 쇠고리를 채운 다음, 그 두 개의 고리를 다시 두꺼운 쇠사슬로 함께 연결해 두었다. 그에게만 족쇄가 채워져 있었다. 일개 농부가 마약 암거래상이나 도박꾼들보다 더 위험한 죄수 취급을 받는단 말인가? … “그렇게 놀란 표정 짓지 마, 동생! 요즘엔 그렇게 드문 일도 아니거든. 수많은 나이 어린 농촌 여자들이 똑같은 일들을 하고 있어. 그리고 하나같이 사연은 똑같지. 아버지가 땅을 팔아야 했고, 어머니는 패물들을 전당포에 팔고, 그러고 나서 딸은 가족의 생계를 돕기 위해 자기가 팔 수 있는 유일한 것을 팔게 되는 거지. 바로 자신의 몸.” … “더 숙이라니깐!” 솜분이 꾸짖었다. 훨씬 더 머리를 숙이자 몸이 거의 반으로 접힐 지경이었다. 진다는 마을의 주지스님에게 음식을 공양할 때도 이렇게까지 몸을 숙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지금은 이렇게 낮게 몸을 숙여야 한단 말인가? ..  (164, 190, 209쪽)


 아기를 돌보느라 엄마나 아빠는 몹시 고단합니다. 아기가 태어나기 앞서부터 태어난 뒤로 잠 한 번 느긋하게 잔 적이 없습니다. 하루 한때 여태까지 해 온 일에 온힘 쏟아 즐겨 본 적이 없습니다. 그러나, 아기가 있어 주었기 때문에 잠을 미루면서까지 할 만한 일이 무엇인가를 깨닫습니다. 아기와 함께 살기 때문에 내가 더 힘을 내어 바칠 만한 일은 어디에 있는가를 느낍니다.


.. 진다는 단단하게 움켜쥔 스리의 주먹을 붙잡고는 부드럽게 손가락을 펴 주었다. 진다의 검게 타고 못이 박인 손에 비하면 스리의 손은 하얗고 부드러웠다. 진다는 스리의 손을 부드럽게 쓰다듬어 주었다. 이건 얼마나 이상한 일인가, 하고 진다는 생각했다. 스리 언니는 모든 것을 가졌고, 나는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도 여기서 그녀를 위로해야 하는 건 나라니 … 도시에 사는 사람들은 매일 이렇게 잘 먹었단 말인가? 네드와 소리가, 진다네 집에서 먹는 부서진 쌀로 지은 밥과 생선소스를 그렇게 이상하게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 진다는 그 신발들을 내려다보며 바깥에 서 있었다. 신발들 대부분은 하얗고 깨끗한 캔버스 천으로 된 테니스화였지만, 가죽구두도 있었고, 어떤 것은 고무 슬리퍼였고, 심지어 한 쌍의 반짝이는 하이힐도 있었다. 천천히 진다는 자신의 고무 샌들을 벗어 놓았다. 진다의 신발만 유난히 낡고 때가 묻어 갈색으로 변해 있었다. 흙이 묻은 자국이 있는 신발도 그녀의 신발뿐이었다 … 스리는 작은 가방에서 열쇠 다발을 꺼내더니 빨간 차의 앞문을 열었다. “내 말 잘 들어.” 그녀가 마른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난 지금, 네 가족이 30년 걸려야 벌 수 있는 돈보다 더 비싼 차를 타고 떠나려는 주제에 네 마을에 돌아가고 싶다는 말을 하고 있어. 어쩌면 까몰이 옳을지도 몰라, 진다야. 나야말로 겁쟁이 위선자인 거야.”..  (214, 232∼233, 242쪽)


 아기와 옆지기와 제가 오늘 하루 머무는 일산 옆지기 식구네 집에서 창밖을 내다보면 새로 올려세우는 아파트가 퍽 많습니다. 인천에서 일산으로 오는 전철길에서도 북한산을 에워싸며 새로 올라서는 아파트를 대단히 많이 구경합니다. 우리 사는 인천에도 곳곳에 새로 올려세우는 아파트를 끝없이 바라보아야 합니다.

 요즈음, 파주에 있는 대안학교 아이들하고 자전거 공부를 하고 있는데, 파주책도시에 있는 대안학교를 찾아가 보면 학교 둘레에 큼직큼직 선 출판사 건물은 많은데, 우리 나라 곳곳에 수없이 올라서는 아파트마냥 ‘자연 삶터를 헤아린 마음결’은 조금도 찾아보지 못합니다. 시늉이라도 햇볕 전지판을 달아 놓고 승강기나 계단 등불을 밝힌다든지, 빗물통을 달아 뒷간 물 내릴 때라도 쓴달지 하는 마음씀이란 하나도 없습니다. 오로지 돈으로 세우고, 오로지 돈으로 사고팔며, 오로지 돈을 들여 관리비 내고 전기 쓰고 가스 쓰고 물 쓰는 아파트요 건물들일 뿐입니다. 이러한 아파트와 건물은 두 다리나 자전거가 아닌 오로지 자가용으로만 오가도록 합니다.

 아파트를 바라보고 건물을 바라보면서 생각합니다. 이런 집이건 저런 집이건 다들 아이를 키우는 사람들일 테고, 아이로 자라온 사람일 테며, 둘레에 조카나 어린 동생이 있을 텐데, 이 사람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는지를. 아이 생각을 넘어 내 생각을 하고 내 집 생각을 하고 내 식구 생각을 한다 할 때에도 이렇게 아파트를 세우고 건물을 세워도 될는지를.


 (3) 어린이책 《아버지의 쌀알》은 어린이책일까


 태국사람 삶과 발자취를 담은 어린이책 《아버지의 쌀알》을 읽습니다. 이 책에 담긴 이야기는 꾸민 이야기가 아니라, 참말로 있던 이야기라고 합니다. 1970년대에 태국에서 일어났던 일이요, 태국땅 농사꾼이 겪은 아픔이라고 합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이야기는 태국땅 농사꾼만 겪은 일이요 아픔은 아니구나 하고 느끼는 한편, 세계 어느 나라 농사꾼이든 똑같은 길을 걸었고 세계 어느 나라 땅임자이든 똑같은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세계 어느 나라 권력자와 지식인이든 똑같은 몸짓으로 살았다고 느낍니다.


.. 진다도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그래요. 아버지가 이렇게 침울해 하시는 건 처음 봐요. 올해는 수확이 너무 나빠서 두싯에게 절반씩이나 뺏기고 나면, 우리 먹을 곡식이 충분치 않을 테니까요.” “왜 절반이나 줘야 해?” 네드가 소를 씻기면서 말했다. 진다는 못 믿겠다는 눈으로 네드를 쳐다보았다. 하도 바보 같은 질문이라서 진다는 네드가 그걸 물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막상 대답하려 하니, 마땅한 설명을 찾기도 쉽지 않았다. “왜냐고요? 그러니까 왜냐하면…… 왜냐하면 그냥 그렇게 해 왔으니까요. 우리는 농지를 빌리는 조건으로 수확의 절반을 주기로 했거든요. 그게 다예요.” “하지만 왜 절반이냐고?” … “만약 싸움에서 진다면, 우리는 땅과 곡식, 집을 잃고 말 거야. 자칫하면 우리 목숨까지도.” “하지만 이장님, 싸움에서 이긴다면 얻게 될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네드가 주장했다. “뭐 말인가? 한두 줌의 쌀 말인가?” “아니죠. 더 나은 음식, 더 건강한 아이들, 더 밝은 미래죠.” “말뿐이야.” 인톤이 콧방귀를 뀌었다. “꿈일 뿐이지.” ..  (99, 103쪽)


 《아버지의 쌀알》에 나오는 마을 어르신 ‘인톤’을 비롯한 모든 농사꾼들은, 당신들이 태어나기 앞서부터 당신들 아이를 낳고 살아가는 오늘날까지 어느 한 번도 ‘땅에 바친 땀을 내 배를 채우는 보람’으로 맛보지 못했습니다. 터무니없는 소작삯을 바쳐야 했고, 엄청나게 소작삯을 챙기는 땅임자는 도시에서 떵떵거리면서 살아갑니다. 도시에서 ‘시골마을 문제’를 풀겠다고 생각하는 지식인들은 언제나 책상물림으로 말다툼을 일삼다가 때때로 군중집회를 열지만, 총과 몽둥이와 깡패를 앞세우는 정부마냥 똑같이 총과 몽둥이를 들어야 한다는 생각에서 헤어나지 못합니다. 평화를 찾는 길을, 아름다움을 찾을 길을, 즐거움을 찾아나설 길을 밝히지 못할 뿐더러 느끼지 못합니다.


.. 다시 정치 이야기잖아. 진다는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그건 도시 사람들이나 해당되는 문제다 … “오빠는 총을 쏘고, 사람들을 다치게 하고, 그들을 죽일 건가요? … 집회 때 그 사람들이 우리에게 했던 것과 같은 방법으로? … 사람들을 죽이는 일은 … 절대로 그렇게 간단하지 않아요.” ..  (174, 319쪽)


 ‘진다’ 같은 농사꾼 아가씨가 태국 방콕에서 느끼는 외로움은, 이 나라 농사꾼들이 서울에서 느끼는 외로움과 매한가지입니다. 태국 농사꾼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흐르는 태국 정치 흐름은, 한국 농사꾼 삶하고는 동떨어진 채 굴러가는 한국 정치 흐름과 마찬가지입니다.

 태국은 방콕으로만 이루어진 나라이고, 한국은 서울로만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태국 지식인은 오직 방콕에만 모여들고 있으며, 한국 지식인은 그저 서울에만 모여들고 있습니다. 태국 방콕은 태국 시골에서 젖줄을 빨아들여 머리만 디룩디룩 커지고 있으며, 한국 서울은 한국 시골에서 젖줄을 뽑아들여 머리만 대롱대롱 커지고 있습니다.


.. 마을 사람들도 집 밖으로 뛰어나와 하늘을 쳐다보며 웃고 있었다. 어린아이들은 진흙이 묻은 옷을 벗어 버리고 맨몸으로 따뜻한 빗속을 뛰어다녔다. 아이들의 발가벗은 갈색 엉덩이들이 비에 젖어 번들거렸다. 아낙들은 약초가 심겨진 광주리들을 빗속으로 옮겨 놓았고, 그러는 동안 남자들은 지붕에서 떨어지는 비를 받기 위해 대나무로 만든 배수관 아래에 유약을 바른 항아리들을 밀어넣었다. 한 늙은 남자는 자기 뜰의 구석에 홀로 선 채, 얼굴을 높이 쳐들고서 혀로 빗방울을 받아먹고 있었다 … 할머니가 고개를 저으며 미소를 지었다. “하던 일이나 계속하려무나 … 빗속을 뛰어다녀. 나도 뛸 수만 있다면, 당장 바깥으로 나가 달리고 있을 거야!” … 달리는 동안 맨발바닥에 밟히는 땅은 부드럽고 유연했다. 진흙을 다시 느낄 수 있다니, 얼마나 기쁜 일인가! … 비는 얼마나 멋진 선물인가! 이렇게 거의 말라가던 모들도 다시 살아나, 줄기를 꼿꼿하게 위로 쳐들고 있었다 .. (338∼339, 348쪽)


 책을 덮고 생각합니다. 《아버지의 쌀알》은 어린이책이라는 이름을 달고 나왔지만, ‘어른책’이라는 이름을 달았으면 ‘그냥 문학’이라 하지 않았겠느냐고. 이러면서 어른들이 먼저 읽고 생각하는 작품이 되지 않았을까 하고.

 어린이책이라면 어린이만 읽는 책이라고 잘못 생각하기 일쑤인데, 어린이책이란 어린이부터 누구나 읽는 책입니다. 작품이건 문학이건 무엇이건 ‘어린이가 함께 읽을 수 있는 눈높이로 다스린’ 책이 바로 어린이책입니다.

 한결 쉬우며 부드럽고, 더욱 살가우며 따스합니다. 좀더 아름답고 눈물겹습니다. 훨씬 사랑스럽고 믿음직합니다.

 아버지가 거두는 쌀알은 어머니가 함께 거두는 쌀알입니다. 어머니가 함께 거두는 쌀알은 할머니가 예부터 거두어 온 쌀알입니다. 할머니가 예부터 거두어 온 쌀알은 아버지와 어머니를 낳아 기르던 아버지가 나란히 거두어 온 쌀알입니다.

 이 쌀알은 누구 손에서 나와 누구 손을 거쳐 누구 입으로 갈까요. 이 나라 한국에서 우리가 나날이 받아먹는 쌀알은 어디에서 어떤 손길로 나와 어느 자리에서 어느 손길을 거쳐 우리 입으로 들어올까요. (4342.5.27.물.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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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김선주 지음 / 삼인 / 200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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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교회가 아름답다
 [잠깐 읽기 35] 김선주,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 책이름 :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 글 : 김선주
- 펴낸곳 : 삼인 (2009.5.18.)
- 책값 : 11000원



 (1) 교회와 우리 삶터


 우리 나라에 예배당이 많다고 느낀 때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던 제 국민학교 3학년인가 4학년인가 하던 때가 처음입니다. 서울에 있던 작은아버지 댁에서 숨을 거둔 할아버지 주검을 충남 당진에 있는 시골집 산등성이로 어른들이 힘겨이 상여 메고 올라가던 그날 밤 늦게 버스를 타고 인천집으로 돌아오는데, 다른 어른들은 모두 지치고 힘들어 곯아떨어지셨지만, 저는 웬일인지 잠이 오지 않아 어두운 밤길을 창밖만 내다보면서 왔습니다. 그때 스쳐 지나간 길이 어떤 길이었는지 하나도 모릅니다만, 깊디깊이 어두운 밤에 시골에서건 도시에서건 예배당 빨간 십자가가 몹시 많았던 일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습니다. 하루아침에 저승사람으로 바뀐 할아버지 생각이 겹쳐서 그랬는지, 아니면 이무렵 학교 선생 가운데 누군가가 ‘우리 나라에는 교회가 너무 많다. 그리고 밤마다 빨간 불을 켜 놓는 모습도 보기 나쁘다’ 하고 읊조렸기에 그 말을 떠올리며 ‘그래, 선생님 말이 맞네. 교회 참 많네. 구역질 나게 많네.’ 하고 생각했기 때문인지는 모릅니다.


.. 그는 또 다른 설교에서 이명박 장로를 찍지 않으면 “내가 생명책에서 지울 거야”라고 했다. “생명책에서 지울” 수 있는 권리를 하느님이 아닌 목사가 행할 수 있다는 말은 자신이 곧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이 역시 애교 섞인 설교의 테크닉쯤으로 이해하고 넘어갈 수도 있지만, 방자하기 이를 데 없는 짓이다. 어느샌가 목사가 하느님의 자리에 선 것이다. 신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을 지배하고 그들의 정신과 영혼까지 장악하려는 권력자가 되어 버린 것이다 …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존재보다 눈에 보이는 담임 목사에게 신앙의 구체적 지향점을 찾으려는 신도들의 미숙한 정신을 목사가 올바로 인도하지 못할 때, 목회자는 자신도 모르게 하느님의 자리에 앉게 된다 ..  (19∼20, 33쪽)


 그 어릴 적, 우리 나라 구석구석에 예배당이 아주 많음을 불현듯 느낀 뒤로는, 버스를 타고 어디 간다든지, 또는 부모님 따라 시골집 나들이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든지, 멀거니 창밖을 내다보면서 빨간 십자가 숫자를 세어 보곤 합니다. 경주로 수학여행을 다녀오던 고등학생 때에도 고속버스에 탄 저는 빨간 십자가 숫자를 세곤 했습니다.

 요즈음은 깊은 밤에 골목마실을 하면서 십자가 숫자를 셉니다. 인천 옛 도심지인 중구와 동구에는 예부터 이름난 큼직큼직한 예배당이 꽤나 많습니다. 답동성당이나 내리교회나 내동성공회성당 같은 데야 워낙 오래되고 역사책에까지 이름이 실릴 만한 곳입니다만, 이런 예배당을 빼고도, 그리 높은 산이 있지 않은 인천임에도 언덕받이마다 예배당이 반드시 있습니다. 그리고 이 예배당은 하나같이 동네를 굽어살핍니다. 요사이야 아파트가 예배당보다 높이 올라선다 하지만, 스무 해쯤 앞서만 하여도 예배당보다 높이 치솟은 건물은 하나도 없던 인천입니다. 언덕받이까지 빼곡하게 들어찬 달동네 지붕낮은 골목집을 우쭐우쭐 내려다보던 예배당이었습니다.


.. 자유당 정권과 유신, 5공화국으로 이어지는 반공 노선에 한국 교회와 목사들이 인권 탄압을 묵인하거나 도리어 앞장서서 주도한 것은 중대한 범죄다. 이것은 역사적 범죄일 뿐만 아니라 하느님의 정의를 짓밟는 행위다. 교회가 하느님의 정의에 배치되는 특정 집단이나 사상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이념과 정치 대립의 장에 깊숙이 개입하여 인권을 유린하고 인명을 살상하는 데 앞장섰던 것이다 … 1966년 박정희 군사정권 때 김준곤 목사에 의해 ‘대통령 조찬 기도회’가 시작됐다. 연중행사로 열리는 이 모임의 첫 번째 기도에서 김준곤 목사는, “박 대통령이 이룩하려는 나라가 속히 임하길 빈다”고 기도했다. 그리고 2회 때는 “우리 나라의 군사혁명이 성공한 이유는 하나님이 혁명을 성공시킨 것”이라 하는가 하면 … 1980년 8월 6일 전두환이 5ㆍ18학살의 공로로 대장 진급을 하던 날, 서울 롯데호텔에서는 개신교 지도자 23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도회가 열렸다. 정진경 목사는 “이 어려운 시기에 막중한 직책을 맡아서 사회 구석구석에 악을 제거하고 정화할 수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라고 기도했다 ..  (52, 57쪽)


 예전부터 인천은 ‘서울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거쳐 가는 징검돌 노릇을 했습니다.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랫동안 뿌리내리며 살던 사람들 집에서는 딸이며 아들이며 서울로 대학교를 다니다가 서울에서 일자리를 잡아 서울에서 홀살이방을 조그맣게 얻다가는 조금씩 전세값을 모아 아예 서울에 뿌리내리곤 합니다. 이러면서 인천은 늙은 엄마 아빠가 할매 할배가 되도록 조용히 남는 땅으로 바뀌어 갑니다. 서울과 가까이 찰싹 달라붙어 있는 탓이라 할 테지만, 아직 인천에서 부모님과 함께 사는 젊은이를 빼고 스스로 인천에서 오래오래 살아가고자 하는 젊은 식구는 그리 안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공무원이나 교사가 아니라 한다면. 젊은 식구는 그나마 인천 옛 도심지를 벗어나 부평이니 관교동이니 연수동이니 또 송도니 청라이니 하는 비싼 아파트(서울과 견주면 반값쯤 되거나 훨씬 더 싸지만)로 옮겨 갑니다.

 이러면서 저절로 ‘예전부터 많았던 예배당에 들락거릴 사람’ 숫자도 줄어들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 많은 예배당 가운데 문을 닫는 곳은 아직 한 군데도 못 봅니다. 오히려 모두들 새로운 사람을 잘 받아들이고 있는 듯하며, 골목골목 ‘새 신도를 환영합니다’ 하는 글월이 적힌 전단지가 뒹굴고 있습니다. 이러는 가운데 계산동이나 부개나 부평 둘레에는 서울 여의도 순복음교회 못지않은 엄청난 교회 건물이 새로 지어지고, 때로는 더 크다 싶은 교회 건물마저 숱하게 지어집니다.


.. 재미난 사실 하나는 이명박 장로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 결혼 적령기 자녀를 둔 부모들이 신앙이 아닌 다른 목적으로 소망교회를 찾는 경우가 생겼다는 것이다. 소망교회가 시쳇말로 ‘물 좋은’ 교회로 알려지면서 ‘집안 좋은’ 배우자감을 물색하기 위해 소망교회 청년부와 대학부에 등록하는 젊은이들이 많아졌다고 한다. 특히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와 청와대 참모진, 그리고 내각에 이르기까지 이명박 정부의 초대 내각이 소망교회 출신으로 채워지면서 소망교회는 권력을 향해 가는 지름길이라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  (138쪽)


 예배당 건물을 바라보면서 절집 건물을 생각합니다. 절집도 천주교나 기독교에서 세우는 예배당 건물과 마찬가지인 종교 시설입니다. 곰곰이 따지면, 지난날 불교 절집 또한 ‘우리들 낮은자리 여느 사람’ 주머니에서 돈을 거두어들이고 품을 그러모으면서 으리으리하게 건물을 올려세웠습니다. 이제는 불타고 없다는 황룡사 높직한 나무탑을 헤아려 보든, 다른 수많은 이름난 절집을 떠올려 보든, 그 절집을 짓는다며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짜야 했을까 싶어 적잖이 쓸쓸합니다.

 오늘날 큰 교회 건물이라면, 뭐 무턱대고 아무한테나 돈을 거둬내지는 않습니다.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 주머니에서 돈이 나올 테지요. 그런데 그 교회에 나가는 사람들은 왜 당신들 교회가 새 건물을 번쩍번쩍 높직높직해지는 데에만 돈을 낼까요. 하느님을 사랑해서? 예수님 믿음을 이 땅에 널리 퍼뜨리고 싶어서?

 그러면 하느님 사랑이란 무엇이고, 예수님 믿음이란 무엇인가요. 하느님한테서 사랑을 받고프다면 어떤 사랑을 어떻게 받고 싶은가요. 예수님 믿음을 나누고프다면 어떤 믿음을 누구한테 어떤 매무새로 나누고 싶은가요.

 집없어 떠도는 숱한 사람들은 하느님 사랑이나 예수님 믿음을 받을 만한 몸이 못 되는지 궁금하고, 비싼 집삯에 허덕이는 낮은자리 사람들한테는 하느님 사랑이든 예수님 믿음이든 와닿을 구석이 없는지 궁금합니다.


.. 한국 교회의 큰 어른 노릇을 하는 입장에 있는 사람들이 악어의 눈물로 보이는 회개 이벤트를 한다는 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한국 교회 전체의 문제다 … 국민들은 대통령의 대국민 사과가 실은 대국민 사기극에 불과하다는 것을 아는 데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는 한미 쇠고기 협상에서 국민의 요구를 수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 반대 방향으로 갔다. 또한 어청수 경찰청장을 중심으로 검찰까지 합세하여 촛불집회 참가자들을 무더기로 구속하는가 하면, 심지어 유모차를 끌고 나와 먹을거리에 대한 우려를 표시한 시민들까지 ‘아동학대방지법’이라는 엉뚱한 법을 들이대어 처벌했다. 이명박 대통령의 이러한 위선은 그의 개인적 기질이나 정치적 성향 때문이 아니라 한국 교회의 신앙 패턴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이다. 쉽게 반성하고 또다시 쉽게 범죄하는 싸구려 감상주의식 회개가 한국 교회와 신도들에게 만성화됐다는 것을 방증한다. 회개할 때는 눈물콧물 다 빼다가도 그 순간을 벗어나면 또다시 세속적 명리와 가치를 좇게 만드는 이벤트성 예배에 익숙한 사람이 장로가 될 때까지 경험한 영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  (224∼226쪽)


 서양사람 믿음인 천주교가 이 땅에 온갖 푸대접과 따돌림과 괴롭힘을 받으면서까지 뿌리를 내리며 널리 퍼졌습니다. 천주교가 서양에서 보여주는 얄딱구리한 모습을 나무라면서 개신교가 태어났고 성공회가 태어났으며, 이러한 서양사람 믿음도 ‘천주교가 한국에 들어오는 동안 죽어나는 꼴’을 가만히 살핀 다음 이 나라 권력자 눈치를 살피면서 살금살금 들어와서 두루 퍼졌습니다(이 이야기는 기독교회 역사를 갈무리한 책에 거짓과 숨김 없이 잘 적혀 있습니다). 어떤 분은 우리네 개신교회가 오늘과 같은 모습을 보여주는 까닭이 천주교회가 어마어마하게 순교자를 내며 쫓겨나고 밀려나는 모습을 보면서, 낮은자리 사람한테 참사랑과 참믿음을 나누는 흐름으로 들어와서는 같은 꼴이 난다고 깨달아 처음부터 권력자한테 빌붙는 꼴로 들어와서 오늘날과 같은 잘잘못을 낳게 되었다고 말씀하는데, 이 말씀이 모두 옳지는 않을 터이나 여러모로 잘 들어맞는 말이기도 하다고 느낍니다. 천주교회가 한국땅에 자리잡은 모습이랄지, 천주교회에서는 예배당에서도 설과 한가위 잔치를 한달지, 천주교회 집안에서는 내남없이 제사를 지낸달지, 신부와 수녀라는 자리는 남녀로 갈리지만 남녀 푸대접을 많이 가셔냈달지 하는 대목은 서양 천주교회와 한국 천주교회가 사뭇 다른 모습입니다.

 그런데 천주교회를 나무라면서 새로 가지를 낸 믿음 가운데 개신교회만큼은 오히려 어마어마한 건물을 수없이 때려짓습니다(새로 짓는 천주교회도 돈을 참 많이 들이는구나 싶더군요. 서울에서 이문동성당 짓는 모습을 보며 혀를 찹니다). 하느님 사랑이나 예수님 믿음과는 거리가 먼 ‘예수천국 불신지옥’ 같은 말을 길거리에서 일삼습니다. 한국 문화를 저주하다시피 깔보면서 장승과 솟대를 자르고 불사르는 짓을 서슴지 않았을 뿐더러, ‘미국 만세’ 같은 말을 거리낌없이 내뱉습니다. ‘미국 = 하느님’이 아니요, ‘하느님 = 미국’이 아님에도 목사님 스스로, 또 교회에 나가는 분들 스스로, 참사랑과 참믿음을 자꾸자꾸 잃거나 잊어 가면서 뒤틀리는 모습을 보여주고 맙니다. 더군다나 몇몇 개신교회 파에서는 남녀 푸대접을 대놓고 저지르는가 하면, 이런 남녀 푸대접이 아주 마땅하다는 듯이 성경 구절을 대면서 둘러대기까지 합니다.

 사랑스러운 종교요 믿음직한 종교라 한다면, 아직 이 종교가 나누려는 아름다움을 깨닫거나 느끼지 못한 사람들 앞에서 더 마음문을 열면서 따뜻하고 너르고 넉넉하고 살가워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수다스러운 종교가 아니라 반가운 종교여야 하지 않느냐 싶고, 떠벌이는 종교가 아니라 다소곳한 종교여야 하지 않느냐 싶습니다. 굳이 ‘도토리 예배당 종지기 할아버지’인 권정생 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교회가 없어도 됨을 깨닫고 너른 믿음을 나눈 ‘우찌무라 간조’한테서 여러모로 앎을 얻은 이오덕 님을 떠올리지 않더라도, 틀림없이 이이들도 교인이요 신도인데 나이 서른을 넘어갈 무렵부터는 예배당에는 한 발자국도 들여놓지 않은 사람들이었으며, 이분들은 당신 온삶과 삶자락으로 ‘종교가 걸어갈 길’을 보여주었다고 할 만합니다. 말마디가 아니라 온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종교요, 글줄이 아니라 온몸으로 살아내야 하는 종교라고 느낍니다.

 말끝마다 ‘하느님 사랑’과 ‘예수님 믿음’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성경풀이나 예수전 같은 책을 내지 않더라도, 우리가 온몸으로 기쁘고 신나고 살갑게 함께할 사랑과 믿음은 어디에나 그득히 있다고 느낍니다. 인도 캘커타에만 데레사가 있지 않고 한국땅 서울에도 데레사가 있으며, 제 삶터인 인천에도 데레사가 있습니다. 어떤 거룩한 사람 몇몇이 데레사가 아니라, 다름아닌 우리 스스로한테 데레사 넋이 있고, 우리 스스로가 데레사가 되어야 합니다. 떠받드는 하느님이 아니라 스스로 우러나는 하느님이요, 모시는 예수님이 아니라 우리가 몸소 되어야 하는 예수님이 아닌가 싶습니다.


 (2)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라는 책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을 읽습니다. 이 땅에 들어와 있는 교회가 저질렀다는 잘못이 꼭 일곱 가지뿐일까 싶지만, 아무튼 일곱 가지 굵직하다는 잘못을 차근차근 보여줍니다. 그런데 이 일곱 가지 잘못을 들어서 밝히는 글이 그리 깊지는 못하다는 느낌을 지우기 어렵습니다. 틀림없이 일곱 가지 잘못을 쏠쏠히 갈무리해서 차분히 풀어내기는 했지만, 지난 2007년부터 권력을 잡은 이명박 대통령 둘레 사람들 꾸지람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이 아닌 이명박 장로로서 얄딱구리하고 안쓰러운 모습을 여러모로 보여주고 있는 탓에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이라는 책에서도 이 대목을 수없이 되풀이하면서 꾸짖는다고 할 테지만, 이렇게 하자면 책이름을 고쳐 붙여야 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이명박 장로가 한국 교회를 망가뜨리는 일곱 가지 죄악’쯤으로.


.. 전도가 안 되는 것은 하느님을 부정하는 세속인들의 타락 때문이 아니라, 부패한 교회 구조와 목회자의 오만한 권위주의 때문이다 … 한국 교회는 이단 때문에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부조리와 부패 때문에 망하고 있다는 것을 지각하지 못하는 것이다 … 성경과 복음의 진정성을 상실한 교회가 어찌 세상을 향해 예수의 복음을 선포할 수 있겠는가 ..  (42, 74, 135쪽)


 그렇지만,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은 이명박 장로 같은 분이 왜 이런 잘못을 저지를 수밖에 없는지를 학자 된 글쓴이 나름대로 슬기롭게 풀어내어 보여줍니다. 이명박 장로가 처음부터 ‘나쁜 놈’으로 태어나서가 아니라, 한국 교회 틀거리가 ‘아무리 좋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스스로 얄궂은 매무새에 길들도록 이끄는 나쁜 뿌리’를 단단히 뻗어 놓고 있기 때문임을 밝힙니다.

 지난날에는 뜻있고 값있는 일을 해 오던 믿음직한 분들이 안타깝게도 ‘하느님 사랑’을 들먹이면서 뜻을 버리거나 값을 내팽개치는 까닭도, 당신들 스스로 ‘못난 사람’이기 때문이 아니라 한국 교회 짜임새가 사람마다 제 믿음을 고이 간수하기 어렵도록 뒤틀고 있음을 이야기합니다.


.. 설교자가 ‘학벌 권하는 사회’의 구조에 편승하여 학벌 없는 동료 목사나 청중들에게 열등감을 조장하고 경쟁을 부추기는 일을 하고 있다면 이는 매우 심각한 문제다. 가짜 학위를 과시하는 설교자의 설교가 진짜 설교인지 의심이 드는 것은 학워 문제가 아니라 설교자 이전의 인간의 진정성과 도덕성에 대한 의문 때문일 것이다 … 부자들의 위장 전입과 불법적 투기 행위가 어디 어제오늘 일인가. 한국적 풍토와 관행상 상류층 인사들이 문서 조작 등을 통해 부동산 투기로 돈을 번다는 것은 이미 다 알려진 사실이다. 그냥 눈감을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일반화된 사건 중 하나일 수 있다. 하지만 책임 있는 자리에 있는 인사가 부동산 투기의 당사자라면 문제가 다르다. 특히나 기독교인이라는 사실은 더 큰 문제가 될 수 있다. 기독교인에게는 더욱 엄격한 윤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면서 동시에 세속사회가 기독교인에게 요청하는 윤리이기 때문이다 ..  (118, 203쪽)


 옆지기 식구들이 사는 일산에 와서 살펴보아도, 우리 집이 있는 인천과 마찬가지로 수많은 빨간 십자가를 봅니다. 서울 나들이를 할 때에도 빨간 십자가는 눈에 밟히도록 봅니다. 통계가 얼마나 될는지 모르지만, 어쩌면, 한국땅에서 예배당 숫자는 구멍가게 숫자보다 훨씬 많지 않을까 싶습니다. 책방 숫자하고 견주면 아마 열 곱이나 스무 곱, 아니 백 곱쯤 예배당 숫자가 많지 않느냐 싶습니다.

 언젠가 헌책방 아저씨가 푸념처럼 이야기하던 말이 떠오릅니다. 목사든 교인이든 책을 참 안 본다고. 종교책이 들어올 때에는 한 차 가득 들어오는데 팔리는 책은 거의 없다고. 교회에서 때때로 뭉치로 천 권 이천 권을 사들여 한쪽에 도서관처럼 꾸며 놓는다고 하지만, 다들 읽으려고 놓는 책이 아니라 자랑하려고 갖추기만 하는 책일 뿐이라고.


.. 세상은 교회가 없어서 망하는 것이 아니라, 나눔을 실천하지 않는 교회 때문에 망한다. 예수 이름만 있고 예수의 가르침이 없는 교회 때문에 망하고 교회도 망하는 것이다 ..  (257쪽)


 우리보고 지키라 하는 ‘열 가지 다짐’ 가운데에는 우상을 섬기지 말라는 다짐이 있습니다. 이 ‘우상’이 무엇인지는 알쏭달쏭하지만, 오늘날 한국땅 어디에나 지어져 있는 큼직한 예배당이야말로 우상이 아닌가 하고 고개를 갸웃갸웃해 보곤 합니다. 어두운 밤에도 빨간 불을 밝혀 놓아 전기를 먹는 십자가, 예배당 건물을 예쁘게 보이도록 밤새 켜 놓는 갖가지 등불이야말로 둘도 없는 우상 가운데 하나가 아닌가 곱씹어 보곤 합니다. 늘 잠겨 있는 뒷간 문, 어느 나그네도 다리쉼을 할 수 없게끔 닫아건 예배당 문이며 울타리, 자전거 설 자리와 아이들 뛰놀 흙마당은 없어도 자가용 댈 자리는 넘쳐나는 앞마당, …… 우리는 얼마든지 아름다운 사랑과 따뜻한 믿음을 어떤 종교로든 나눌 수 있을 텐데, 하고 생각할 때면 가슴 한쪽이 무겁고 서늘하고 먹먹합니다.

 작은 것이 아름답다 하고, 작은 학교가 아름답다 합니다. 작은 사랑이 아름다우며 작은 믿음이 아름다운 가운데 작은 교회가 아름답습니다. (4342.5.26.불.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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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09-05-30 21:21 
    평일에는 자주 찾는 한겨레나 경향신문을 주말에는 사볼 수가 없다. 동네 편의점 등에서 갖다 놓질 않기 때문이다(아니면 너무 적게 갖다놓거나). 해서 오늘자 리뷰란에 실린 기사인지는 모르겠지만 온라인에 뒤늦게 올라온 기사를 하나 옮겨놓는다. <한국 교회의 일곱 가지 죄악>(삼인, 2009)에 대한 것이다. 김규항의 <예수전>과 함께 얼마전에 읽은 한완상의 <예수 없는 예수 교회>(김영사, 2008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
한무영 지음 / 그물코 / 2009년 5월
평점 :
절판




 이 책 하나 106 - 착한 사람은 빗물을 받아 먹는다
 : 한무영,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



- 책이름 :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
- 글 : 한무영
- 펴낸곳 : 그물코 (2009.5.10.)
- 책값 : 1만 원


 (1) 비를 생각하다


 엊저녁부터 내린 비는 아침이 되어 멎습니다. 말끔하게 갠 하늘이지만 해는 나지 않습니다. 해까지 나면 빨래를 해서 널 텐데, 빨래를 해서 밖에 내다 넌다 하여도 비가 오나 안 오나 마음이 쓰일 만한 하루입니다.

 낮나절에 방송국에서 취재 나온 분이 있습니다. 제가 이참에 새로 낸 책을 읽고 방송 풀그림에 내보내고 싶다 하십니다. 이런 말 저런 말을 묻다가 마지막에 ‘요즈음 살면서 좋았던 일이 무엇이 있나요?’ 하고 묻습니다. 갑작스런 물음이지만, 제 느낌 그대로 “아기 기저귀를 빨아서 햇볕 쨍쨍할 때 빨랫줄에 탁탁 털어서 널면 아주 짜릿합니다. 그런데 오늘은 하늘이 두루뭉술해서 밖에 내다 널지는 못할 듯하네요. 이따가 해가 살짝이라도 비춰 주면 좋을 텐데.” 하고 이야기합니다.

 방송국 리포터 되는 분은 ‘손빨래를 하는 짜릿함’이 가슴에 뭉클하게 느껴진다며, 당신께서 집으로 돌아가서 한번 손빨래를 해 보아야겠다고 이야기합니다. “적어도 양말이라도 빨아 보시면 다르게 느끼실지 몰라요.” 하고 한 마디 붙입니다. 마음속으로 ‘참 고맙습니다’ 하고 이야기합니다.


.. 아이들에게 날마다 주스와 요구르트를 주면서 산성을 걱정하는 부모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독 음료수보다 훨씬 산성도가 약한 빗물에 대해서는 두려워하고 기피하는 것은 왜일까요? 제대로 모르기 때문입니다 ..  (19쪽)


 비 갠 골목길을 자전거를 타고 잠깐 휘 돌았습니다. 제가 몸담고 있는 ‘사진찍는 모임’ 분들이 서울에서 스무 분 남짓 인천을 찾아왔습니다. 이분들이 오기 앞서 먼저 슥 돌았고, 제 일터인 도서관으로 잠깐 돌아와서 몇 가지 볼일을 본 다음 다시 이분들과 어울릴 텐데, 빗물을 머금은 골목꽃은 한결 싱그럽다고 느낍니다.

 다른 날에도 빗물 머금은 골목꽃과 골목풀은 더욱 싱그럽다고 느꼈습니다. 낡은 스티로폼 상자도 버리지 않고 잘 간수하여 꽃그릇으로 쓰는 골목 이웃인데, 비가 오면 큰 통을 골목 한켠에 놓아 두고 빗물을 받곤 합니다. 집에서 수돗물을 호스로 이어 물을 주는 분들도 많지만, 빗물을 받아 물을 주는 분도 제법 많습니다.

 큰 통에 받은 빗물은 꽃이 먹는 밥이 되기도 하지만, 골목길을 쓸고 닦을 때에 쓰는 물이 되기도 합니다. 가만히 보면, 비가 오면서 저절로 골목길 물청소가 되는 셈인데, 이렇게 물청소가 되고 며칠 지나면서 자동차들이 내뿜고 흩날리는 온갖 먼지로 다시 더럽혀지면, 이 더럽혀진 골목을 씻어내는 데에 쓰인다고 할까요.

 한 동네에 온삶을 바쳐 살아온 골목 이웃들은 으레 빗물을 받아서 씁니다. 모르는 노릇이지만, 당신이 처음 태어나거나 자라던 시골마을에서도 마땅히 빗물을 받아서 쓰지 않았으랴 싶습니다. 떨어지는 빗물을 아깝다고 여겼으며, 이 통 저 그릇 온통 마당에 내놓고는 빗물을 받느라 부산했다고 생각합니다. 하기는, 아파트가 아니고서야 어느 골목집이든 예나 이제나 빗물을 받느라 바쁘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비록 인천 골목길은 ‘서울로 올려보낼 물건을 만드는 공장들’마다 내뿜는 먼지와 연기 때문에 퍽 매캐하고 먼지가 많다 하여도.


.. 도시가 발달하고 사람들이 모이면서 도심 거리는 어디나 할 것 없이 온통 콘크리트 건물과 포장된 도로뿐입니다. 풀 한 포기 자라거나 흙 한 줌 날리는 땅을 보기가 힘든 것이 우리 나라 도시의 모습입니다. 그로 인한 문제점 가운데 하나가 도시의 홍수 피해입니다. 폭우가 쏟아지면 그 빗물이 포장도로 밑으로 스며들지 못하고 하천이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흘러넘쳐 홍수 피해를 더하는 것이지요 … 나무가 클수록 뿌리가 깊듯이 건물이 높을수록 지하도 깊어지겠지요. 깊어질수록 지하층 방수를 해야 합니다. 이를 위해 흔히 사용하는 공법은 지하 벽면 둘레를 막고 지하수를 한 곳에 모아 뽑아내 하수도로 내보내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도시에 건물이 한두 채입니까. 거의 모든 건물에서 이런 식으로 지하수를 뽑아내 버리니 지하수위가 내려가고 하천이 메마르며 생태계가 파괴되는 것이 당연하지요. 오랜 시간이 지나면 지하수라인은 도시에서 가장 깊은 건물의 바닥과 같은 높이가 되어 버립니다. 즉 도시의 모든 지하수위가 떨어지는 것이지요. 도시에 수많은 건물이 들어서면서 눈에 보이는 스카이라인을 해치는 것은 신경을 쓰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지하수라인에 대해서는 누구도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습니다 ..  (33, 67쪽)


 요즈음은 아기를 돌보느라 빗길 자전거질은 잘 안 합니다. 빗길을 신나게 달리다 자칫 고뿔이라도 걸리면 아기를 돌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잘못하다 아기한테 고뿔이 옮을 수 있고요.

 빗길을 한참 달리면 자전거도 망가집니다. 빗길을 달린 다음에는 자전거에 묻은 흙탕을 잘 닦고 말려 놓아야 합니다. 그러나, 빗속을 자전거로 달리는 맛이란 맑은 날 달리는 맛하고 사뭇 다릅니다. 빗속을 우산을 받고 거니는 맛하고 빗속을 맨몸으로 고스란히 비를 맞으며 거니는 맛하고 사뭇 다르듯이.

 생각해 보면, 우리 형은 중고등학교 다닐 때 우산을 쓴 적이 거의 없습니다. 제가 뽀르르 달려가 우산을 받쳐 주기라도 할라치면 걸음을 재게 놀리며 우산에서 벗어났습니다. 그냥 비를 쫄딱 맞았습니다. 저도 우산을 안 챙긴 날은 비를 쫄딱 맞았습니다. 그러다가 가방에 든 책까지 적신 적이 잦지만, 책도 말리고 몸도 말리고 옷도 말리면 그만입니다. 어쩐지 비가 올 때에는 비를 맞아야 하지 않느냐고 몸으로 느꼈다고 할까요. 형한테 옮았는지 모르지만.


.. 댐을 높인다면 얼마나 더 높여야 하며, 그때 지역주민 사이의 갈등은 어떻게 풀어야 할까요. 하천의 본류에만 댐을 만들면 하천 이외의 지역이나 지천에서 일어나는 작은 규모의 하수도 침수는 또 어떻게 막을 수 있을까요 … 많은 지자체들이 하천을 복원할 때 청계천을 본보기로 삼고 싶어 하지만, 이러한 방법으로 복원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하천을 복원하고 관리하는 데는 민과 관이 힘을 합하여 돈이 적게 들고, 자연스럽게 물이 흐르게 하는 방법을 찾아야 합니다 ..  (60∼61, 82쪽)


 나중에 신문배달 일을 할 때에는 비를 새삼스레 느낍니다. 자전거 타고 신문을 돌리는데 우산을 받고 돌릴 수 있겠습니까. 내 몸은 옴팡 젖어들어도 신문에는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썼습니다. 장마철만 되면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여느 날보다 두 시간씩 일찍 일어나서 두 시간씩 늦게 일이 끝나 죽을맛이었고, 신문사지국에는 비 냄새로 가득했는데, 맑은 날 신문 돌리던 일은 거의 떠오르지 않지만, 비오는 날 신문 돌리던 일은 이제까지 하나도 안 잊힙니다.

 새벽 네 시까지는 비소식이 없어 느긋하게 돌렸는데 여섯 시 즈음부터 갑자기 쏟아져서, 애써 돌린 신문이 죄 젖는 바람에 다시 돌린 일. 지하에 있던 신문사 지국에 물에 잠길 뻔한 일. 지국장 님 댁을 비롯해 이문동 반지하집이 모조리 물에 잠겨서 지국장 님 댁에 있던 가구며 옷이며 지국으로 옮겨다 놓고 대피하던 일. 허리춤까지 잠긴 물길을 자전거로 헤치면서 신문을 돌리던 일. 비가 오면 가뜩이나 신문으로 무거운 자전거가 브레이크도 잘 안 들어 비탈길에서 내려오며 조마조마하던 일. …….

 옆지기가 아기를 배기 앞서 둘이 장대비를 주룩주룩 맞으면서 한 시간 남짓 골목마실을 하던 일도 떠오릅니다.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면서도 빗길을 느끼며 걷는 골목 맛은 다른 그 어느 날 느끼던 골목 맛하고 견줄 수 없었습니다. 온몸 가득 빨려들고 스며드는 빗줄기로 몸과 마음과 눈을 한꺼번에 씻어내곤 했습니다.
 





 (2) 물을 생각하다


 이달부터 옮겼는데, 우리 살림집과 도서관이 깃든 오래된 건물은 수도가 샙니다. 이리하여 물값이 삼사만 원 훌쩍 넘게 나오곤 했습니다. 집임자는 줄줄줄 새는 물은 아랑곳하지 않았고, 달삯에서 이 애먼 물값을 덜어 주지도 않습니다. 고쳐 주기는커녕, 물값을 덜어 주기는커녕. 돈이 많은 사람들은 다 이 모양인가 싶으면서도, 돈이 많아서 이 모양이라기보다 사람된 길을 걸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냐 싶었습니다. 참 사랑을 나누고 참 믿음을 나누어 본 적이 없기 때문이 아니랴 싶었습니다.

 당신 사는 아파트에서 물이 샌다면 어찌 했겠습니까. 그 애먼 물값이 어찌 되는지 얼마나 가슴 아프고 괴로웠겠습니까.

 그러나 물값만 아깝지 않습니다. 그런 물값이야 내주지요 뭐. 사만 원? 아주 짜증스러운 값이지만 내주지요 뭐. 그렇지만, 이 물값보다도 ‘애써 수도국에서 걸러낸 물이 아무 보람 없이 버려진다’는 데에서 안타깝고 슬픕니다. 서울 청계천에서 전기로 수도물을 끌어와서 흘려버리는 일하고 똑같잖아요. 아무 데에도 안 쓰고 흘려보낼 물을 뭣하러 수도국에서 걸러내어 수도관을 타고 흐르게 합니까. 물 자원이 아깝게 버려지는 일을 그치게 하는 데에 마음을 기울일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라밖에는 물 한 모금 없어서 목말라 죽는 사람들이 있는데, 건물임자는 떼부자이면서도 ‘새는 물관’ 고치는 몇 푼에 돈을 들이지 않으니, 달삯을 얹혀 사는 사람이 어떻게 손을 쓰나요.


.. 빗물 이용은 빗물이 더러워지기 전에 받아서 사용하자는 것이고, 빗물 ‘재이용’은 더러워진 빗물을 정수 처리한 다음에 사용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때 더러워지기 이전의 빗물을 이용하는 데는 거의 돈이 들지 않습니다 … 우리 나라는 물 부족 국가가 아니라 물 관리를 잘 못하는 나라라고 해야 맞습니다 … 환경부의 관련법은 수질이나 물 절약과 관련된 문제들을 중심에 놓고 다루고 있지만, 가뭄이나 산불 방지, 홍수는 다루지 않습니다. 건교부의 관련법에서는 홍수만을 위주로 다룰 뿐, 하천 환경을 좋게 하려는 의지는 보이지 않습니다. 자연재해특별법 역시 자연재해만을 한정시켜 다루고 있지요. 그것과 연관된 다른 사안들은 고려하고 있지 않습니다 ..  (29∼30, 37, 53쪽)


 저는 늘 손빨래를 합니다만, 손빨래를 하면 물을 아주 조금만 써도 넉넉합니다. 비누거품 헹군 물을 잘 갈무리해서 걸레를 빨아도 되고, 새로 나온 빨래를 담가 놓은 다음 애벌헹굼을 할 때에 쓰면 됩니다. 그렇게 애벌헹굼을 조금씩 하면서 새 빨래 비누거품을 가시고, 세벌이나 네벌헹굼쯤 될 때에 새 물을 받아서 헹굽니다. 그리고 이렇게 세벌이나 네벌쯤 되는 헹굼물은 다시 갈무리해서 다음 빨래를 할 때에 씁니다. 어떻게 보면 버려지는 물이 하나도 없는 셈이라 할 텐데, 이렇게 헹군 물로는 씻는방 바닥이나 벽을 닦은 다음에 개수구로 흘려보냅니다. 또는 씻는방 거울을 닦는다든지.

 정 몸이 힘들다면 세탁기를 써야 합니다. 그러나 몸이 힘들지 않으면서 세탁기를 쓰는 사람은 죄를 짓는 셈이 아닌가 싶습니다. 또한, 물을 허투루 내버리는 셈이 아니랴 싶습니다. 더욱이, 기계 아닌 우리 몸을 써서 빨래를 하면 손발 운동이 착착착 잘 됩니다. 따로 헬스클럽 같은 데에 돈 갖다 바치면서 다닐 까닭이 없습니다. 헹굼물로 걸레를 빨아 방바닥을 훔치고 집치우기를 하면 더더욱 운동이 잘 됩니다. 집에서 빨래 한 가지만 하여도 우리 몸에는 군살이 붙지 않아요. 여기에다가 자전거로 일터나 학교를 오간다면 우리 몸매는 아주 날렵하고 훌륭히 가꿀 수 있을 테지요.

 저는 자전거를 타니 자전거를 닦습니다만, 차를 닦는 분들은 어마어마하게 물을 써대며 차 껍데기를 번쩍번쩍 빛나게 합니다(자전거를 닦을 때에는 물이 거의, 아니 한 방울도 안 듭니다). 그런데 차 껍데기는 왜 번쩍번쩍 빛나도록 닦아야 하나요. 비오면 알아서 닦이는 차 껍데기 아닌가요. 애먼 물을 따로 들여서 써야 하나요. 차 껍데기를 얼마나 깨끗하게 해야 하고, 우리는 수도물을 얼마나 많이 써야 하나요.


.. 빗물을 모으고 관리하는 이유는 내 필요와 목적에 따른 것이기도 하지만, 사실은 남을 위해, 즉 우리 모두를 위한 것이기도 하니까요. 만일 내 집 지붕에 떨어진 빗물을 모으지 않으면, 하류에 있는 다른 사람 집은 넘치는 빗물로 잠겨 버릴 것입니다 ..  (49쪽)


 우리 나라는 기술이나 과학이나 또 무엇무엇이나 거의 ‘가장 앞(최첨단)’을 달린다고들 합니다. 온 나라에 새로 짓는 아파트를 보면 갖가지 전자시설이 넘쳐납니다. 그런데 이 수많은 시설 가운데 ‘전기 없이 쓸’ 수 있는 시설은 무엇이 있을까 궁금합니다. ‘기름 없이 쓸’ 만한 시설은 한 가지라도 있는가 알쏭달쏭합니다. 계단을 타는 사람도 없는데 20층 30층까지 계단을 놓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적어도 옥상이든 벽이든 창문 어디에든 햇볕을 받아들여 전기를 뽐아낼 수 있도록 할 수 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집집마다 들어갈 전기까지는 아니라 하여도 승강기나 골마루 등불쯤은 햇볕전지판으로 갈음할 수 있을 테니까요.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이라는 책에도 얼핏 나오지만, 아파트 옥상에 ‘빗물 모음통’을 마련해, 집집마다 뒷간 물 내리는 데에 쓴다면 물이며 자원이며 전기며 한껏 줄이거나 아낄 수 있습니다.


.. 우리 나라는 여름에 잠깐 집중해서 비가 오는데 여기에 맞춰 크고 비싼 시설을 만드는 것이 과연 좋은 모습일까요? … 대개, 계속해서 물에 잠기는 지역에 거대한 빗물 펌프장을 만드는데 이때 돈이 수백억 원이나 들어갑니다. 그런데 이 엄청난 돈을 들인 시설을 일 년에 며칠이나 사용합니까? … 비워 두는 날이 많은 댐을 만들기 위해 엄청난 비용을 쏟아붓고, 댐을 짓기 위해 살던 곳이 물에 잠기게 된 주민들의 원망을 듣습니다 … (117, 131∼132쪽)


 그렇지만 나 몰라라처럼 되어 있습니다. 내 알 바 아니라는 듯 짜여 있습니다. 내 돈 내가 쓴다는 생각으로 굳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맙니다. 아예 등을 돌리는데 무슨 말을 할 수 있나요. 귀를 막아 버리고 눈을 감아 버리는데 어찌 손짓 발짓 하나요. 돈이 넘쳐서 펑펑 쓴다는데 어떻게 말리는가요.
 





 (3)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이라는 책


 서울대학교에서 건설환경공학부 교수로 일하며 빗물연구센터 소장을 맡고 있는 한무영 님이 책 두 권을 한꺼번에 펴냈습니다. 하나는 《빗물을 모아쓰는 방법을 알려드립니다》이고, 다음 하나는 《지구를 살리는 빗물의 비밀》입니다. 한무영 님은 그동안 《수돗물의 미생물학》과 《WHO 음용수 수질 가이드라인》과 《정수시설의 종합설계 및 유지관리》와 《하수와 우수의 관리를 위한 환경친화적 기술》 같은 책을 펴내 왔습니다.

 저는 이분이 해 온 일이 무엇인지 잘 모르고, 빗물을 살피는 학자가 있음도 처음 알았는데, 한무영 님이 낸 책 두 가지를 읽으면서 ‘지구 물 문제’에서 빗물 문제를 빼놓고는 아무것도 모르는 셈이겠다고 느꼈습니다. 또한, 빗물을 제대로 알아가는 길은 물을 제대로 알아가는 길이며, 물을 제대로 알아갈 때 우리 삶터를 좀더 또렷하게 받아들이거나 알아챌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빗물이 깨끗한 물인지, 깨끗하지 않다면 왜 깨끗하지 않은지, 빗물이 지저분하다면 왜 지저분한지, 그리고 지저분하면 얼마나 지저분한지를 ‘제대로 모르’면서 살아왔다고 느꼈습니다.


.. 서울대학교에 새로 지은 기숙사에는 200톤 규모의 빗물 저장 시설을 본보기로 만들어 사용하고 있습니다. 약 5개월 동안 날마다 6톤 정도의 물을 사용했는데 그 가운데 1000톤의 물을 화장실 물로 사용해 수도요금을 크게 줄였습니다. 사무용은 1톤에 1100원을 부담하므로 달마다 22만 원으로 쳐서 5개월 동안 11만 원을 절약한 것이지요. 만약 이 물을 수도요금이 1.6배 정도 비싼 가정용으로 사용했다면 약 200만 원 정도 줄어든 셈입니다 … 수돗물을 아끼면 개인은 수도요금을 적게 내는 이득이 있는데, 사회는 더 큰 이득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 즉 빗물을 이용하면 댐의 취수량이 줄고, 물을 정수 처리하는 양이 줄어 그 비용 또한 절감되며, 운반비용 역시 줄일 수 있습니다 ..  (86∼87쪽)


 오늘날 삶터에서는 무엇이든지 ‘자원’이라 하고, 자원은 ‘관리’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합니다. 이리하여 정부에서는 사람도 ‘자원’으로 다루려고 교육부를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으로 고치기까지 했습니다. 이를 놓고 적잖은 사람들이 거세게 나무랐지만 말마디 나무람으로 그치고 더 크게 나아가지 못했으며, ‘교육인적자원부’라는 이름을 바꾸어 놓지 못했습니다.

 생각해 보면, 이런 이름이야 어떻게 붙든 큰 일은 아닙니다. 얄딱구리한 이름이 붙어 있더라도 교육 행정을 옳고 바르게 할 수 있으면 되니까요. 사람이 사람다이 살아갈 수 있는 기틀을 닦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스레 바라보고 껴안고 어깨동무할 수 있게끔 가르치는 터전을 세우면 되니까요.

 그런데 사람을 자원으로 여기며 다루는 우리 나라는 교육 기틀을 제대로 다스리고 있는 나라라 할 수 있을까 궁금합니다. 사람부터 사람답게 다스리고 있다는 생각을 하기 어려운데 사람 아닌 숱한 자원은 얼마나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껴안으면서 즐기고 돌보고 가꾸는 길을 걷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우리 나라의 연평균 강수량은 약 1283밀리리터 정도인데 대부분 여름 장마철에 집중되어 있습니다. 여름에 전체 강수량의 약 35퍼센트인 400억 톤의 빗물을 그대로 흘려보내는 것이지요. 이 아까운 빗물만 잘 모아 두어도 섬과 산간 지역의 물 부족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될 것입니다. 반면 독일은 연평균 강수량이 700밀리리터이지만, 평소에 독일사람들은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전혀 느끼지 못하고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비가 일 년에 걸쳐 고르게 오기 때문이며, 이를 충분히 모아 활용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강물은 늘 넉넉하게 흐르고 지하수 또한 충분히 확보되어 있지요. 독일의 집집마다 빗물을 받아 쓰는 모습은 너무나 일상적인 일입니다 ..  (42쪽)


 우리 삶을 돌아봅니다. 우리들 하루하루를 돌아봅니다. 우리가 날마다 먹고 마시고 쓰고 버리는 매무새를 돌아봅니다. 여느 사람들 집부터 일터까지, 학교와 관공서까지, 골목과 큰 찻길까지, 우리들 살림살이는 어찌 이루어져 있는가 돌아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 보금자리와 마을을 어떻게 추스르고 있는지 돌아봅니다.

 독일에서는 집집마다 빗물을 받아 쓰는 모습이 아주 ‘흔한 삶으로 자리잡았다’고 하는데, 독일사람은 빗물 받아서 쓰기에서만 ‘훌륭한 삶매무새’를 보여주지는 않을 테지요. 다른 자리에서도, 다른 삶자락에서도 이와 마찬가지 매무새를 보여주고 있을 테고요.

 그리고, 우리 나라는 빗물 받아서 쓰기에서만 젬병이 아니라고 봅니다. 우리 나라는 다른 자리에서도, 다른 삶자락에서도 젬병입니다. 거의 날마다 터지는 비정규직 문제나 이주노동자 문제만 보아도 쉬 알 수 있습니다. 입시지옥을 보아도 손쉽게 알 수 있습니다. 돈에 따라 계급이 갈리고, 가방끈에 따라 신분이 나뉘는 사회 얼거리를 보아도 넉넉히 알 수 있습니다.

 우리는 빗물을 알뜰히 받아서 쓰기 앞서, 먼저 참다운 사람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아니, 우리 스스로 먼저 참다운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다면 빗물이야 마땅히 알뜰히 받아서 쓰고자 애쓰지 않겠는가 생각합니다. (4342.5.23.흙.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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