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산하세계어린이 29
세실 모지코나치.클로드 퐁티 글, 조엘 졸리베 그림, 백선희 옮김 / 산하 / 2009년 3월
평점 :
품절


 

 이 책 하나 107 ― 마오리족이 어른을 섬기고 젊은이는 튼튼했던 까닭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책이름 :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
- 글 : 세실 모지코나치, 클레르 메를로-퐁피
- 그림 : 조엘 졸리베
- 옮긴이 : 백선희
- 펴낸곳 : 산하 (2009.3.16.)
- 책값 : 9000원



 (1) 옷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2001년부터 즐겨입어 온 반바지 하나가 있습니다. 그무렵은 출판사에 세 해째 몸담고 있던 때라 한 달 일삯을 백만 원 조금 넘게 받았습니다. 이만한 살림이라면 저한테는 돈이 꽤 남아 일삯 2/3를 은행에 집어넣고도 쓸 돈이 제법 남아, 그때까지 꿈으로만 꾸어 오던 ‘조금 값이 비싸더라도 오래오래 입을 질기고 튼튼한 반바지’ 하나 사자고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래서 동무 한 사람을 불러(옷을 사러 옷집에 가 보기란 그때로서 아홉 해 만이었니까) 옷집에 찾아갔고, 이만천 원이었든가 만오천 원이었든가 하는 까만빛 반바지를 한 벌 장만했습니다. 웃도리 한 벌까지 해서 이만 원을 조금 더 치렀지 싶군요. 그무렵 입던 반바지는 하나같이 길에서 이삼천 원 하던 녀석이었는데 몇 번 빨래하니 올이 풀리고 법석이 아니라, 제대로 된 반바지 한 벌 갖고 싶었습니다.

 언제나 즐겁게 자주 입고 고이 아끼며 입었는데, 지난 2008년 여름에 허벅지 쪽 실이 닳고 닳아 세 군데가 찢어졌습니다. 그리고 엊그제, 엉덩이 께도 찢어집니다. 어느덧 아홉 해째 입었으니 그럴 만하다 싶습니다. 따로 두꺼운 천을 대야 할까 싶고, 앞으로는 집에서만 입어야 할까 싶기도 합니다. 지난날 이 반바지를 아홉 해 만에 장만했으니, 이번에도 아홉 해를 기려 새로 한 벌 장만해야 할까요.


.. 마오리족은 할아버지들과 할머니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얘기에 귀를 기울였다. 노인들은 말이나 행동에 나무랄 데가 없어야 했다. 젊은이들에게 가르치려면 그래야만 했다 ..  (44쪽)


 날이 따뜻하다 못해 조금 덥습니다. 여름이 코앞이니 마땅한 노릇입니다. 사람들 옷차림은 가볍습니다. 아니, 사람들 옷차림이라기보다 아가씨들 옷차림이 가볍습니다. 젊은 사내나 아저씨들 옷차림은 가볍지 않습니다. 꽤나 많은 남자들은 이 여름에도 긴소매 양복을 입습니다. 속에는 와이셔츠를 받칩니다. 아마 이 양복이나 와이셔츠는 천이 얇고 바람이 잘 들 테지요.

 그러나 서울이든 시골이든 다른 데이든 어디이든 관공서이든 여느 회사이든, 젊거나 늙은 사내들이 한결같이 판에 박은 듯 맞춰서 입는 양복은 제 눈에는 낯섭니다. 양복을 입고 일터를 오가는 분한테는 익숙할 테며 자연스럽겠지만, 저로서는 아직까지 낯설기만 합니다. 더운 여름날 왜 온몸을 이리도 꽁꽁 싸매는 까만 빛 천으로 둘러대야 할는지요. 옷이름에도 나타나듯이 어이하여 ‘서양옷(洋 + 服)’을 입어야만 회사원이 되고 공무원이 되고 사무원이 될 수 있는지요. 서양옷을 입지 않으면 영업을 하러 다니면서 버르장머리가 없는 노릇인가요. 서양옷을 갖춰입고 책상맡에 앉아야 머리가 술술 풀리고 일을 한껏 북돋울 수 있습니까.

 그런데 중고등학교 아이들 옷차림도 ‘어른 서양옷 차림’하고 마찬가지입니다. 아이들한테도 어릴 적부터 ‘서양옷이 다소곳함을 지키며 갖춰입는 옷’이라고 못박듯 길들이는 셈입니다. 우리 나라 날씨는 해마다 뜨거워지면서 벌써부터 30도를 오르내린다고 하는데, 그나마 여학생은 치마길이를 줄여 시원하다(여학생들은 시원하려고 치마길이를 줄이지 않습니다만) 싶도록 옷을 입는다 하는데, 남학생은 긴바지를 싹둑 잘라 반바지로 입을 수 없고, 스스로 입으려 하지도 않습니다.


.. 마오리족은 자연을 사랑하고 존중한다. 자연은 생명과 풍요로운 원천이기 때문이다. 숲은 사냥꾼들에게 사냥감을 주고, 사람에게 카누와 집을 만들 나무를 주며, 새들에게 멋진 깃털을 준다 ..  (67쪽)


 디제이 디오시가 부른 노래가 아니더라도, ‘청바지 입고 회사에 못 갈’ 까닭이 없고, ‘반바지 입고 동사무소에서 일 못할’ 까닭이 없습니다. 중고등학교 아이들이 교실에서 ‘소매없는 웃도리’를 입거나 ‘아예 웃통을 벗은 채’ 공부를 하지 말란 법조차 없습니다. 회사원은 회사일을 잘해야 할 노릇이요, 공무원은 동네사람 일을 잘 다스려야 할 노릇이며, 아이들은 스스로 무엇을 익히고 받아들여야 하는가를 잘 삭일 노릇입니다.

 고리타분한 울타리에 갇힌 어른들은 ‘보기에 나쁘다’라든지 ‘점잖지 못하다’라든지 ‘버릇이 없다’고들 말씀하지만, 너무도 터무니없는 소리요 웃기는 소리일 뿐입니다. 왜냐고요? 교사가 장님이라면 어떻습니까. 앞을 못 보는 사람이 교사라면 어떻습니까.

 헤엄터에서는 헤엄옷을 입고 알몸헤엄터에서는 알몸으로 있어야 ‘올바름’이듯, 제도권학교에서는 ‘서양옷과 똑같은 학교옷’을 갖춰 입어야 올바름이라고도 합니다. 따지고 보면 이 말이 맞습니다. 왜 그러느냐면, 오늘날 우리네 학교는 자유롭고 평화롭고 평등하며 통일과 민주가 살아숨쉬는 배움터는 아니기 때문입니다. 입시지옥을 코앞에 둔 ‘시험 전투원’이 ‘볼펜이라는 총칼’을 들고 ‘옆자리 짝꿍을 적군으로 삼아 무찔러 쓰러뜨리’도록 길들어 가는 감옥소하고 똑같은 얼거리이기 때문입니다. 그저, 이런 감옥소 같은 학교라 할지라도, 아이들 앞에서 ‘창의’니 ‘창조’니 ‘상상’이니 ‘교육’이라는 겉발린 말이라도 읊조리고자 한다면, 더운 여름날에는 더위를 식힐 수 있게끔 ‘반바지 민소매 학교옷’도 만들어야 하지 않느냐 싶을 뿐입니다.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아이들 여름옷은 한결같이 반바지인데(때로는 초등학교 여름옷도), 중고등학교부터는 긴바지만 입어야 한다면 앞뒤가 어긋날 뿐더러, 사람몸에도 어울리지 않습니다.


.. 타네 신이 이 자리에 모인 새들에게 말했습니다. “투이야, 너는 땅으로 내려가기를 그토록 겁냈으니 비겁함의 표시로 목에 흰색 깃털 두 줄을 달아 주마. 발을 적시는 게 싫다고 한 푸케코는 평생 동안 축축한 습지에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둥지를 만드느라 바쁘다는 피피와로로아, 너는 앞으로 둥지를 지을 필요가 없을 거다. 남의 둥지에다 알을 낳게 될 테니까. 하지만 키위야, 너는 희생의 대가로 이 나라에서 가장 유명하고 가장 사랑받는 새가 될 것이다.” ..  (71쪽)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아이들한테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히려는 분들 스스로 한여름에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대학교수이건 초중고등학교 교사이건 마찬가지입니다. 당신들 스스로 땀을 뻘뻘 흘리면서도 긴소매 긴바지 서양옷을 갖춰입습니다. 그래야만 ‘배우는 아이들 앞에서 다소곳함을 지킨다’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남학교 교사들은 런닝셔츠 바람에 긴바지는 무릎 위까지 걷어올린 채 수업을 하는데, 이렇게 하지 않고서는 당신들 스스로 견디지 못하면서, 당신들 스스로를 사로잡거나 얽어매는 무시무시하고 무거운 쇠사슬을 끊지 않습니다.

 서양사람은 북중남미 대륙을 식민지로 삼아 영국말, 프랑스말, 스페인말, 포르투갈말만 쓰도록 얽어 놓았으며, 뉴질랜드와 호주 또한 영국사람 문화가 스며들도록 했습니다만, 알고 보면 이 나라 대한민국에도 구석구석 영국 문화, 그리고 영국에서 떨어져 나가며 새로 세웠다는 미국 문화가 뿌리내리도록 했습니다. 다만, 우리들은 한글과 우리 말이라는 지푸라기 하나를 놓지 않았을 뿐입니다. 말마디와 글줄을 빼놓고는 온통 잡아먹혔습니다. 그나마 이 말마디와 글줄조차 아이들이 갓 태어나자마자 영어에 미쳐 버리도록 몰아세우고 있습니다만. 
 





 (2) 삶에 깃들어 길들이는 생각


 동네 골목집이 사라집니다. 하나둘 아파트로 바뀝니다. 아파트로 바뀌지 않더라도 동네 골목집 짜임새와 얼거리는 우리네 살림집은 아니었습니다. 겉모양도 그렇고, 속내도 아니었습니다. 껍데기는 기와 얹은 집이요 풀 얹은 집이라 할지라도 속내에는 서양 살림집 차림이었습니다.

 서양사람이 처음 만들고 이 나라 사람이 고쳐 만든 갖가지 전자제품과 살림살이가 들어차 있습니다. 숟가락과 젓가락을 쓰고 밥사발을 쓴다지만, 이런 수저와 밥그릇 어디에도 한글이 적히는 일이란 없습니다. 한국사람이 만들어 한국사람한테 팔고 한국사람이 한국땅에서 쓰는 한국 물건이라 하지만, 이런 한국 물건에 한국말이 한국글로 당차게 적히는 일이란 찾아볼 수 없습니다.


.. 하지만 마우이가 등을 돌리기 무섭게 형들은 물고기에 달려들었습니다. 살점을 마구 뜯어내고, 자르고, 토막 냈지요. 가엾은 물고기는 아파서 몸을 비틀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뉴질랜드 북섬의 산들이 일어서고 계곡들이 패인 것입니다. 물고기를 닮은 이 섬을 이곳 사람들은 ‘테이카 아 마우이’, 즉 ‘마우이의 물고기’라고 불렀습니다. 뉴질랜드 전체는 마오리어로 ‘아오테아로아’라고 부르게 되었지요 ..  (35쪽)


 사람들이 몰고 다니는 자동차에 한글이름이 붙지도 않지만, 한글로 적더라도 속살은 서양말입니다. 한국사람끼리 주고받는 이름쪽에 어김없이 알파벳으로도 찍는 한편, ‘손전화’까지는 바라지 않으나 ‘핸드폰’이라고 한글로 적는 사람조차 찾아보기 힘듭니다. 이제는 거의 안 씁니다만, ‘비퍼’ 아닌 ‘삐삐’라는 우리 말로 이름쪽에 글을 박는 사람을 ‘영어도 모르는 시골놈!’이라며 우습게 깎아내리던 일은 먼 옛날이 아닙니다. 회사이름이건 운동경기 선수단이건 오로지 서양말로 제 이름을 갈아치우거나 갈아입습니다. 학교 아이들이 타는 버스이니 마땅히 ‘학교버스’인데, ‘학교버스’라 말하는 학교는 없습니다. ‘스쿨버스’일 뿐입니다. 그러면, 이참에 학교이름도 아예 ‘스쿨’로 바꿀 노릇이 아닌가 싶습니다.


..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시키는 대로 할 테니 제발 그만 좀 때려!” “네가 미친 듯이 빨리 하늘에서 돌기 때문에 사람들이 무척 괴로워하고 있어. 그러니 앞으로 천천히 돌겠다고 약속하면, 너를 놓아 줄게. 하루가 길어지면, 사람들은 농사를 짓고 일에 열중할 수 있게 될 거야. 그러면 사람들은 네 친구가 되어 줄 거야.” 기운이 빠지고 상처를 입은 태양은 시키는 대로 하겠다고 약속했습니다. 그제야 마우이는 형들에게 태양을 놓아 주라고 말했습니다. 이날부터 태양은 하늘에서 천천히 움직였고, 햇빛은 따스하고 유익한 빛이 되었답니다 ..  (40쪽)


 적잖은 글쟁이와 예술가 들께서 ‘우리 말이 아름답다’고 외치는 목소리를 들으면서 헛웃음이 나오곤 합니다. 그토록 아름다운 말이라 한다면, 왜 당신들 스스로 ‘그 아름다운 말로 문학을 하건 책을 쓰건 예술을 하건’ 안 하는지 알 노릇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 말은 아무리 아름다워도 돈벌이가 되는 일거리는 아니라서, 돈벌이는 돈벌이대로 서양말로 잔뜩 뽐내면서 하고, 멋부리면서 서양차 한 잔 즐길 때 가끔 시를 읊듯 읊는 소리인지 궁금합니다.

 어쩌면,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누가 쓰는 말인 줄 모르지 않으랴 싶습니다. 그 아름답다는 말이란 지식인이라든지 많이 배운 사람이 쓰는 말이 아닌 줄을 못 깨달았으리라 봅니다. 요사이야, ‘김수영 시인이 느낀 저잣거리 장사꾼 아지매와 할매가 쓰는 말’마저 텔레비전 연속극과 우스갯소리에 물들고 찌들어 참맛과 참멋을 잃었습니다만, 아름답다고 하는 말이란 바로 저잣거리에서 떠도는 말입니다. 길바닥에서 오가는 말입니다. 논두렁과 밭두렁을 넘나드는 말입니다. 바닷물결을 타고 시냇물결을 타는 말입니다. 새와 함께 지저귀고 들짐승과 함께 우짖는 말입니다.


.. 라타는 가장 좋은 연장들을 가져와서 곧바로 일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라타는 기운은 넘쳤지만 인내심이 부족했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것을 깜빡했지요. 조상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신성한 원칙을 잊었던 겁니다. 그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나뭇잎 하나를 자르더라도 그 전에 식물들에게 왜 그래야 하는지를 설명하고 허락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야 나무나 식물의 마음이 다치지 않고, 숲이 평화를 지킬 수 있기 때문이지요 … 수많은 새들과 곤충들이 풀밭에 누운 나무 위로 후드득하며 구름처럼 날아올랐습니다. 이들은 숲의 신인 타네의 자식들이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존중하지 않는 라타에게 화가 났던 것입니다. 자기들의 형제를 잘라내면서 허락도 받지 않았으니까요. 이들이 한목소리로 중얼거렸습니다. “오, 라타, 이 나무를 가만 내버려 둬. 제발 가만 놓아 둬. 나무 부스러기들이 날아오르고 뿌리들이 날아올라 다시금 모여들어 나무가 된다네 …….” ..  (59, 63쪽)


 엄마와 아빠가 살아간 대로 딸과 아들이 살아갑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엄마와 아빠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대로 딸과 아들도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그렇지만 꼭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엄마와 아빠는 딸과 아들한테 오래도록 제 삶을 길들여 놓습니다. 맞추어 놓습니다. 물려주고 이어주고 내려줍니다. 엄마와 아빠가 읊는 말투가 아이들 말투가 되고, 엄마와 아빠가 즐겨먹는 밥이 아이들 즐겨먹는 밥이 됩니다. 집에 갖추어 놓은 엄마와 아빠 책대로 아이들은 책을 만납니다. 자동차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자동차 타기를 아주 마땅히 받아들이며 저희들도 나중에 스스로 차를 장만하여 몰고자 합니다. 자전거마실을 즐기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자전거를 즐겨탈 뿐 아니라, 자가용 한 번 얻어탈 때 대단히 고마워할 줄 압니다. 늘 걸어다니고 때때로 버스나 전철을 타는 엄마와 아빠라면, 아이들은 스스로 걷기를 즐기며 걷는 동안 부대끼는 사람과 삶터를 깊이 돌아볼 줄 아는 가운데, 어쩌다가 자가용을 얻어타면 참으로 고맙게 여길 줄 압니다.

 돈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돈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길들입니다. 사랑으로 살아가는 어버이는 사랑으로 아이들을 키우고 가르칩니다.

 저 혼자 하는 생각인지 모릅니다만, 이 나라에서 예부터 오래오래 살아온 사람들은 돈으로 딸아들을 낳아 기르지 않았다고 느낍니다. 딸아들을 돈을 생각하면서 낳고 기른 어버이는 옛날에도 있기는 있었을 테지만, 오늘날처럼 갑작스레 늘어나지는 않았으리라 느끼고, 또 오늘날처럼 아주 미쳐날뛰듯 돈에만 눈알이 돌아가는 흐름을 키우지도 않았으리라 느낍니다. 서양사람이 북중남미 대륙과 아프리카와 아시아 땅으로 쳐들어오고 난 다음부터라고만 말하기는 뭣하지만, 이무렵부터 아주 크게 돈바람이 휘몰아치면서 우리들은 하나같이 넋이 나가고 얼이 빠지고 있습니다.
 





 (3)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이라는 책


 어린이책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을 읽습니다. 어린이책인 만큼 글씨는 시원시원합니다. 금세 읽힙니다. 몇 분 지나지 않아 뿌듯해진 가슴으로 책을 덮으며 생각합니다. 이 책을 읽는 아이들마다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 수 있다면, 이 책을 손에 쥐도록 이끈 어버이들한테도 가슴에 무엇인가 뿌듯하게 남을까 하고. 어버이 스스로 가슴에 무언가 뿌듯하게 남지 않는다면 이와 같은 책을 스스로 찾아 읽지는 않겠지 하고.


.. 150여 년 전, 뉴질랜드에서 마오리족과 영국인들 사이에 큰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마오리족은 이미 오래 전부터 뉴질랜드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영국인들이 새로운 땅을 찾아 오랜 항해를 거친 끝에 이곳에 이르게 된 것이지요. 영국인들에게 난데없이 지배받게 된 마오리족 사람들은 몹시 화가 났습니다 … 마오리족의 족장들은 속담을 이용하거나 신화와 전설을 끌어들이면서 걱정과 분노를 표현했습니다 ..  (7∼8쪽)


 우리는 북미 토박이 이야기를 꽤나 찾아서 읽습니다. 중남미 토박이 이야기도 퍽 찾아서 읽고 노래도 제법 찾아서 듣습니다. 아프리카 토박이며, 인도 토박이며, 호주 토박이며, 태평양 섬나라 토박이 이야기며 줄줄이 찾아서 읽습니다.

 그런데, 정작 우리 나라 토박이 이야기는 거의 찾아 읽지 않습니다. 우리 나라 토박이 노래는 한 줌조차 찾아 듣지 않습니다.

 우리네 여느 이야기는, 우리네 살아온 이야기는, 우리네 삶터를 이룬 옛이야기는 조금도 찾아 읽지 않습니다. 기껏해야 ‘단군신화’로 두루뭉술하게 엮어낼 뿐이고, 그나마 ‘그리스로마신화’에 단단히 짓눌려 있습니다. 게다가 ‘신화’라는 사슬을 차고 ‘역사’로 자리매김하지 않습니다.

 하기는요, 이 나라에서 ‘역사’라 하면 임금님 이름 외우기하고 땅따먹기하던 발자국을 넘어서지 않습니다. 가야사람이 어느 곡식을 농사지으며 밥상은 어떻게 차렸는지가 역사책에 적히지 않습니다. ‘한국문화사’에도 이러한 이야기는 없습니다. 고구려사람 옷차림과 신발 이야기가 ‘한국문화사’는커녕 ‘한국사’ 어디에도 나타나지 않습니다.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이야기는 문화로도 예술로도 역사로도 담기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로 이런 물레를 잣고 디딜방아를 밟으며 곡식을 까부르는 ‘북중남미 토박이와 아프리카 토박이와 인도 토박이와 태평양 토박이’ 이야기는 ‘아주 훌륭하고 거룩한’ 이야기로 떠받들면서 사랑하고 아끼고 믿고 보듬습니다.


.. 마법의 잠에서 깨어난 대제사장은 자신이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알고 애처롭게 신음 소리를 내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티니라우는 불쌍히 여기지 않았습니다. 투우루우루가 좋아하는 고래인 투투누이를 죽인 사람이었으니까요. 티니라우는 그 자리에서 제사장을 때려죽인 다음, 그대로 먹어 버렸습니다. 티니라우는 이렇게 투투누이에게 복수했습니다. 이때부터 인간들 사이의 전쟁과 식인 풍습이 생겨난 것이랍니다 ..  (88쪽)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가 허술하거나 모자라거나 달갑지 않다는 말씀이 아닙니다. 《마오리족, 하늘과 땅이 낳은 사람들》에 담긴 이야기는 대단히 재미있고 눈물겹고 짠합니다. 기쁘고 놀랍습니다. 그러나, 이런 이야기쯤은 우리한테도 얼마든지 있다는 소리일 뿐입니다. 우리 스스로 제대로 찾아내어 적바림하지 않았고, 애써 찾아내어 적바림한 사람들 손품은 거의 보람없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리입니다.

 우리는 아직 몇 군데 드문드문 살아남아 버티고 있는 ‘오래된 골목동네’를 어떻게 간수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가장 가까운 곁에 있는 살갑고 푸진’ 이야기를 캐내고 가슴으로 느끼면서 고운 보배로 키울 수 있기도 하지만, 가뭇없이 사라지도록 내팽개칠 수 있습니다. 우리 두 손으로 넉넉한 곡식을 거두어들여 기쁘게 이웃과 나눌 수 있는 한편, 알맹이인지 쭉정이인지 알아채지 못하는 가운데 나라밖 사람들 뒤꽁무니만 좇다가 길잃은 사금파리 한 조각이 될 수 있습니다. (4342.5.28.나무.ㅎㄲㅅ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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