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한테 5분이란



  나한테 5분이란 글 한두 꼭지를 거뜬히 써낼 수 있을 만한 말미이다. 이 5분이란 곁밥을 한 가지쯤 마련할 수 있는 말미이기도 하다. 이 5분이란 아이들하고 신나게 노래하고 춤출 수 있는 틈이기도 하다. 이 5분이란 나물씨앗을 쉰 톨쯤 심을 수 있는 짬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5분을 놓고 언제였는지 아주 슬픈 이야기가 오간 적 있다. 어느 해였는지 가물거리는데, 우리 형이 나한테 “야, 너 네 시간 동안 차려 자세로 있으라고 하면 있을 수 있어?” 하고 불쑥 물었고, 나는 이 물음을 5초쯤 생각하다가 “나는 아마 3시간 55분 동안 아무렇지 않게 꼼짝않고 차려로 있을 텐데, 마지막 5분에 못 버티고 허물어질 듯해.” 하고 대꾸했다. 이때 형은 “뭐야? 그럴려면 아예 처음부터 안 버티면 되지. 그건 못한 것하고 똑같아. 그럴려면 처음부터 ‘못하겠습니다! 못 버티겠습니다!’ 하고 말해. 넌 병신 짓이야.” 하고 한 마디 쏘아붙이더니 왜 이런 얘기를 물었는지 말해 주지 않았다. 나중에 형한테 왜 물어보았느냐고 다시 물어보니 머리에 꿀밤만 먹이고 참말 아무 말도 안 했다. 형한테 무슨 일이 있었을까? 어쩌면 형이 그때 중학교에서 ‘네 시간 차려 자세 얼차려’를 받았을까? 그런데 이 이야기가 참말로 그 뒤에 나한테 벌어졌으니, 내가 군대에 가서 일병 계급이던 무렵이다. 사단장이라는 놈이 갑자기 훈련 군장검사를 한다며 중대에 찾아와서 연병장에 중대원을 몽땅 완전군장으로 세웠고, 두 시간 넘게 차려로 서서 움직이지 말라고 시켰다. 이때 사단장은 ‘네 시간 차려’로 있으라고 말했다. 고맙게도 사단장 스스로 두 시간 남짓 흐른 뒤에 그쳐 주었지. 아, 얼마나 괴롭던지. 그러나 어릴 적 형이 나한테 물은 말을 떠올렸다. ‘맞아. 나는 세 시간 오십오 분을 버틴다고 했지? 비록 세 시간 오십육 분째에 허물어진다고 나 스스로 밝혔지만.’ 그래서 세 시간 오십오 분까지는 이를 악물고 살아남기로, 아니 세 시간 오십오 분에 이르기까지는 마음으로 노래를 부르며 있기로 했다. 이러니 40킬로그램에 이르는 완전군장을 짊어졌어도 딱히 땀이 흐르지도 허리가 아프지도 않았다. 게다가 두 시간 십 분 만에 끝났다! 2018년 3월 30일, 그러니까 엊그제 일인데, 이날 어느 자리에서 네 시간 가까이 기다리는데 거짓말이 아니라 마지막 5분이 가장 힘들었다. 아무래도 약속이 깨진 듯해서 마지막 5분을 속울음을 삼키면서 걸음을 돌리려 했다. 그리고 바로 이 마지막 5분에 ‘약속 때에 늦은 사람’이 짠하고 바람처럼 눈앞에 나타났다. 약속한 때에 꽤 오래도록 늦은 사람은 미안하다는 낯빛이 하나도 없었고, 나는 이녁이 아무렇지 않은 낯빛이라서 되레 반가웠다. 좋았다. 늦게 오신 분이 늦게 와 주는 바람에 나로서는 그동안 ‘나 스스로 오래 잊고 지냈던’ 스스로 견디지 못한다고 여긴 ‘마지막 5분’이라는 울타리를 쉽게 허물 수 있었다. 글쓰기를 하고 싶은 분들한테 이 말을 들려주려 한다. 못하겠으면 안 하면 된다. 하고 싶으면 하면 된다. 못 버티겠으면 안 버티면 된다. 하고 싶으면 ‘버티려는 생각’을 떨치면 된다. 그뿐이다. 2018.4.1.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삶과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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