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학동네 시인선 101
문태준 지음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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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를 노래하는 말 328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는 끝이 없어요
―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
 문태준
 문학동네, 2018.2.10.


아름다운 바퀴가 굴러가는 것을 보았네
내 고운 님의 맑은 눈 같았지
님의 가늘은 손가락에 끼워준 꽃반지 같았지
대지에서 부르던 어머니의 노래 같았지
아름다운 바퀴가 영원히 굴러가는 것을 보았네
꽃, 돌, 물, 산은 아름다운 바퀴라네
이 마음은 아름다운 바퀴라네 (일륜월륜/12쪽)


  시집 《내가 사모하는 일에 무슨 끝이 있나요》(문태준, 문학동네, 2018)를 읽습니다. 책끝에 붙은 시집 추천글을 보면 문태준 시인이 훌륭한 ‘서정시인’이라고 나옵니다. 문득 ‘서정’이라는 말이 궁금해서 사전을 살핍니다. ‘서정시(抒情詩)’를 “[문학] 개인의 감정이나 정서를 주관적으로 표현한 시”로 풀이합니다. 그런데 어느 시나 글이든 글쓴이 느낌(감정)이나 마음(정서)을 스스로(주관적) 그리기 마련입니다. 딴 사람이 느끼거나 생각하는 이야기를 그리는 시나 글이라면, 이때에는 아무개 시나 글이라고 할 수 없겠지요.

  모든 시는 밑바탕이 서정시일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참말로 그렇습니다. 시뿐 아니라 글도 모두 ‘서정글’이 되겠지요. 우리 나름대로 느끼거나 생각한 이야기를 밝히는 글일 테니까요.

  문태준 시인이 훌륭한 서정시인이라 한다면, 다른 누구보다 문태준 시인은 이녁 느낌이나 마음을 안 숨길 줄 안다는 뜻이지 싶습니다. 다른 누구보다 제 느낌이나 마음을 살뜰히 시로 그릴 줄 안다는 뜻이 될 테고요.


내 어릴 적 어느 날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어머니가 노랗게 익은 뭉뚝한 노각을 따서 밭에서 막 돌아오셨을 때였습니다
누나가 빨랫줄에 널어놓은 헐렁하고 지루하고 긴 여름을 걷어 안고 있을 때였습니다
외할머니는 가슴속에서 맑고 푸르게 차오른 천수(泉水)를 떠내셨습니다 (외할머니의 시 외는 소리/16쪽)


  시를 쓰거나 읽기 어렵다면 아무래도 이 대목 ‘우리 느낌이나 마음’을 어떻게 보거나 다루어야 하는가를 모르기 때문이지 싶습니다. 거꾸로 우리 느낌이나 마음을 꾸밈없이 그리거나 즐거이 담아낼 수 있다면, 누구나 시를 쓸 수 있다는 뜻이 되지 싶어요.

  글솜씨가 훌륭해야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갖가지 표현기법을 잘 살려야 훌륭한 시인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 느낌을 우리 목소리로 살릴 때에 비로소 시인이 되지 싶습니다. 우리 마음을 우리 삶에 담아서 우리 손으로 풀어낼 줄 안다면, 시인이란 이름이 없어도 시를 쓰고 비평가란 이름이 없어도 시를 읽을 만하리라 봅니다.


만일에 내가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
창백한 서류와 무뚝뚝한 물품이 빼곡한 도시의 캐비닛 속에 있지 않았다면
맑은 날의 가지에서 초록잎처럼 빛날 텐데
집밖을 나서 논두렁길을 따라 이리로 저리로 갈 텐데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았다면/39쪽)


  문태준 님은 어릴 적 외할머니가 읊은 샘물 같은 시를 떠올립니다. 그런데 외할머니만 맑은 샘물 같은 시를 읊지 않았겠구나 싶어요. 어머니도 누나도 참말로 그윽한 시를 읊었네 싶습니다. 어머니는 늙은오이를 따는 시를, 누나는 여름 빨래를 널고 걷는 시를 읊습니다.

  그리고 문태준 님은 맑은 날 푸르게 빛나고 싶은 나뭇가지 같은 마음으로 도시를 떠나 시골에서 하루를 노래하고 싶다는 시를 읊습니다. 서류도 강단도 떠나, 조용히 흙을 만지고픈 나날을 꿈꾸며 시를 읊어요.


따라붙는 동생을 저만치 떼어놓을 때
우는 내 동생의 맑은 눈물이 또르륵 굴러떨어져 피어난 꽃아 (별꽃에게 2/78쪽)


  우리가 사랑하는 일에는 끝이 없으리라 생각합니다. 시골에서 흙을 짓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도시에서 서류에 파묻혀 회사일에 얽매이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찬비를 맞거나 봄비를 맞거나 소나기를 맞으며 밭을 매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하루 내내 쉴새없이 나오는 갓난쟁이 오줌기저귀를 갈아대는 하루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어요. 고단한 출퇴근 버스길이나 전철길도 끝없이 사랑할 수 있습니다.

  시 한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삶에서 터져나옵니다. 시 두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하루에서 샘솟습니다. 시 석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사람하고 마음으로 어깨동무하는 자리에서 태어납니다. 시 넉 줄은, 스스로 사랑하는 꿈길을 걷는 동안 시나브로 자라납니다.

  시인이 어린 날, 우는 동생 볼을 타고 흙바닥으로 떨어진 눈물이, 오늘 별꽃으로, 그러니까 곰밤부리꽃으로 피어난다고 해요. 참말로 새봄에 피어나는 온갖 꽃송이는 우리가 흘린 눈물이 자라난 숨결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서로 기쁘게 얼싸안으면서 놀고 노래하다가 지은 웃음에서 이어진 숨결일 수 있어요. 매화내음이며 동백내음이 마을에 가득한 삼월 한복판입니다. 2018.3.21.물.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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