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삶창시선 50
이종형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시를 노래하는 말 324


호랑이 표식 단 남한 병사에게 어미 잃은 이웃
―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
 이종형
 삶창, 2017.12.15.


4월의 섬 바람은
뼛속으로 스며드는 게 아니라
뼛속에서 시작되는 것 (바람의 집/21쪽)


  아침에 작은아이가 방글방글 웃으며 마루이며 마당이며 부엌이며 휘젓고 달리다가 문득 큰소리로 묻습니다. “어머니! 아버지! 이제 봄이야? 저기 나무에 꽃이 피려고 해!”

  달력으로는 2월 22일입니다. 달력으로는 3월 1일부터 봄이라 할 수 있으나, 해나 바람이나 흙이나 물을 살펴서 봄이로구나 하고 느낄 만해요. 달력으로 바라보는 봄이 아닌, 봄이며 삶이며 숲으로 바라보는 봄을 익힐 수 있어요.

  저는 아이한테 한 마디를 들려줍니다. “음, 네가 봄이라고 여겨서 봄을 부르면 봄이야. 그리고 햇볕이 따뜻하고 바람이 시원하면서 흙이 말랑말랑한데다가 네 말처럼 나뭇가지에 잎눈이며 꽃눈이 터지려 하면 바로 봄이지. 꽃이 피는 모든 곳은 곧 봄이야.”


책갈피를 넘길 힘조차 이제 남지 않아서
만년필이나 사인펜보다 심이 굵은 4B연필로 서명하는 게 더 편하네요
그나저나
남의 이름을 이렇게 삐뚤거리게 써서 어쩌지요 (그 남자, 김영갑 갤러리 ‘두모악’에서/54쪽)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삶창, 2017)을 읽습니다. 지난 2017년 12월 끝자락, 그러니까 겨울 한복판에 나온 시집입니다. 시집이 겨울 한복판에 나왔대서 겨울을 노래하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이 시집에 흐르는 이야기는, 이 시집에서 다루는 이웃은, 이 시집을 여미는 시인은, 안팎으로 으슬으슬 추운 겨울을 노래합니다.

  4월이 되어도 어쩐지 뼈마디가 시큰거릴 뿐은 바람을 느낀대요. 4월이면 한창 꽃철일 텐데, 꽃바람 아닌 시린 바람을 느낀대요. 그리고 이 시린 바람이 좀처럼 잦아들지 않을 듯해서 아픈 마음을 노래하고, 이 시린 바람은 제주뿐 아니라 저 먼 베트남에도 부는구나 하고 느끼면서 눈물짓는다고 합니다.


명색이 시인인 애비에게
번뜩이는 시상 떠오르거든 잊기 전에 적어놓으라고
따뜻하고 좋은 시 많이 쓰라고
몇 해 전 생일에 딸아이가 선물해준 작은 수첩을
두어 계절 지나고 들췄더니 (레시피/56쪽)

미워한 적은 없었지만 원망은 몇 번 했고
살아오는 동안 가끔씩 그리웠을 뿐이라고
그렇게 얘기하면 착한 아들은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사진 한 장 남겨놓지 않은 당신 때문에
삶과 불화한 세월이 길었다 (아버지/68쪽)


  시인 이종형 님은 노래하고 싶습니다. 슬픈 노래나 눈물 노래만이 아닌, 기쁜 노래나 웃음 노래를 하고 싶습니다. 그렇지만 이녁 마음에 새긴 생채기를 좀처럼 털지 못합니다.

  봄에 봄을 그리지 못하고, 여름에 여름을 누리지 못합니다. 가을에 열매를 그리지 못하고, 겨울네 눈밭놀이를 누리지 못합니다.

  딸아이가 아버지한테 선물한 ‘시 쓰는 공책’도 한쪽으로 밀어둔 채 마냥 시린 가슴으로 하루하루 살아갔다지요.

  누가 시인한테서 봄을 빼앗았을까요. 누가 시인뿐 아니라 우리한테서 봄을 앗아갔을까요. 누가 시인하고 우리한테서뿐 아니라, 이 땅에서 봄을 짓밟거나 억눌렀을까요.


이 좋은 햇볕 그냥 보내면 죄짓는 거다
어렸을 적 외할머니가 하신 말씀 (10월/74쪽)

시청 앞에 다녀오시나 봐요
아, 저도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돌아오는 주말엔 꼭 참석할 생각이에요
잠깐만요, 선생님 이거 하나 드세요
제가 사서 드리고 싶어요 (바나나 혁명/100쪽)


  따뜻한 볕을 쬐며 아이들하고 마당에서 놀다가 땀을 흘립니다. 고흥은 2월 끝자락이 따뜻하다 못해 살짝 덥군요. 이마에 흐르는 땀을 훔칠 즈음 큰아이가 불쑥 손을 하늘로 뻗으며 매우 큰소리를 뽑습니다. “저기 봐! 무지개다!”

  소나기도 안 왔는데 무지개라니? 하늘이 구름도 없이 말끔한데 무지개라니? 마른 하늘에도 무지개가 있나?

  그런데 참말 마른 하늘에 무지개가 있군요. 따끈따끈 고운 볕을 베푸는 해님을 큼직하게 둘러싼 동그란 무지개가 낍니다. 어제도 오늘도 동그란 무지개가 우리를 쳐다보며 방긋방긋 웃음을 짓는구나 싶어요.


쯔엉탄 아랫마을 깟홍사 미룡촌에서 태어난 판 딘 란Phan Dihn Lanh
떨리는 목소리로 태어난 지 사흘 만에
호랑이 표식을 단 남한 병사에게 어미 잃은 사연을 얘기하는데
꼬박 오십 년이 걸린 거였습니다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khai/106쪽)


  시집 《꽃보다 먼저 다녀간 이름들》에 흐르는 시 가운데 “바나나 혁명”을 퍽 애틋하게 읽었습니다. 촛불 한 자루를 들고 집회에 다녀온 늙수그레한 아저씨는 편의점에 들렀고, 편의점에서 시간제로 일하는 젊은 사내는 “저도 꼭 참석하고 싶었는데 너무 아쉬워요” 하고 한 마디를 하더니 늙수그레한 아저씨인 시인한테 바나나 우유를 내밀었대요. 시간제로 일하는 젊은 사내가 이녁 일삯을 덜어 내민 바나나 우유를 받고 늙수그레한 시인은 속으로 울었대요.

  베트남으로 찾아가 ‘베트남전쟁 때에 베트남사람을 끔찍하게 죽여서 잘못했습니다’ 하고 비는 빗돌을 여러 마을에 세운 이야기를 다룬 “카이, 카이, 카이khai, khai,khai”라는 시에는 ‘우리 마을에서도 한국군 양민학살이 있었는데 왜 우리 마을에는 빗돌을 안 세우느냐’면서, 제 어머니를 한국군 양민학살 때문에 잃은 마흔 넘은 아저씨가 눈물을 흘렸다는 이야기를 옮겨적습니다.

  우리는 여러 총부리에 끔찍하게 다치거나 아파야 했는데, 우리도 다른 이웃나라 조용한 시골마을에 총부리를 들이대고서 끔찍하게 죽이거나 짓밟는 바보짓을 했어요. 4월마다 봄마다 제주에 부는 시린 바람은, 제주를 거쳐 베트남까지 부는 셈이에요. 그리고 이 시린 바람은 지구별 구석구석을 돌면서 아픈 사람들 가슴을 하나둘 스치거나 어루만지겠지요.


그대가 제주공항에 도착해서 신제주로 나가는 길이라면 한라산 방향 우측 능선에 소나무들이 곧게 허리를 뻗은 작은 숲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그곳은 예전에 도령마루라 불리었던 숲이었으나 이제는 섬사람들에게도 낯선 지명이 되어버렸습니다 (도령마루/28쪽)


  새봄에 새봄을 노래할 수 있기를 빌어요. 이 봄에 이 봄을 사랑할 수 있기를 빌어요. 이웃 가슴에 시린 칼날이나 총부리를 들이대는 몸짓은 이제 사라질 수 있기를, 끝내거나 그칠 수 있기를 빌어요. 2018.2.22.나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