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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의 눈, 벌레의 눈
김해자 지음 / 삶창(삶이보이는창) / 2017년 12월
평점 :
시를 노래하는 말 321
풀벌레처럼 노래하는 우리는 누구나 시인
― 시의 눈, 벌레의 눈
김해자
삶창, 2017.12.26.
오늘날 우리 언어 속엔 살 속에 내장한 숨결이 없다. 자본에 저당 잡힌 인간의 시간에는 현재가 없다. 두 발을 땅에 붙이고 대지를 일군 노동의 근육과 언어는 사라졌다. 시를 찾는 것은 언어를 찾는 것이고, 언어는 인간의 살아 있는 숨결이자, 이 모든 현재적 시간을 살아 있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21쪽)
우리 보금자리에 아이가 찾아온 뒤부터 시를 꾸준히 읽습니다. 아이가 어버이한테 들려주는 모든 말은 노래요, 어버이가 아이한테 들려줄 말도 언제나 노래라고 느껴요. 이러면서 시집을 손에 쥡니다.
아이가 우리 보금자리에 찾아온 첫무렵에는 그냥 숱한 시집을 읽었어요. 아이가 말에 귀를 열고 글에 눈을 뜰 즈음, 어버이가 스스로 시를 써서 들려주어야 하는구나 하고 깨닫습니다. 이제는 아이하고 함께 시를 씁니다.
따로 등단이라든지 문학수업을 받은 적이 없습니다만, 아이들하고 말놀이를 누립니다. 아이한테 새롭게 말을 한 마디 들려주고, 아이는 다시금 새롭게 노래를 부르며 돌려줍니다.
이 사람 저 사람 불러다 공평히 나눠 먹는 삶, 도란도란 둘러앉아 맛있게 먹는 밥을 통해 시인은 그가 바라는 세상 모습을 확연하게 그려낸다. 누구도 혼내거나 비난하지 않는다. 이런 점에서 지식인의 시가 갖는 그릇된 것에 대한 풍자라기보다, 우리 민중의 판소리 가락에 묻어나오는 해학과 익살에 가깝다. (121쪽)
시를 쓰기도 하고 읽기도 하는 ‘아주머니’인 김해자 님이 엮은 《시의 눈, 벌레의 눈》(김해자, 삶창, 2017)은 문학비평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어려운 말로는 문학비평입니다. 쉬운 말로 하자면 ‘시를 읽고 쓴 이야기’라 할 수 있을 테고요.
김해자 님은 시를 쓸 적에 아주머니다운 말씨로 부드럽거나 나긋나긋하게 이야기를 풀어내시곤 하는데, 막상 이녁도 비평이라는 이름으로 시집을 이야기하려니 말씨가 좀 딱딱하거나 어렵습니다. 그저 수수하게 아주머니스럽게 시를 읽고 이야기하면 한결 나을 텐데 싶기도 합니다.
이 시를 읽다 아주 조금 울었습니다. 그의 방 냉장고에 있는 말라비틀어진 갓김치 몇 조각과 젓갈이 보여서요. 그 방의 눅눅한 이불과 책과 어둠이 생각나서요. (146쪽)
생명이라는 말을 떠올릴 때 생명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고, 풀이라는 언어를 떠올릴 때 풀의 형상이 없을 수 없다. (237쪽)
시를 이야기하는 《시의 눈, 벌레의 눈》이라는 책이 다루는 시집은 ‘일하는 시’입니다. 그냥 시가 아닌 ‘일하는 시’란 ‘노동시’라고도 합니다. 일하는 자리에서 솟아나는 시요, 일하는 땀방울을 담은 시요, 일하는 보람을 드러내는 시요, 일하다가 아프거나 슬픈 마음을 밝히는 시입니다. 일하는 사람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면서 씩씩하게 한 걸음 내딛는 몸짓을 그리는 시입니다.
시를 쓰는 사람은 모두 다를 테니, 언제나 다 다른 시가 태어납니다. 일하는 사람도 저마다 다른 일터에서 저마다 다른 일손을 잡을 테니, 늘 다른 일거리하고 일노래가 흐르겠지요.
그런데 김해자 님이 이녁 책에서 적기도 하듯이, 요즈음 시집에서는 땀내음이 옅기 일쑤입니다. 요즈음 시를 쓰는 분들은 스스로 땀을 흘려 삶을 지은 이야기를 덜 쓰거나 안 쓰곤 합니다. 머리로 말을 굴리거나 짜맞추는 문학만 으레 하지 싶어요.
저는 시집 한 권을 읽는다는 게 하나의 우주를 펼쳐 보는 것과 같다고 생각합니다. (275쪽)
어쩌면 이미 모두 시인일 수 있는데, 시는 이래야 한다 저래야 한다는 불필요한 기준 혹은 규정들이 시를 소수의 전유물로 만든 게 아닌가요. 시짓기가 필수였던 과거제도도 오래전 없어진 마당에 등단이 무슨 필요가 있을까요. (290쪽)
시집 한 권이란 저마다 다른 우주일 수 있어요. 시집을 펴면서 새로운 우주를 마주한다고 할 만해요. 시를 쓰는 이웃은 어떤 우주를 손수 지으면서 이야기꽃을 펴려고 할까요. 시를 읽는 우리는 시를 쓰는 이웃하고 어떻게 만나면서 손을 맞잡을 만할까요.
아직 ‘등단’이나 ‘추천’이라는 제도가 있다고 합니다. 어른문학도 어린이문학도 이와 같아요. 등단이나 추천을 받지 못한다면 ‘문학상’을 거머쥐어야 시인이라는 소리를 듣는다고 해요.
어쩌면 이런 등단·추천·문학상이야말로 사람들하고 시인 사이에 금을 긋는 일인지 모릅니다. 마치 졸업장이나 자격증처럼 울타리를 세우는 셈일 수 있어요. 시인 자격증이 없이는 시를 내놓아 실을 자리를 얻을 수 없고, 시인 자격증이 없다면 시 한 줄을 실을 자리뿐 아니라 시집 하나 낼 곳을 찾을 수 없는 셈일 수 있습니다.
희망은 하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고, 아플 대로 아파 본 밑바닥에서 마치 굿거리장단처럼 터져나오는 것이 희망이자 노래라고. (427쪽)
이오덕 어른이 들려준 “어린이는 모두 시인이다”라는 말을 떠올려 봅니다. 저는 이 말에 살짝 바꾸어 보고 싶어요. “우리는 모두 시인이다”라고요. 어린이도 어른도 누구나 시인이라고 느껴요. 아이를 낳아 돌보는 모든 수수한 어머니하고 아버지도 시인이요, 어버이 사랑을 듬뿍 받으면서 자라는 모든 아이도 시인이지 싶어요.
시골지기도 시인이요, 버스 일꾼도 시인입니다. 택시 일꾼도, 기업 우두머리도, 시장이나 군수도 시인입니다. 교사나 청소부도 시인이요, 의사나 국회의원도 시인이지요. 밥집 아지매나 군밤장수도 시인이에요. 시인이 아닌 사람이란 있을 수 없다고 여겨요.
풀벌레처럼 노래하는 우리는 누구나 시인이지 싶습니다. 풀잎처럼 싱그러운 우리는 저마다 시인이지 싶습니다. 말 한 마디에 꿈을 싣습니다. 글 한 줄에 사랑을 심습니다. 말 한 마디가 노래로 퍼집니다. 글 한 줄이 이야기로 피어납니다. 시를 보는 눈이란, 풀벌레를 보는 눈이 됩니다. 풀벌레로 숲을 노래하는 마음이 시를 쓰는 손이 됩니다. 2018.1.28.해.ㅅㄴㄹ
(숲노래/최종규 . 시골에서 시읽기)